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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2차(完走)

20-1구간. 하늘재→탄항산→평천재→부봉→마패봉→조령3관문

 

□ 백두대간 2차 20-1구간 [대전 산사모 백두대간 3차 남진 산행 제 26회째]

 

하늘재→탄항산→평천재→부봉→마패봉→조령3관문→조령2관문→조령1관문→주차장

 

◇ 산행지 :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상모면. 경북 문경시 문경읍 일원

◇ 산행일자 : 2012. 4. 7 (토). 날씨 : 맑음 (찬 바람으로 인해 체감 온도 낮음)

◇ 참가인원 : 대전시 산사모 회원 32 명

◇ 산행친구 : 기대

◇ 산행거리 : 9.39km(포항 셀파산악회 실측거리 기준, 이탈 거리 : 조령 3관문~1관문 약6 km제외)

<20-1구간> 하늘재→1.82→월항삼봉(탄항산)→1.75→주흘산갈림길→1.5→동암문→3.41→마패봉→0.91→조령3관문
◇ 산행시간 : 대간 산행 3시간 50분< 이탈 1시간 40 분 제외> 후미 7시간

◇ 시간대별 요약

- 04:10 대전 IC 출발

- 05:50 하늘재 도착

- 05:53 하늘재 산행 시작

- 06:05 모래산

- 06:39 탄항산(월항삼봉)

- 06:58 평천재

- 07:40 부봉 삼거리(왕복 15분 소요)

- 07:47 부봉

- 08:03 동암문

- 08:23 휴식 김밥(10분)

- 08:55 북암문

- 09:18 마역봉(마패봉)

- 09:41 조령 3관문

- 10:32 조령 2관문

- 11:10 조령 1관문

- 11:22 주차장(문경식당) 산행 마침

- 13:37 문경 출발

- 15:28 대전 IC 도착

 

특기사항

① 선두(영선조)외 일부 주흘산 영봉 다녀 옴

② 강한 찬 바람으로 체감 온도 낮아 동틀 무렵 손시렵고 추웠음

③ 구간 너무 짧았음(컨디션 좋은 결과)

④ 한국의 아름다운 길 문경새재(조령 3관문~1관문) 걸음

⑤ 산행 후 문경 식당 뒤풀이( 오미자삼겹살, 냉이 된장국)

 

산행 전 사전 조사

<신립과 문경 새재>

충주는 사실상 서울로 향하는 적을 막을 수 있는 마지막 방어 거점이었다. 그 때문에 당시 충주에는 도순변사 신립 휘하에 약 8000명의 병력이 모여 있었다. 신립은 조선 조정이 가장 높이 신뢰하고 있던 용장이었고, 실제 그가 대군을 거느리고 왔다는 소식에 충주의 사민들은 피난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할 정도였다.“훈련이 안 된 오합지졸로는 적을 어떻게 해볼 수조차 없었다”는 이일의 보고를 받은 직후 신립 진영에서는 논란이 빚어졌다. 신립의 참모 김여물은 적군보다 병력이 현저히 적은 상황을 고려하여 문경새재에 진을 치자고 건의했다. 조령의 험준한 지형을 활용하여 지키다가 역습을 펼치자는 주장이었다. 신립은 김여물의 제안을 거부하고 들판에서 싸우자고 했다. 높고 험한 곳에서는 기마병을 활용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는 실제로 충주 읍내에서 5리쯤 떨어진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 신립은 일찍이 북방에서 기마병을 활용하여 여진족을 물리친 경험이 있는 장수였다. 또 휘하 병력의 상당수가 오합지졸인 상황에서 그들의 마음을 다잡으려면 배수진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하지만 신립 또한 척후를 소홀히 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조령에 복병이나 척후병을 제대로 배치하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군은 조령 입구에 이르러 험준한 산세와 복병에 대한 우려 때문에 정찰에 몹시 신경을 썼다. 4월27일 저녁 군관 한 사람이 와서 일본군이 고개를 이미 넘었다고 보고하자 신립은 그의 목을 벤다. 4월28일 일본군은 단월역으로부터 길을 나눠 공격을 개시했다. 포르투갈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일본사>에서 “신립이 탄금대 앞에 초승달 형태의 진을 치고 일본군의 중앙부를 향해 돌격을 시도하는 등 용맹하게 싸웠다”고 기록했다. 이 싸움에서도 조총의 위력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신립의 기마대는 수차례 돌격을 시도했지만 일본군의 조총 사격 앞에 번번이 가로막혔다. 게다가 주변에 논과 습지가 널려 있어 기마대가 돌격전을 계속 펼치기에는 곤란한 상황이었다. 전세가 기울자 신립은 단기로 적진을 향해 돌격을 시도하다가 달천에 몸을 던져 순국한다. <징비록>은 “여러 군사들도 모두 강물에 뛰어들어 시체가 강을 뒤덮었다”고 당시의 참상을 기록하고 있다. (출처: 한명기의 임진왜란)

