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두대간 2차 25 구간 [대간 산행 2회째 ]
갈령→비재→봉황산→화령재→윤지미산→무지개산→신의터재
◇ 산행지 : 경상북도 상주시 화남면, 화서면, 화동면 일원
◇ 산행일자 : 2011. 3. 19(토). 날씨 : 맑음
◇ 참가인원 : 대전시 산사모 회원 64명.
◇ 산행친구 : 기대, 돈민, 진석外 산사모님들
◇ 산행거리 : 도상거리 약24.46km (접속 1.2 km 포함)
<25구간>접속구간 : 갈령-1.2-갈령삼거리
갈령삼거리-4.15-비재-3.85-봉황산-1.45-산불감시초소-3.26-화령-1.87-윤지미산-4.41-무지개산-4.27-신의터재 계:23.26
◇ 산행시간 : 후미기준 8시간 30분 소요 예상, 산행시간 8시간 <중식 20분, 무지개산 왕복 15분 포함>
◇ 시간대별 요약
- 06:20 대전 IC 출발
- 07:20 갈령 도착
- 07:30 갈령 산행시작
- 07:28 갈령 삼거리
- 08:25 못제
- 09:12 비재
- 10:48 봉황산 (점심 20분)
- 11:17 산불 감시 초소
- 11:57 화령
- 12:53 윤지미산
- 14:10 무지개산 갈림길 (무지개산 왕복 15분 소요)
- 15:28 신의터재 산행 마침(선두 7시간 30분, 후미 9시간 30분)
- 16:15 신의터재 출발
- 17:20 대전 IC 도착
※ 특기사항
① 무지개산 정상 다녀옴.
② 산행 중 왼쪽 무릎 아픔.
③ 총원 63명으로 인해 45인승 버스 2대 출발.
※ 산행지도및 고도표
※ 산행 후기
목표산행의 어려움은 불철주야 가리지 않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가야 하며 부득이 빠지게 되면 보충을 꼭 해야 한다. 그런 어려움이 있기에 백두대간을 완주 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높이 평가해 주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무실 오픈 행사를 한다는데 내가 꼭 참석해야 할 이유는 많지 않지만 그래도 오픈 행사를 한다는데 고민을 하다 백두대간을 택했다. 초청 하려면 많은 사람이 있겠지만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기로 했으니 내 손님도 없고 선배 입장에서 보면 내가 없는 것이 오히려 나을 수도 있다고 생각되기에 과감히 백두대간을 택했다.
원두막에서 버스를 타니 회장님이 일찍 올 사람만 1호차에 탑승 하란다. 버스가 두 대 출발하니 어려운 점은 1호차에 탑승 하기 위해 한눈을 팔지 못한다는 거다. 전에는 언중조로 마음 편하게 다녔는데 어쩔 수 없다 오늘도 최선을 다 할 도리 밖에..
갈령에 오니 익숙하다. 이번이 아마도 최소 다섯 번째는 되는 것 같다.단체 사진 찍고 부지런히 올라 가니 30여분 만에 갈령 삼거리에 도착하여 대간 길에 접속 했는데 전에 왔을 때에 비해 이정표와 시설이 잘 되어 있다. 상주시에서 많이 신경 쓴 흔적이 보이는데 산꾼들에게는 고마운 일이다. 못제 설명판도 없었는데 있었고 비재 철계단은 반가웠다. 선두가 잠시 숨고르기를 하는 동안 기념사진도 찍고 봉황산으로 향했다. 봉황산에 도착해서는 이른 점심을 먹고 화령재로 향했다.
화령재는 4년전 내가 백두대간임을 알고 산행 한 첫 구간이다. 당시 화령에서 신의터재를 지나 윗왕실에서 산행을 마쳤었다. 비산비야라고 할 수 있는 백두대간 구간 중 가장 낮은 고도의 구간을 가면서 완전히 KO패를 당했던 쓰라린 기억이 있어서 윤지미산에 갈 때는 긴장을 했는데 그때의 기억이 징크스를 만드는지 ㅠㅠ 왼쪽 무릎 옆의 힘줄이 당겨 아픔을 참아가며 오르는데 영선조의 송산 선배님이 다리에 쥐가 나서 오르지 못하고 계셨다. 아스피린을 먹으면 효과가 있다고 말씀을 건네니 이미 드셨다며 천천히 오를테니 먼저 올라 가라 하신다. 다리 통증에 도움이 될까 하여 나도 친구에게 아스피린을 두 알 받아 먹고 윤지미산에 올라서서 긍적의 하나님에게 스프레이 파스를 얻어 뿌리고 산행을 계속 했는데 약이나 파스가 큰 도움은 되지 않은 느낌이다. 산행 끝 날 때 까지 통증을 가지고 산행에 임해야 했기 때문이다.
