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문산 (龍門山, 1157m ) : 용문사, 가섭봉, 장군봉, 함왕봉, 백운봉
용문관광단지→용문사→마당바위→가섭봉→장군봉→함왕봉→백운봉→새수골
◇ 산행지 :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옥천면 일원
◇ 산행일자 : 2012. 11. 21 (수) 날씨 : 맑음
◇ 산행거리 : 약 12 Km
◇ 산악회및 친구 : 홀로
◇ 산행시간 : 6시간 20분 산행 ( 점심 15분, 백운봉 휴식 15분 포함 )
◇ 시간 대별 요약
- 04:40 기상
- 05:03 병점역 전철 탑승
- 08:01 용문역 하차
- 08:15 조식
- 09:00 용문터미널 용문사행 탑승
- 09:20 용문관광단지 하차
- 09:23 매표소 산행 시작
- 09:27 용문사 일주문
- 09:42 용문사
- 09:50 상원사 갈림길
- 10:16 용각바위
- 10:38 마당바위
- 11:12 용문사, 상원사 능선 갈림길
- 11:58 용문산 가섭봉(정상)
- 12:47 장군봉 (점심 15분)
- 13:10 사나사 갈림길1
- 13:19 함왕봉
- 13:51 사나사 갈림길2
- 14:04 연수리 갈림길
- 14:18 백운봉(15분 휴식)
- 14:54 두리봉 갈림길
- 15:08 백년약수터
- 15:40 용문산 자연 휴양림 산행마침
※ 특기사항
① 전철이용 용문역 이동
② 용문산 두 번째(정상은 처음) 산행
③ 응달에는 눈과 빙판 길
④ 백운봉에서 만난 분 차 이용 서울 도착
⑤ 산행 후 양평 족발집 막걸리
※ 산행 전 사전 조사
<양평(楊平) 지명 유래>: ‘양평’의 지명은 양근군과 지평군의 두 지역이 합쳐진 통합호칭으로 양평군(楊平郡)이라 불리게 되었다.양근군(楊根郡)은 본래 양근군 또는 항양군(恒楊郡)이라 불렸으며(고구려시대) 다시 빈양현(濱陽縣)으로 고쳤고(신라시대), 후일에 옛 지명인 양근현으로 고쳐(고려) 조선시대까지 계속 불리어 왔으나 고려시대에 잠시 영화(永化) 또는 익화(益和)라고도 했다. 다음으로 지평군(砥平郡)은 지현군(砥峴郡)이라 불렸으며(고구려시대), 다시 지평군으로 고쳤다(신라시대). 지역의 수준급수가 감무에서 현(縣)으로까지 승격된 적도 있는 곳이다. 두 연접지역이 1908년 9월 서로 합쳐 양평군이 되었다. 그 후 일제시대에는 주권이 상실되어 있었던 1914년 3월(甲寅年) 전국의 317郡 4,351面을 12府 218郡 2,517面으로 통폐합 조치한 강제령에 따라 양평군과 지평군이 합병되어 그 당시의 순수성을 담고 이어온 우리 민족의 고유한 지명들이 거의 말살된 채로, 두세 개 이상의 지명을 임의로 조작 합성어(合成語)가 되므로 써 양평군뿐만 아니라, 한국의 전 국토의 고유 지명은 구전(口傳) 또는 변음(變音) 속음화(俗音化)로 바뀌어 전해지고 있다.(출처:네이버지식 오픈백과)
<사나사(舍那寺)의 유래>: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여엄이 고려 태조와 함께 이상적인 "불국토연화장" 세계를 건설하려는 뜻으로 노사나보신불상(盧舍那報身佛像)을 봉안하고 사나사라 이름 하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 화주승(化主僧)이라 하는 범사(梵師)가 절을 세우고 불상을 모시려 백일기도를 하였는데 하늘에서 천장노사나불(天藏盧舍那佛)이 출현하여 즉시 그 불상을 제작하여 절에 모셔 사명(寺名)을 "사나사"라 하였다는 설이다.
