본문 바로가기

백두대간2차(完走)

36구간. 여원재→입망치→수정봉→고촌리→북고리봉→정령치→만복대→묘봉치→남고리봉→성삼재

 

□ 백두대간 2차 36구간 [대간 산행 40회째 ]

성삼재→남고리봉→묘봉치→만복대→정령치→북고리봉→고기리→수정봉→입망치→여원재

◇ 산행지 : 전북 남원시 이백면, 주천면. 구례군 산동면 일원

◇ 산행일자 : 2012. 10. 13(토). 날씨 : 맑음

◇ 참가인원 : 대전시 산사모 회원 32명

◇ 산행친구 : 만복대까지 오후조 노치샘 이후 영선조

◇ 산행거리 : 약20.6km (포항 셀파산악회 실측거리 기준)

<36구간> 여원재→6.75→주촌리→2.15→고기리→3.4→고리봉→0.9→정령치→2.2→만복대→5.2→성삼재

◇ 산행시간 : 후미기준 8시간 소요 예상, 산행시간 6시간 33분 <중식 10분 포함>

◇ 시간대별 요약

- 05:00 대전 시청

- 05:25 대전 IC 출발

- 07:47 성삼재 도착

- 07:50 산행시작

- 07:55 당돌마을 갈림길

- 08:20 남고리봉(작은고리봉)

- 08:50 상위마을 갈림길(묘봉치)

- 09:37 만복대

- 10:16 정령치

- 10:38 북고리봉(점심 10분)

- 11:42 고기리 삼거리

- 12:07 노치샘

- 12:56 수정봉

- 13:19 운봉읍,이백면 갈림길(입망치)

- 14:23 여원재 산행 마침

- 15:05 후미 도착(7시간 15분 산행)

- 16:16 뒤풀이 마치고 출발

- 18:00 대전 IC 도착

 

특기사항

① 기대 워크샵 때문에 불참

② 초반 컨디션 난조(음악 큰 도움)

③ 고기리에서 북고리봉 오름 힘들어 역 산행(북진 산행)

④ 오후조 출발 영선조와 같이 하산

⑤ 산행 후 황산 토종 정육 식당 (흙돼지 뒤풀이)

 

산행 전 사전 조사

<팔량치>:조선시대의 팔량치는 팔량관(八良關)이라 하여 꼬박 나라에서 지켰다. 나랏길이 지나는 중요 길목이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도 왜적으로부터 호남의 곡창을 지키는 으뜸 관문이었던 탓이다. 흔적은 역력하여 흥부 마을로 자부심이 대단한 성산 마을에는 지금도 산성 자리가 뚜렷하며, 팔량치에 여원재까지의 산성만도 그 수를 한참 헤아려야 한다. 달구경이 그만인 인월에서 보면 팔량치는 생김이 마치 시위 당긴 활처럼 휘어, 그 활과 달을 말미암아 인월의 이름 내력을 떠올려 보는 것도 좋을 듯.

 

