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요산 (消遙山,587m) : 백운대, 나한대, 의상대, 공주봉
관리소→일주문→하백운대→상백운대→나한대→의상대→공주봉→절터→관리소
◇ 산행지 : 경기도 동두천시 상봉암동 일원
◇ 산행일자 : 2009. 8. 9(일)
◇날씨 : 맑고 바람 없는 폭염. 산행 후 뒷풀이 때 소나기
◇ 산악회및 산행 친구 : 하늘 산악회 친구 14명, 산길 산악회 3명
◇ 산행시간 : 4시간 10분 산행 < 식사 시간 20분 포함>
◇ 산행거리 : 약 9Km
◇ 시간대별 요약
- 07:00 대전 IC 출
- 10:05 주차장 도착
- 10 :15 산행시작
- 11:09 하백운대
- 11:28 중백운대 (점심20분)
- 12:13 상백운대
- 12:46 나한대
- 12:55 의상대
- 13:28 공주봉
- 14:05 속리교
- 14:40 알탕 후 주차장 산행마침
- 15:50 주차장 출발
- 19:40 대전 도착
※ 특기사항
① 산림청 선정 100대 명산.
② 정상은 상백운대가 아니고 의상대임.
③ 명성에 비해 계곡을 제외하면 특색이 없으나 가을 단풍은 좋을 듯 함.
④ 카메라 고장으로 친구 블러그 사진 펌.
⑤ 소나기.
※ 산행 전 사전 조사
<소요산(逍遙山) > : 경기도 동두천시와 포천시 신북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자료에 따라 높이가 536m, 559m, 587m 등으로 서로 다르게 기술되어 있다. 주봉인 의상대 높이가 587m로 낮은 산이긴 한데 모든 봉우리를 다 돌면 4시간 이상 걸린다. 산세가 수려해 경기의 소금강이라고도 불린다. 다만, 보통 좀 더 대중적으로 알려진 소금강은 오대산 소금강이다. 화담 서경덕, 봉래 양사언과 매월당 김시습이 자주 소요(산책)하였다 하여 '소요산'이라 불린 것이라는데, 이 또한 근거가 없다. 산세가 웅장하진 않지만 뾰족뾰족한 기암괴석이 절묘하게 봉우리를 이루기에 경관이 좋다. 그리고 봄에는 진달래와 철쭉이 피고. 가을에는 단풍이 드니 그 또한 아름답다. 한여름에는 등산로 입구를 따라 흐르는 계곡물에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 폭포도 작지만 여럿 있어서 등산 중에 좀 큰 원효폭포와 작은 청량폭포, 옥류폭포 등을 볼 수 있다. 하백운대, 중백운대, 상백운대, 나한대, 의상대, 공주봉의 여섯 봉우리가 원을 그리며 솟아 있다. 계곡을 따라 오르면 청량폭포가 보이는 곳이 하백운대다. 청량폭포를 지나서 암릉으로 된 능선길를 따라 올라가서 나오는 것이 중백운대. 중백운대에서 더 올라가면 상백운대다. 소요산 정상은 의상대다. 이는 산 정상에 있는 봉우리로, 여기에 올라가면 감악산과 국사봉(동두천에 있는 것), 칠봉산 등이 보인다. 동네가 동네인 만큼 주변에 군부대가 많아서 어떤 날에 가면 총소리, 비행기 소리만 듣다 하산할 수도 있다. 소요산에는 신라 선덕여왕 14년인 서기 645년에 원효가 세운 자재암이라는 절이 있다. 원효가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은 후 이 곳 산으로 들어와 수행하다 지은 것이라 한다. 근처에는 자그마한 폭포들이 많고, 자연 석굴인 나한전과 산중턱의 금송굴도 있다. 또한 이 절에는 조선 세조 10년에 간행된 반야바라밀다 심경약소 언해본(보물 1211호)이 보관되어 있다. 등산을 하려면 자재암 입구를 지나가야 하는데(소요산 등산 자체는 자재암을 지나가지 않아도 가능하다) 입장료를 받는다. 문화재관람료라는 명목. 가격은 어른이 천원. 동두천시민은 신분증 제시할 경우 무료입장이 가능하며 명절에는 타 지역 주민들에게도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한다. 또한, 소요산은 아들 이방원에게 팽당한 이성계가 한때 말년을 보내던 곳으로서, 과거 이성계가 머물던 행궁위치에 기념비가 세워져있다. 상백운대에 자주 올라 운치를 구경했다고 한다. 소요산은 서울특별시와 거리도 가깝고, 근처에 소요산역이 있는 등 교통도 좋은 편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등산객 대부분이 1호선 전철을 이용하는데 안내사무소 밖에 열차 시간표까지 걸어 두었다. 평일 출퇴근 시간 외에는 한 시간에 두 번 인천 행 열차가 출발하니 참고하길 바라며 산 입구에는 넓은 주차장과 눈썰매장, 수영장 등의 편의 시설도 구비되어 있어, 수도권 지역의 당일 행락코스로 인기가 좋은 편이다. 1981년에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다. 다들 기억하는지 모르겠지만, 초등학교 6학년 교과서에 '소요산역에 아름다움이 있다.'라는 소요산역장이 쓴 수필이 있었다. 네이버지도나 다음지도를 찾아보면 소요산에 위험구간(위험지역 또는 위험지대)이 많이 나온다. 출처:네이버 나무위키
