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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2차(完走)

19 구간. 하늘재→포암산→꼭두바위봉→부리기재→대미산→차갓재→작은차갓재

 

 

□ 백두대간 2차 19구간 [대전 산사모 백두대간 3차 남진 산행 제 25회째 ]

 

하늘재→포암산→꼭두바위봉→부리기재→대미산→차갓재→작은차갓재→안생달리

 

◇ 산행지 : 충북 제천시 덕산면.한수면. 문경시 동로면, 문경읍 일원

◇ 산행일자 : 2012. 3. 17 (토). 날씨 : 가랑비 온 후 운무 (따뜻한 편 이었음)

◇ 참가인원 : 대전시 산사모 회원 38 명

◇ 산행친구 : 기대

◇ 산행거리 : 19.13km(포항 셀파산악회 실측거리 기준, 접속거리 : 안생달~작은차갓재 1.2km제외)

<19구간> 작은 차갓재→5.9→대미산→1.35→버리기재→7.6→만수봉갈림길→2.82→포암산→1.35→하늘재
◇ 산행시간 : 산행시간 8시간 33분<점심 15분 포함> 후미 9시간 40분

◇ 시간대별 요약

- 04:25 대전 IC 출발

- 06:22 하늘재 도착

- 06:23 하늘재 산행 시작

- 06:31 하늘샘

- 07:35 포암산

- 08:39 마골치

- 10:12 꼭두 바위봉

- 10:27 점심 (15분)

- 11:03 1032봉

- 11:29 1062봉

- 11:52 부리기재

- 12:29 대미산

- 12:36 눈물샘 삼거리

- 12:48 문수봉 갈림길

- 13:06 헬기장(새목재)

- 14:20 차갓재

- 14:33 작은차갓재

- 14:56 안생달마을 산행 마침

- 14:40 후미 도착

- 16:29 안생달 출발

- 18:35 대전 IC 도착

 

특기사항

① 선두 알바(최후미 그룹으로 포암산 정상 오름)

② 포암산 이후 아이젠 착용(얼음과 눈 진흙으로 산행내내 불편)

③ 경방 기간으로 인해 북진 산행

④ 가랑비 온 후 운무로 인해 산행 내내 조망 없음(날씨 따뜻한 편)

⑤ 산행 후 안생달 마을 뒤풀이( 삼겹살, 라면)

 

산행 전 사전 조사

<생달마을에 대한 재미있는 지명유래>

생달리(生達里)는 '산달' 또는 '산다리' 로 불리웠는데 '안산다리'와 '바깥산다리'가 있다.생달은 산과 달만 볼 수 있는 두메산골이라는 뜻으로 산(山)월(月), 산다리라는 마을 이름이 생겼고, 그 후 생달이라는 이름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마을 어귀에 다리가 있고 그 다리에서 사람이 떨어졌으나 죽지 않고 살았다 하여 산(生)다리라 해서 산다리라는 마을 이름이 되었다는 속설도 있으며, 한 마을 뒷산에 고불형(顧佛形)의 명당(名堂)이 있다는 풍수설(風水說)에서 안산다리 마을입구에 '고불목'이라는 자연부락이 위치하고 있다.

<안산다리 마을> 안산다리마을에는 백두대간 종주자들이 주로 찾는 민박집이 여러 곳 있다. 황장산 기슭 동로면 일대는 오미자로 유명하다. 생달1리에는 오미자청을 만들며 농·산촌을 체험할 수 있는 오미자체험마을도 있다. 면소재지에서 생달리간 도로변(적성리)에는 풍수설과 관련한 전설이 깃들어있는 말(馬)무덤이 수령 300년 된 큰 소나무와 어우러져 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서 귀화한 두사충이 조선의 팔대 명당 중 하나라고 전하는 명당을 적성리에서 발견,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정탁의 머슴에게 일러주어 나중에 정탁의 아들이 찾아나섰는데 타고온 말이 갑자기 뒷발질을 해 머슴이 즉사하자 화가 나 말의 목을 베어 묻었다는 곳이다. 산악인들이 간단하게 술 한 잔 하며 황장산 산행을 결산하는 장소로 많이 애용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시내 쪽으로 차로 10분쯤 가면 경천호가 나오고 이어 도로변에 황희 정승 후손들이 500년을 빚어온 명주 ‘호산춘’ 제조장(산북면 대하리, 054-552-7036)이 나온다. 호산춘은 장수 황씨 사정공파 종택에서 전승돼온 솔향 그윽한 가양주로 이곳에서만 구할 수 있다.(출처:산림청)