※ 용문산 산행 지도
※ 산행 후기
용문산은 2005년 8월 15일에 다녀온 적이 있다. 그때는 처갓집 식구들과 휴가 중이었는데 혼자서 중미산-소구니산-유명산을 다녀온 후 내 차량을 이용해 그 다음날 용문산을 다녀 온 기억이 있는데 당시는 정상을 개방하지 않은 상태여서 정상은 밟아 보지 못하고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그 이후 2007년 11월 17일 정상을 개방 한 후에는 한 번도 가 본적이 없어 언젠가 한 번 가 보아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한강기맥을 시작하면 용문산을 지나가니 그때 가 볼까 하다가 그때는 능선만 타야 되므로 천연기념물인 은행나무가 있는 용문사를 기점으로 산행을 하고 싶어 혼자서 다시 용문산을 가기로 했다. 문제는 전철을 이용하여 용문역까지 가려니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우선 첫차를 알아보니 5시 3분 전철이 있다. 스마트폰에 있는 지하철 내비게이션을 이용하여 용문역 도착 시간을 알아보니 대략 3시간이 소요되어 아침식사는 용문역에 내려서 하고 점심은 김밥을 사서 해결하려고 계획을 세웠고 산행을 대비해 술은 마시지 않은 상태로 일찍 잠이 들었다. 산행 당일 4시40분에 기상하여 샤워를 한 후 병점역에서 5시 3분 첫 전철을 타고 용산역에 내려 중앙선을 기다렸는데 결과적으로 조금 잘못된 판단이었다. 기다리는 시간이 많았기에 잠시 역내 구내 매장에서 우유와 빵을 산 후 중앙선 첫 차를 타고 용문역에 도착하니 용문역까지는 3시간이 소요되어 지루한 느낌이었다. 단 지하철이 시민의 발이란 용어처럼 비용은 많이 들지 않았다. 용문역 주변 식당을 찾아보니 양평 해장국 집도 눈에 띠었으나 소머리국밥집에서 아침 식사를 한 후 터미널로 이동 했는데 결론적으로 말해 용문역에서 기다렸어도 되는데 터미널로 가서 탄 꼴이었다. 용문사에서는 한 사람이 내렸는데 내릴 때 보았을 뿐 산행을 시작 한 이후로는 볼 수 없었다. 용문관광단지는 한 번 와 보았었는데도 버스에서 내리니 기억이 전혀 없다. 아스팔트를 따라 용문사에 도착하여 은행나무와 용문사를 돌아 본 후 본격적인 산행은 시작되었다. 산행을 시작하자마자 상원사 갈림길이 나왔는데 마당바위도 보고 싶고 계곡 길도 걷고 싶어서 상원사 길은 포기하고 계곡을 택했는데 한 겨울이 코앞인데도 맑고 깨끗하고 수량이 많은 계곡 물이 알탕을 하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생겼지만 산행을 마친 이후라면 모를까 또다시 땀범벅이 될 것 같아 포기하고 발길을 재촉했는데 응달에는 이미 빙판을 이루고 있어 넘어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걸어야 했다. 마당바위를 지나면서 물줄기가 두 갈래로 갈라지면서 가파른 오름이 시작되었는데 눈이 얼어붙어 하산은 능선을 타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만들었다. 