<달궁이야기>:달궁이라는 이름은 계곡 들머리의 마한 왕궁터에서 비롯됐다는 것만 어렴풋이 전해진다. 달궁계곡이 마한 왕조의 피신처였음을 밝힌 이는 김경렬씨다. 김씨는 저서 <다큐멘타리 지리산2>에서 지금의 달궁계곡에서 지리산 개산의 비밀을 풀었다. 김씨는 서산대사의 <황령암기>에서 비밀의 열쇠를 찾았다.<황령암기>에는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의 난을 피하여 이곳에 와서 도성을 쌓을 때 정 장군과 황 장군에게 수비성을 쌓게 해 도성을 72년 동안 보전했다”고 적혀 있다고 한다. 기원전 78년의 일이었다. 그때의 도성이 있던 곳이 지금의 달궁계곡이고, 이때 쌓은 성의 흔적은 고리봉에서, 정령치로 다시 만복대로 이어진 능선에 남아 억새를 키우고 있다. 일제시대인 1928년 7월 대홍수가 휩쓸면서 달궁은 전설에서 역사로 다시 태어났다고 한다. 심원계곡에서부터 불어난 계곡물이 덮치면서 달궁터를 감추고 있던 흙이 씻겨 나갔다. 그때 드러난 것은 지금의 주춧돌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지름 1.5m에 이르는 질그릇 시루와 청동제 수저 수십벌, 구리거울, 활촉 등도 출토됐다. 그러나 그 유물들은 일본 순사들이 어디론가 가져가버린 뒤 행방을 알 수 없게 됐다. 마한 왕조의 유적은 새걸산에서 노고단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곳곳에서도 찾아진다. 정령치에서 고리봉으로 오르는 등산로에는 토성의 흔적이 역력하다. 중간 중간 다듬은 돌로 쌓은 성곽도 멀쩡하게 남아 있다. 마한의 정 장군이 달궁계곡의 도성을 지키기 위해 쌓았다는 성의 흔적이다. 성벽이 이어진 고리봉 정상아래 암벽에는 마애불상군이 희미한 흔적으로 남아 있다. 설명문에는 조각양식이 고려조의 수법이라고 적혀 있지만 인근에서는 마한 장군상으로 부른다. 사람들은 모두 12분의 부처가 있다고 하고 보물 1123호라고 적은 설명문에는 9분의 부처가 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눈을 부릅뜨고 꼼꼼히 찾아봐도 3분의 부처 이외는 보이지 않는다. 오랜 세월 풍화된 탓이기도 하거니와 아무나 탁본을 떠갈 정도로 관리가 소홀했던 탓이 더 커보였다. 포수들도 마한 장군상 앞에 이르러서는 ‘마한 임금님의 성지’라 하여 동물을 놓치면 놓쳤지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는 것은 한말 시대의 이야기일 뿐이다.1400여m에 이르는 고봉의 능선이면서도 마한 장군상 앞은 유난히 평탄하다. 지금은 빽빽한 잣나무 숲인 이곳에서 마한의 군대가 주둔했던 터일지도 모른다. 1960년 이곳을 사탕수수밭으로 개간하려던 시도가 있었다. 그때 여러 가지 유물들이 출토됐지만 그 유물들도 달궁의 유물들과 똑같은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노고단 일대는 화랑이 심신을 단련하던 곳이기도 했고 고려조에는 몽고군과의 항전이, 임진왜란에는 왜적의 침입을 피하기도 했던 곳이다. 무수한 역사의 두께가 덮였을 텐데도 지워지지 않은 2천여년 전 마한 왕조의 이야기는 무엇을 전하려 하는 것일까?

 

산행지도및 고도표

 

산행 후기

백두대간 가기 전날 금기시 하는 게 여러 개 있다. 그중에 제1은 술을 마시지 않는 거다. 장시간 산행이 힘들기 때문에 나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산행 전날은 술을 마시지 않는다. 그런데 집에 가는 도중 “작은 아이가 시험이 끝나 삼겹살을 먹고 싶다고 하니 고기를 사오라”고 집사람에게 전화가 온다. 술은 안사고 싶었지만 느끼한 것을 먹으니 딱 석 잔만 마시려고 소주 한 병을 사서 집에 갔다. 삼겹살로 저녁 식사를 하는 중에 집사람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백두대간을 다녀 온 다음날에는 관악산 갔다가 서울에서 직접 화성으로 가려고 한다”고 했더니 심한 태클이 들어온다. “산이랑 결혼하지 왜 나랑 결혼 했느냐”는 등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내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어서 결국 소주 한 병에 캔 맥주를 두 개나 마시고 잠자리에 들었다.