 

산행 지도및 고도표

 

 

 

 

산행 후기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에 심란해 진다. 다행인 것은 "산행 당일 새벽에 적은량의 비가 오고 아침 부터는 갠다"는 일기예보라 그나마 다행이라고 위안 삼으며 산행 준비를 했다. 비가 오면 가장 염려되는것이 체온 관리니 만큼 갈아 입을 옷은 평상시 보다 더 준비하고 우의도 1회용이 아닌 것을 하나 더 등산 가방에 넣고 모든 준비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 3시 30분 알람 소리에 일어나 간단히 씻고 밥을 먹으려니 입맛이 영 없다. 하지만 당뇨 환자인 나는 산행을 잘 하려면 든든히 먹어야 하는 까닭에 거의 우겨 넣다 싶이 하고 집을 나섰다. 부슬비 수준의 비를 맞으며 "이정도면 우의를 입지 않고 산행을 할 수 있겠구나" 하고 있는데 친구 차가 온다. 이번 점심은 각자 도시락을 준비 하기로 했으니 김밥집에 들리지 않고 원두막으로 가니 조금 이른 시간이다. 버스가 다른 때에 비해 조금 늦은 시간에 도착 하여 서둘러 승차 하니 역시 친구와 같이 앉아서 갈 자리는 없다. 통로쪽이 편해서 자리를 둘러 보고 앉았는데 에고~! 다리를 뻣을 수 없는 자리다. 두어 시간 남짓 가면 되니 게으치 않았는데 시간이 갈 수록 역시 불편 하다.

산행지에 도착하니 모두들 서두른다. 나는 스패츠 착용도하지 않고 우의도 입지 않아서 준비가 빠른 이었는데 친구에 비해 오름이 너무 약하다 보니 선두를 서둘러 따라 나섰다. 비가 오는 상태이다 보니 운무가 낀 상태였고 거의 5년 만에 다시 오르는 구간이라 그런지 많이 낯설었는데 선두가 그만 알바를 하는 바람에 에고~! 선두는 그냥 길이 아닌 곳을 치고 올라가고 나는 빽을 하여 정상적인 등로를 찾아 돌아가다 보니 포암산 정상에는 최후미 그룹에 섞여 올라갔다. 산행을 하면서 늘 함께 해주는 친구가 정상에서 당연히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역시 친구는 기다리고 있었고 기다린 것이 미안하여 인증 샷을 찍고는 서둘러 정상을 벗어났다. 포암산 정상 까지 꾸준함 오름 뒤에 정상을 벗어나자마자 아이젠을 착용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북사면에는 눈이 많아 서둘러 아이젠을 착용하고 진행을 했다. 산행지에 도착하기 전 김밥 한 줄을 먹었어야 했는데 식사 한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아서 버스에서 그냥 내렸는데 역시 포암산을 지나면서 시간이 갈수록 힘들어서 김밥 반줄과 간식을 하고 산행에 임했는데 마골치를 지나 1032봉 오름 전에는 도저히 견디기 힘들 정도로 힘이 들어 서둘러 점심 식사를 했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식사를 한 연후에는 산행 발걸음도 한결 가볍다보니 산행의 즐거움도 배가 되었지만 운무로 인해 조망이 없는 산행은 대간 산행에 대한 회의감만 많이 들었다.

1032봉을 오른 이후 진행은 대체적으로 고도차가 없어 순탄한 진행 이었는데 부리기재에서 내려선 후 대미산 오름은 고도차로 인해 힘들었으나 하는데 태평동산님이 앞서가는 바람에 편안히(?) 오를 수 있었다. 대미산 이후 진행은 몸이 완전히 풀려 큰 어려움 없이 진행 할 수 있었고 차갓재에 오니 돈민이를 비롯하여 일부가 꾀를 부려 작은 차갓재까지 진행 하지 않고 바로 내려 가는 모습도 보았지만 난 대간 길에서 단 몇 미터도 벗어나도 용납이 안 되듯이 작은 차갓재 까지 진행 한 후 안생달 마을로 하산 했다. 하산 해 보니 이미 선두는 불판 준비를 하고 있다. 서둘러 마을에서 씻은 후 옷을 갈아입고 삼겹살에 마시는 쏘맥은 그야말로 산행 후 느끼는 최고의 즐거움이다.

