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백두대간2차(完走)

23구간. 버리미기재→블란치재→대야산→밀재→고모치→조항산→갓바위재→청화산→늘재

□ 백두대간 2차 23구간 [대간 산행 39회째 ]

버리미기재→곰넘이봉→블란치재→대야산→밀재→고모치→조항산→갓바위재→청화산→늘재

◇ 산행지 : 충북 괴산군 청천면. 문경시 능암면 일원

◇ 산행일자 : 2012. 10. 2(화) 날씨 : 맑음

◇ 참가인원 : 3명

◇ 산행친구 : 박성범님. 청우자님

◇ 산행거리 : 약17.49km(포항 셀파산악회 실측거리 기준)

<23구간> 버리미기재→4.55→대야산→1.25→밀재→4.35→조항산→1.15→갓바위재→3.7→청화산→2.49→늘재

◇ 산행시간 : 8시간 40분 소요 예상, 산행시간 10시간 16분 <알바 1시간 05분, 중식 15분 포함>

◇ 시간대별 요약

- 04:30 반석역

- 04:56 대전 IC 출발

- 06:07 증평 아침식사 후 출발

- 07:00 괴산 소금강

- 07:27 버리미기재 도착 산행 시작

- 07:45 입석 바위

- 08:05 곰넘이봉

- 08:21 미륵 바위

- 08:28 헬기장

- 08:33 블란치재

- 08:53 촛대봉

- 09:07 촛대재

- 09:51 직벽 구간(로프 많은 구간) 올라 섬

- 10:01 대야산(상대봉)

- 10:22 대문 바위

- 10:27 능선 갈림길(알바 1시간 5분)

- 11:43 밀재

- 11:50 점심(15분)

- 13:02 통시 바위 갈림길

- 13:21 고모치(약 10분 휴식)

- 14:16 조항산

- 14:56 갓바위재

- 16:47 청화산

- 17:24 정국 소원단

- 17:43 늘재 산행 마침

- 18:11 알탕 후 출발

- 19:20 대전 IC 도착

특기사항

① 보충 구간으로 개별 산행 (이정표 없어 산행 어려움)

② 대야산 능선 갈림길(용추 폭포, 밀재 갈림길)에서 1시간 5분 알바

③ 바람 없고 고도차 심해 산행 어려움

④ 고모샘 수량 풍부

⑤ 대전 도착 후 늘봄 숯불 갈비에서 삼겹살 뒤풀이

산행 전 사전 조사

<궁기리, 宮基里>궁기리의 속명은 '옛터골' 이라 불리어지고 있으며 경북과 충북을 경계로한 험준한 조항산 중턱에 있는 조그마한 마을이다. 후삼국 시대에 견훤이 많은 군사를 모집하여 훈련한 곳으로서 견훤가의 본궁이 있었다 하여 궁기(弓基)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졌는데, 상부에 위치하였다고 상궁 중간에 위치하였다고 중궁, 아래에 위치하였다고 하궁이라 한다. 이곳의 주민은 대개 임진왜란때 난을 피하여 들어와 살았다고 전한다.

산행지도및 고도표

산행 후기

지난 5월 26일 산사모 산행에 참석 하지 못했었는데 달력을 놓고 그 원인을 찾아 봐도 도대체 생각이 나지 않는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 이상 대간 산행에 불참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데 무슨 일이 있었나 보다 그렇게 막연히 생각하다가 산사모 카페에 들어가 보니 친구들과의 바다 낚시 때문에 산행에 참석 하지 못한다는 댓글이 달려 있는 것을 보고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산사모에서 그날 빠진 분들 중에서 같이 보충 산행을 하려고 물색(?)을 해 보니 광명님과 천안의 박성범 선배님 그리고 청우자님이 참석치 않음을 확인 하고 9월 셋째 주에 산행을 하기로 했는데 10월 셋째 주로 미뤄져서 9월22일 산행을 마치고 날짜를 재조정 하는 과정에서 추석 연휴인 10월 2일에 산행을 하기로 하고 시간과 장소를 정하게 되었다. 광명님은 근무라 참석하지 못하고 청우자님은 버리미기재에서 밀재까지만 산행을 해도 되는 까닭에 차는 청우자님 차로 움직이기로 하고 대전 IC에서 5시에 만나 가기로 했다. 아침 식사는 가면서 하기로 했고, 청우자님이 엑스포 아파트에 살아서 반석역에서 택시를 타면 비용이 많이 나오니 반석역으로 와주신다는 고마운 말씀을 듣고 4시 30분 까지 반석역에서 만나기로 최종 약속을 잡았다.

