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두대간 2차 22구간 [대전 산사모 백두대간 3차 남진 산행 제 21회째 ]
버리미기재→장성봉→은치재→주치봉→구왕봉→지름티재→은티마을
◇ 산행지 : 충북 괴산군 연풍면, 칠성면. 문경시 가은읍 일원
◇ 산행일자 : 2012. 1. 7 (토). 날씨 : 맑음 (바람이 없어 1월 날씨 치곤 따뜻 했음)
◇ 참가인원 : 대전시 산사모 회원 41명
◇ 산행친구 : 기대
◇ 산행거리 : 12.23 Km (접속구간 2.9Km 제외)
<22 구간> 지름티재→2.75→은치재→2.16→악희봉→5.35→장성봉→1.97→버리미기재
◇ 산행시간 : 산행시간 7시간 5분<점심 15분 포함>◇ 시간대별 요약
- 06:35 대전 IC 출발
- 08:13 버리미기재 도착
- 08:15 버리미기재 산행 시작
- 09:15 장성봉 (시산제 10분)
- 11:07 점심 (15분 )
- 11:46 악휘봉 갈림길(왕복 20 분 소요)
- 11:51 선바위
- 11:56 악휘봉
- 12:55 은티재
- 13:13 주치봉
- 13:21 호리골재
- 14:10 구왕봉
- 14:39 지름티재
- 15:20 은티마을 산행마침
- 17:10 은티마을 출발
- 18:45 대전 IC 도착
※ 특기사항
① 동절기 감안 짧은 코스 선택 산행으로 소백산 구간 건너 뜀
② 장성봉 출입금지로 인해 역 산행(南進 산행) 실시
③ 막장봉, 악희봉 대간 길에서 벗어나 있음 (막장봉 못 다녀옴)
④ 2003년 10월 이후 900번 째 산행
⑤ 산행 후 은티마을 뒤풀이(오리훈제),라면
※ 산행 지도및 고도표
※ 산행 후기
2003년 10월 산행을 시작 한 이후로 900번째 산행을 하는 뜻 깊은 날이지만 특별함을 느끼지 못하고 어느 사이 산행에 대해 무디어져 있다. 단지 새해 들어 대전을 벗어나기 위해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첫 산행이라는 것 외에 큰 의미를 찾지 못했으니 산행에 대해 이제는 초월해 있는 건지, 아님 일과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모호하다.
이번 산행은 혹서기 임을 감안하여 산악회 측에서 소백산 구간을 잠시 보류하고 짧은 산행 코스를 택했다. 짧다고 해야 7시간이 넘을 산행 시간이라고 보면 결코 짧은 산행은 아니지만 어찌됐건 새벽 1~3시 출발하던 다른 때와는 달리 아침 6시에 출발하고 산행시간도 다른 때에 비해 확연히 짧으니 마음은 다소 편안함을 가지고 산행 준비를 할 수 있었다.
겨울철 산행을 하며 최대의 고충 중 하나인 식사 준비는 “산악회에서 제공하는 김밥 한 줄과 기대 친구가 컵라면을 준비 한다”고 했기에 나는 간단한 요기 거리로 곶감과 두유를 준비했다. 아침은 혜성옥에서 설렁탕으로 해결하고 이번엔 한전 앞에서 승차 했는데 대전 IC원두막에 도착하여서는 출발하지 못하고 한동안 한 분을 기다려야 했다. 시청에서 잠시 화장실을 간 사이 버스는 출발 해 버렸고 택시를 타고 오시는 중이라 했다. 그사이 이번 산행에 대한 설명과 다음 구간에 산행설명 그리고 “장성봉에서 시산제를 한다”는 회장님의 설명이 있었고, 버스가 출발하자 나는 깊은 잠속으로 빠져 들었다. 무박 산행을 가며 깊은 잠을 자지 못했던 것과는 달리 혜성옥에서 먹은 설렁탕이 깊은 잠을 자게 한 것 같다.