술을 마셔선지 비교적 푹 잔 느낌으로 알람 소리에 깨어 식사를 한 후 택시를 타고 시청으로 향했다. 친구가 오늘은 참석하지 못한다 했으니 편히 앉아 갈 수는 있지만 산행 내내 혼자일 것 같은 느낌에 이어폰을 챙기고 버스에 올랐다. 버스에 올라 눈을 감았는데 어느 사이 산행지인 성삼재다. 나는 숙취가 남아 있어선지 무거운 몸이었는데 산행지에 도착하자마자 산으로 빨려들듯 산악회 사람들을 서둘러 산행을 시작했다. 나는 오늘 “오후조”를 따라 갈지언정 내 페이스를 유지하기로 하고 성삼재 방향으로 몸을 돌려 성삼재 근처에 가서 노고단 방면으로 사진을 찍고 출발하니 꼴찌로 출발 할 수밖에 없었다.

산행을 시작하고 혼자서 뒤쳐져서 가다가 남고리봉에 가서야 꼬리를 잡을 수 있었다. 이후에는 오후조와 함께 산행을 하는데 몸 상태가 안 좋으면 나타나는 증상이 온다. 아마도 혈압 상승으로 인한 현상으로 판단하여 속도를 줄이고 당을 높이기 위해 초코릿을 먹는 등 나름대로는 컨디션 조절에 들어갔다. 그러다 보니 오후조에 묻혀 산행 할 수밖에 없었는데 정령치에 도착해서는 안 되겠다 싶어 혼자서 치고 나갔다. 한참을 가고 있는데 산산애님이 뒤에서 부르며 같이 가자고 한다. 오후조를 따라 가다 보니 너무 뒤쳐져 있는 것 같다고 하면서 정령치에서 쉬지 않고 따라왔다고 한다.

남고리봉에 도착해서 이른 점심을 했다. 점심을 한 후에는 정상적인 컨디션을 찾았는데 점심을 먹는 사이 오후조가 정령치에서 추월해 가는 바람에 고기리 삼거리로 가는 동안 오후조에 막혀 또 답답증에 시달려야 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등산로가 약간 넓어진 틈을 이용 먼저 가겠다는 말을 남기고 앞서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고기리 삼거리에 도착하기 전 점심을 하고 있는 몇 사람을 확인해서 꼴찌는 아니겠구나 싶어 주촌리 노치마을 까지 가는 아스팔트에서는 속도를 조금 더 내어 걸었다.

노치마을에서 물을 보충 하려고 노치샘에 가보니 샘의 상태가 안 좋아 민가에서 수돗물로 물을 보충하고 마을에서 산길로 접어들며 산행을 막 시작하려고 하니 앞서간 모든 인원이 점심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나에게도 식사를 하고 가라고 하는데 나는 식사를 하고 왔다면서 산행을 계속하려고 보니 회장님이 출발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회장님이 발을 다쳐 산행 속도가 내지 못해 모두 멈추어선 것을 알 수 있었다. 컨디션을 완벽히 회복한 수정봉 이후에는 영선조와 함께 산행을 하여 여원재에서 산행을 마쳤고, 오후조가 하산 한 다음 흙 돼지 식당으로 이동하여 뒤풀이를 한 후 대전으로 향했다.

 

산행 사

 

▲ 성삼재 도착

 

▲ 성삼재: 삼한시절의 전적지로, 마한군에게 쫓기던 진한왕이 달궁계곡에 왕궁을 짓고 피난하여 살 때였다. 북쪽 능선에 8명의 장수를 두어 지키게 한 곳이 팔랑재요, 동쪽은 황장군에게 지키게 하였으므로 황영재, 남쪽은 성(姓)이 각각인 세 사람의 장수를 보내어 지켰다 해서 성삼재라 하였다 한다.