※ 소요산 산림청 100명산 선정 사유 : 규모는 작으나 상백운대, 하백운대, 중백운대 등 경관이 아름답고, 등산인의 선호도가 높아 '81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된 점을 고려하여 선정하였으며 원효폭포, 청량폭포, 선녀탕절벽과 가을철 단풍이 유명하며, 신라 무열왕 1년(654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자재암이 있음.
※ 소요산 등산지도
※ 산행 후기
목표산행으로 1대간 9정맥을 하고 있기에 2002년 산의 해를 맞아 산림청에서 선정 한 100대 명산에 대해서는 크게 개의치 않고 산행하고 있지만, 100대 명산 중 아직 가 보지 못 한 산이 10산 남았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소요산이다. 당초 지난 달 하늘산악회 정기 산행 계획이었는데 우천으로 한 달 뒤로 연기된 이후로 이번 달에도 가지 못 할까 봐 내심 불안해했는데 인원이 적어도 일단 출발하기로 했다. 산길산악회에서 3명을 공수(?) 해 오고 그동안 모아둔 돈으로 부족한 부분은 보충하기로 하고 진행하기로 했다. 산행 전날이면 이상하게도 꼭 술에 취한 한 팀이 와서 늦게 가는데 그로인해 신경이 곤두 선 나머지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일어났다. 너무 빠르다는 생각으로 배낭을 챙기고 원두막으로 향했는데 산길의 짱이님과 영수씨 그리고 치헌이와 여원이가 먼저 와 있다. 차량 체크를 해 보니 첫 출발지부터 영인이가 늦어 원두막에는 6시 50분경에 차가 도착하여 55분 출발했다. 회장인 내가 오늘 산행에 참여한 여러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에 이어 소요산 설명까지 마친 후 잠을 청했다. 음성 휴게소까지는 잠을 깊이 들지 못하고 멀뚱멀뚱 그런 상태였는데 이후에는 깊은 잠에 빠지고 양주시에서 정화 친구를 태운 후 산행지에 도착했다. 단체사진 촬영 후 매표소에 이르니 국립공원도 입장료를 받지 않는데 절 소유 땅이라며 입장료를 받는데 기분은 유쾌하지 않다. 산행 지도에 정상이 해발 559M로 표기 되어 있기에 별로 힘들지 않은 산이려니 했는데 일주문을 지나고 자재암을 지나 하백운대로 향하니 염천에 가파른 오름길에 장난(?)이 아니었다. 하백운대를 지나 중백운대를 지난 뒤 넓은 자리에서 점심을 하고 상백운대가 정상인 줄 알고 인증사진을 찍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의상대가 해발이 제일 높으며 그곳이 정상이다. 상백운대에서 일부가 하산하고 나머지는 나한대를 지나 의상대에 오른다. 의상대 표석 옆길에 밧줄로 안전을 위해 출입금지를 해 놓은 곳으로 가 보니 시야가 트이고 제법 100 명산인 느낌도 들었다. 공주보에서 기다렸다가 하산팀 모두가 함께 하산을 시작했는데 하산하는 길은 제법 가팔랐으며 구절터엔 절터 모습이 확연했고 그곳부터 운집해 있는 행락객(?)들로 계곡 같지 않은 계곡엔 사람들로 가득했다. 속리교를 지나 일주문 가까이에서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알탕은 하지 못하고 옷을 모두 입은 상태로 물속으로 풍덩하고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버스가 있는 곳으로 가니 여원이 재칠이 진범이 정화가 부침개를 하느라 여념이 없다. 쏘맥으로 거하게 한 잔 하고 버스에 오르니 모두들 화장실은 급하고 부족한 술에 슈퍼만 찾는다. 대전으로 향하는 도중 화장실을 찾지 못해 염치불구하고 노상방뇨하고 건네는 술에 취하여 잠이 드니 어느 사이 대전이다. 가계 보고 있을 집사람 생각에 "저녁을 같이 하러 가자"는 친구들의 유혹을 뿌리치고 발길을 돌리며 그렇게 산행 일정을 마무리 했다.