버리미기재 도착 전 괴산의 소금강 입구에서 모두 내려 오랜만에 단체사진을 찍고 버리미기재에 도착했다. 버리미기재에는 국공파의 초소가 있는데 국공파의 단속으로 인해 대간꾼들이 대부분 버리미기재에서 산행 시작을 하지 못하고 재수리재에서 산행을 많이 했다는 산행기를 보았는데 다행이도 도착 시간이 8시 15분경으로 국공파는 아직 출근 전인가 보다. 여유 있게 울타리를 통과하여 장성봉으로 향했는데 산행기점과 장성봉의 고도차가 있어도 역시 초반이 어렵다. 힘겹게 1시간 만에 장성봉에 올라서니 이미 영선조는 시산제를 지내고 단체 사진을 찍고 있었다. 한해의 무탈 산행을 기원하며 얼른 세 번 절하고 음복을 하고 막장봉을 향해 출발 했다. 백두대간 길에서 약 500여m 벗어나 있는 막장봉 갈림길에서 막장봉을 다녀오려고 했는데 아무도 막장봉에 간 흔적이 없어 막장봉은 지나쳤다. 이미 두 번이나 막장봉에 갔었기에 그냥 지나쳐갔는데 그래도 아쉬움은 조금 남아 있었다. 이후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이 계속되어 힘든 상황을 만들었다.
당뇨가 있는 나는 에너지를 섭취해야 산행에 어려움을 격지 않기에 점심은 다소 빠르게 11시를 넘어서면서 했다. 식사를 해서 인지 악휘봉 갈림길까지는 비교적 수월하게 갈 수 있었고, 악휘봉에 가서 인증을 한 후에는 더욱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은티고개에서 주치봉 오름이 이번 산행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웠지만 천천히 오르면 못 오를 산이 없듯 인내심을 가지고 조바심 치지 않았다. 호리골 고개에서 구왕봉 오름도 만만치 않았는데 두유와 곶감으로 요기를 해선지 비교적 수월하게 올라설 수 있었다.
1차 대간 때에는 없었던 구왕봉 표석에서 인증을 하고 지름티재로 향하면서 밧줄이 있는 외길에서 모산악회에 부딪혔다. “우린 둘 뿐이니 길을 양보해 달라”고 요구하자 “앞서 간 우린 팀들에게 그동안 양보 많이 해 줬다”면서 막무가내 식으로 올라온다. 산행 예절이 어느 쪽이 맞는지는 모르지만 암튼 우리 둘은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조금은 난 구간인 구왕봉 내림 길을 무사히 지나오며 지름티재에 도착하니 감회가 새롭다. 봉암사 스님들이 막아서 희양산을 오르지 못했던 기억이 떠올랐는데 지금은 개방을 하고 있는지 희양산 안내 이정목도 잘 설치되어 있고, 울타리 안에 비닐하우스를 지어 놓고 산문 입구를 지키는 느낌이었다.
지름티재를 벗어나 은티마을로 가는 도중에 스님 네 분을 만났는데 스님들 모습을 담으려니 사진 찍지 말아달라고 한다. 은티마을에서 필요한 물품을 구입해서 이곳을 통해 봉암사로 들어가는 모양인데 암튼, 스님들 말로 산문은 이곳뿐이란다. 은티마을 주차장에 도착하니 태련씨가 오리훈제를 굽느라 바쁘다. 땀 흘려 추워진 옷을 갈아입고 술 한 잔 하고서는 기대와 돈민이와 함께 뒤에 오는 사람들을 위해 라면을 끓였다. 매번 산악회를 위해 애쓰고 봉사하는 여러 사람들에게 감사함을 표하며 특히 “항상 선두에서 바닥지를 놓고 내려와서는 솔선수범하는 태련씨에게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 산행 전 사전 조사
<봉암사 [鳳巖寺]>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이다.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희양산파(曦陽山派)의 종찰(宗刹)로 879년(헌강왕 5)에 지증대사인 지선(智詵)이 창건했다. 935년(태조 18)에 정진대사 긍양(兢讓)이 중창하고, 1431년(세종 13)에는 기화(己和)가 중수했다. 1674년(현종 15)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신화(信和)스님이 재건했다. 1915년 세욱(世旭)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현존 당우로는 극락전과 요사채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聞慶鳳巖寺智證大師塔:보물 제137호)·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국보 제315호)·문경 봉암사 3층석탑(보물 제169호)·문경 봉암사 정진대사탑(聞慶鳳巖寺靜眞大師塔:보물 제171호)·문경 봉암사 정진대사탑비(보물 제172호) 등이 있으며 이 절의 서북쪽 계곡에 있는 거대한 암벽에는 높이 600cm의 봉암사마애보살좌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1호)이 새겨져 있다. (출처:다음 백과 사전)