산행 전 날 "산행 일정에 대해 차질은 없는지" 여부를 두 분에게 확인하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산에만 가려면 잠이 오지 않는다. 대간 가기 전날엔 무슨 일이 있어도 음주를 하지 않는데 대전에 사시는 매형과 조카사위가 집에 와서 식사를 하다 보니 소주 세 잔과 맥주 한 캔을 마셨는데도 잠이 오지 않아 뒤치다꺼리다 잠이 들었는데 알람이 울린다. 서둘러 샤워를 하고 반석역으로 가서 청우자님을 기다리고 있는데 전화가 온다. 1번 출구에 계시다고 해서 얼른 전화를 끊고 대전 IC로 가니 박 선배님은 택시를 타고 오시는 중이란다. 대전IC를 벗어나 식사 할 장소를 의논 했는데 괴산읍 보다는 증평에서 식사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증평 읍내를 들어가 찾아보니 올갱이 국밥집이 있어 그곳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산행 초입인 버리기미재로 향했다.

버리기미재에 도착 주차를 하고 산행을 시작했다. 이번이 세 번째 인데도 불구하고 5년 전에 와보고 안 와봐선지 등산로가 익숙지 않다. 첫 오름으로 헬기장에 도착 후 밧줄 구간으로 이어진다. 곰넘이봉에서 인증을 하고 블란치재로 가는 길은 또 내리막이다. 내리막이 있으면 또 오르막이듯 촛대봉에 오르려니 또 벅차다. 촛대봉에서 인증을 한 후 다시 출발 했는데 박 선배님이 워낙 잘 걸으셔서 앞서 나가고 청우자님이 뒤따라가시는데 나만 뒤쳐져서 헉헉댄다. 청우자님께 우스갯소리로 박선배님 혼자 가시니 나도 밀재로 내려간다고 뻥을 한 번 쳐 보아야겠다고 했는데... 암튼 나만 뒤쳐져서 산행을 계속해야 했다. 대야산 오름 바로 직전 만나는 직벽에 가까운 구간에서 있는 힘을 쏟아 내듯 힘겹게 올라서니 이제 밀재로 내려가는 길은 수월할 것으로 예상되어 대야산 정상에서 인증 샷을 하고 과일을 먹은 후 출발 하였다. 한 달 전에 밀재에서 대야산을 왔었기에 내림 길은 익숙한데 능선 갈림길에서 중대봉 쪽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고 아무 생각 없이 두 분을 따라 내려가다 보니 느낌이 이상하다. 맞게 가는 건지 한참을 생각해 봐도 이상한데 청우자님이 길을 잘못 들었으니 우측으로 가자고 한다. 맞는 것 같아서 우측으로 진행하다 등산로를 못 찾고 되돌아 왔는데 올라오는 등산객에게 물어보니 잘못됨을 알고 능선갈림길로 되돌아올라 가기로 했다. 알바하면 언제나 그렇지만 너무 힘이 든다. 너무 힘이 들어 나 혼자 그냥 내려가서 우측으로 갈까 고민하다 그냥 두 분을 따라 가기로 청우자님이나 나는 두 번째이니 큰 의미를 안 가져도 되지만 박 선배님은 처음이니 제대로 가야 할 것 같았는데 암튼 너무 힘들게 능선갈림길에 올라섰다. 능선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다시 진행 밀재에 도착하여 청우자님과 헤어진 후 다시 시작한 첫 오름에서 점심을 한 후 박 선배님은 또 앞서간다. 할미통시바위 갈림길을 지나 고모치에 도착하여 고모샘에 갈 기력도 없었지만 1분 거리의 거리를 안다녀오면 나중에 후회 할 까봐 다녀왔는데 물은 엄청 시원했다. 이후 조항산에 열심히 갔는데도 불구하고 박 선배님은 보이지 않아 인증 샷은 포기하고 등산로를 찾는데 여러 차례 어려움을 격고 간신히(?)대간 길을 찾아 진행을 계속했는데 리본이 많지 않고 이정표가 없어 어려움이 많았다. 갓바위재를 지나면서는 우측 무릎이 아파 오면서 고전을 많이 했는데 청화산이 가까울 무렵 버섯이 있는 곳에서는 선배님께 "천천히 갈 테니 버섯 따시면서 오시라"고 하고 진행을 하니 내가 못 쫒아 감으로서 미안한 마음이 상쇠 되는 듯 했지만 어느 순간 버섯을 다 따고 뒤따라 붙어서 즐거움도 잠시 또다시 발걸음이 무겁다.