마당바위부터 정상까지는 약 1시간 20분이 소요 되었는데 산행 중 가장 힘든 시간이었다. 산행을 시작하고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해서 정상에 오르면 인증 샷을 해야 하는데 사람이 없을까봐 걱정했는데 정상 오름 직전 인천에서 오셨다는 두 아주머니를 만나 정상에서 인증 샷을 할 수 있었다. 두 분에게 산행기점을 여쭤보니 상원사에서 올라왔는데 아이젠이 없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당초 산행 계획을 바꾸어 용문산 휴양림으로 하산하기로 결정을 한 후 서둘러 장군봉 방향으로 향했다.장군봉에 도착하여 김밥 한 줄 그리고 빵과 우유로 점심을 간단하게 했다. 이후 산행은 특별함이 없었다. 마치 정맥 한 구간을 하는 것처럼 밋밋한 흐름으로 오르내렸는데 백운봉 오름 전 한참을 내려 간 후 백운봉에 올라서려니 너무 힘든 구간이었다. 하지만 계단으로 정비가 잘 되어있고 안내판도 잘 되어있어서 산행 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백운봉에 올라서니 아주머니 두 분이 과일을 먹고 있다. 어디서 오셨냐고 여쭤보니 한 분은 양평에 사시고 한 분은 서울에서 왔다고 한다. 사과를 깎아 한 쪽씩 드리니 감으로 답례를 한다. 어디로 하산 하는지 물어보니 나와 같은 새수골이다. 서울 가는 길에 전철역 아무 곳이나 내려달라고 하니 흔쾌히 부탁을 들어주신다고 한다. 차량을 얻어 타기 위해 같이 하산을 했는데 문제는 산행 속도가 엄청 느렸다. 산행 보조를 맞출 수 없어 먼저 하산하여 기다리기로 하고 백년약수에서 물을 받아 약식으로 씻었는데도 오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약수터에 왔는데 나는 다시 먼저 내려가서 기다리겠다는 인사를 한 후 새수골로 향했다. 새수골에 도착하여 씻을 곳을 찾으니 휴양림 식기 닦는 곳에서 물이 나오고 있어 다시 약식으로 씻고 두 사람을 기다려 양평의 족발집에서 차 얻어 타는 비용으로 막걸리 세병으로 하산 주를 한 후 서울로 향했다.
※ 산행 사진
▲ 용문역 앞 소머리 국밥집에서 아침 식사
▲ 용문역 앞에서 용문사행 버스가 정차 한다. 그러므로 일부로 버스터미널까지 갈 필요는 없다.
▲ 용문사 가는 버스 시간표
▲ 용문터미널에 있는 용문산 산행 지도와 중원산 산행지도
▲ 용문산 관광지 도착
▲ 용문사 입구에 문화재 관람료 명목으로 입장료를 받고 있다. 이번 산행 코스상 문화재 관람료를 안 낼 방법은 없지만 문화재 관람료를 내야 하나? 문화재 관람료에 대해 인터넷에 오른 글들을 보면 상당히 비판적이다. 나 역시 문화재를 관람하지도 않으면서 낸 적이 많았기에 문화재 관람료에 대해서 긍정적이지 않다. 하지만 이번엔 관람 안 할 방법이 없으니 어쩔수 없다.
▲ “용문산관광단지 입구에는 겸재(謙齋) 양창석(梁昌錫)이라는 이가 쓴 용문팔경(龍門八景)이란 시비가 있다.
▲ 용문사 일주문
▲ 당초 계획은 상원사로 올라 장군봉 가섭봉 용문사로 원점회귀 하려 했었는데 산행을 하며 4코스로 바뀌었다.
