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두대간 2차 20-2구간 [대전 산사모 백두대간 3차 남진 산행 제 27회째]
이화령→조령산→신선암봉→깃대봉 갈림길→조령3관문→고기리
◇ 산행지 : 충북 괴산군 연풍면. 경북 문경시 문경읍 일원
◇ 산행일자 : 2012. 4. 21 (토). 날씨 : 강풍을 동반한 비
◇ 참가인원 : 대전시 산사모 회원 30 명
◇ 산행친구 : 기대
◇ 산행거리 : 8.97km(포항 셀파산악회 실측거리 기준, 이탈 거리 : 조령 3관문~ 고기리 약2.3 km제외)
<20-2구간> 조령3관문→1.0→깃대봉→5.1→조령산→0.75→조령샘→2.12→이화령
◇ 산행시간 : 대간 산행 4시간 15분< 고기리 이탈 31 분 제외>
◇ 시간대별 요약
- 05:10 대전 IC 출발
- 06:41 이화령 도착
- 06:41 이화령 산행 시작
- 07:32 조령샘
- 07:52 조령산
- 08:53 신선암봉
- 10:41 깃대봉 갈림길
- 11:00 조령3관문
- 11:31 산행 마침
※ 특기사항
① 강풍 동반한 비로 인해 조망 없었음.
② 빗길 위험과 암벽으로 인한 밧줄 많아 산행 어려움.
③ 당초 계획 마역봉 지나 신성봉 산행 후 고기리로 하산 산행 하지 못함.
④ 마니산 다녀온 후 허리 통증 심한 상태의 산행.
⑤ 산행 후 고기리 식당 뒤풀이
※ 산행 전 사전 조사
<신립과 문경 새재>
충주는 사실상 서울로 향하는 적을 막을 수 있는 마지막 방어 거점이었다. 그 때문에 당시 충주에는 도순변사 신립 휘하에 약 8000명의 병력이 모여 있었다. 신립은 조선 조정이 가장 높이 신뢰하고 있던 용장이었고, 실제 그가 대군을 거느리고 왔다는 소식에 충주의 사민들은 피난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할 정도였다.“훈련이 안 된 오합지졸로는 적을 어떻게 해볼 수조차 없었다”는 이일의 보고를 받은 직후 신립 진영에서는 논란이 빚어졌다. 신립의 참모 김여물은 적군보다 병력이 현저히 적은 상황을 고려하여 문경새재에 진을 치자고 건의했다. 조령의 험준한 지형을 활용하여 지키다가 역습을 펼치자는 주장이었다. 신립은 김여물의 제안을 거부하고 들판에서 싸우자고 했다. 높고 험한 곳에서는 기마병을 활용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는 실제로 충주 읍내에서 5리쯤 떨어진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 신립은 일찍이 북방에서 기마병을 활용하여 여진족을 물리친 경험이 있는 장수였다. 또 휘하 병력의 상당수가 오합지졸인 상황에서 그들의 마음을 다잡으려면 배수진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하지만 신립 또한 척후를 소홀히 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조령에 복병이나 척후병을 제대로 배치하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군은 조령 입구에 이르러 험준한 산세와 복병에 대한 우려 때문에 정찰에 몹시 신경을 썼다. 4월27일 저녁 군관 한 사람이 와서 일본군이 고개를 이미 넘었다고 보고하자 신립은 그의 목을 벤다. 4월28일 일본군은 단월역으로부터 길을 나눠 공격을 개시했다. 포르투갈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일본사>에서 “신립이 탄금대 앞에 초승달 형태의 진을 치고 일본군의 중앙부를 향해 돌격을 시도하는 등 용맹하게 싸웠다”고 기록했다. 이 싸움에서도 조총의 위력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신립의 기마대는 수차례 돌격을 시도했지만 일본군의 조총 사격 앞에 번번이 가로막혔다. 게다가 주변에 논과 습지가 널려 있어 기마대가 돌격전을 계속 펼치기에는 곤란한 상황이었다. 전세가 기울자 신립은 단기로 적진을 향해 돌격을 시도하다가 달천에 몸을 던져 순국한다. <징비록>은 “여러 군사들도 모두 강물에 뛰어들어 시체가 강을 뒤덮었다”고 당시의 참상을 기록하고 있다. (출처: 한명기의 임진왜란)
<이화령[梨花嶺])> : 이유릿재라고도 하며 높이 548m로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의 사이에 있는 고개로 유래는 고개가 가파르고 험하여 산짐승의 피해가 많으므로 전에는 여러 사람이 어울려서 함께 넘어갔다하여 이유릿재라 하였다. 그 후에 고개 주위에 배나무가 많아서 이화령으로 불리게 됐다.조령산(鳥嶺山, 1,017m)과 갈미봉(葛味峰, 783m)과의 안부(鞍部)에 위치하며 동쪽사면은 조령천(鳥嶺川)의 곡구(谷口)인 진안리에서 서쪽으로 분기하는 하곡과 통하고, 서쪽사면은 남한강의 지류인 달천(達川)으로 흐르는 연풍천(延豊川)의 하곡으로 이어진다.