마지막 봉우리인 청화산에서 인증 샷을 한 후 늘재로 향했다. 내림 길이라 수월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우측 무릎이 아파 고전은 계속되었고 정국기원단을 지나 조금 더 진행을 하니 청우자님이 마중 나와 계신다. 늦어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조금 뒤따라가니 반가운 표석이 나온다. 그걸로 힘겨웠던 산행은 종료되었고 알탕 할 장소를 찾아가다 박 선배님이 사온 맥주는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대전으로 돌아오는 길에 적당한 장소에서 알탕을 하고 대전IC가 가까운 곳에서 삼겹살로 뒤풀이를 한 후 하루를 마감했다. 함께 산행 한 청우자님과 박 선배님에게 감사함을 전하면서...

산행 사

▲ 대전 IC 원두막

▲ 증평 아침 식사 한 곳 (올갱이 해장국이 맛있었다)

▲ 괴산 소금강

버리미기재 (장성봉 까지는 출입금지 구간으로 국공 초소도 있다) 버리미기 유래는 아홉 번 시집을 가서 낳은 자식들을 ‘벌어 먹이던’ 팔자 센 주막집 과부의 전설이 전해지듯, ‘버리미기(벌어먹이다의 사투리)’를 위해 넘나들던 삶의 고개들이다.대야산 북쪽으로 영남대로가 통과하는 문경새재가 양반들의 길이었다면 대야산 주변의 고개는 그야말로 민중의 고개다.한편, 문허비고와 산경표에 의하면 희양산과 대야산 사이에 주현(周峴)이라는 고개가 있는데, 이를 우리말로 보면 주의(周衣)를 '두루마기' 라고 한다. 이를 미루어 보면 주현을 두루미기 고개라고 하겠는데 이 '두루미기' 가 변음되어 '버리미기'로 변한 것이라 생각된다. 또 다른 속설은 보리 먹이로서 버리(보리)와 미기(먹이)의 합성어라는 설과, 벌어 먹이다의 경상도 사투리에서 비롯한 지명 이라는 설이 있다.산행시작)

버리미기재는 현재 태풍으로 유실된 곳을 공사 중이다.

버리미기재에서 산행 시작 후 만나는 첫 봉우리에 있는 헬기장

버리미기재에서 산행 시작 후 만나는 첫 밧줄 구간

1차 때는 지나쳐 버린 곰넘이봉에 올랐다. 천안의 박 선배님은 모르고 그냥 지나쳐 갔다.

