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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산 산행기

봉화 문수산(149명산 완등)

149명산 완등을 위한 1박 2일 둘째 날, 봉화 문수산에 가다.

축서사→주실령/축서사 능선 갈림길→문수산축서사

◇ 산행지 :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일원 

◇ 산행일자 : 2024년 6월 4일(화) 날씨 : 맑음 

◇ 산악회및 친구 : 자차 이용, 경헌    

◇ 산행거리 :4.34km(트랭글 거리)

◇ 산행시간 : 2시간 5< 휴식 15분 포함> 

◇ 시간 대별 요약

- 06:40  홍천 넘버 25 호텔 조식 

- 07:20  홍천 출발     

- 08:53  단양팔경 휴게소 

- 09:32  소수서원        

- 10:00  소수서원 출발 

- 10:28  부석사

- 11:09  종점식당 중식(산채비빔밥 20분)  

- 11:35  부석사 출발 

- 11:58  축서사 일주문 

- 12:01  축서사 관람(20분)

- 12:19  축서사 산행 시작  

- 12:59  능선 접속(구실령/축서사/문수산 갈림길)

- 13:25  문수산(15분 휴식) 

- 13:43  문수산 하산 시작

- 14:25  축서사 산행 마침 

- 14:50  축서사 출발

- 17:01  속리산 휴게소

- 18:05  반석동 서가집 석식

- 19:25  석식 마침

  

※ 특기사항

 149명산 완등 산행  

1박 2일 홍천 석화산(문암산), 봉화 문수산 산행    

이정표, 등산로 최상

문수산축서사 이정표 없음(산악회 표식 많음) 

 자차 이용 

 

봉화 문수산 등산 지도

문수산 산행 후기

6시 알람 소리에 일어나 숙소에서 제공하는 라면과 밥으로 식사한 후 친구에게 운전을 부탁하여 숙소를 나섰다. 영주 부석사 가는 길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을 들러 잠시 구경한 후 영주 부석사로 향했다. 백두대간 산행하면서 능선을 지나며 늘 궁금했던 부석사이기에 이번이 절호의 기회라 생각되었고 점심 식사 시간도 애매하여 부석사 구경 후 부석사 주변에서 식사하고 문수산으로 가면 되기에 택했는데 절묘했다. 부석사 구경 후 종점식당에서 산채비빔밥으로 점심 식사를 마친 후 문수산 축서사에 주차한 후 먼저 절 구경부터 하고 산행은 시작되었다. 생각했던 대로 산행코스는 순조로웠는데 문제는 친구가 산행 실력이 너무 좋다는 데 있었다. 바짝 달라붙어 따라와 결국 비켜서서 먼저 오르라 하고 난 내 페이스에 맞춰 능선에 오르니 훨씬 수월한 산행이었고 능선에 오르니 산행은 더욱 쉬워지기 시작했다. 149 명산 중 마지막으로 오른 문수산 정상에서 인증하니 감회가 새롭고 속이 다 시원했다. 개인적으로 100 명산이 아니라는 판단이 서긴 했지만 그래도 월간 산이 선정한 100 명산이고 무엇보다 일단 모두 완등 했으니 더 이상 어떠한 목표를 삼지 않아도 되는 산행이 앞으론 이어질 것 같아 좋았다. 원점으로 내려가는 산행이지만 올라 온 길을 그대로 똑같이 내려가기 싫어 친구에게 다른 길로 가자고 하니 길이 험한들 한데 올라 온 길로 가자고 반대하여 남들이 내려간 길이기에 우리도 갈 수 있다고 설득하니 흔쾌히 따라 줘 하산을 시작하니 비록 이정표는 없고 약간 험한 내리막길이었지만, 산악회의 시그널이 많았고 어제의 석화산(문암산) 산행에 비하면 너무 쉬운 산이었기에 쉽게 하산했다. 축서사 아래 계곡에서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대전으로 향하며 운전대는 내가 잡았고 대전 반석동에 도착하여 소고기에 축하주를 마시고 친구와 헤어지며 12일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향했다. 149 명산 완등에 함께 해준 친구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문수산 산행사진

▲그릇 없이도 라면을 끓여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다. 숙소에서 제공한 라면과 밥, 그리고 집에서 준비해 온 김치로 아침 식사한 후 문수산으로 향한다.