 

▲ 성삼재 산행준비

 

▲ 성삼재에 있는 이정목

▲ 성삼재 출발하고 만나는 첫 이정목:당동마을 갈림길

당동마을:원래는 큰 마을이었는데, 남악사가 생기면서 관속과 양반들이 많이 찾아오자 마을 주민들이 거주에 불편을 느끼고 다른 곳으로 이거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지금은 당동 마을의 가구 수가 광의면에서 가장 작다고 한다. 반 평야지인 이 마을의 주 소득원은 벼농사이며, 또한 평산인 관계로 인해 한약재를 생산하여 소득을 올린적도 있으며, 지금은 과수(단감, 대봉)와 묘목 재배를 통해 소득을 올리고 있다. 해방 직 후 남악사 터에 유씨란 사람이 몰래 묘를 쓰자 큰 가뭄이 들어 모내기를 할 수 없는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고 한다. 그래서 인근 주민들이 괭이와 호미를 들고 와서 그 묘를 파내자, 주민들이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비가 내려 그 해 모내기를 할 수 있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따라서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그 터에 결코 손을 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연고로 지금은 일대가 쑥밭이 되어 봄 쑥 향이 코를 찌르며, 폐사된 지 100년이 넘었지만 이곳이 길지인지라 아직까지도 이곳으로 사람들이 찾아와 치성을 올린다고 한다. 또한 이 마을의 자랑거리는 1980년경부터 ‘범죄 없는 마을’로 선정되어 지금까지도 그 맥을 잇고 있다는 것이며, 마을 사람들이 순박하여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1908년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남악사가 폐사되어 당(堂)이 없어지자 그 이름대로 ‘당몰’이라 칭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구례군 광의면 온당리 당동(堂洞)으로 칭하게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 뒤 돌아 본 성삼재와 노고단

▲ 남고리봉(작은고리봉)

▲ 남고리봉에서 바라 본 당동마을

▲ 남고리봉에서 바라 본 노고단

▲ 남고리봉에서 바라 본 만복대

▲ 입망치:산수유로 유명한 구례군 산동면의 상위마을 갈림길로 산동마을 사람들이 달궁마을로 넘나 들던 고갯길이다.

 

 

 

 

만복대(萬福臺 1438.4m): 풍수지리로 볼 때 지리산의 많은 복을 차지하고 있다고 하여 만복대라는 이름이 붙었다고도 하며, 사방으로 복을 내려주는 봉우리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가을에는 전형적인 초가지붕을 연상케 한다고 했을 만큼 복스럽게 생긴 모양새다. 거대한 젖무덤처럼 부드럽게 솟아 오른 만복대는 광활한 억새 군락지를 이루고 있어 가을 풍경이 특히 아름답다. 풍수지리로 볼 때 지리산의 많은 복을 차지하고 있다고 하여 만복대, 사방으로 만인에게 복을 내려주는 봉우리란 뜻에서 만복대라 한다.

▲ 만복대에서 오후조와 함께

▲ 만복대에 있는 이정목

▲ 만복대에서 바라 본 상위마을

정령치(1172m) 전설: 정령치는 주천면 고기리에서 산내면 달궁 부락으로 넘어가는 지리산 줄기의 고개로 황령치(黃嶺峙)와 함께 마한의 별궁을 지키던 중요한 곳이었다 하는데 이 곳은 고개 마루가 운동장 만큼이나 넓어 이에 대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마한의 별궁을 방어하기 위해 황령치와 정령치에 성을 쌓고 정씨 성을 가진 장군과 황씨 성을 가진 두 장군이 각각 지키고 있었는데, 정 장군이 지키던 이 정령치에 마을을 만들고자 그의 신통력을 써서 손바닥으로 고갯 마루를 쳐서 주위의 높은 산들을 뒤로 물러나게 하였다. 이리하여 산들이 조금씩 뒤로 물러나 앉기 시작하는데 운봉에 사는 어느 아낙이 저녁을 짓고 있는데 천지를 올리는 천둥소리와 함께 지축이 흔들리므로 괴이하게 여겨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니 정령치쪽 높은 산들이 탕탕 내리치는 소리에 맞추어 빙빙 돌면서 조금씩 움직이므로 무심결에, 「어메 산이 가네이!」하고 외치면서 들고 있던 부지깽이로 부엌문턱을 치니 그 순간 정 장군이 내리치는 소리에 맞춰 움직이던 산들이 그만 그 자리에 주저 앉고 말아 다시는 움직이지 않아 고갯마루가 넓어지려다 말았다 한다. 6.25 사변 전만 해도 정 장군의 손바닥이 찍힌 바위가 달궁마을 앞까지 굴러 내려왔었다 하는데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고 다만 정 장군이 쌓았다는 산성만이 고리봉 능선에 약 20m 정도 남아 있어 옛날 전설(마한의 별궁설)을 전해주고 있다. 현재는 이 고개를 정령치(鄭嶺峙)라 하지 않고 정령치(正嶺峙)라 고쳐 부르고 있다.