미륵바위와 대야산(1차 때는 밧줄이 걸려 있어 올라 갔는데 밧줄이 없어 올라가지 않았다)

미륵바위에서 바라 본 대야산

미륵바위 옆에서 바라 본 모습(운무가 저수지 같다)

블란치재: 불란치재는 '불한령(弗寒嶺)' '불한재'로 부르다가 변음되어 '불란티재'로 부르게 된 것으로 여겨지며, 대간을 경계로 해 남쪽은 내선유동이라 하고, 북쪽은 외선유동이라 한다.이곳은 양쪽의 산이 깊게 패인 골짜기로과거 몇 백년동안 사람들이 많이 다녀서 이같이 깊게 패인 모양인데 이제는 폐로로 변했다.

촛대봉 오름 전 우회 길이 있으나 우회 하지 않고 진행 했다.

촛대재

대야산 직벽에 있는 밧줄

대야산 (大耶山)은 대야산과 대치산 대하산 대산 상대산 등으로 불리던 대야산은 조선후기부터 神仙이 내려와 노릴던 산이라 하여 "仙遊山" 이라 불리게 된다. 大耶山의 유래에 대해 정확한 기록이 없다. 이름의 ‘야’자 또한 옛 문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던 것을 1789년 발행한 문경현지의 기록을 바탕으로 ‘야(耶)’자로 쓰고 있다. 어조사 ‘야’는 아버지를 부르는 글자이기도 하다. 기독교의 예수를 ‘야소(耶蘇)’라고 표기할 때 쓰는 글자와도 같다. 대야산 동쪽 문경 선유동의 물은 희양산에서 발원한 가은천과 합쳐져 영강으로 해서 낙동강으로 가고, 서쪽 괴산의 물은 한강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문경 사람들은 대야산에서 ‘서쪽으로 오줌을 누면 서울사람, 동쪽은 부산사람 입으로 들어간다’며 이 고장의 산을 아끼는 마음을 둘러 표현하기도 한다.

대야산 중대봉 방향

대문 바위

이곳에서 알바 주의(바로 내려 가면 용추계곡으로 간다. 우측으로 돌아서 내려 가야 됨)

밀재:오른쪽[서쪽]으로는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 쪽으로, 왼쪽[동쪽]으로 가면 다래골. 용추골을 거쳐 벌바위를 거쳐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를 거쳐 버리미기재에서 내려오는 길과 이어진다.

밀재에서 청우자님은 내려 가시고 이후는 박 선배님과 둘이 산행

마귀할미통시바위 갈림길(이정표는 없다. 이곳도 알바 주의 구간)

<마귀할멈통시 바위의 전설>마귀할멈통시 바위와 손녀마귀통시 바위가 있는 둔덕산[屯德山]은 높이 969m의 백두대간의 대야산(931m)과 조항산(951m) 사이에 동쪽으로 솟아 있는 암벽, 능선이 아름답고 수림이 울창한 산이다. '통시'라는 말은 경상도 사투리로 "변소" 즉 화장실을 뜻함이다. 우리나라 전래 설화에 의하면 거인이 용변을 보면 그 물은 홍수를 일으키고 또한 강을 만든다.(대야산과 조항산이 대 홍수로 물에 잠겼을때,여기서 대 홍수는 거인의 용변?? 대야를 엎어논 형상이고,조항산도 물에 잠궜을때 새의 머리와 부리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마귀할미의 2세대 후손인 손녀는 밀재로 내려가면 만나는 용추계곡의 깊고 푸른 물에 일조한 대골 계곡을 만들었을까??대야산에서 용추계곡으로 하산하는 길목에 자리한 '떡바위'에 대한 전설이 있는데 그 떡바위는 다름 아닌 이곳 통시바위에서 떨어져 나간 똥이 바위로 변한 것이라 한다. 경상남도 밀양 어느 마을에도 통시바위와 관련된 설화가 전해 온다.내용인 즉슨 산을 지고 다니는 마귀할멈이 통시바위에 걸터 앉아 오줌을 누니 산이 무너져 동네가 생겼다는 얘기다.더구나 똥이 떨어져 나간 데는 궂다하여 궂질이라는 동네가 생겼다 한다.