목표산행의 어려움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계절을 따지거나 본인의 형편에 맞춰서 하기 어렵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그날그날 산악회에 맞춰 산행을 해야 하므로 특색 없는 길을 걸을 때마다 1차 때에 비해 목표 감도 떨어지다 보니 아무래도 회의감을 많이 가지는 것은 아닌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미 시작한 일이니 끝까지 최선을 다해 2차 대간을 마무리 하리라 생각 하면서...

 

산행 사

▲ 하늘재 옆에 있는 계립령 유허비( 사진은 함께 산행 한 대전시 산사모 회원님 것)

<계립령 유허비에 세겨진 글>

『청아(淸雅)한 기운을 가득 머금고 솔바람 들꽃 향기 그윽하게 피어내며 구름 한 점 머무는 고즈넉한 백두대간의 고갯마루. 태초(太初)에 하늘이 열리고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영남과 기호지방을 연결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맡아 장구(長久)한 세월 동안 역사의 온갖 풍상(風霜)과 애환(哀歡)을 고스란히 간직해 온 이 고개가 계립령(鷄立嶺)이다.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와 충청북도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의 분수령을 이루고 있는 이 고개는 속칭 하늘재, 지릅재, 겨릅재, 대원령(大院嶺)이라 부르기도 하며, 신라가 북진을 위해 아달라왕(阿達羅王) 3년(156) 4월에 죽령(竹嶺)과 조령(鳥嶺) 사이의 가장 낮은 곳에 길을 개척한 계립령은 신라의 대로(大路)로서 죽령보다 2년 먼저 길을 열렸다. 계립령을 넘어서면 곧바로 충주에 이르고, 그 곳부터는 남한강의 수운(水運)을 이용하여 한강 하류까지 일사천리로 나갈 수 있는 길로서 삼국시대(三國時代)에 신라는 물론 고구려, 백제가 함께 중요시한 지역으로 북진과 남진의 통로였으며, 신라는 문경지방을 교두보로 한강유역 진출이 가능하였고, 이곳 계립령을 경계로 백제와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시켰다. 계립령을 사이에 두고 고구려 온달장군과 연개소문의 실지(失地)회복을 위한 노력이 시도되었고 왕건과 몽고의 차라대가 남하할 때, 또한 홍건적의 난으로 공민왕의 어가(御駕)가 남쪽으로 몽진(蒙塵)할 때도 이 고개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있는 등 숱한 사연을 담고 있는 곳이다. 고려시대(高麗時代) 불교의 성지(聖地)인 충북과 문경지방에 이르는 계립령로 주변에는 많은 사찰이 있었으나 전란(戰亂)으로 소실되었고, 그 유적과 사지(寺址)만 전한다. 조선조(朝鮮朝) 태종 14년(1414) 조령로(지금의 문경새재)가 개척되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조령로가 험준한 지세로 군사적 요충지로 중요시되자 계립령로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점차 떨어지게 되어 그 역할을 조령로에 넘겨주게 되었다. 오랜 세월 동안 묵묵히 애환을 간직해 온 계립령로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 보고 고개를 넘는 길손들에게 지난 역사의 향취(香臭)를 전하고 그 뜻을 기리고자 이곳에 유허비를 세운다.』

▲ 하늘재: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에서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로 넘어가는 경계에 있는 고개로 높이 525m이다. 우리나라 최초로 뚫린 고갯길로 삼국시대(156년) 때 신라의 아달라왕이 북진을 위해 개척하였다. 고구려 온달과 연개소문은 빼앗긴 하늘재를 다시 찾기 위해 끈질긴 전쟁을 벌였으며, 고려 공민왕은 홍건적을 피해 몽진(蒙塵)할 때 이 길을 이용했다고 한다. 이렇듯 교통의 요지이며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거점이었으나 조선 태종 때 새재길이 열리면서 그 역할이 축소되었다. 이전에는 계립령(鷄立嶺), 대원령, 지릅재 등으로 불렀으나 요즘에는 거의 모든 지도에 하늘재라 표기하고 있다. 오래된 세월만큼 길 양쪽에는 전나무, 굴참나무, 상수리 등 다양한 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문경 쪽에서 오르는 길은 고갯마루 가까이에 사는 주민들을 위해 포장을 해 놓았으나 미륵리 쪽은 비포장도로이다. 2001년에 문경시에서 세운 계립령유허비가 있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 하늘재에 있는 이정목(포암산 1.6Km, 반대편 부봉 삼거리 4.6Km 미륵리 주차장 2.5Km)

▲ 하늘샘

 

▲ 하늘재에서는 날씨가 어두웠는데 밝아 오면서 이정목이 잘 보인다.