※ 산행 사진
▲ 주차장 끝에 있는 산행 안내도
▲ 단체사진을 찍었는데 지금도 자주 만나는 친구는 손꼽을 정도다. 당시 산행 친구는 규태, 여원, 치헌, 진석, 명숙, 현자,정화, 영인, 진범, 순남, 재칠, 금옥, 진범, 돈민. 산길산악회에서 여정, 명옥, 명수 이렇게 17명 이었다.
▲ 소요산 입구의 조형물이다. 옆으로는 반공 희생자 위령탑과 독립유공자 추모비가 있다.
▲ 주차비 2000원에 이어 매표소가 나오는데 입장료가 1,000원이다. 동두천시민, 장애인, 군경, 경로자도 무료라고 한다. 2009년 산행시에도 입장료는 받고 있었다. 심지어 카드도 안된다고 한다.
▲ 자재암 일주문을 지나면 삼거리 갈림길이 나온다. 오른쪽은 공주봉을 거쳐 정상인 의상대로 오르는 길이고 왼쪽은 자재암과 하백운대, 상백운대, 칼바위로 오르는코스인데 우리가 선택한 코스는 일주문→자재암→하백운대→중백운대→상백운대→칼바위→나한대→의상대→공주봉→구절터→일주문으로 능선을 한바퀴 돌아서 내려오는 3코스다. 일주문에서 조금만 더 올라 가면 원효굴을 만날 수 있다. 바로 옆에 있는 원효폭포가 있다. 원효폭포을 지나면 바로 첫번째 갈림길이 나온다 그곳에서 자재암 방향으로 가면 된다.
▲ 자재암은 신라 선덕여왕 14년(645)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한 유서 깊은 사찰로서 고려 광종 25년(974) 왕명으로 각규대사(覺圭大師)가 중창했으며, 의종 7년(1153) 화재를 당해 이듬해 각령선사(覺玲禪師)가 대웅전과 요사 일부를 증건했다. 조선 고종 9년(1872) 원공선사와 제암화상이 퇴락된 이 사찰을 44간의 건물로 복원하고 영원사(靈源寺)라 개칭했다. 1907년(순종 원년) 정미의병 때는 이곳이 의병 활동의 근거지였던 탓으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불태워졌다. 이후 제암화상과 그의 제자 성파(性波) 스님이 복원하여 원래 이름인 자재암으로 고쳤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또다시 폐허가 되어 1961년 대웅전, 1971년에 요사, 1974년에 포교당과 원효대, 1977년에는 삼성각을 각각 건립하였다. 자재암에는 보물 제1211호로 지정된(1994.10.17) 『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般若波羅密多心經若疏)』언해본이 보관되어 있다. 이 판본은 현재 보물 제771호로 지정된 서울대학교 도서관본과 동일한 책이나 서울대학교본에 없는 전이 붙어있고, 교정인이 찍혀 있으며 보존상태 또한 훨씬 양호하다. 저지(楮紙) 목판본이며 목판본불상의 복장에서 나온 것인 듯 표지가 없다. (출처:네이버 나무위키)
▲ 자재암을 지나면 하백운대까지 급경사 계단길이 이어진다.