마귀할미통시바위 가는 능선(둔덕산 가는 길)

고모치(고모재)와 고모(姑母)샘: 궁기 뒷편 골짜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문경에서 충북을 연결 짓는 12㎞의 험준한 준령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고모와 부모 없는 질녀가 오두막에서 가난하게 생활하였다 한다. 질녀가 우연히 병사하자, 고모는 슬픔을 못 이겨 식음을 전폐하고 험준한 준령 상봉에 올라가 질녀의 이름을 부르며 수일을 지내다 고모도 그 자리에서 죽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이 애처로운 넋을 달래기 위하여 고모치' 라 이름 지었다 한다. 고모령에서 10미터 지점에는 석간수로써 어린 조카를 잃은 한이 서려있는 고모샘이 있다. 오른쪽 내리막은 의상저수지를 거쳐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와 경북 상주시 화북면 의상골. 큰말로 갈 수 있고, 큰말에서는 남쪽으로 늘재로 가는 길에 닿고, 입석리에서 북쪽으로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로 갈 수 있다.

고모(姑母)샘은 석간수로 물맛이 좋았으며 수량이 풍부 했는데 누군가가 이곳을 찾는 산객을 위해 나뭇잎으로 물을 잘 받을 수 있게 배려한 흔적이 있었다. 내려 가는데는 1분도 소요되지 않았다.

조항산(鳥項山 정상, 951m)조항산은 천재지변으로 일어난 홍수때 물에 떠 있는 정상부가 새 머리를 닮았다하여 "鳥項山"이라 한다. 마귀할멈통시바위에서 조항산을 보면 갓바위봉은 새의 부리로 보이며 조항산 정상부는 새의 머리로 보인다고 한다. 조항산 높이를 두고 여러 표기가 있어 헷갈리는데, 푯돌에는 951m, 「실전 백두대간 종주 산행」(조선일보 펴냄) 지도에는 961.2m로, 같은 책 기사에는 951m로, 「백두대간 & 정맥 GPS 종주 지도집」(산악문화 펴냄)에는 951.2m로, 「지도첩 백두대간 24」(고산자의 후예들 펴냄)에는 953.6m로, 「한국 400산행기」(김형수, 깊은솔 펴냄)에는 953.6m로 각각 다르게 표기해 놓았다.

조항산에서는 멀리 희양산이 조망 되는데 골재 췌치를 위해 산림을 훼손한 흔적도 보인다.

▲ 뒤 돌아 본 조항산

▲ 갓바위재: 지도에서 보면 조항산 갓바위와는 연관이 없없다.는 것 같아 보이는데 왜 갓바위재라 했는지 알 수 없다.

▲ 조항산

▲ 의상 저수지

▲ 시루봉 갈림길

※ 우복동천: 국어사전을 보면 "동천"(洞天)이란 <산과 내가 둘려 있어 경치가 좋은 곳>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상주시 화북면에는 우복동천, 용화동천, 입석동천, 서재동천 등 네 곳의 동천이 있다. 이 또한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동천"을 갖고 있는 상주시 화북면이다. 우복(牛腹)동천이란 소의 배처럼 편안한 곳으로 전란, 기아, 천재지변이 범할 수 없는 유토피아의 땅을 의미하는데 바로 화북마을 일컫는다 한다. 그래서 "우복동천"은 길지(吉地), 복지(福地)의 대명사로 쓰이기도 한다. 화북마을(현 면사무소 소재지)을 중심으로 <도장산>, <속리산>, <청화산>을 연결하는 "환상회귀종주"(環狀回歸縱走) 코스를 개발하고, 이름하여 환상회귀 <우복동천 명품등산로>라 명명하였다. 용유계곡(쌍룡계곡)을 출발한 능선종주 산행은 화북마을 동쪽 도장산을 넘어, 갈령(葛嶺)에서 형제봉으로 건너간다. 이어서 백두대간 마루금인 화북마을 서쪽 속리산 주능선을 종주한 다음에, 늘재를 건너 화북마을 북쪽 청화산을 넘고 시루봉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면 출발지점인 쌍룡계곡에 원점회귀 한다. 말하자면 화북마을 즉 "우복동천"을 중심에 두고 도장, 속리, 청화 3산 주능선을 환상회귀 종주하는 것이다. 총 종주 코스의 길이는 37.8km로 18시간 정도가 소요되는 국내 최장의 아름다운 등산코스로 상주시는 이 등산로를 우복동천 명품 등산로로 명명 했다.하지만 만만치 않은 등산코스다. 물론 등산하는 사람들은 각자의 시간에 맞게 구간을 나누어 출발지와 도착지를 자유롭게 선택하면 된다.