▲ 포암산 오름 전의 계단(1차 대간 때는 없었는데...)

 

▲ 포암산 인증

포암산[布岩山, 베바우산, 마골산, 계립산 961.8m]은 여러 이름을 갖고 있다.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와 충주시 상모면의 경계에 있으며 해발 962M로 월악산국립공원에 속해 있다.

 

포암산은 관음리에서 옛고개 하늘재를 보고 오르면 마치 큰 베(布)를 펼쳐 놓은것 처럼 보이기도 하고, 껍질을 벗겨 놓은 삼대처럼 보인다 하여 마골산(麻骨山)이라고 불리워지기도 하였지만 오늘날 포암산으로 불리우고 있다. 또한 산의 형세가 닭처럼 보인다고 하여 계립산(鷄立山)이라 하였다고 옛기록이 전해지기도 한다. 만수계곡에서 들어가면 쌍봉의 육산처럼 보이지만 문경시 쪽에서 보면 암봉으로 보인다. 옛날에는 이 산을 베바우산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반듯한 암벽이 키대로 늘어서 있어 거대한 베 조각을 이어 붙여놓은 듯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희고 우뚝 솟은 바위가 삼대 즉, 지릅같이 보여서 마골산(痲骨山)으로 불렸다는 기록도 전해오고 있으며, 하늘재의 옛지명인 계립령에서 이름을 빌려 계립산(鷄立山)으로도 불리었다.

▲ 마골치:마골산에서 유래

▲ 마골치에 있는 출입 금지 안내문

 

 

▲ 언제나 함께 해 주는 친구의 모습과 나의 모습이 있어서..

▲ 꼭두바위봉(유래는 알 수 없으며 이곳에 오르기 전 이른 점심을 했다)

▲ 1032봉(벼락바위봉):꾀꼬리봉 갈림길이지만 출입금지 구역이라 그런지 이정표는 없다.

▲ 1062봉

부리기재(879.1m)는 문경시 문경읍 중평리에서 대미산을 넘어 제천시 덕산면의 용하구곡을 연결하는 고개이다. 지금은 용하구곡과 대미산을 경유하는 등산로로 쓰이거나 주민들의 약초채취에 이용되고 있어 매우 양호한 상태의 오솔길이 유지되고 있다. 부리의 옛말인 부리기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아 새의 부리처럼 생긴 고개란 뜻인가 보다.

▲ 대미산: 문경제산지조(聞慶諸山之祖), 문경 지역 모든 산의 주맥(主脈)이라는 산. 산경표에 검은 눈썹의 산, 대미산(黛眉山)으로 올라 있고, 대동여지도에는 두루 크다의 대미산(大彌山)으로 올라 있다는 산으로 퇴계 이황이 부드럽고 크게 아름답다는 대미산(大美山)으로 명명했다고 한다.

 

▲ 북사면에는 아직도 눈이 많았다.

▲ 눈물샘에 내려 가면 있다는 표지석에는 다으과 같이 적혀 있다고 한다.

 

문경의 산들모임산악회(회장 김규천)는 2003년 11월 30일 문경시 문경읍 중평리에 소재한 대미산(1,115m)을 찾아 지난 1995년 10월 22일 이 산악회에서 세워 놓았던 정상표지석을 재정비했다. 당시 이 표지석은 그 아래에 주변의 돌을 모아 단을 쌓고 표지석을 올려놓았으나 대미산을 오른 등산객들이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단을 오르내려 훼손된 상태였다. 이번에 표지석 아래의 단을 해체하고 표지석만 고정시킨 채 정상을 말끔히 새롭게 정비해 놨다. 또 정상에서 사방을 조망할 수 있도록 잡목제거 작업도 함께 실시했다.이날 대미산 정상표지석 정비와 아울러 대미산에서 생달리 방향 대간길을 따라 10분정도 거리에 위치한「눈물샘」도 깨끗하게 보수해 대미산을 찾는 애산인(愛山人)들과 백두대간을 지나는 산꾼들에게 편의를 도모토록 했다. 산악회원들은 눈물샘 정비를 위해 가는 자갈과 파이프, 안내판, 작업도구 등 무거운 짐을 메고 동로면 생달리를 출발해 눈물샘까지 가파른 너덜지대를 힘들게 올라와 작업을 펴게 됐다.대간길에서 50m정도 아래에 위치한 눈물샘은 그동안 물이 잘 나오지 않고 물받기에도 어려워 이곳을 찾는 이들이 많은 불편을 겪어야 했다. 이번에 새로 정비한 눈물샘은 물줄기를 새롭게 잡아 파이프로 연결해 파이프 둘레를 가는 자갈로 채우고 턱을 내어 물받기에도 편리하도록 했다. 또한 이 샘에「눈물샘의 유래」를 적은 작은 안내판도 세우고 대간길에서 눈물샘을 금방 찾을 수 있도록 안내팻말 2개를 대간길 입구에 설치했다.