1차 백두대간 때는 무지개산 정상은 다녀 오지 않았었기에 다리가 아픈데도 불구하고 정상을 향했는데 조망도 없고 정상석도 없고 ㅎㅎ 3차 백두대간을 내가 할지는 몰라도 다음에는 경유하지 말아야 겠다. 무지개산 이후는 특별함이 없다. 신의터재에 도착하여 산행을 마치고 쏘맥으로 갈증을 풀고 버스에 올랐다.
※ 산행 사진
▲ 갈령
▲ 갈령 단체 사진 남기고..
▲ 갈령 삼거리 (백두대간 접속)
▲ 갈령 삼거리에 있는 표지판
▲ 충북 알프스 갈림길
▲ 못제 - 대간 마루금 상에 있는 유일한 고원 습지다. 이 습지는 후백제를 세운 견훤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못제의 맞은편에 솟은 대궐터산에 성을 쌓은 견훤이 이 곳 못제에서 목욕을 하여 힘을 얻어 세력을 넓혀 가자, 이를 알게 된 신라 장군 황충이 못에 소금 수백포를 풀어 견훤의 힘을 꺽었다는 것이다. 지렁이는 소금을 매우 싫어한다는 데 착안하여,「삼국유사」에 “견훤은 지렁이의 자식”이라는 데에서 유래된 것이 아닐까? 전설에서 눈에 띄는 것은 ‘지렁이’ 와 ‘소금 뿌리기’ 이다. 지렁이 이야기는 왠지 혐오감을 주고 있으며, 연못(습지)에 소금을 뿌렸다는 이야기는 유쾌하게 들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이런 불유쾌한 전설이 전해져 내려올까? 아마도 승자의 편에서 견훤을 폄하한 것은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 된다.
▲ 비재(영선조님들)
▲ 비재에 있는 백두대간 안내판
▲ 비재에 있는 철계단( 비재(320m - 이 고개는 나는 새의 형국이라 해서 飛鳥재라 했으나 최근에 와선 비재라 한다고 한다)
▲ 봉황산 정상은 길쭉한 공터로 이루어져 있고, 정상 표지석엔 '白頭大幹 鳳凰山 740.8m'라 적혀 있다. 그리고 삼각점(관기? 303, 1980 재설)이 있으나 워낙 오래된 것이어서 글자가 희미하여 제대로 읽을 수가 없다.1300여 년 전 이 산에 봉황새가 찾아들어 살았다는 전설이 전하여 봉황산이 됐다고 하는데, 산의 생김새가 정상을 봉황새의 머리라 하고, 양쪽으로 뻗은 봉우리들을 날개에 해당된다고 한다면 그런 대로 봉황 같다고 할 수 있어서 그런 전설이 배태된 것이라고 본다. 정상은 주변의 잡목을 제거하여 사방으로 시원하게 전망이 열려 있어서 북쪽으로 멀리 형제봉과 속리산 천황봉을 비롯한암릉들이 눈에 들어오고, 대궐터산의 암봉과 그 아래 극락정사가 가까이 보인다. 서쪽으로는 구병산(876.5m)이 보이며, 남쪽으로는 화서면 일대가 내려다 보인다고 했는데 날씨가 흐려 조망은 볼 수 없었다.
▲ 봉황산 정상에 있는 백두대간 안내판
▲ 산불 감시 초소
▲ 화령에 가려면 상곡리 백두대간 등산로에서 내려서 좌측 방향으로 25번 국도를 약 5분간 걸어야 한다.
▲ 화령-화령재는 삼국시대부터 고구려, 신라, 백제가 서로 차지하려는 국경지대였고, 김유신 장군이 삼국통일을 할 때에도 이 화령재에서부터 북상했다는 말이 전하고 있으며, 후삼국시대에도 견훤이 중요시했던 고개라고 한다. 그리고 6·25 때도 이 지역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었다고 하는데, 이런 배경을 가진 고개였기에 싸움이 잦아서 화령(火嶺), 곧 '불붙는 고개'라는 별칭이 있다. 이런 내력을 담고 있는 화령재는 현재 경북 상주시와 충북 보은을 잇는 25번 국도가 지나는 고갯마루이다. 정상엔 '화령재 해발 320m'라 새겨진 표석이 있고, 도로 왼편(북쪽)엔 상당히 넓은 주차장과 화령재 정자가 있다. 아래 사진 처럼 주차장 쪽에서 도로 건너 산행 들머리엔 '낙동강-금강 분수령' 안내판이 서 있다.