<조령(650m)> 백두대간(白頭大幹)의 조령산(鳥嶺山) 마루를 넘는 이 재는 예로부터 한강과 낙동강유역을 잇는 영남대로상의 가장 높고 험한 고개로 사회 문화 경제의 유통과 국방상의 요충지였다. 새재(鳥嶺)는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 옛 문헌에 초점(草岾)이라고도 하여 「풀(억새)이 우거진 고개」 또는 하늘재, 麻骨嶺)와 이우리재(伊火峴) 사이의 「새(사이)재」, 새(新)로 된 고개의 「새(新)재」 등의 뜻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뒤에 이곳에 3개(주흘관, 조곡관, 조령관)의 관문(사적 제 147호)을 설치하여 국방의 요새로 삼았다. 이 곳은 자연경관이 빼어나고 유서 깊은 유적과 설화·민요 등으로 이름 높은 곳이다. 이 곳에는 나그네의 숙소인 원터, 신구 경상도관찰사가 관인을 주고 받았다는 교귀정터만 남아있는 것을 1999년 중창하였고, 옛날에 산불을 막기 위하여 세워진 한글 표석 "산불됴심" 비(지방문화재자료 제226호)가 남아있다. 그리고 역사에 얽힌 갖가지 전설을 비롯하여 임진왜란과 신립(申砬) 장군, 동학(東學)과 의병(義兵)이 남긴 사담(史談)이 골골이 서리어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이 일대를 1974년 지방기념물(제18호), 1981년 도립공원으로 지정, 보호하고 있어 전국에서 관람객이 많이 찾고 있는 곳이다. 백두대간(백두산~지리산)이 등뼈를 이룬 고산준령이 병풍처럼 이어져 충북과 도계를 이룬 천험의 요새인 조령은 새재계곡 따라 3관문까지 이어지며, 조선시대부터 영남에서 한양으로 통하는 가장 큰 대로(영남대로)로서[영남]이란 말도 조령의 남쪽 지방이라는 뜻이다. 조령의 다른 이름인[새재]는 새도 날아 넘기 힘든 고개 ,또는 억새풀이 많은 고새로 풀이되고 있으며 [고려사]에는 초점,[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조령으로 기록되어 있다.

 

산행 지도및 고도표

 

 

산행 후기

이번 구간은 일반적으로 조령3관문에서 끊지 않고 이화령까지 진행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문경새재 옛길을 걷는 것과 오미자 삼겹살을 먹기 위해 조령3관문에서 끊는다”는 회장님의 이야기를 듣고 1차 때 산행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보니 안전시설 미비와 눈이 많아 고전을 했던 구간으로 기억이 남아 있어 산행 시간 등 산행에 대해 전반적인 기록을 살펴보니 1차 때 다른 사람의 사진만 있을 뿐 내용이 없다. 당시에도 이번과 똑같이 짧게 끊었으면서도 상당히 고전 했었다는 강한 인상 때문에 내심 짧게 끊는 것이 반갑기도 했다.