 

 

 

 

 

 

▲ 북고리봉에서 바라 본 지리산 천왕봉

▲ 북고리봉(1248m):북동쪽에 세걸산(世傑山), 남서쪽에 만복대(萬福臺)를 마주보고 있다. 지리산을 지척에 두고도 그 맥을 달리하는 바위산이다. 남원시를 벗어나 곡성 쪽으로 서진하다 보면 금지들이라 불리는 평원에서 눈앞을 가로막고 솟은 바위산이 바로 고리봉이다. 고리봉이란 이름은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온 소금 배를 묶어 놓았던 고리가 어딘가에 있었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 이 고리봉은 명산이라 하여 가뭄이 심할 때면 기우제를 지내던 곳으로 이 마을 뿐만 아니라 인근 금지면에서도 온갖 정성을 다하여 모셔 왔다. 수일동안 몸을 청결히 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제물을 준비하여 기우제를 지냈는데 제물은 삼실과(대추, 밤, 곶감) 돼지머리를 쓰고 기우제가 끝나면 그 자리에서 삼실과는 산 아래로 던지고 돼지머리는 땅에 묻고 하산하였다고 한다. 1962년 가뭄이 극심할 때 풍수설에 의하여 고리봉 정상 부근에 있는 묘를 파헤쳐야만 가뭄이 해소된다는 풍문이 떠돌아 대강면 사석리로 갓 시집온 어느 아낙이 자기 증조모님의 묘인 줄도 모르고 파헤쳐 버렸다 한다. 그 후에 그 사실을 알고 슬퍼하며 금잔디를 심었다 하며,1945년 이후 아낙네들이 기우제에 참가하여 남자들보다 아낙네들이 주축이 되어 기우제를 지냈는데, 1973년 6월과 7월에 걸친 극심한 가뭄 때 대강면 사석리 아낙네들이 기우제를 지내고 하산하던 도중 큰 비를 만났다 하는데 지금은 거의 수리안전답으로 되어 우뚝 솟은 고리봉의 영험은 전설로 남아 있다.

 

 

▲ 고기 삼거리에 있는 이정목

▲ 고기 삼거리

▲ 고기 삼거리에서 노치마을 까지는 아스팔트를 걸어야 한다. 백두대간 구간 중 유일한 아스팔트 구간이다. 왜 산길도 아닌데 백두대간 길일까 의심하다가 남원시 디지털 문화대전에서 중요한 글을 퍼왔다.