▲잠시 들린 단양팔경 여느 휴게소와 달리 진입이 너무 멀어 독특했다. 

▲지나는 길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에 잠시 들렸다. 영주의 소수서원은 최초로 국학의 제도를 본떠 선현을 제사 지내고 유생들을 교육한 서원으로 알려져 있다. 영주에 있다보니 예을 들어 경주, 공주, 전주등 "주"가 들어간 시,군에서 온 사람은 입장료도 활인 해 준다. 

소수서원 입구의 소나무는 겉과 속이 모두 붉다고 하여 적송이라 부르며 300~1,000년 된 소나무 숲으로 겨울을 이겨내는 소나무처럼 인생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참 선비가 되라고 학자수(學者樹)라 부른다. 그야말로 멋진 예술품이다. 

소수서원 입구의 서원 입구의 숙수사지 당간지주(宿水寺址 幢竿支柱)는 숙수사터에 있으며,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세워두는 것으로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이곳에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 두는데 이 깃발을 걸어두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이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서원입구 오른쪽의 경렴정에서 바라 본 취한대

서원입구 오른쪽의 경렴정(景濂亭)은 신재 주세붕이 창건하였으며 시연을 베풀고 호연지기를 가꾸던 곳이다.

지도문(志道門)은 서원 정문이다.

강학당(講學堂)은 유생들이 모여 강의를 듣던 곳으로 사방(四方)에 툇마루가 놓여있다. 바깥 편액은 백운동으로 처음 주세붕이 세웠던 서원 이름이다. 강학당을 지나면 회헌(晦軒) 안향(安珦,1243~1306)선생의 위패를 모신곳(사당)인 문성공묘(文成公廟)와 장서가 보관되던 곳인 장서각(藏書閣), 서원에서 유생들이 유숙하던 곳인 직방재(直方齋)와 일신재(日新齋), 대학 강의실 격인 학구재(學求齋), 지락재(至樂齋) 건물이 있다.

영정각(影幀閣)은 여섯분의 초상을 봉안한 곳으로 주요 영정은 영인본이고 원본은 소수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건물 왼쪽 벽면왼쪽은 미수(眉叟) 허목(許穆)영정(影幀) 오른쪽은 오리(梧里)이원익(李元翼)영정, 주자(朱子)영정이다.

왼쪽은 회헌 안향(晦軒 安珦) 영정 , 가운데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영정 , 오른쪽은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영정 이다.

제사용 그릇 등을 보관하는 곳으로 춘,추 제향 때 제물을 마련하는 곳인 전사청(典祀廳)과 충효 교육관을 지나면 옛 숙수사지의 유물들이 있고 해시계로 중간에 막대기를 꽂아 그림자를 보고 시간을 재는 일영대(日影臺)가 있다.

사료관(史料館)은 역사를 연구하거나 편찬하는 데 있어서 재료가 되는 문헌이나 유물을 모아 놓은 전시관이다.

백운교를 건너 취한대로 간다.

죽계천과 소나무

광풍정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바로 소수박물관인데 박물관은 패스 했다.

취한대(翠寒臺)는 경렴정과 함께 휴식과 더불어 자연을 벗하며 시도 짓고 학문을 토론하는 장소로 이용하였다고 하며 퇴계 이황 선생이 건립했다고 한다. 취한대 옆 경자바위는 주세붕이 백운동(白雲洞)과 경(敬)이라는 한자어를 바위에 새겼다고 해서 경자바위라고 부른다고 하는데 지나쳐 보지 못해 아쉬웠다.