▲ 청화산(靑華山 정상, 970m)靑華山은 10리 밖 어디에서 바라보아도 항상 푸르고 화려하게 빛나고 있다 하여 청화산으로 이름 하였다 하는데 청화산은 동국여지승람 문경조와 유형원의 동국여지지 문경조에 의하면 17세기까지는 화산(華山)으로 불렸으나 이중환의 택리지 복거총론 산수조에 의하면 청화산이라 하였고 대동지지 문경조에 화산의 일명으로써 청화산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면 18세기부터 청화산으로 불려온 것으로 보인다. 마주보고 있는 속리산이 남성미를 자랑한다면청화산은 부드러운 여성미를 가진 산이다. 풍수지리에서는 소의 뱃속을 닮았다고하여 우복동이라하는 조선 제일의 명당터가 남쪽으로 한자락(화북면 용유리)을 차지하고 있어 더욱 빛을 발한다.

▲ 청화산에서 박성범 선배님

▲ 청화산에는 [↑늘재 2.6km] 길 안내판이 있고, 청화산 높이고 푯돌에는 970m, 그밖에 앞에서 인용한 바 있는 「백두대간&정맥 종주 지도집」(산악문화 펴냄). 「지도첩 백두대간 24」(고산자의 후예들 펴냄). 「실전 백두대간 종주산행」(조선일보 펴냄), 「한국400산행기」(김형수, 깊은솔 펴냄) 따위에는 984m로 표기해 놓았다. 늘재인재 눌재인지등 어느 것이 정확한지 지자체에서는 서둘러서 고쳐 놓아야 할 것 같다.

▲ 이곳에서 보는 속리산의 조망이 멋진데 아쉽게도 어둠이 내리는 시간이라 그런지 조망을 제대로 못했다.

정국소원단(靖國所願檀): 나라를 평안하게 해달라는 기원단과 의병장 이강년 장군 공덕비다. 이강년은 조선 말기 의병장으로 1880년 무과에 급제하여 용양위부사과로서 선전관이 되었으나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明成皇后) 민씨(閔氏)가 시해 되자 1896년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켜 안동관찰사 김석중(金奭中) 등 부정 관리를 효수(梟首)하고, 이어 제천(堤川)의 유인석(柳麟錫)과 합류, 유격장이 되어 문경새재 조령 등지에서 활약하였다.1907년 한·일신협약으로 조선군대가 해산 당하자 단양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충주(忠州)를 공격하였다. 어서 싸릿재[杻峙(유치)]·죽령(竹嶺) 등지에서 전과를 올리며 북진, 1908년 가평(加平)에서 승리한 뒤 적의 기습으로 부상 체포 되어 순국 했다.

▲ 청우자님이 마중 나오셨다.

