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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2차(完走)

33구간. 육십령→깃대봉→민령→영취산→백운산(상봉)→중고개재

□ 백두대간 2차 33구간 [대간 산행 37회째 ]

육십령→깃대봉→민령→영취산→백운산(상봉)→중고개재→중재→중기마을

◇ 산행지 : 경북 함양군 서상면, 백전면. 전북 장수군 장계면 번암면 일원

◇ 산행일자 : 2011. 9. 8(토). 날씨 : 흐림

◇ 참가인원 : 대전시 산사모 회원 3명 후 맑음

◇ 산행친구 : 기대

◇ 산행거리 : 19.07km (포항 셀파산악회 실측거리 기준. 접속구간:운산리 운산마을→중고개재 4km 포함 합계 23.7km)

<33구간> 육십령→3.07→깃대봉→8.2→영취산→3.45→백운산→2.55→중고개재

◇ 산행시간 : 후미기준 7시간 40분 소요 예상, 산행시간 6 시간 50분 <중식 20분 포함, 이탈구간 1시간 포함>

◇ 시간대별 요약

- 05:00 대전 시청

- 05:15 대전 IC 출발

- 06:23 육십령 도착

- 06:29 육십령 산행시작

- 07:12 깃대봉

- 07:43 민령

- 08:08 북바위

- 09:15 덕운봉

- 09:30 논개 생가 갈림길

- 10:01 영취산 (점심 20분)

- 10:25 선바위 고개

- 11:28 백운산(상봉)

- 12:18 중고고재

- 12:39 중기마을

- 13:18 운산마을 산행 마침

- 14:10 후미 도착

- 15:10 뒤풀이 마치고 운산마을 출발

- 16:40 대전 IC 도착

 

특기사항

① 중재까지 진행 하지 않고 중고개재에서 이탈

② 긴바지 산행(잡목, 억새, 산죽 많았음)

③ 등산로 고도차 없어 순탄 했으며 산행 시간 짧아 어려움 없었음

④ 일부 소수 인원 중재까지 진행

⑤ 산행 후 운산리 마을 입구 알탕및 오리 훈제 뒤풀이

 

산행지도및 고도표

 

산행 후기

지난 구간에서 컨디션 난조로 고생을 한 이후 이번엔 아침 식사도 하고 초콜릿도 따로 준비하고 과일과 간식도 충분히 준비 한 후 택시를 타고 시청으로 향했다. 이번 구간은 5시 출발이지만 이른 시간이라 대중교통이 없어 이번에도 택시를 이용해야 했다. 택시를 이용 하는 고충은 4시 이전에는 할증이 붙는데다 반석동의 특성상 택시도 많지 않아 택시 잡기가 어려워 집에서도 일찍 나와야 되는 등 여러 가지 불편함이 있어 “이번 구간에는 산행 시간도 짧고 이동 시간도 가까우니 6시에 출발 했으면 좋겠다“고 회장님에게 건의를 했지만”이미 공지된 사안이라서 이번 구간은 바꾸기 어렵고 다음 구간은 6시에 출발 하겠다“는 확답을 받았다.

버스에 올라 잠시 눈을 붙인 것 같은데 육십령 도착이다. 오랜만에 단체사진을 한 장 찍고 출발했는데 이미 어둠은 가시었고 약간 흐린 날씨와 많은 바람 때문에 산행 하기는 좋았다. 다만 새벽녘까지 내린 비로 인해 이슬이 많아 친구와 나는 뒤로 빠지는 작전(?)을 구사했다. 고도차가 없고 바람이 많이 불어 산행속도가 빨라선지 아님 영선조의 회장님 발목 상태가 좋지 않아 속도가 떨어 졌는지 영취산 정상에서 거의 전원이 모여 점심을 하는 모양세가 되었다. 이후 백운산에서 다시 한 번 많은 인원이 집결했고 다음 구간이 짧은 것을 감안하여 중고개재에서 산행을 마감하는 시그널을 발견하고 중고개재에서 운산마을로 향했다.

1차 백두대간 때 버스가 중기마을까지 들어왔었기에 중기마을까지 버스가 들어와 있을 것으로 예상 했으나 35인승 버스만 출입 가능 하다는 마을 주민의 말에 우리 차는 운산마을에 있어서 운산마을 까지 시멘트도로를 걷는 기분은 발바닥이 아파 좋지 않았다. 운산마을에 도착 폭우로 불어난 개울에서 옷을 입은 체 알탕을 하고 뒤풀이로 훈제 오리를 구워 먹은 후 일정을 마쳤다.

 

산행 사

▲ 육십령 도착 (생태 이동 통로를 만들고 있다)

육십령(734m): 육십현(六十峴) 또는 육복치(六卜峙)라고도 하는데, 소백산맥 중의 덕유산(德裕山)과 백운산(白雲山) 사이에 있으며 신라 때부터 요충지로 알려져 왔다. 오늘날 이 고개는 영남과 호남지방을 연결하는 주요교통로로 전주~대구 간 26번 국도가 지나간다. 예부터 함양-장수 주민들의 물류를 교환했던 고개라고 한다.