취한대를 마주 보고 있는 경렴정과 소나무 

죽계천 징검다리를 건너 밖으로 나간다.

죽계천 징검다리에서 바라 본 취한대

소수서원 관람을 마치고 부석사로 향한다.

▲백두대간 산행하며 늘 궁금했던 부석사를 찾았다. 부석사 불교문화 유산 안내소를 지나고 은행나무 길을 지나면 일주문을 만나다. 일주문에는 태백산 부석사라 적혀 있는데 부석사가 자리한 봉황산은 그 뒤편 선달산으로 이어지면서 태백산 줄기에 속해서 그렇게 적었다고 한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소백산 부석사가 맞지 않을까 생각된다. 물론 큰 백산과 작은 백산, 두 산은 하나이니 상관은 없지만 말이다. 일주문은 사찰 진입로 입구에 세우는 문이다. 기둥이 한 줄로 되어 있어 일주문이라고 부른다. 부석사 일주문에는 문 없이 기둥만 두 개가 서있다. 사찰의 이 문은 '물리적인 통제의 문이 아니라 마음의 문이라는 의미'여서 문이 없다고 한다.

부석사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신라시대 석조유물인 ‘당간지주(幢竿支柱) ’를 만난다.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세워두는 것으로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이곳에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 두는데 이 깃발을 걸어두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이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사찰에 들어갈 때 일주문, 금강문 다음에 거쳐야 하는 문이 천왕문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수미(須彌)산의 4주(洲)를 수호하는 신(神)인 사천왕상을 안치하여 사찰을 지키고 악귀를 내쫓아 불도를 닦는 사람들에게 사찰이 신성한 곳이라는 생각을 각인하기 위해 세워졌다고 한다. 천왕문(天王門) 편액은 효남 박병규 (曉楠 朴秉圭 1925~1994)의 글씨고 사천왕은 증장천왕(增長天王), 광목천왕(廣目天王), 다문천왕(多聞天王), 지국천왕(持國天王)이 있다. 천왕문에서 직진하면 중생들에게 윤회전생(輪廻轉生)을 깨우치게 한다는 의미의 회전문(廻轉門)이 보인다.

봉황산 부석사 현판이 있는 누각

부석사 석축(회전문)을 오르고 나면 3층 석탑이 나오는데 3층 석탑은 동서로 마주 보고 있다. 무량수전 옆에 있는 3층 석탑(보물 249호)과는 비슷하지만 조금 늦게 만들어진 석탑이라고 한다.

안양루와 무량수전

부석사(浮石寺) 편액은 1956년 부석사를 방문하여 우남 이승만(雩南 李承晩/ 1875∼1965) 전 대통령이 쓴 글씨다.‘안양’은 극락을 의미한다. 안양문을 지나면 아미타불이 계신 극락세계, ‘무량수전(無量壽殿)’이 나온다.

무량수전은 극락정토에 머물면서 중생들을 주제하는 아미타불을 모시는 적각으로 극락전 또는 미타전이라고도 부른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는 부석사의 중심 법당으로 무량수는 태어남과 죽음이 없는 영원한 생명을 뜻한다. 무량수전은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창건 할 때 지었다고 추정되지만, 그것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고려 헌종 7(1016)에 고쳐 지었으며 공민왕 7(1355)에 왜적의 침입으로 불에 타서 우왕 2(1376)에 다시 짓고 조선 광해군 3(1611)에 수리하였다. 이후 일제강점기인 1916년에 해체하여 수리하였다.무량수전은 안동 봉정사 극락전과 함께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로 고려시대 사찰 건축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전각이다.