친구와 상의 후 아침 겸 점심은 산악회에서 주는 김밥과 혹시 부족할지 몰라 한 줄을 더 사서 준비하고 물은 1.5리터만 준비 했는데 그렇다보니 배낭이 너무 가볍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행 후 점심을 오미자 삼겹살로 한다.” 했으니 간단한 간식을 챙기고 친구를 만나 원두막으로 향했는데 평상시와 달리 버스가 와 있다. 서둘러 버스에 오르니 인원이 적어 보여 후미 대장님께 여쭤보니 오늘 산행 인원은 32명이란다. 이어 회장님의 산행지 설명이 있었는데 “지난 산행 중 종아리 파열로 인해 목발을 집고 다니는 상태라서 본인은 산행을 할 수 없으며 산행 전 준비 운동을 철저히 해서 부상을 미리 막으라”는 말씀이 있었다.

산행지에 도착하여 발목 돌리기도 하고 나름대로는 천천히 준비하여 산행을 시작했는데 처음 오름이 약간 가파르다. 첫 오름이 끝나자 지도에는 잘 없었던 “모래산” 이정목이 나왔고 탄항산까지는 꾸준한 오름이었지만 컨디션이 좋은지 힘겨움이 덜했다. 평천재를 지나 부봉 삼거리에서 부봉을 들리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시간도 많이 남는듯해서 부봉을 다녀오니 이후 산행은 그다지 큰 어려움이 없다.

나는 차에서 내리기 직전 아침 식사를 했는데 친구는 식사를 하지 않았다 해서 동암문 가기 전에 김밥 한 줄을 먹고 마패봉으로 향했다. 잠깐 힘겹게 오름이 이어진 후 마패봉에 도착 했고, 마폐봉에서는 신선봉을 다녀오고 싶은 유혹이 있었으나 다음 구간에 신선봉으로 하산 한다고 하니 조령으로 향했다.

조령3관문에서 1관문으로 향하는 길은 비포장 길로 예전에도 두어 차례 이상 왔었기에 낯설지 않았는데 친구가 처음이라기에 이번엔 구석구석 볼 심사로 책바위도 보고 여러 곳을 구경하며 내려오다 보니 약간 시간은 더 소요됐다. 친구는 내려오며 “드라마 촬영장에도 간다”고 하기에 난 지난번에 다녀와서 흥미가 반감되어 혼자 내려와 식당에 들어서니 영선조 세분과 기사님 회장님 밖에 없다. 오미자 막걸리는 생각보다 맛이 없었고 오미자 삼겹살 역시 생각보다 맛이 덜했지만 맛있게 점심 식사를 마칠 즈음 최후미가 도착한다. 산행 후 마신 술로 인해 잠이 깊이 들었고 돌아오는 길은 짧게 느껴졌다. 대전에 너무 일찍 도착하여 찜질방에서 야구를 본 후 친구가 “생일 잊고 지나쳐서 미안하다”며 우리 둘만의 뒤풀이로 참치회에 소주 한 잔 하자 해서 술에 취하며 하루를 마감했다.

 

산행 사

▲ 하늘재 옆에 있는 계립령 유허비

▲ 하늘재 산행 준비

▲ 하늘재에서 약 10분 정도 산행 하면 나타나는 모래산 이정목

 

▲ 탄항산(월항삼봉856.7m) : 월항삼봉( 851m)은 충북 충주시 상모면 월악산국립공원 남단에 위치하며 가까이 마의태자 의 전설이 깃든 미륵사지와 고대 삼국시대부터 호서 영남을 잇는 하늘재를 감싸고 있는 아기자기한 산세를 가지고 있는 산이다. 세 개의 봉우리가 나란히 서 있다 하여 삼봉이라 부르나 예전에 산삼이 많이 난다 하여 삼봉(蔘峰)이라 부르기도 하며,또한 탄항산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옛날에는 봉화를 올리던 곳으로 산 남쪽 월항마을 사람들은 봉화봉이라고 부르기도 한 산이다. 정상은 노송과 절벽,괴석 등으로 어우러지고 정남으로 주흘산과 마주보고 있으며, 백두대간상의 하늘재 직전에서 남쪽으로 들어간 계곡이 아름답고, 정상 서편에서 북쪽으로 뻗은 칼바위등길은 너럭바위, 홈바위, 칼바위 등으로 어우러져 스릴 있는 하산 길이다

▲ 탄항산에 오르기 까지 찬 바람으로 체감 온도가 낮았다.

 

▲ 평천재

▲ 안전시설이 잘 되어 있다.