중국의 선승 달마, 혜능 대사에 의해 창시된 선종(禪宗)은 도당(渡唐) 유학승들에 의해 신라로 들어와 한국 선불교의 기초가 됐다. 신라 고승 지증 대사는 문경을 둘러보고 산세와 지리에 반해 봉암사를 세웠다. 이후 희양산은 우리나라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종찰로 우뚝 섰다. 봉암사는 한국 불교의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킨 곳. 일제강점기 한국 불교는 왜색화로 급속히 타락의 길로 들어선다. 난맥에 빠진 한국 불교를 바로 세우기 위해 성철, 청암, 자운 등 50여 스님은 희양산에 모여 이른바 ‘봉암사 결사’를 결행했다. 한국 불교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지만 구호는 간결했다. ‘오직 부처님 법대로’. (출처:한국지방신문협회 매일신문 한상갑 기자)
< 은티마을의 남근석과 남근석에 얽힌 유래>
마을 입구에는 은티마을 유래비가 서 있고, 시내버스 종점의 작은 공터 느티나무 아래에는 조그마한 남근석이 새끼줄로 금줄을 두른 채 세워져 있는데, 은티마을은 희양산 계곡과 악희봉 계곡에서 흘러 내려오는 개울이 만나는 합곡점에 위치하고 있어서, 마치 Y자 가운데 여궁혈 자리에 위치해 있는 형국이라고 한다. 그래서 큰비가 오면 물난리가 자주 일어난다고 믿고 있으므로 음기를 누를 목적으로 남근석을 세워놓고, 매년 정월 초이튿날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그 형세가 마치 여성의 성기와 같은 여근곡(女根谷)이다. 이를 여궁혈(女宮穴)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쌘 음기를 막기 위한 풍수의 하나로 남근석과 전나무 등을 심어 놓았다한다. 마을 유래비가 이 마을의 역사를 잘 말해주는 듯하다.
※ 산행 사진
▲ 쌍곡구곡 입구의 소금강 표석
쌍곡구곡: 괴산에서 연풍방향으로 12㎞지점의 칠성면 쌍곡마을로부터 제수리재에 이르기까지 10.5㎞의 구간에 호롱소, 소금강, 병암(떡바위), 문수암, 쌍벽, 용소, 쌍곡폭포, 선녀탕, 장암(마당바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천연의 수려한 자연경관을 보전하고 있는 쌍곡구곡은 산수가 아름다워 조선시대 퇴계 이황, 송강 정철 등 당시 수많은 유학자와 문인들이 쌍곡의 산수경치를 사랑하여 이곳에서 소요하였다고 한다. 수많은 전설과 함께 주위에는 보배산, 칠보산, 군자산,비학산의 웅장한 산세에 둘러 싸여 있고, 계곡을 흐르는 맑은 물이 기암절벽과 노송, 울창한 숲과 함께 조화를 이룬다. 특히 한 폭의 동양화 같은 칠보산과 충북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군자산은 등산객들에게 인기가 많다.
▲ 단체사진(광명님 사진에서 발췌)
▲ 버리미기재 (장성봉 까지는 출입금지 구간으로 국공 초소도 있다) 버리미기 유래는 보리먹이가 변형된 말로 '보리로 밥을 지어 먹는다'는 의미인데, 다른 말로는 '빌어 먹이다'의 경상도 방언에서 유래된 지명이란다.
▲ 버리미기재
▲ 장성봉 오르며 뒤 돌아본 희양산
▲ 119솔라등은 야간에 자동 발광해 조난자가 원거리에서도 불빛을 확인할 수 있어 구조에 많은 도움을 준다고 한다.
▲ 장성봉에 설치된 이정목에는 버리미기재 까지 탐방로가 아님을 강조 하고 있다. 하지만 왜 비탐방로인지 선뜻 이해가 안된다.
▲ 영선조는 이미 시산제를 마치고 출발 준비를 하고 있다.
▲ 장성봉(長城峰, 915m)은 마치 거대한 만리장성의 일부를 보는 듯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정상에는 아담한 규모의 돌에 해서체의 한자로 白頭大干 長城峰(백두대간 장성봉)이라고 쓴 표석이 놓여 있다.
▲ 막장봉(幕場峰, 868m):충북 괴산군 칠성면과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살구나무골에서 갈라진 시묘골이 협곡을 이루어 광산의 갱도처럼 생겨 그 마지막에 있는 봉우리라 하여 막장봉으로 불리어집니다(자료: 괴산군)
▲ 점심은 컵라면과 김밥으로
▲ 악휘봉 갈림길(왕복 20분 소요)
▲ 선바위: 소나무와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마치 어떤 전설을 지닌 듯 기이한 모습이다. 악희봉 아래에 입석마을이 있는데, 바로 이 선바위와 치마바위, 호랑바위 등이 '입석마을'이란 이름을 낳게 하였다.
▲ 악희봉(樂熹峰) : 예전에는 대부분 악희봉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정상석이 두 개인데, 예전 것에는 '악희봉'으로, 새로 세운 정상석은 아래 사진 처럼 '악휘봉'으로 기록되어 있다.