육십령 유래

1. 함양의 감영에서 이곳까지가 60리 길이고, 장수 감영에서 이 고개까지도 60리(24km)라고 하여 육십령이라 함.여암 신경준의 山經表 에는 "六十峙"- 南來 安義西六十里 長水北四十里 라고 쓰여 있다. 안의 서쪽 60리, 장수 북쪽 40리에 "육십령"이 있다는 뜻이다.

2. 이 고개를 넘으려면 크고 작은 60개의 고개를 넘어야 겨우 닿을 수 있어 육십령.

3. 옛날엔 이 고개에 산적들이 많아서 60명이 모였다가 올랐다는 이야기인데, 이 고개를 넘기 위해서 양쪽 산아래 마을에서 며칠씩 묵어가며 기다렸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밑에는 장정들이 모여 있던 주막이라 해서 장군동(壯群洞)이 있고, 산적을 피해서 살다가 이루어진 마을이라고 해서 피적래(避賊來)라는 마을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한다. 어느 것이 맞는 것인지는 확실치는 않지만 역사적으로 보면<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남아있어 세 번째 이야기가 신빙성이 높다.

4. 박정희 대통령은 군장동 사람들에게 산 속 군장동에 살지 말고 길가에 나와서 살라고 흙벽돌집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고갯마루 연립 주택식으로 지어진 하얀색 집들이 그때 박 대통령이 지어준 집들이다. 군장동에 사람이 살지 않게 된 것이 그때부터. 육십령마을이 군장동 사람들에게 새 삶의 터전이 된 것도, 고개이름이 육십령으로 불리게 된 것도 그때부터라고 한다.

▲ 육십령엔 생태 이동 통로를 만들고 있어 어수선하다. 휴게소는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영업을 하지 않고 있었다.

▲ 육십령에 있는 정자

▲ 육십령에서 바라 본 지리산 방향

▲ 육십령에서 오랜만에 단체 사진

▲ 육십령 산행 시작

▲ 육십령 들머리에 있는 백두대간 안내도

▲ 육십령에서 산행 시작 후 만나는 첫 이정표

▲ 깃대봉 오름 전 샘터 ( 산행 전날 비가 와서 수량이 풍부 했다)

▲ 구시봉(깃대봉1014.8m):장수군 장계면과 경남 함양군 서상면의 경계에 있다. 옛날 임금님이 신하나 백성들 중에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땅을 하사했는데, 이를 사패지(賜牌地)라 했고, 이 땅에는 누구의 사패지라고 하는 깃대를 꽂아 놓은 데서 깃대봉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깃대봉은 특히 가을의 억새와 구절초 향으로 유명하다. 정상에 오르면 북으로 남덕유산, 동으로는 기백산, 남쪽으로는 장안산과 백화산이 보인다.

구시봉 정상석 뒤에 새겨져 있는 깃대봉과 구시봉 유래: 산림청에서 세운 푯돌에는 「구시봉」이라 적어놓고 “삼국시대 때 신라와 백제의 국경 지대로 그 아래 주둔하던 군사들이 기를 꽂은 곳이라 하여 깃대봉이라 불렀으나, 옛날 한 장수가 이 산에 올라보니 산 형태가 구시형이라 2006. 1. 6 「구시봉」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고 적고 있다.구시형이란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몰라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니, 구시(1) - “ ‘구덩이’의 경상도 사투리”, 구시(2) - “소나 말 따위의 가축들에게 먹이를 담아 주는 그릇. 흔히 큰 나무토막이나 큰 돌을 길쭉하게 파내어 만든다.” 고 표기해 놓았는데, 구시봉이란 여기서 구시(2)를 두고 한 말이다.

구시봉에 있는 구급함

민령:깃대봉과 영취산 사이에 있는 중요한 참고점이다. 백운산은 논개의 고향이다. 생가는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이고,

무덤은 경남 함양군 서상면 금당리 방지마을이다. 민령은 바로 논개의 생가와 무덤을 오가는 대간의 고갯길이다. ‘밋밋한 고개’라는

우리 이름인데, 소리에 따라 ‘岷’이라는 한자를 음차하였다. (신동길저/뫼따라 하늘까지 中

북바위 유래: 바위 단면이 북처럼 생겨서 북바위이다.

▲ 산죽이 터널을 만들고 있다.

▲ 지도와 이정표상 덕운봉 정상인데 아무런 표식이 없다.