현황도로도 위에 언급된 계곡을 따라 개통되었으나, 동편의 진안리에서 이화령 고개까지는 갈미봉의 산록을 따라 올라가고, 서편은 행촌리까지 ‘잣밭등’의 남쪽을 따라 내려간다. 고개 아래 연풍은 영하취락(嶺下聚落)이다. 옛날의 국도는 새재[鳥嶺]로 통하였으나, 새재는 몹시 높고 산로(山路)가 험하므로 신국도 3호선은 이화령을 통하게 되어 연풍은 이화령에 교통로가 열린 뒤에 발달한 신흥취락이다.
연풍에서 하곡을 따라 올라가 원풍리를 거쳐 분수령에 이르면 동쪽은 새재마루의 조령 제3관문이고, 서쪽은 소조령(小鳥嶺)이다. 소조령을 넘으면 온천으로 유명한 수안보(水安堡)에 이른다. 이와 같이 이화령은 충청북도의 충주권과 경상북도 북부의 점촌지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이화령의 개통으로 북쪽의 조령은 제1·2·3 관문과 주변의 성곽 등을 사적 제147호로 지정하고 크게 보수, 축조하여 도립공원으로 정비하였다. 조령의 통과는 중초리에서 통제되고 관광객이나 등산로 외에는 사용되지 않고 있지만, 이화령은 국도 제3호가 통과하여 주변지역에서 산출되는 특용작물의 수송도로로 이용되고 있다. 이리하여 옛 조령에 이어 이화령은 새로운 교통요충지로 변모하고 있다. 그러나 국도 3호선은 도로가 구불구불하여 이용하는 사람들이 불편하다는 민월을 끊임없이 제기하였다. 이에 따라 민간투자사업으로는 처음으로 3번 국도가 4차로로 확장되면서 이화령 터널이 뚫렸다. 그 뒤 이화령 터널 옆으로 고속도로의 상하행선 터널이 추가로 관통됨으로써 모두 3개의 터널이 있게 됐고, 옛 이화령 포장도로까지 합쳐 10개의 차로의 도로들이 나란히 있는 실정이다. 이화령 터널을 건설할 당시 예상한 이용률보다 훨씬 적어서 문제가 되었고, 2007년 건설교통부가 ‘이화령 터널’을 인수하여 2007년 8월 1일 터널 통행료가 폐지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조령관문일원 [鳥嶺關門一圓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일대의 성곽 일원에 있으며 경상북도 기념물 제18호. 지정되었다. 조령은 조선시대 영남지방에서 소백산맥의 준령을 넘어 한양으로 가는 주요 통로의 하나로서, 주흘산(1,106m)·부봉(釜峰, 915m)·조령산(1,017m) 등이 이루는 장장 8㎞의 험준한 계곡이 천험(天險)의 요충을 이루고 있다.이러한 지형을 이용하여 구축한 요새로 문경관문(聞慶關門, 사적 제147호)은 제1에서 제3까지 3개의 관문으로 되어 있다. 이 관문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 6월 설치의 논의가 있었으나, 전란 중의 경제사정이 허락하지 않아 그 이듬해인 1594년 조곡관(鳥谷關)에 중성(中城), 세칭 제2관문이 설치되었다.그 후 1708년(숙종 34) 중성을 크게 중창하는 한편, 이보다 남쪽으로 약 4㎞ 떨어진 주흘관(主屹關)에 초곡성(草谷城)을, 또 북으로 약 4㎞ 떨어진 조령관(鳥嶺關)에 조령산성을 축조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제1관문과 제3관문이다. 이들 관문은 낙동강수계에 속하는 조령천의 협곡을 이용하여 구축하였다.