산경표』에서 말하는 백두대간을 비롯한 1정간 13정맥 모두는 하천을 둘러싼 하천의 유역분지 분수령을 체계화시킨 것이다. 가장 큰 백두에서 지리산까지의 백두대간은 한반도 물줄기를 동서로 가르는 주맥으로서 가장 큰 분수령맥이다. 이런 백두대간이 수정봉에 다다르면 더 이상 능선을 타고 지리산으로 갈 수가 없다.수정봉에서 좌우 즉 덕산저수지로 빠지는 낙동강 물줄기와 노치마을에서 왼쪽으로 빠지는 요천, 섬진강 물줄기를 건널 수가 없는 것이다. 오직 이 좌우 물줄기가 나누어지는 노치마을 길을 따라서만이 지리산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즉 평지가 산이 된 셈이다. 그러나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보면 이 길을 따라 정확하게 산길을 이어 놓았다. 그리고 이런 분수계를 따라 운봉읍과 주천면의 경계가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곳은 평지가 산이 되는 곧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을 정확하게 지키는 구간인 것이다. 오히려 이런 극적인 구간이 있는 이곳을 더욱 알려서 조상들의 정확한 분수계 설정과 백두대간의 의미를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 수정봉은 운봉분지를 에워싸는 북서산릉의 한 봉우리로 화강암이 변성받은 암석으로 이루어졌다. 심층풍화된 남원화강암의 운봉분지에 비해 풍화에 강한 암질 산으로 남아있다. 오랜 지질시대엔 정령치에서 구룡폭포로 빠지는 물줄기가 24번 국도를 따라 낙동강쪽으로 흘러갔으나 급사면의 구룡천이 상류쪽으로 심하게 침식이 진전되는 두부침식(頭部侵蝕)에 의해 정령치 물줄기와 만나면서 정령치 물줄기는 방향을 바꾸어 구룡천으로 흘러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오늘날 하천이 흐르지 않는 구간이 낙동강과 섬진강의 분수계가 된 것이며 이를 백두대간을 이어주는 곡중분수계(谷中分水界)로 보는 것이다.

 

 

▲ 백두대간은 노치마을 방향으로 가야 한다.

 

 

▲ 노치마을

▲ 노치샘(낙엽이 많이 들어가 있어서 샘물은 마시지 않았다)

▲ 노치마을 지나서 산행 초입에 있는 소나무 (이곳에서 선두와 만날 수 있었다)

 

 

▲ 노치마을에서 산행 후 만나는 이정목

 

▲ 수정봉 유래를 알리는 안내판

 

▲ 수정봉(1차 때는 없었던 정상 표석이다)

입망치(笠望峙) :남원시 이백면 과립리와 오른쪽 운봉읍 행정리를 이어주는 고개로 갓바래재라고도 한다. 고개의 유래를 알아보니 고개에 중이 삿갓을 지고 가는 모습의 산혈(山穴)이 있어서 갓바래재라고 불렀다고 하고 갓(笠)을 만드는 사람이 있어서 입촌(笠村)되어 갓바래로 불렀다는 설이 있다.

 

▲ 갓바래봉이라고 어떤이가 적어 놓은 이곳 부터 영선조와 함께 하산

 

 

 

 

 

 

 

 

여원재 유래 :고려 말 주막에 살던 젊고 아리따운 주모의 전설이 전해진다. 영남과 호남을 오가는 길손들에게 웃음으로 밥과 술을 내놓는 신세라 해도 어찌 왜구에게 몸을 빼앗기랴 하여 왜놈의 손을 탄 왼쪽 젖가슴을 스스로 도려내고 자결하고 말았던 것이다. 당시 왜적을 무찌르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여원재를 지나던 이성계의 꿈에 나타난 백발의 여인은 왜적을 이길 수 있는 날짜와 전략을 알려주어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것이 1380년 이성계의 황산대첩 이라고 한.(이 고을에는 황산대첩비가 있다고 한다.) 이성계가 전투가 끝난 후 고갯마루에 오르는 길목에 여원이란 사당을 짓고 여인의 넋을 달랬고 주민들은 이 고개를 여원재라 불렀다 지금 여원재 도로 아래의 암벽에 왼쪽 젖가슴이 없는 마애불이 서 있다. 전설의 여인과 마애불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민병준의 백두대간 가는길에서)

여원재 산행 마침(영선조와 함께)

▲ 여원재에 있는 휴게소

 

 

 

▲ 뒤풀이 장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