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두대간 2차 28구간 [남진 산행 제 31회째]
우두령→삼성산→여정봉→바람재→황악산→운수봉→여시골산→괘방령→가성산→눌의산→추풍령
◇ 산행지 : 충북 영동군 매곡면. 추풍령면. 경북 김천시 봉산면 일원
◇ 산행일자 : 2012. 6. 23 (토). 날씨 : 맑음(더웠으나 간간히 부는 바람에 시원한 편이었음)
◇ 참가인원 : 대전시 산사모 회원 37 명
◇ 산행친구 : 기대
◇ 산행거리 : 23.74km(포항 셀파산악회 실측거리 기준, GPS 실거리:25.8 km)
<28구간> 추풍령→3.61→눌이산→3.03→가성산→4.25→궤방령→5.55→황악산→2.85→바람재→4.45→우두령
◇ 산행시간 : 8시간 15분 < 점심 15분 포함> 후미 10시간 산행
◇ 시간대별 요약
- 05:00 대전 시청 출발
- 06:17 우두령 도착
- 06:20 산행 시작
- 07:00 삼성산
- 07:27 여정봉
- 07:46 바람재
- 08:18 형제봉
- 08:36 황악산
- 09:21 운수봉
- 09:38 여시굴
- 09:51 여시골산 점심(15분)
- 10:30 괘방령
- 12:20 가성산
- 12:49 장군봉
- 13:33 눌의산
- 14:35 추풍령 산행마침
- 16:15 후미 도착
- 17:00 뒤풀이 마치고 추풍령 출발
- 18:05 대전 IC 도착
※ 특기사항
① 노팬티 남대문 개방 산행
② 반석동 이사 후 시청 첫 탑승
③ 컨디션 좋은편이었으나 가성산 오르며 과도한 땀 배출로 인한 고혈압 증상
④ 카리브 모텔 대실 이용 산악회원 전체 샤워
⑤ 산행 후 족발 뒤풀이
※ 산행 전 사전 조사
<은편리[銀片里]> : 이 마을은 본래 지금으로부터 약 250여년전 영·정조 연간에 형성되어 음변(陰邊)리라 불렸고, 1759년 경상도 금산군 황금소면에 속했다가 1914년에 충북 영동군에 편입되면서 마을 이름도 은편(銀片)으로 개칭하였다. 1991년에는 황금면을 추풍령면으로 변경하여 현재의 행정구역은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은편리로서 50여호의 부락으로 오늘에 이른다. 마을 뒤쪽에는 느름산이 높이 솟아 거센 한풍을 막아주고 겨울에 흰눈이 마치 은가루를 덮은 듯하다 하여 음변리를 은편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한다.
마을 우측의 당산 위에는 수령 500년을 넘는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느름산 정상에는 통신수단으로 사용했던 봉화대 옛터가 남아 있어 애환과 오욕 속에 흘러간 마을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으니 이 고장의 자랑으로 손꼽을 만하다. 예나 지금이나 이 마을 사람들은 씩씩하고 단합이 잘 되기로 소문이 나 있다.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이곳 사람들의 인심은 변함없이 넉넉하고 순박하여 사철 마르지 않는 느름산 물이 좋아 장수하는 마을로도 이름이 높다.