제1관문은 육축(陸築 : 지면 위에 축조하는 것)에 홍예문을 열고, 성벽에는 총안(銃眼)이 있는 성가퀴가 설비되어 있으며, 초루(礁樓)에는‘嶺南第一樓(영남제일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 제1문은 3개의 관문 중 옛모습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문이다. 제2, 제3관문은 육축만 남겨 놓은 채 홍예문은 불타 버린 것을 1974∼1977년의 문화재 보수 때 복원되어 옛모습 다시 찾게 되었다. 이들 관문과 관련하여 이 일대에는 조령원(鳥嶺院)·동화원(東華院) 등의 원터와 진(鎭)터·군창(軍倉)터, 신구임(新舊任) 경상감사가 교체될 때 교인(交印)하였다는 교구정지(交龜亭址), 고려 말 공민왕이 거란의 난을 피하였을 때 행궁이 있었다는 어유동(御由洞) 등 사적지가 많고, 또 신라 문성왕 8년(846)에 초창하였다는 고찰 혜국사(惠國寺)도 여기에 있다. 조령계곡에는 여궁폭포(女宮瀑布)·쌍룡폭포·팔왕폭포 등이 울창한 산림과 더불어 아름다운 자연 식생 경관을 이루고 있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산행 지도및 고도표
※ 산행 후기
강화도 마니산을 다녀 온 후 산행기를 적다가 허리가 아픈 이후로 꾸준한 치료를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잔 통증이 남아 있어 산행에 자신이 없어 산행을 가는 것에 대해 고민하다 친구에게 “최대한 배낭을 작게 꾸려가니 무거운 것은 네가 준비해 달라”고 부탁하고 산행을 갔다. 허리도 아프고 비가 오는데 굳이 산행을 해야 하나 하면서도 이번 구간이 다행히 짧으니 조심만 하면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갔는데 강한 찬바람을 동반한 비 때문에 산행은 다소 어려움이 많았다. 더욱이 밧줄이 많은 구간은 여자 분들이 밧줄 구간에서 조심하는 바람에 시간이 많이 소요되기도 했다. 허리가 아파서 당초 산악회에서 목표한 신선봉은 다녀오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산행 후 알아보니 단 한 명도 다녀오지 않았을 정도로 악천후 속 산행이었다.
※ 산행 사진
▲ 이화령 도착 산행 준비
▲ 이화령: 이유릿재라고도 하며 높이 548m로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의 사이에 있는 고개로 유래는 고개가 가파르고 험하여 산짐승의 피해가 많으므로 전에는 여러 사람이 어울려서 함께 넘어갔다하여 이유릿재라 하였다. 그 후에 고개 주위에 배나무가 많아서 이화령으로 불리게 됐다.
▲ 이화령에 있는 육각정쪽으로 산행 시작
▲ 이화령에서 산행 시작 이때 까지는 비가 오지 않았다.