안양루는 부석사 무량수전 앞마당 끝에 있는 누각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중층 다포계 팔작지붕의 형식을 가진 16세기 사찰문루 건축의 대표적인 건물이다. 『계암일록(溪巖日錄)』, 「부석사 안양루 중창기(浮石寺 安養樓 重刱記)」등의 문헌자료에 의하면, ‘강운각(羌雲閣)’이라는 단층 건물이 1555년 화재로 소실되어 1576년에 현재의 ‘안양루’를 지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안양루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소백산 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어 정말 천상의 세계 같다고 한다. 안양루(安養樓) 편액은 소남 김종호 (小南 金宗鎬 1901~1985) 의 글씨다.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榮州 浮石寺 塑造如來坐像)은 다른 불상과 달리 서에서 동쪽으로 바라보게 배치되어 있다. 동쪽에 극락이 있다고 하여 동쪽을 바라보도록 불상을 배치하였다고 한다.

부석사 삼층석탑(보물 제249호)은 문무왕 16년(676) 부석사를 창건할 당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아래층 기단의 너비가 매우 넓고, 1층 몸돌 또한 높이에 비해 너비가 넓어서 장중해 보인다. 1956년에 석탑을 해체하여 복원하였고, 석탑의 파손된 부분은 새로운 부재로 보충하였다. 탑은 원래 법당 앞에 건립되는 것이 통례이나 이 석탑은 법당의 동쪽에 세워져 있어 눈길을 끈다.

부석사 조사당(국보 제19호)은 의상대사의 초상을 모시고 있는 곳으로 조사당(祖師堂) 편액은 독특하게 세로글씨다. 조사당 입구 우측 철창 안에 있는 선비화(仙扉花)는 의상대사가 꽂은 지팡이가 나무로 자랐다는 전설이 있는 골담초 나무다. 여성이 골담초 잎을 따서 삶아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어 나뭇잎을 마구 따가는 일이 생기게 되면서 현재는 철책으로 나무를 보호하고 있다다. 1300년을 살아온 골담초로 불가에서는 선비화로 불리고 있다. 조사당은 굳게 닫혀있었다. 조사당 벽화(국보 제46호)는 고려 때 그려진 제석천(帝釋天)과 범천(梵天), 그리고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있었는데, 1916년 건물을 수리하면서 무량수전으로 옮겼다가 지금은 부석사 성보박물관에 보관 중이라고 한다.

멀리 백두대간 능선이 보인다.

무량수전 서쪽에 부석사란 이름의 유래가 된 '부석(浮石)' 바위 즉 ‘뜬 돌’이 있다. 이 바위는 위아래가 붙지 않고 떠 있다.자세히 보면 '돌 석(石)' 자에 '점'이 찍혀있는데 이는 누가 왜 새겼는지는 알 수 없다.

부석 바로 아래에 조성된 석조석가모니좌상, 자연미도 좋지만 불상도 좀 닦지 이끼가 많이 끼어 있다.

부석사 구경을 마치고 종점식당에서 산채비빔밥으로 점심 식사를 했다.

1인분에 만원, 그냥 먹을만 했다.

부석사 인공폭포

부석사 영원한 지금, 소나무가 멋지다. 이제 부석사를 떠나 축서사가 있는 문수산으로 향한다.

문수산(文殊山) 축서사(鷲棲寺) 일주문은 특이하게 산중에 있지 않고 도로에 있다. 그래서 축서사 가는 길은 다른 산 절과는 다르게 올라가는 길이 좋다. 넓게 포장된 도로를 거침없이 달려 축서사로 향한다.

축서사 경내로 들어가는 누각 보탑성전(寶塔聖殿)은 사찰 출입문 역할을 한다.

보탑성전에서 바라보는 서쪽 백두대간 풍경, 축서사는 서향이고 앞이 탁 트여 저녁노을이 아름다운 사찰이라고 한다.

보탑성전을 올라와서 본 오층보탑(五層寶塔) 전경은 신라말이나 고려 초기에 창건된 유서 깊은 절이라지만 고풍스런 맛은 전혀 나지 않는다. 오층보탑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다. 오층보탑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선열당(禪悅堂), 왼쪽에는 심검당(尋劍堂)이 있다.