<직지사 [直指寺]: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代項面) 황악산(黃嶽山)에 있는 사찰이며 고구려의 아도(阿道)가 지었다는 설이 있으나 현재 사적비(寺蹟碑)가 허물어져 확실한 것은 알 수 없고, 418년(눌지왕 2)에 묵호자(墨胡子)가 경북 구미시에 있는 도리사(桃李寺)와 함께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 후 645년(선덕여왕 14)에 자장(慈藏)이, 930년(경순왕 4)에는 천묵(天默)이 중수하고, 936년(태조 19)에 능여(能如)가 고려 태조의 도움을 받아 중건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거의 타버려 1610년(광해군 2)에 복구에 들어가 60여 년 후 작업을 끝맺었다. 직지사라는 절 이름은 능여가 절터를 잴 때 자를 쓰지 않고 직접 자기 손으로 측량한 데서 붙여졌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학조(學祖)가 주지로 있었고, 유정(惟政)이 여기서 승려가 되었다. 경내에는 석조약사여래좌상(보물 319), 대웅전 앞 3층석탑(보물 606), 비로전 앞 3층석탑(보물 607), 대웅전 삼존불 탱화 3폭(보물 670), 청풍료(淸風寮) 앞 3층석탑(보물 1186) 등의 문화재가 있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 산행 지도및 고도표
※ 산행 후기
친구들과 바다낚시를 가기 위해 한 구간 빠지고, 친구랑 둘이 했던 구간이라 큰 의미를 찾지 못해 또다시 빠지다 보니 “이번 백두대간 산행은 6주 만인 한 달 반 만에 산행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심적으로 부담이 간다. 물론 한 달 반 동안 산행을 안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짧은 시간의 산행이지만 잦은 산행으로 충분한 워밍업은 되어 있긴 하지만 장시간 산행에 대한 부담이 크다는 이야기다. 더욱이 무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금에 9시간이란 산행 시간은 분명 부담이 간다. 하지만 이제 대간 산행도 카운터 다운이 들어간 시점이니 가급적이면 빠지지 않고 산행을 해야 한다. 숙소를 인천에서 병점으로 옮기고 필요한 가재도구와 분양사무실 준비 등으로 지난 일주일 동안 운동이 부족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동안의 산행 경험으로 인해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라 생각 했고, 금요일 기차를 타고 집에 내려와서는 물부터 얼리기 시작했다. 이번 구간에 중간지점이라 할 수 있는 “괘방령에서 차가 대기 하고 있겠다!”는 산악회의 공지에 따라 물은 최대한 많이 얼리고 수량도 4리터를 준비하고 캔 커피도 얼리고 과일과 당분이 있는 오디 즙도 얼려서 만반의 준비를 했다. 날씨가 더워져 반바지를 준비 할까 하다가 숲이 우거져 종아리가 긁힐 염려가 있어 바지는 그냥 긴바지를 입고 산행을 할 때 속옷을 입어서 생기는 불편함을 생각해서 노팬티 산행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문제는 시청에서 새벽 5시 출발인데 대중교통이 없으니 택시를 이용 하던가 아님은 차를 가지고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집사람이 차를 써야 하므로 새벽에 일어나 시청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한다. 저녁 식사 후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 잠이 오지 않는다. 그동안 이사하고 이래저래 일이 있어 술로 잠을 청했는데 수면제라 할 수 있는 바둑 채널에 시선을 고정 시켜도 마찬 가지고 잠은 거의 포기하다 시피 있다가 잠깐 눈을 감은 듯 했는데 알람이 울린다. 일어나 샤워를 하고 옷을 챙겨 입고 식사를 하는데 집사람이 일어나 시청까지 태워다 준다고 한다. 