▲ 은티재 가는 길에 위험 구간에는 이렇게 철계단이 놓여 있다.
▲ 좌로 부터 구왕봉, 가운데는 주치봉
▲ 은티재: 일명 오봉정재 (지도에는 은치재로도 나오는데 은티마을이 아래 있으니 은티재가 맞는 것 같다)
▲ 은티재에 있는 봉암사 출입금지 안내판(낡아서 꼴불견이다)
▲ 주치봉에는 아무런 표식이 없다.
▲ 주치봉에서 내려서면 호리골재로 판단되는 임도에 출입을 금하는 안내판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약 3분 오르면 아래 사진처럼 안내 이정표가 있는곳이 호리골재라 한다. 아마도 봉암사로 출입이 어려운 아래 사진이 있는 곳을 호리골재로 하고 싶릉 모양이다.
▲ 호리골재(지도에는 묘가 있는 이곳을 호리골재로 표기 되어 있다)
▲ 구왕봉(898m) 유래: 고찰 봉암사를 빼놓고는 구왕봉도 희양산도 설명이 되질 않는다.봉암사 창건설화에 기인하는데 지증대사가 심충이란 자의 조언으로 지금의 봉암사터를 잡았다. 당시 그 터에 큰 못이 있었다. 그 연못에 살고 있던 아홉 마리 용을 지증대사가 신통력을 발휘해서 내쫓았는데 쫓겨난 용들이 멀리 가지 않고 봉암사와 희양산이 잘 내려다보이는 봉우리에 자리를 잡고서 지증대사를 향해 그 연못에 살게 해 달라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그 봉우리가 바로 구왕봉이다 (2011년3월19일 정운산악회에서 설치 해 놓은 정상석)
▲
구왕봉에서 바라 본 희양산
희양산: 지형보다 불교사적인 면에서 더 가치를 발한다. 해방 이후 한국 불교는 600년 동안 이어온 조선왕조의 억불(抑佛)정책의 족쇄와 일제의 ‘사찰령’으로 대표 되는 종교말살 정책의 폐단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1947년 ‘봉암사 결사’는 한국 불교의 혁신 운동이었다. 스님들은 제일 먼저 왜풍을 일소하고 수도 도량으로 거듭날 것을 결의했다. 불법에 어긋나는 불공과 천도재를 없애고 화려했던 가사(袈裟)도 괴색으로 바뀌었다. 일일부작 일일부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의 정신을 생활화 한 것도 이때부터다. 수행자들이 노동에 지쳐 선방에서 졸기하도 할라치면 ‘밥값 내놔라 이 도둑놈들아’ 하는 성철 스님의 고함소리가 산을 쩌렁쩌렁 울렸다고 한다. 1982년부터 수도에만 정진할 수 있도록 사찰은 물론 일대 임야까지 일반인의 출입을 막았다. ‘금단의 사원’ 전통의 시작이었다. 매년 석가탄신일엔 산문을 열었으나 그것도 경내로 방문이 제한됐다. 현재 문경 쪽에서 오르는 등산로는 대부분 막혀 있고 주등산로는 충북 괴산군 쪽에 집중돼 있다. 희양산을 찾는 등산객들은 일반 등산객들과 백두대간 종주팀 두 부류다. 종주팀들은 버리미기재-은티재-배너미평전 코스를 주로 타고 일반 등산객들은 은티마을-지름티재-구왕봉-희양산으로 올라 희양산성-은티마을로 돌아오는 원점회귀코스를 주로 이용한다. (출처:한국지방신문협회 매일신문 한상갑 기자)
▲ 구왕봉에서 지름티재 가는 길은 위험 구간이다.
▲ 지름티재에 있는 산불 감시 초소
▲ 지름티재에 대한 유래: (1) 연풍과 가은을 넘나드는 최단거리 지름길이라 붙혀진 이름이다. (2) 희양산과 구왕봉으로 오르는 길이 지름(기름)처럼 미끄럽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신빙성은 없다.
▲ 지름티재에 있는 출입금지 안내문
▲ 지름티재에 있는 이정목과 거리가 다르게 표시 되어 있다. 약 50분 소요 된 것을 보면 은티마을 까지는 3km가 맞는 것 같다.
▲ 은티마을엔 여러 번 왔었는데 주막집이 새로 지어 진 것 같다.
▲ 은티마을 유래비
▲ 은티마을 주차장 산행 마침
▲ 은티마을 주차장에서 뒤풀이(산산애님 사진에서 발췌)
▲ 돈민이 라면 끓이느라 수고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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