선열당(禪悅堂)은 스님, 행자님들의 거처와 24시간 개방되어 있는 대중 선방이 있는 곳으로 이곳 축서사의 대중선방 전각들은 모두 크기가 정면이 7칸으로 규모들이 대단하다.

심검당(尋劒堂)은 사리탑 좌측에 있는 전각으로 종무소와 신도회및 소임자들의 거처로 쓰이는 장소라고 한다.

축서사(鷲棲寺)는 독수리 ()’, 깃들 ()’독수리가 사는 절이라는 뜻이다. 험준한 문수산 산세가 풍수적으로 독수리의 형국이라고 한다. 독수리는 지혜를 상징하며, 불교에서는 대지혜의 문수보살님을 의미한다고 한다. 문수보살이 사라진 자리에 불상만 남은 것을 의상대사가 이 대웅전 터에 법당을 짓고 불상을 모신 축서사 대웅전이다. 창건 설화에 의하면 문수산 아래 지림사(智林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지림사 스님이 어느 날 밤 문수산 쪽에서 휘황찬란한 빛이 발산되고 있어 광채가 나는 곳으로 달려 가니 한 동자가 아주 잘 조성된 불상 앞에서 절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얼마 후 그 동자는 청량산 문수보살이라고 말하며 구름을 타고 사라져 버리고 불상만 남았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의상 대사는 불상을 모실 곳을 찾아다니다가 현 축서사 대웅전 터에 법당을 짓고 불상을 모시고 축서사를 창건하고, 산 이름도 문수보살이 출현하였다고 해서 문수산이라고 했다고 한다.

▲대웅전에서 바라 본 모습으로 축서사는 조선 말기에도 여러 채의 건물이 있었고, 상대암, 도솔암, 천수암의 셋 암자를 거느리고 중이 44명이 살던 큰 절이었다. 그런데, 대한제국 말기 을사보호조약(1905)과 정미7조약(1907)으로 일본의 속국화되는 것을 분개하여 전국적으로 의병이 무장 봉기하여 항일 투쟁할 때 일본군이 의병을 토벌하기 위해 축서사를 방화하여 불태워 대웅전(지금의 보광전) 1동만 남기고 전소시킨 가슴 아픈 역사가 있다. 축서사는 일제강점기에 폐사로 있다가 6.25 한국전쟁 이후 조금씩 복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여 스님이 1996년부터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시작하여 1999년에 대웅전과 적멸보궁을 완공하고 2003년에 운수각, 선열당, 안양원, 심검당 등을 건립하였으며, 2006년에 극락전을 완공하였다.

축서사 보광전 앞에 있는 팔각 석등(石燈)은 등불을 밝혀주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3단 받침돌을 두고, 위에는 지붕돌과 머리 장식을 얹었다.

대웅전 뒤 높은 언덕 위에 아미타삼존불의 조형물이 있다. 아미타불의 이름은 무한한 광명이란 뜻이라고 한다. 서방정토에 머물면서 중생을 극락으로 이끈다는 부처가 아미타불이라고 한다.

▲경내를 다시 한 번 쳐다보고 이제 산행을 준비한다.

▲절에서 나와 내려오니 산행 초입이 보인다.

실질적인 산행 초입이다. 149 명산 중 정상에 오르지 못한 딱 하나의 산에 오르기 시작한다.

▲산행 시작하고 약 40분만에 능선에 오르니 주실령에서 올라오는 길과 합류한다. 이제 정상까지 780m 남았다. 능선에 오기까지 급한 오르막이 있기도 했지만 크게 위험하거나 험한 곳은 없고 등산로는 잘 되어있어 무난 했으며 친구를 먼저 보내고 내 페이스에 맞춰 산행을 하니 비교적 쉬웠다. 

계단이 바로 나오지만 이제 무척 쉬운 길이 정상까지 이어진다. 삼거리 능선까지 이어지던 급격한 경사는 이제 사라지고 정상까지 부드러운 능선길이다.

능선부터는 아주 쉬운 길이다.