내 집으로 이사를 하면서 집도 깨끗하고 보일러 상태가 좋아 세를 살던 집에 비해 온수도 풍부하고 산과 접해 있어 여름인 지금도 시원하고 모든 게 다 좋아서 집사람과 아이들은 너무 너무 좋다고 하는데 내 입장에서는 산에 한 번 가려면 대전에 있는 거의 모든 산악회 버스가 대전IC를 통과하다 보니 송촌까지 거리가 멀어서 그것 하나가 제일 불편하다. 시청엔 5시 40분에 도착 하여 버스에 오르니 친구와 둘이 앉아 갈 자리가 없다. 통로를 선호하는 마음은 알겠는데 거의 모두가 이기적이란 생각이 든다. 지난 번 지정 좌석 제도를 하던지 접수순으로 자리 배치를 했으면 하고 회장님께 건의를 드렸는데 운영상 어려움으로 받아드려지지 않았다. 시청에서 승차 하면서도 친구와 앉아 갈 수 없는 현실에 잠시 우울 했는데 태평동 산님에게 친구와 같이 앉아 갈 수 있도록 자리 양보를 부탁하니 흔쾌히 받아 주셔서 친구와 같이 앉아 갈 수 있는 자리를 확보하고나 이번 구간에 대한 회장님의 설명이 있은 후 회장님은 일이 있으셔서 이번 구간은 참석하지 못 한다며 차에서 하차 한다. 운영진의 어려움은 이런 것에서 잘 들어 나는 것 같다. 한전 앞에서 친구가 승차하고 눈을 감았는데 또 잠이 오지 않는다. 잠깐 눈을 감은듯한데 기사분의 음성이 들린다. 우두령에 다 와 가니 산행 준비를 하라는 내용이다. 슬리퍼에서 등산화로 갈아 신고 조금 기다리니 우두령이다. 회장님이 안 계시니 준비 운동도 없고 단체 사진도 없이 또 우르르 출발한다. 사진 촬영도 하고 지난 번 백두대간 1차 때 상호 친구와 둘이 왔었던 구간이라 그때도 떠올려 보고 조금 여유를 부리다가 출발하니 거의 후미 수준이다. 높은 곳에서 출발 하다 보니 삼성산까지 오름은 큰 어려움이 없다. 황악산을 지나면서는 다소 지루함이 있었는데 황악산에서의 추억을 떠올리다 보니 지루함도 잠시였고 여시골산에서 점심을 하고 괘방령에 내려섰다. 괘방령 이후 가성산 오름은 바람이 사라져 힘든 시간이었다. 더욱이 땀을 많이 배출해 그로인한 고혈압 증상이 겹쳐 가장 힘든 시간이었는데 친구의 조언에 따라 물을 많이 마시고 천천히 올라 가성산을 지난 후에는 탄력을 받아 눌의산은 커다란 어려움 없이 추풍으로 향 할 수 있었다. 산행을 마치고 버스에 도착하니 모텔을 두 곳 잡아 놓았다 한다. 남자와 여자 씻을 곳을 대실로 잡아 샤워를 할 수 있게 영선조가 생각 해 낸 것 인데 여름 철 씻지 못하면 그로인한 고충은 이루 말 할 수 없는데 선두에서 길을 찾고 산에 내려와서는 후미를 위해 늘 애쓰는 영선조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친구가 한 잔 하자는 말에 귀가 솔 깃 했지만 작은 아이가 돼지 갈비 먹고 싶어 한다는 집사람 말이 떠올라 다음을 기약하고 송촌에 온다는 집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대전IC로 오라 한 후 집사람을 만나 집으로 향하며 일정을 마무리 했다.
※ 산행 사진
▲ 다음 구간인 우두령 석교산 방향
▲ 우두령 [ 牛頭嶺 ] 충청북도 영동군의 상촌면 흥덕리 피남절에서 경북 김천시 구성면 마산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한국지명총람』에는 우두령 대신 산 지명인 '우두산(牛頭山)'이 기록되어 있으며, 지명유래에 대해 산의 모양이 소의 머리처럼 생겨 지어진 이름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우두령은 조선 후기의 지리지와 고지도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여지도서』(황간)의 황악산 세주(細註)에 '우두령'이 기록되어 있다. 이후 『대동여지도』(황간)와 『동여도』에 각각 '우두령'과 '우두산(牛頭山)'이 기록되어 고개와 산으로 표기되어 있다. 『1872년 지방지도』(황간)에도 표기자 변화 없이 '우두령'이 기록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일명 질매재라고도 불리우는데 ‘질매’라는 이름은 이 고개의 생김새가 마치 소 등에 짐을 싣거나 수레를 끌 때 안장처럼 얹는 ‘길마’ 같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질매는 길마의 이 고장 사투리다. 이 말이 한자화하여 우두령(牛頭嶺)이라고도 불리는 것인데,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에는 두 이름이 별개인 양 둘 다 표기돼 있다.