▲ 용문사 은행나무:현재 우리나라에 생존하고 있는 은행나무들 중에서 가장 크고 우람하며 오래 된 것으로 용문사 대웅전 앞에 위치하고 있다. 은행나무는 나이가 약 1,100여년으로 추정되며 높이 60여 미터에 줄기의 가슴높이 둘레가 12.3m을 넘어 동양에서는 가장 큰 은행나무이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신라의 마지막왕인 경순왕(敬順王)이 그의 스승인 대경 대사를 찾아와서 심은 것이라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세자 마의태자(麻衣太子)가 나라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에 심은 것이라고도 하고, 신라의 고승(高僧)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것이 뿌리가 내려 이처럼 성장한 것이라고도 한다. 많은 전란으로 사찰은 여러 번 피해를 입었지만 특히 정미의병이 일어났을 때 일본군이 의병의 본거지라 하여 사찰을 불태워 버렸으나 이 은행나무만은 불타지 않고 살아남았던 나무라하여 천왕목(天王木) 이라고도 불렀고 조선 세종(世宗)때에는 정3품(正三品)의 벼슬인 당상직첩(當上職牒)을 하사(下賜)받기도한 명목(名木)이다. 이 나무에는 또한 전설이 있다. 옛날 어느 사람이 이 나무를 자르려고 톱을 대었을 때 톱자리에서 피가 쏟아지고 맑던 하늘이 흐려지면서 천둥이 일어났기 때문에 중지하였다하며 또한 나라에 큰 변이 있을 때 소리를 내었다고 하는데 고종이 승하하였을 때에는 커다란 가지가 1개 부러졌고 8.15해방과 6.25사변 때에도 이 나무에서 이상한 소리를 내었다고 한다. (출처:백운신문&양평방송)
▲ 용문사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본사인 봉선사(奉先寺)에 속해 있다. 913년(신덕왕 2) 대경 대사가 창건하였으며, 고려 우왕 때 지천대사가 개풍 경천사의 대장경을 옮겨 봉안하였다. 1395년(태조 4) 조안화상이 중창하였으며, 1447년(세종 29) 수양대군이 어머니인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의 원찰로 삼으면서 보전을 다시 지었다. 1457년(세조 3) 왕명으로 중수하는 등 중 ·개수를 거듭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절집이 304칸이나 들어서고 300명이 넘는 승려들이 모일 만큼 번성했던 것으로 보인다.그 후 1907년(융희 1)에 왜군의 병화로 전건물이 소실된 것을 당시의 주지 취운(翠雲)이 소규모로 재건하여 유지해 오던 중 그마저 6 ·25전쟁 때 파괴되어 3칸의 대웅전과 관음전 ·산령각(山靈閣) ·종각 ·요사(寮舍) 등만 남게 되었다. 1982년부터 대웅전, 삼성각, 범종각, 지장전, 관음전, 요사채, 일주문, 다원 등을 새로 중건하고, 불사리탑, 미륵불을 조성하였다. 절에서 동쪽으로 약 300m 떨어진 곳에 조선 전기의 정지국사(正智國師)부도 및 정지국사탑비가 있다. 부도와 탑비는 함께 보물 제531호로 지정되어 있다. [출처]:두산백과
▲ 용문사를 벗어나자마자 있는 등산 안내도
▲ 상원사 갈림길
▲ 한겨울인데도 불구하고 수량은 풍부했으며 계곡이 끝나는 지점까지 알탕 유혹에 흔들려야 했다.
▲ 응달은 빙판이었다.
▲ 용각바위
▲ 마당바위
▲ 상원사로 오르면 만나는 지점(내가 오른 마당바위 계곡길 보다는 편안하다고 한다)
▲ 안내판과 안전시설은 잘 되어 있다.