내리막도 나오지만, 산책로 정도 수준으로 이어지는 정상가는 능선길이다.

▲정상 오름 전 가부재 갈림길이다. 정상에서 길을 잘못 생각해 조금 진행하다 돌아 온 곳이기도 하다.

삼각점은 1,207.4m라 적혀있고 정상석은 1.205m로 적혀 있는 문수산은 경상북도 봉화군의 물야면 개단리, 봉성면 금봉리, 춘양면 서벽리 경계에 있는 산이다. 세종실록지리지"봉화의 진산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봉화)"조선 세조 3년에 순흥 문수산(文殊山)의 물 동쪽 땅을 떼어서 예속시켰다."라는 기록이 있다. 여지도서(순흥)"백병산에서 뻗어 나와 안동 학가산(鶴駕山)의 으뜸 줄기를 이룬다."라고 하였고, 여지도서(안동)"내성현의 북쪽에 있다. 북쪽의 안동 태백산에서 뻗어 나와서 동쪽으로 봉화 갈방산으로 뻗어 나간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순흥)"지금은 순흥에 속한다."라는 간략한 기사만 나와 있다. 이들 관찰 사료의 내용은 지명의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시사할 뿐 유래에 대해서는 아무런 단서를 제공하지 않는다. 최근에는  문수보살이 출현하였다고 해서 문수산이라고 했다고도 한다.

▲정상에서 친구에게 내 가방을 가지고 오라했는데 결론적으로 잘못 생각하여 잠시 알바 아닌 알바를 했다.

문수지맥은 백두대간 옥돌봉 서남쪽 280m지점에서 분기하여 서남진하며 낙동강 본류와 내성천을 가르며 문수산(1207.6m), 갈방산(712m), 만리산(791.6m), 용두산(665m), 복두산(509m), 요성산(490m), 박달산(580m), 봉수산(569.6m), 천등산(575.4m), 조운산(635m), 학가산(874m), 보문산(641.7m), 대봉산(210m), 검무산(331.6m), 마부산(330m)을 일구고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 낙동강 본류에 합수되는 삼강나루터 앞에서 그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약 114.5km 되는 산줄기이다.나는 백두대간 2회와 9정맥 종주, 3기맥을 하고 그 이후론 지맥은 안하기로 마음 먹어 현재는 지맥에 관심이 없다.

▲정상으로 돌아와 정상석 앞으로 직진해야 축서사로 갈 수 있다. 문수산 정상에서 직진하는 이 코스는 송이버섯 채취 시기인 8월 말부터 10월 초순까지는 갈 수가 없다. 이 시기에는 문수산 삼거리 0.78km로 되돌아가 축서사로 하산해야 한다.

북향으로는 두위지맥, 그리고 옥돌봉에서 구룡산으로 이어지는 대간 마루금이 보인다.

▲소백산 능선이 잘 조망된다.

문수산 정상에서 직진하여 하산하다 보면 광케이블이 매설되어있다는 안내가 계속 이어진다. 이 표시를 보면 올바른 하산을 하고 있다고 판단하면 된다.

▲하산 시작하고 약 25분 뒤 묘지가 나오면 오른쪽으로 가야 한다. 시그널이 있어 걱정 할 필요는 없다.

계곡을 건너 식수 탱크가 있고 축서사 경내 주차장으로 들어가 일정을 마무리했다.

우리나라 100대 명산은 4군데서 지정하고 있다. '산림청', '블랙야크', '한국의 산하', '월간 산' 나는 산림청 지정 100대 명산 완등을 마치고 나머지 3곳과 중복되지 않는 49개(블랙야크 21개, 한국의 산하 9개, 월간 산 19개) 산 완등에 나섰지만 서두르지 않다가 이번에 마무리했다.

축서사 주차장 산행 마침

▲대전으로 돌아 오며 속리산 휴게소에서 바라 본 구병산

▲대전 도착, 반석동 소고기 맛집 서가집에서 149 명산 완등 축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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