▲화령(化寧)재 - 원칙적으로 현재 화령(化寧)이란 행정지명은 없다. 그러나 이 지방 사람들은 화서면 일대를 화령이라 부르는 것이 일반화돼 있다고 한다. 그것은 예전에 그 일대의 화서면, 화동면, 화북면, 화남면을 합쳐서 화령현이라 했고, 그 화령현의 소재지가 지금의 화서면 소재지였기에 지금도 화서면을 화령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부근의 모동면과 모서면을 합쳐 옛날엔 중모현이라 했다. 그리하여 화령현 지역과 중모현 지역을 합쳐서 지금도 상주에서는 중화(中化)지구라 하여 충북에 인접한 특수지역으로 분류하고 있다. 49번 국도 상주 화북면과 괴산군, 그리고 문장대관광단지로 이어지는 길이고, 동서로 뻗은 25번 국도의 서쪽 방향은 화서면(화령;化寧), 청주, 보은 등지로 이어지며, 동쪽으로는 화령재와 상주, 선산으로 가는 길이다. 그 삼거리의 상곡1리 마을 표지석이 있는 곳에서 25번 국도를 따라 동쪽 상주, 선산 방향으로 300m 정도 완만한 고갯길을 올라가면 화령재이다. 이 지역은 해발 200∼300m의 고원지대로서 일교차가 심하고 일조량이 많아서 질 좋은 포도, 배, 사과 등의 과일을 많이 재배하고 있다
▲ 우리가 화령에 도착 하니 선두는 라면을 끓여 먹고 출발 하고 있었다.
▲ 청원-상주 고속도로
▲ 상주시에서 백두대간 등산로 곳곳에 안내판을 잘 설치 해 놓았다.
▲ 윤지미산은 해발은 낮아도 등산로가 가파라서 힘겹게 올랐다. 이곳에서 영선조 송산 선배님은 쥐가 나서 고생을 하셨고, 나는 왼쪽 무릎 관절이 아파 힘들게 올라섰다. 윤지미산 설명은 "상주 시청에 문의 해도 알수 없다"는 선답자들의 글을 보았는데 인터넷을 뒤져봐도 알수 없었는데 어느 대간 꾼의 글을 보니 윤지미산의 정확한 시기와 유래는 알수 없으나 언제 부터인가 윤지미산으로 불려지게 되었으며, 일부 설에 의하면 윤집걸중(允執乞中)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말로써 "인생전반을 다 안다, 세상을 포용한다, 세상을 두루 알아 맞힌다"라는 의미를 가진 산]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 무지개산 갈림길
▲ 무지개산 (1차 백두대간 때는 가 보지 못해서 정상에 들렸다. 표지판이 삐딱하게 매달려 있어 카메라를 삐딱하게 ㅎ)
▲무지개산 - 산 근처에 무지개 폭포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상주 시청) 조망도 없고, 표지판은 삐딱하고 ㅎ
▲ 신의터재(280m) - 신의터재는 상주시 화동면과 내서면을 잇는 2차선 도로이고, 작은 공원으로 꾸며진 곳에 커다란 표석 전면엔 '신의터재 해발 280m'라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임란 이전에는 신은현(新恩峴)이라 불렀고, 임란 때 의사 김준신(金俊臣)이 이 재에서 의병을 모아 최초의 의병장으로 상주진에서 많은 왜병을 도륙하고 임진 四월 二五일 장령하게 순절한 사실이 있은 후부터 '신의터재'라 불리었으나 일제 때 민족정기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어산재'라 불리게 되었고, 문민정부 수립 후 광복 五拾주년을 맞이하여 민족정기를 되찾고 후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 교육의 장으로 삼고자 옛 이름인 '신의터재'로 다시 고치다"라고 새겨져 있다. 그리고 한쪽에 '義士 節谷 金俊臣 遺蹟碑'가 세워져 있고, 쉬었다가 갈 수 있는 나무의자가 설치되어 있다. (산행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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