▲ 장군봉 갈림길(정상인 가섭봉에서 장군봉으로 가는 길은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어 갈 수 없다)
▲ 가섭봉에 있는 통신시설
▲ 용문산 가섭봉(伽葉峯)유래: ‘가섭봉’은 예로부터 용문산내 ‘석가봉’, ‘아난봉’ 등과 함께 ‘용문산 불교 3봉’으로 일컬어 지고 있으며 ‘가섭’은 부처님에게 염화시중의 미소를 보낸 ‘마하가섭’를 ‘가섭존자’를 칭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용문산은 제1봉 가섭봉(1157m)에 이어 석문(1127m), 제2봉 장군봉(1056m), 제3봉 백운봉(940m), 함왕봉(887m), 도일봉(864m), 중미산(801m) 순으로 준령들이 펼쳐져 있다. 지질은 전체적으로 호상편마암과 편암, 그리고 충적층이 분포돼 있다. 1786년 조선 정조 10년 병오연 전남 무안군에서 태어난 초의선사(숙명 홍중부)는 46세되던 1831년(순조31년) 용문산을 여행하며 남긴 일기에 “수월암(지금의 백운봉밑 세수골)에서 하루를 자고 가섭봉에 올라서 윤필암과 상원암을 거쳐 용문사에 이르렀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19세기 용문산 정상이 가섭봉으로 통칭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용문면 일부 주민들이 말하는 가섭재(가협치)는 용문산 정상이 아닌 사나사 북동쪽 용문산 중턱 있는 고개로 이 고개를 넘으면 가섭봉을 지나 용문면 연수리로 통한다.(출처:용문산 자연휴양림)
▲ 용문산: 용문산은 고산다운 풍모와 기암괴석을 고루 갖추고 있는 산으로 관련된 속담도 회자된다. “용문산 안개 두르듯”은 ‘옷을 치렁치렁 걸친 모양을 비유한 말’이며, “용문산에 안개 모이듯”은 ‘여기저기서 한 곳으로 집결하는 모양을 이르는 말’이다. 자욱한 안개 속에서 용이 승천하는 모습이 연상되는 속담이다.‘용이 드나드는 산’, ‘용이 머무는 산’, 용문산의 원래 이름은 ‘미지산(彌智山)이라고 전해온다. ’미지‘는 ’미리의 옛 형태고, ‘미리’는 경상, 제주지방의 ‘용’의 방언이듯이 용과 연관이 있다. ‘용’의 옛말인 ‘미르’와도 음운이 비슷하다. 즉 미지산이나 용문산이나 뜻에서 별 차이가 없다는 얘기다. 그런데 ‘미지산’에서 ‘용문산’으로 언제 바뀌어 불렀는지 정확치는 않으나 조선 태조 이성계가 용이 날개를 달고 드나드는 산이라 하여 ‘용문산’이라 칭했다는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실제 1769년 신경준이 쓴 우리나라 산세를 백두대간과 정간, 정맥으로 구분한 <산경표>엔 ‘미지’라는 산명으로 기록돼 있으며, 그보다 200여년 앞선 1530 조선 중종 25년에 이행과 홍언필이 제작한 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미지산은 현 서쪽 20리 되는 곳에 있다’고 기록, 미지산이라는 지명이 살아 있다. 그러나 14세기 조선 중기시인 이적의 시 중에 양근 양평 옛 지명을 “왼쪽으로는 용문산에 의지하고”라는 구절이 있는 것을 보면 14세기부터 용문산이란 이름이 미지산과 함께 쓰인 게 분명하다. 또한 1710년 조선 숙종 36년 윤두서가 작성한 조선의 지도인 <동국여지도>와 1861년 조선 철종 12년 고산자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에도 ‘용문산’으로 기록된 점을 볼 때 18세기 이후에는 ‘용문산’으로 완전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고려말 문인 이색이 지은 <기지평현 미지산 용문사 대장전기>나 조선초 문인인 권근이 지은 <미지산용문사 시정지국사비명병서>, 조선초 세조때 지어진<용문사기>, 조선초<미지산사나사석종명병서>등의 기록과 그리고 조선초<조선왕조실록>등 고려말에서 조선초까지는 미지산으로 기록돼 있다. (출처:용문산 자연휴양림)
▲ 공군기지가 주둔하고 있는 군사시설보호구역으로 각 방송국 중계기지국 시설 까지 복잡하게 얽혀있어 용문산 정상은 그동안 개방을 하지 않다가 2007. 11. 17 (토) 08 : 30분부터 개방했다. 2005년 8월 15일에 용문산을 갔었지만 그때는 정상을 가지 못했고 이번에 정상 인증
▲ 용문산 정상의 산행지도
▲ 정상 갔다 다시 장군봉 갈림길까지 하산 장군봉 방향으로 진행
▲ 장군봉 가기전 뒤 돌아 본 용문산 정상의 모습
▲ 장군봉에 있는 이정목
▲ 가섭봉을 개방 하기 전에는 장군봉이 정상 역활을 했다.