白頭大幹 城隍堂 由來碑(백두대간 유래비)

백두대간의 정기 받은 성역 늘재에 당(堂)이 있으니 백두대간 성황당이다. 이 당은 원래 탑의 신앙과 산신 신앙을 혼성한 서낭신앙에서 유래하여 신라 고구려 때는 횡액 질병을 막고 길손의 무사 여행을 기원하는 소박한 민간 토속이었고 조선에 이르러 동제(洞祭)로 발전하여 오다가 잦은 국난을 당하면서 국태민안을 위해 성황신을 백신(白神)의 장으로 모시고 관민이 신봉하는 전통 신앙으로 승화되어 당(堂)도 지지(地誌)에 등재되어 왔다. 이러한 유서를 지닌 신당이므로 그 위치가 환경유역과 사실(史實)에 합당하다. 이를 개관하면서 이 늘재는 낙한(落漢) 양대 강의 분수령이다; 강의 원류 따라 개통된 도로는 동남으로 영호남 서북으로 충청도와 서울로 통하는 장정(長程)의 기점이며 고대에 라제(羅濟)의 국경으로 각축지대가 견훤산성이 축성되었고 근세에는 정기룡(鄭起龍) 장군의 임란전첩지가 용화동에 있으며 세조대왕께서 백관과 함께 노니신 문장대와 용화온천을 비롯하여 고승(高僧)과 명장(名將)이 수련한 유적이 있다. 특히, 한말 경술국치 후에 의사(義士)들이 창의하고 만세운동이 전개될 때 통로가 되고 쉼터이며 도창의 대강 이강년(李康秊) 선생의 묘소가 지척에 있다. 그리고 때맞추어 늘티에 전상석(全相錫) 처사가 우국일념으로 이 성황당을 창건하여 동민과 함께 지성 기도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백여 년이 지난 이래 그의 증손 충환(充渙)이 유지를 받들고 이상배(李相培) 국회의원과 김근수(金瑾洙) 상주시장이 산촌 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당(堂)을 중창하여 선인들의 애국심을 후세에 수범하고 후진의 교육장이 되게 하여 백두대간의 영기(靈氣)를 실감나게 하였다. 이에 그간의 유래와 성황당 중창의 경위를 약기하여 비를 세워 영원히 기념하는 바이다.

백두대간 큰 푯돌 뒷면에는 이런 글이 있다.

俗離山

白頭嫡脉走束陲(백두적맥주동수) 백두산 큰 산맥이 동으로 뻗어와서

兄是金剛弟俗離(영시금강제속리) 금강산 먼저 서고 속리산 뒤에 섰네

彌勒觀音寬世界(미륵관음관세계) 미륵관음 양봉높아 자비 세계 너그럽고

忠淸慶尙壯根基(충청경상장근기) 충청 경상도의 경계한산 장엄하도나

白南 金始鑌(백남 김시빈)

옆의 영동대학교에서 세운 푯돌에는 늘고개는 淸華山과 俗離山을 이어주는 咽喉之地요 慶尙과 忠淸의 境界이며 洛東江, 漢江, 錦江三派의 分水嶺이 이곳 靈地에 精氣를 모아 人傑의 輩出을 期待하고저 우리 故庄 出身 學校法人 金剛學園 尋牛堂 金孟碩 理事長과 永東大學校 總長 蔡薰寬이 大幹碑를 세우다(늘고개는 청화과 속리산을 이어주는 인후지지요 경상과 충청의 경계이며 낙동강, 한강, 금강삼파의 분수령이 이곳 영지에 정기를 모아 인걸의 배출을 기대하고저 우리 고장 충신 학교법인 금강학원 심우당 김맹석 이사장과 영동대학교 총장 채훈관이 대간비를 세우다) 檀紀 4341년 월 일(단기 4341년) 白頭大幹碑 建立 推進會(백두대간비 건립 추진회)宋秉俅 曹三守 李相俊(송병구 조삼수 이상준)李榮中 蔡一錫 李亨珪(이영중 채일석 이형규) 後援 化北面長 李永植(후원 화북면장 이영식)

▲ 속리산 구간 시작점

▲ 알탕 장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