▲ 주흘산 갈림길

▲ 부봉 오름전에 찍은 부봉의 모습(2봉이 제일 높다 했는데 진행 방향에서는 1봉이 더 높게 보인다

▲ 부봉 삼거리(왕복 15분 소요 된다)

부봉(916m) : 부봉은 조곡관(2관문)에서 볼 수 있는 우뚝 솟은 산인데 6봉으로 이루어져 있다. 백두대간에서

500m 떨어진 부봉을 제1봉이라 하고 높이는 917m,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그 다음 차례대로 이어져 조곡관에서

가장 가까이 보이는 봉이 제6봉이다. 제2봉은 933.5m, 제3봉이 911m, 제4봉이 923.9m, 제5봉이고 사자바위가

있는 제6봉이 916m이다. 우리들이 부봉이라고 흔히 부르는 봉이 제1봉이다. 2봉이 가장 높지만 백두대간과의

관계 때문일 것으로 본다

 

부봉에서 바라 본 주흘산

부봉에서 내려 오는 친구의 모습(항상 내 페이스에 맞춰주는 친구에게 감사함을 표한다)

▲ 동암문

▲ 북암문

 

 

마패(역)봉(927m) : 마폐봉은 암행어사로 이름난 박문수가 삼관문 위의 봉우리에 마폐를 걸어 두고 쉬었던 곳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폐봉 정상은 멀리 대미산 포함산 부봉으로 타고 내려오는 백두 대간 자락으로 아래로 조령 삼관문을

거쳐 조령산 , 희양산, 대야산, 속리산을 이어주며 서쪽으로 줄기를 뻗어 신선봉을 붙들고 있다.

 

 

 

 

조령관(鳥嶺關)-영남제3관(嶺南第3關)

새재 정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의 적을 막기 위하여 선조 초에 쌓고 숙종(숙종 34년 : 1708) 때 중창하였다

 

 

▲ ‘한국의 아름다운 길’로 선정된 문경새재길은 주흘관에서 고갯마루의 조령관까지 6.5㎞가 비포장 흙길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1970년대에 국토개발을 진두지휘했던 박정희 대통령이 유독 문경새재길은 포장하지 말라고

지시해 자연 상태 그대로 남게 되었다. (출처:국민일보 박강섭 기자 글에서 )

책바위

 

 

 

 

 

동화원(음식점이다): 동암문이나 북암문에서 진행 방향 좌측으로 진행 하면 이곳으로 나온다

 

 

 

 

 

바위굴

 

 

 

 

▲ 조곡관(鳥谷關)-영남제2관(嶺南第2關) 선조 27년(1594)에 충주인 신충원이 축성한 곳으로 중성(中城) 이라고도 한다.

숙종조에 관방을 설치할 때 옛 성을 개축하였으나 관(關)은 영성(嶺城 : 3관문)과 초곡성(草谷城 : 1관문)에만

설치하고 이곳에는 조동문(鳥東門) 또는 주서문(主西門)을 설치하였다.

 

▲ 교귀정은 경상도 감찰사의 이취임식이 열리던 곳으로 낙락장송 한그루가 이채롭다.

이곳을 지나던 김종직은 이름 없는 정자를 ‘교귀정’이라 명명하고 “교귀정에 올라 앉아 하늘과 땅을 즐기는데/

문득 깨달으니 귀밑머리 흰빛이로다/한 가닥 흐르는 물은 바람과 더불어 노래 부르고/즈믄 바위는 그림 같건만

날은 점점 저물어만 가누나/(후략)”는 시를 선물했다

 

 

▲ 조령원터

 

 

▲ 지름틀 바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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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 드라마 촬영 세트장인데 전에는 입장료를 받지 않았는데 지금은 성인 2,000원을 받고 있다.

 

주흘관(主屹關)-영남제1관(嶺南第1關) 남쪽의 적을 막기 위하여 숙종 34년(1708)에 설관 하였으며

영남 제1관 또는 주흘관이라 고 한다. 정면 3칸(間)과 측면 2칸 협문 2개가 있고 팔작(八作)지붕이다.

 

 

 

 

▲ 새재 박물관

▲ 뒤풀이 한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