▲ 우두령 산행시작
▲ 우두령 생태이동 통로 가는 길
▲ 우두령에서 산행 시작 후 40여 분만에 삼성산에 도착한다.내가 보기에 특별함은 없는데 그 유래는 거창(?)하다.
※삼성산의 유래: 성스러움을 뜻하는 산 이름이다. 산경표에 '삼성산(三聖山)이라 기록되었고, 주변에 이를 뒷받침할 만한 지명들이 있다. 김천시 대항면 주례리(周禮里)에 '주공'이란 마을이 있다. 1790년 곡부공씨가 이 마을을 개척했는데 공자가 살던 주나라 주(周)와 자신의 성 공(孔)자를 따서 주공(孔周)이라 불렀다. 공자는 중국의 삼성(三聖) 중 한 명으로 꼽는 인물이다. 삼성산 남쪽의 대성리(大聖里)도 같은 지명이다. 1750년 이씨, 박씨, 김씨, 세 선비가 조용하고 살기 좋은 마을을 찾아 개척했다. 이 마을에 평소 자신들이 존경하고 있던 중국의 성인 '공자'의 이름을 따서 '공자동(孔子洞)'이라 불렀다. 그러다가 1914년 일제강점기에 '대성리'란 이름으로 개명되었다.삼성산 북쪽 기슭에 삼성암(三聖庵)이 자리 잡고 있다. 직지사 말사로서 이 암자 현판에 천덕산 삼성암(千德山三聖庵)이라 적혀있다. 삼성암 약광전의 석불좌상은 도선국사가 조성한 것으로 전해지며, 금오산 '약사암 중수기'에는 이 석불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전설에 지리산에 세 분의 석불이 있었는데 삼형제 부처라 불렀다. 하나는 금오산 약사암에, 또 하나는 직지사 삼성암에, 다른 하나는 이곳(지리산)에 모셨다"
▲ 여정봉(旅程峰: 1030m) :여정봉은 특징 없는 봉우리다. 정상을 알리는 부산낙동산악회의 작은 팻말과 선답자의 리본만 매달렸을 뿐이다. 여정봉 정상에서 우측으로 90도 꺾이는 내리막으로 대간길이 이어진다.
▲ 백두대간 복원지:여정봉에서 내려서면 긴 의자와 이정표, 알림 표지가 설치된 지점이 나온다.여기서 좌측 사면으로 내려서면 목장 분위기를 연상케 하는 백두대간의 복원지를 지나가게 된다.과거 폐 초소 등의 군사시설로 망가져 있던 백두대간을 최근 다시 원상으로 복원해서 본래의 모습으로 고친 것이다. 아직은 복원중으로 출입을 막고 있다.