 

눈물샘은 차진 황토흙에서 솟아 나오는 약수로 일년내내 물이 마르는 법이 없고 가슴속 깊이 스며드는 물맛은 무어라 형언할 수 없을 정도다. 또 눈물샘이 위치한 곳은 겨울 혹한기에도 바람이 없어 샘 바로 옆에 야영을 할 수 있는 장소도 있어 대간길을 가는 종주자들의 좋은 휴식처로 각광을 받는 곳이다. 눈물샘에 세워놓은 눈물샘 유래 안내판에 적힌 글귀는 다음과 같다.

 

이제 산 사람들을 위해 1990년 샘을 다듬과 2003년 다시 정성어린 손길로 그 모습을 되찾으니, 아름다운 대미산과 백두대간 산꾼들의 젖줄이 되어 오래도록 사랑받는 샘터로 그 맥이 길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이 샘물이 금천으로 흘러들어 낙동강으로 이어지는 것처럼…2003. 11. 30 문경 산들모임산악회

▲ 1051봉: 문수봉 갈림길(지리산 백두산 이정표가 이채롭다)

▲ 고개의 흔적조차 없는 새목재(826.4m) 바로 위 헬기장

백두대간 중간지점 표지석이 반긴다. 포항 셀파산악회에서 실측한 천왕봉에서 진부령 구간의 중간지점을 찾아 경기 평택 여산회에서 백두대간 상징물을 설치해 놓았다고 한다. 하지만 차갓재에는 문경 산들 모임 산악회에서 이미 중간 표지석을 만들어 놓았는데 중간이라는 것이 오차 범위내 일텐데 굳이 이곳에 또 설치해서 산행자들에게 혼선을 줄 필요가 있는지 오르겠다.

▲ 차갓재 가기 전 이곳에서 일부는 하산

차갓재는 문경시 생달리에서 황장산을 비껴 문경시 생달리 차갓마을과 동로면 명전리를 거쳐 충북 단양군 단성면으로 이어진다. 안생달 마을에서 백두대간길에 올라서면 차갓재와 작은차갓재가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자리하고 있으며, 차갓재의 유래는 백두대간을 사이에 두고 동로면 생달리 안생달 마을과 생달리 차갓마을을 이어주는 고개로서 차갓마을에서 유래된 고개이다. 일설에는 재 넘어 또 재가 있다는 차가(且加)재에서 유래했다는 고개다.그런데 여기서 차갓재의 "갓"은 충청도나 전라.경상도에서는 "주변:이란 뜻의 사투리이며 "갓"은 "가치"로 발음되어 이를 한문으로 옮겨적을 때 "가치"에 가장 가까운 까치작(鵲)의 첫 글자를 쓰고 문안골에 있는 작성산성에서 재성(城)자를 빌려와 鵲城山으로 명명하였다. 가치+까치=작(鵲)

차갓재(740m)에는 `백두대장군`과 `지리여장군`이라 씌여져 있는 두 장승이 세워져 있으며, 두 장승 사이로 문경 `산들모임`에서 세운 기념 빗돌이 낮게 자리하고 있다. 그 빗돌에는 ‘백두대간이 용틀임하며 힘차게 뻗어가는 이곳은 일천육백여리 대간길 중간에 자리한 지점이다. 넉넉하고 온후한 마음의 산사람들이여! 이곳 산 정기얻어 즐거운 산행 되시길….’ 이라 씌여져 있다.

▲ 광명님 사진에서

▲ 작은 차갓재

▲ 작은 차갓재에서 안생달 마을로 내려 오면 있는 출입금지 안내판(일부는 이곳에서 알탕을..)

▲ 폐광을 이용 하여 와인바를 설치 하고 있다 (내부를 구경 하고 오고 싶었으나 신발이 진흙으로 더러워서 그냥 내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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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행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