▲ 논개 생가 갈림길: 충절의 여신 주논개는 1574년 영취산 북쪽의 대곡리 주촌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왜장을 껴안은 채로 죽은 논개의 묘는 백두대간 육십령 동남쪽으로 십리쯤 떨어진 함양 서상면 금당리방지마을 뒷산에 있다. 대간에서 나고 대간에 묻힌 것.논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보통 경상우도의 병마절도사인 최경회(崔慶會)의 후처로, 임진왜란 때 최경회가 전사하자 촉석루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본군의 잔치에 참석하여 일본 장수인 게야무라 로구스케(毛谷村六助)를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한 정도까지만 알고 있다. 성은 주씨(朱氏)이고, 본관은 신안(新安:중국)이며, 전북 장수(長水)에서 태어났다. 원래 양반가의 딸이었으나 아버지가 사망하고 집안에 어려움이 겹쳐 가산을 탕진하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의 후처가 되었다고 전한다. 그 밖의 자세한 성장과정은 알 수가 없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5월 4일에 이미 서울을 빼앗기고 진주성만이 남았을 때 왜병을 맞아 싸우던 수많은 군관민이 전사 또는 자결하고 마침내 성이 함락되고 최경회는 일본군에 의해 전사한다(제2차 진주성 싸움). 일본군 왜장들은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촉석루(矗石樓)에서 주연을 벌이는데 논개는 최경회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기생으로 위장하여 참석하게 된다. 이 자리에 있던 그녀는 계획대로 열손가락 마디마디에 반지를 끼고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 로구스케[毛谷村六助]를 꾀어 벽류(碧流) 속에 있는 바위에 올라 껴안고 남강(南江)에 떨어져 적장과 함께 죽었다. 훗날 이 바위를 의암(義岩)이라 불렀으며, 사당(祠堂)을 세워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다. 1846년(헌종 12) 당시의 현감 정주석(鄭胄錫)이 장수군 장수면(長水面) 장수리에 논개가 자라난 고장임을 기념하기 위하여 논개생향비(論介生鄕碑)를 건립하였다. 그가 비문을 짓고 그의 아들이 글씨를 썼다. 1956년 '논개사당(論介祠堂)'을 건립할 때 땅 속에 파묻혀 있던 것을 현 위치에 옮겨놓았다. 비문에는 "矗石義妓論介生長鄕竪名碑"라고 씌어 있다.

변영로가 지은 시

논개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蛾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魂)

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 무령고개가 가까운 영취산 오름길은 오솔길을 걷는 것 같다.

무령고개(900m)유래: 백두대간에서 갈라진 금남호남정맥을 넘는 첫 고개로, 마치 춤추는 용과 같다 해서 무룡이라고도 불린다.

영취산 (1075.5m): 장수 영취산(靈鷲山)은 백두대간에서 금남호남정맥 분기점으로 함양 진산인 백운산에서 백두대간이 육십령으로 북상하는 도중에 거치는 산이다. 정상에서 서쪽으로 금남호남정맥줄기가 갈라져 나간다. 바로 무령고개를 지나 장안산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또한 영취산의 물줄기는 동으로는 낙동강, 남으로는 섬진강, 북으로는 금강을 가른다. 북으로 남덕유산이, 서쪽으로 장안산이, 남으로 백운산이 조망된다.

영취산에 도착하니 선두 후미 없이 모두 식사 중이다. 친구와 나도 이곳에서 식사를 했다.

▲ 선바위고개: 영취산에 무령고개 쪽으로 백여미터 가면 큰 바위 하나가 서있다. 이 바위가 선바위이고 고개이름도 여기서 따왔다.

백운산(1278m): 백운산은 전북 장수군 번암면 지지리와 경남 함양군 서상면, 백전면에 경계를 하고 있다. 백운산의 이름은 흰백(白), 구름운(雲)을 써서, 산이 높아서 산봉우리에 항상 흰 구름을 감싸안고 있는 산이라 뜻이다. 백운산의 물줄기는 서쪽은 백운천을 통하여 섬진강으로 흘러들고, 동쪽은 옥산천을 통하여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백운산 정상에서 바라보면 서쪽으로는 장안산과 괘관산, 북쪽에는 깃대봉과 남덕유산, 남쪽으로는 월경산과 봉화산 등이 보인다.백운산을 만산홍엽의 가을 단풍과 금상첨화로 산허리마다 흐드러진 갈대와 싸리나무, 그리고 산죽이 한데 어우러져 비경의 극치를 이루는 산으로 유명하다.

▲ 예전에 있던 백운산 정상석

▲ 난이도가 없어서 산행 인원 거의가 몰려 있다.

중고개재: 고개의 동쪽 백운산 자락은 신라 영은조사(靈隱祖師)가 창건한 영은사지를 비롯해 많은 암자가 있는데. 특히 선농일치(禪農一致)에 의한 선농불교를 제창한 용성스님이 평소 선사의 지론인 선농일치를 몸소 실천하기 위해 스스로 호미를 들고 세운 농장인 화과원이 이곳에 있다. 그래서 화과원 동쪽 백운산을 넘는 고개는 절고개이며, 중들이 많이 넘나들었다는 이 고개는 중(衆)고개라는 이름이다. 용성스님은 기미독립선언서 대표 33인중 한 분이다.

중고개재에서 중기마을 가는 길

중재 가는 길

▲ 알탕 장소

▲ 뒷풀이 모습

▲ 운산마을

▲ 그동안 고생한 등산화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