※ 바람재 명칭 유래 :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주례리와 충청북도 영동군 상촌면 궁촌리를 연결하는 고개로 바람재 북쪽에 황악산과 형제봉 솟아 있고, 남쪽으로는 높이 약 1,030m에 이르는 여정봉이 있다. 바람재 고갯마루 높이는 약 810m로 1,000m가 넘는 높은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에 상대적으로 고도가 낮은 안부에 자리 잡고 있다. 두 봉우리 사이 고도가 낮은 안부에 있는 고개로 북서~남동 방향으로 열려 있는 폭 약 500m의 좁은 통로 모양의 지형을 취하고 있어, 편서풍이나 북서 계절풍이 통과하면서 풍속이 매우 빨라지는 곳이다. 이 같은 지형 조건으로 풍속이 빠른 바람이 부는 곳이어서 바람재 또는 풍령(風嶺)이라 하였다.바람재는 북쪽 괘방령이나 남쪽 우두령에 비해 고도가 높고 험준하여 고개를 지나는 도로가 개설되어 있지 않지만, 동쪽 비탈면의 바람재목장과 부근의 군사 시설을 위해 개설한 임도가 있어 주례리 화곡마을에서 바람재 고갯마루까지 차량을 이용하여 접근할 수 있다. 바람재목장에서는 젖소, 사슴 등을 사육하고 있다.출처:디지털김천문화대전
바람재는 또한 아마추어 무선사들이 새로운 무전기의 교신 거리와 성능을 실험하기 위해 종종 찾는 곳이라고 한다. 50W 정도의 출력을 내는 무전기로도 일본과 교신이 될 만큼 전파가 잘 터지는 곳인 바람재는 과거 주한미군이 주둔하기도 했다. 자동차 2∼3대가 겨우 올라 설 수 있는 꼭대기까지 길을 낸 것도 미군이었다. 발을 들여놓기 곤란할 만큼 망가진 데다 쓰레기투성이가 된 콘크리트 방카를 유산으로 남겨놓기까지 했다. 그들은 지금도 한 달에 한두 번 산을 올라와 몇 시간씩 머물고 돌아간다고 한다. 특히 미군이 개입하는 국제전쟁이 치러질 때면 봉우리에는 어김없이 미군들의 모습이 보인다고 했다. 해발 870m의 21만여평의 목장은 94년에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형제봉(兄弟峰)명칭 유래]:행정구역은 경상북도 김천시 증산면 장전리와 성주군 가천면 용사리, 금수면 영천리에 걸쳐 있는 산이다. 형제봉 유래는 우뚝 솟은 두 개의 봉우리가 마치 우애 깊은 형제의 모습과 닮았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북쪽 봉우리는 높이 1,022.2m로 행정 구역상 성주군에 속하고, 남쪽 봉우리는 높이 약 1,010m로 김천시 증산면 장전리 선무터마을에서 동쪽으로 약 1.7㎞ 떨어져 있다. 형제봉은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나와 수도산(修道山)과 가야산(伽倻山) 등을 이루는 산줄기인 수도지맥(修道支脈)에서 갈라진 작은 산줄기로, 수도산과 가야산 중간에 있는 석항령(石項嶺) 부근에서 북쪽으로 뻗은 산줄기가 형제봉을 거쳐 성주군 독용산(禿用山)으로 이어진다.
▲ 황악산 비로봉: 국토지리정보원의 1:50,000 지도에는 황학산(黃鶴山)으로 표기돼 있다. 예로부터 학이 많이 찾아와 황학산(黃鶴山)으로 불렀다고 하며 지도상에도 흔히 그렇게 표기되어 있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대동여지도, 택리지 같은 문헌 및 직지사의 현판에 ‘황악산’으로 적혀 있고 산경표에도 '황악산(黃岳山)이라 기록되어 있다. 주봉인 비로봉(毘盧峰.1111m)을 중심으로 형제봉, 신선봉, 백운봉, 운수봉 등 다섯 봉우리가 말발굽 모양으로 직지사(直指寺)를 포근히 감싸고 있다. 피라밋 모양의 육산으로 직지사 부근을 제외하고는 소나무가 드물다는 임상적 특징이 있으며 단풍과 설화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 황악산 직지사 갈림길(일반적인 황악산 산행은 직지사에서 올라 비로봉을 거쳐 직지사로 하산하는 원점회귀를 많이 한다.)