▲ 조령샘: 이화령에서 산행 시작 50분 정도 소요 되었으며 물의 양은 다소 많았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2009.06.21일에 어떤 사람이 작성한 글을 보면 “문경시에서 샘물검사를 했는데 대장균에 뭐 이것저것 나와서 부적합판정을 받았다 한다. 문경시는 부적합 판정 받았으면 마시지 말라는 표지판을 달아놓아야 할 듯” 이렇게 적혀 있는데 지금은 적합한지 아무런 표시가 없다
▲ 조령산[鳥嶺山 ]:충북 괴산군 연풍면과 경북 문경시 문경읍과의 경계선상에 자리 잡은 명산으로 높이는 1,017m이다. 전체적으로는 산림이 울창하며 대암벽지대가 많고 기암 괴봉이 노송과 어울려 마치 그림 같다. 능선 남쪽 백화산과의 경계에는 이화령이 있고 능선 북쪽 마역봉과의 경계가 되는 구새재에는 조령 제3관문(조령관)이 있으며, 관문 서편에는 조령산 자연휴양림이 조성되어 있다. 제3관문이 위치한 곳은 해발 642m로서 예로부터 문경새재라 일컬어지고 있다. 이를 통해 영남지방과 중부지방이 연결되어 교통의 요지였을 뿐 아니라, 험난한 지세를 이용할 수 있어 군사상의 요충지이기도 하였다. 주능선 상에는 정상 북쪽으로 신선봉과 치마바위봉을 비롯하여 대소 암봉과 암벽지대가 많다. 능선 서편으로는 수옥폭포와 용송골, 절골, 심기골 등 아름다운 계곡이 발달되어 있다. 능선 동쪽을 흐르는 조령천 곁을 따라 만들어진 길은 조선조 제3대 태종이 국도로 지정한 간선도로였으며, 주흘관(제1관문)·조곡관(제2관문)·윈터·교구정터 등의 사적지가 있고 완만하게 흐르는 계곡에는 와폭과 담이 산재하여 있다. 현재 이 일대는 문경새재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수안보온천, 월악산국립공원과 가깝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 조령산 정상에 있는 이정목
▲ 신선암봉 [神仙巖峰]:충청북도 괴산군의 연풍면 원풍리와 문경시 문경읍의 경계에 위치하는 산이다 (고도:939m). 신선암봉 남쪽으로는 조령산이, 북쪽으로는 깃대봉이 연결되어 소백산맥의 줄기를 형성하는데, 문경새재 도립공원에 속한다.『한국지명총람』에서는 이 산을 신선봉으로 소개하고 있고 고사리봉 · 할미봉 · 온산으로도 불렸다고 적고 있다. 신선봉이라는 지명은 옛날에 신선이 달밤에 놀았다고 해서, 할미봉이란 지명은 마고 할머니가 이곳에 와 놀았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괴산의 명산 35곳 중의 하나이지만, 『조선지형도』나 「1:50,000 지형도」에는 이 지명이 표기되어 있지 않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깃대봉 갈림길(깃대봉 정상까지 시간은 적게 소요 될 것 같았으나 비가 와서 조망이 없어 다녀 오지 않았다)
▲ 제3조령문 옆 산신각 : 조령산 휴양림 방면 제3조령관(옛과거길) 옆에 산신각이 있다. 조령약수터 바로 위에 산신각이 있는데 평상시는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다. 제물과 촛불은 안 되고 향공양은 드릴 수 있고 참배 후 향불은 꺼야 한다고 한다. 관문 옆 관리사무실에 “인사를 드리겠다” 하면 근무하는 관리인이 산신각 빗장(자물통)을 열어준다고 한다.
▲ 조령3관문 바로 옆 이곳에도 조령샘이 있는데 물은 나오지 않고 있었다.
▲ 조령관(鳥嶺關)-영남제3관(嶺南第3關)
새재 정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의 적을 막기 위하여 선조 초에 쌓고 숙종(숙종 34년 : 1708) 때 중창하였다
▲ 이후 사진은 고기리 가는 길임
▲ 고기리 산행 마침
▲ 산행 마치고 식당에서 뒤풀이(아쉬웠던 것은 비가 와서 모두 추워 떨었으니 기왕이면 따뜻한 국물이 있는 것으로 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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