▲ 사나사 갈림길1
▲ 1055봉에 있는 삼각점
▲ 사나사 갈림길 2
▲ 함왕봉 유래: 함왕봉은 함왕성지(咸王城地)와 관련 있는 것 같다. 함왕봉 아래 함왕성지란 오래된 산성(山城)이 있는데, 이는 양평함씨의 시조인 함혁(咸赫)이 쌓았다고 전한다. 함혁은 삼한시대(혹은 삼국시대)에 중원대륙에서 넘어온 사람으로 용문산 서쪽에 성을 쌓고 조그만 세력을 꾸렸다고 한다. 그는 스스로 함왕(咸王)을 칭했는데, 그런 연유로 성의 이름이 '함왕성'이 되었고. 즉 우리나라 함씨의 발생지가 되는 셈이요. 성 밑에는 사나사(舍那寺)계곡이 흐르고, 그 계곡은 함왕성에 터전을 둔 함씨세력에게 생명수와 같아 특별히 옆에 끼고 살았으며, 사나사(舍那寺)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 함왕혈이 이를 증명한다. 또한 계곡 중간에 자리한 사나사(舍那寺)는 함씨의 지원에 힘입어 그들 시조를 모신 원찰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후삼국시대에 이르러 함씨세력의 우두머리인 함규(咸規)가 세력을 크게 불렸는데, 고려 태조(太祖)를 도와 고려의 공신(功臣)이 되었으며, 태조에게 양근함씨(양근은 양평의 옛 지명으로 양근 고을과 지평고을이 합쳐져 생긴 이름)란 본관을 하사 받았고. 그 이후 함씨 세력의 일부가 강릉으로 넘어가 강릉함씨를 이루게 되었으며, 강릉함씨도 양근과 마찬가지로 함왕인 함혁을 시조로 받들고 있다. 함왕의 정체에 대해서는 시조(始祖)인 '함혁'이 아닌 '함규'로 보기도 한다.
▲ 백운봉
▲ 사나사 갈림길 3
▲ 백운봉을 들리지 않고도 형제우물로 갈 수 있다.
▲ 연수리 갈림길
▲ 뒤 돌아 본 용문산 가섭봉
▲ 백운봉에 있는 통일암: 육천만 민족의 염원인 통일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백두산 천지에서 옮겨 이곳 백운봉에 세웠단다.
▲ (백운봉(白雲峰) : 백운봉은 흰 구름이 항상 걸려있다고 해서 유래된 이름으로 주변 능선에 비해 날카롭게 우뚝 솟아 있어 동양의 '마터호른'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스위스 알프스의 여왕'으로 불리는 피라미드처럼 우뚝 서 있는 4,478m의 '마터호른'과의 비교는 조금 과장된 듯하다. 아래 사진이 '마터호른'이다
▲ '스위스 알프스의 여왕'으로 불리는 '마터호른'
▲ 백운봉에서 새수골로 하산하다 보면 형제우물로 갈 수 있는 길이 또 나온다. 아쉽게도 들리지는 못했다.
▲ 두리봉 갈림길
▲ '스위스 알프스의 여왕'으로 불리는 '마터호른'과 안 닮았는데..
▲ 백년 약수터(물 맛은 좋았는데 고인물을 퍼 먹어야 해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 백운봉에서 새수골로 가는 동안에도 계곡물이 제법 있었다.
▲ 용문산 자연 휴양림
▲ 새수골 산행 마침: 새수골의 유래를 알아 보니 옛날 동래 정씨가 이곳에 처음 정착하여 '새로운 곳에서 살만하다'하여 한자로 新宿으로 표기한 데서 유래 했다고 한다. (출처: 양평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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