※[직지사 유래]:황악산(黃岳山)의 황자는 청(靑), 황(黃), 적(赤), 백(白), 흑(黑)의 5색(色) 중에서도 중앙색을 상징하는 글자이다. 따라서 황악산에 자리잡은 직지사는 예로부터 해동(海東)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으뜸가는 가람이라는 뜻에서 동국제일가람(東國第一伽藍)이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김천까지는 12km이고, 다시 김천에서 서울까지는 230km, 부산까지는 218km로서 남한의 중앙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신라 눌지왕 2년(418) 아도 화상에 의하여 도리사(桃李寺)와 함께 개창(開創)되었다. 직지(直指)라 함은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종의 가르침에서 유래되었다 하며, 또 일설에는 아도 화상이 일선군 냉산(冷山)에 도리사를 건립하고 멀리 김천의 황악산을 가리키면서 저 산 아래도 절을 지을 길상지지(吉祥之地)가 있다고 하였으므로 하여 직지사라 이름했다는 전설도 있다. 또는 고려의 능여 화상이 직지사를 중창할 때 자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자기 손으로 측지(測地)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란 설도 있다.
▲ 운수봉 유래는 운수동(雲水洞) 마을명칭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천덕산(千德山)이란 다른 이름도 있다. 200여년 전부터 직지사를 찾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이 근처 골짜기에 정착해서 마을을 형성해 터목이라 불렀다. 한자로는 대항(垈項)이라고 표기했다. 면사무소가 이곳에 생겨 면(面) 중심지로 본리(本里)라 불렀으나 1914년 일제 때 본리와 돌모리, 백운동(박수점)을 통합해서 '운수동'으로 개명했다. 운수(雲水)는 행운유수(行雲流水)와 같이 언제나 구름이 머물고 골짜기에 물이 흐르는 자연경관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본디 이름인 터목이야 말로 삶의 터전이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이름은 없을 것으로 여겨진다.
▲ 여우굴 같은 동굴이 있는데 여우가 살았는지는 알 수 없다. 김천시에서는 여시굴이라고 알림판을 설치 해 놓았다.
▲ 현재 여시골산(620m)이라 불리는 산은 운수봉과 괘방령 사이의 대간 상에 있다. 그런데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에는 오른쪽 가지줄기의 385.4m를 여시골산이라 표기하고 있다. 현지 조사를 통해 진위가 가려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여시골산이라는 이름은 ‘여우’의 경상도 사투리에서 비롯된 듯한데, 과거 이 산에 여우가 많이 살았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대간 등마루 위 오름길의 시작 부분에 여우굴 같은 동굴이 있다.
▲ 괘방령 백두대간 진행 방향
▲ 괘방령 유래: 산경표에 '계방산(桂榜山)으로 표기됐고, 금산(지금의 김천) 서쪽 10리에 있다'고 했다.<신증동국여지승람>은 '卦方嶺'(괘방령), 현 고개턱의 안내문에는 '掛榜嶺'(괘방령)이라 표기하였다. 지금은 이 고개가 한가로운 길로 변했지만 과거엔 꽤나 시끌벅적했다고 한다. 관로(官路)인 추풍령과 달리 상로(商路)로 쓰였는데 과거 길의 선비들이 대부분 추풍령을 기피했다고 한다. 추풍낙엽(秋風落葉)으로 낙제를 연상시키는 추풍령보다는 급제자 합격의 방을 걸어두는 ‘괘방(掛榜)이라는 것에 더 집착했으리라고 본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후대로 내려와서 고개 이름에 의미를 부여한 것일 뿐, 어떤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므로 사실로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또한 이곳은 임진왜란 때 박이룡 장군이 왜군을 상대로 격렬한 전투를 벌여 승전을 거둔 격전지로서 북쪽으로 1km 떨어진 도로변에는 장군의 공을 기리기 위해 지은 황의사라는 사당이 있다. 비록 이곳이 해발 300m의 낮은 고개이지만 민족정기의 상징인 백두대간의 정기가 잠시 숨을 고르다 황학산으로 다시 힘차게 뻗어 오르는 곳이며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이기도 하여 북쪽으로 흐르면 금강, 남쪽으로 흐르면 낙동강으로 흘러가는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 [괘방령 산장]: 전원생활을 그리워하던 산장 부부가 가정집으로 지으려다가 산꾼들의 성화에 못 이겨 산장 아닌 산장이 되었다 한다. 부부가 손수 3년여 공사 끝에 2007년 11월에 완공. 아직 대간길에서 많이 알려지지 않아 산꾼들의 발걸음은 적은 편이지만 한번 다녀간 사람은 산장 부부의 넉넉한 인심에 시간을 내어 다시 찾아오는 사람도 있다 한다. 대간 상에 많은 산장이 있지만 대간길에서 많이 벗어나 있어 이용하기가 힘들지만 괘방령산장은 대간길과 접하고 있어 이용하기 편리하다.
▲ 가성산(柯城山 ):인근 주민들은 '가재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김천 쪽으로는 가성마을과 외가성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산 중턱에서 옛 성터가 마을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가성(柯城)이라 했다고 한다.
▲ 장군봉: 한자로 將軍峰이 아닌 長君峰이다. 왕자(王子) 중에서 최고 연장자를 장군(長君)이라 부른다. 663봉 우측의 국사봉과 관련이 있어 보이는데 기록이 없어 유래를 알 수 없다.
▲ 눌의산 직전 헬기장(눌의산 주변엔 서너개의 헬기장이 있다)
▲ 눌의산(訥誼山: 743m) :'봉화산' 또는 '선계산'이라 부르기도 했다. 정상에 봉수대가 있던 자리라서 봉화산, 신선이 도포를 걸친 모습이라서 선계산으로도 불리었다고 한다.한자의 뜻으로 정의(情誼)가 눌하다 혹은 더디다는 것이니, 추풍령을 사이에 두고 충청도와 경상도의 교류가 뜸하다는 것쯤으로 해석된다. 눌의산 정상석이 놓인 곳은 옛날 봉수대가 있던 자리이며, <세종실록지리지>에 눌이항(訥伊項), <동국여지승람>에는 눌이항산봉수(訥伊項山烽燧)라 기록됐다. 따라서 '눌의'의 의(誼)는 이(伊)가 개변된 것이고, 항(項)은 목을 가르키는 것으로 유사음으로 풀이하면 본디 이름은 '눌이산'이다. 즉 '눌이산'은 '늘이목' 혹은 '늘잇재'가 되어 느릿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사실 추풍령은 해발 고도가 225m밖에 안 된다. 경상도와 충청도 사이의 백두대간을 가로지르는 죽령(689m)이나 조령(642m) 등의 이름난 고개들에 비하면 훨씬 낮을뿐더러 김천시의 고도가 해발 100m에 이르고, 그 너머 황간 쪽은 추풍령 마루턱 높이를 거의 유지하면서 넌지시 기울 뿐이니, '늘잇재'라는 이름은 산이름 이었다기보다는 추풍령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유명하다.
▲ 추풍령(秋風嶺): 본래는 추풍(秋豊)이라해서 풍요로움을 뜻하는 지명으로 불리었다.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등에 추풍(秋豊), 또는 추풍역리(秋豊驛里)라 기록하고 있다. 거기에 령(嶺)자를 붙여 고개로 취급하기 시작한 것은 윤두서(1668~1715)의 <동국여지지도>와 그보다는 150년 뒤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대동지지>의 기록이 처음이다. 그로써 보면 지금 우리가 부르는 추풍령(秋風嶺)이란 이름은 대개 임진왜란 전후로부터 알려져 온 게 아닌가 싶다. 1905년 추풍령에 철도가 개설되었다. 이를 계기로 영남지방과 중부지방을 넘나드는 관문으로 조령보다는 추풍령을 더 많이 이용하게 되었다. 교통의 요지로서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는 군사적 요충지로도 이용되었다.
▲ 추풍령(秋風嶺)에 있는 조형물
▲ 추풍령(秋風嶺) 카리브 모텔을 산악회 측에서 두 방을 대실하여 남녀 구분하여 샤워를 했다. 여름 산행 후 문제는 씻을 곳을 찾는게 고충인데 회장님과 영선조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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