▲ 소요산 백운대 능선의 제일 아래 봉우리인 하백운대의 이정표에는 440m라 표기 되어 있다. 이제 부터 중백운대, 상백운대를 거쳐 의상대, 공주봉으로 이어지는 말굽모양의 등산로가 이어진다.
▲ 소요산 중백운대 이정표
▲ 덕일봉 갈림길의 이정표
▲ 상백운대 가기 전 선녀탕 갈림길의 이정표
▲ 상백운대 이후 칼바위능선이 이어진다. 칼바위는 칼날처럼 날카롭고 뾰족하게 생긴 크고 작은 편마암들의 바위라는 의미로 상백운대에서 시작하여 선녀탕입구 하산로까지 약500m가량 연속으로 이어진 구간이다.
▲ 상백운대에서 단체 사진 (치헌, 진범, 순남, 재칠, 금옥, 규태, 여원, 명숙, 현자, 영인, 돈민)
▲ 나한대는 소요산에서 두번째높은 봉우리다. 나한이란 의미는 불교를 수행하여 해탈의 경지에 이른 수행자를 이르는 명칭이다. 원효대사 이후 이곳에서 많은 고승들이 수행했고 특히 조선태조가 자재암에 머문적이있어 주변의 봉우리들을 불교와 관련된 명칭으로 부르게 되었다고한다.
▲ 소요산의 정상 의상대는 해발587m로 정상은 바위로된 봉우리인데 오르고 내리는구간이 험하고 정상부가 좁아서 사람들이 몰린다. 정상 인증 사진이 있어 다행(?)이다. 이날 이후 사진의 스틱은 소요산 주차장에 놓고 와서 볼 수 없다.
▲ 공주봉 정상엔 상당히 넓은 광장이 있다. 한쪽으로는 계단식으로 단체가 앉을수있는 자리가 만들어져서 강의나 공연도 가능할 것 같다. 이곳이 비박하는 이들에게 최적의 장소다.
원효대사와 요석 공주: 진평왕 39년에 압랑군 남쪽 불지촌의 율곡 사라수 밑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 아이가 바로 원효대사인데 원효대사는 출생부터 남달랐다. 어머니가 원효를 가졌을 때 별똥별이 품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으며, 해산할 때는 오색구름이 땅을 뒤덮었다. 이렇게 태어난 원효대사는 어린시절 부터 총명하고 영리하였다. 청년이 된 원효대사는 29세에 출가하여 영축 산 남지, 훙류낫 연기, 반용산 보덕 등을 찾아 수행하다가 34세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려고 하였다. 당나라로 가는 배를 타기위해 당항성으로 가던 길에 날이 저물어 동굴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다. 잠결에 목이 말라 물을 한 그릇 마셨는데 너무 달고 맛있어서 기분 좋게 잠들었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보니 그 물이 해골에 고인 썩은 물인 것을 알고 급히 토하다가, '모든 것은 자기 마음에 있다'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원효는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신분이 낮은 농민이나 천민들과 어울려 함께 일하고 함께 놀면서 불법을 전하였다. 원효대사의 이름이 이미 신라에 널리 알려졌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원효가 아침부터 미친 사람처럼 거리를 쏘다니며 큰 소리로 이런 노래를 불렀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 주겠는가 나는 하늘을 받칠 기둥을 찍으련다" 사람들은 아무도 그 뜻을 알지 못했다. 이때 태종(무열왕)이 노래를 듣고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스님께서 아마 귀부인을 얻어 훌륭한 자식을 낳으려 하신 모양이구나. 그런 분의 자식이라면 영특할 것은 틀림없고, 나라에 훌륭한 인재가 생기면 그보다 좋은 일이 없지." 마땅한 여자가 없을까 궁리하던 무열왕은 마침 요석궁에서 혼자 살고 있는 공주를 떠올랐다. 왕은 신하들을 시켜 원효대사를 요석궁으로 데려오게 했다. 관리들이 원효를 찾아 나섰을 때, 원효는 이미 일이 그렇게 될 줄 알고 먼저 문천교 다리로 나가 기다렸다. 저 편에서 관리들이 보이자 원효는 모르는 척하고 다리를 건너오다가 일부러 발을 헛딛고 물에 빠졌다. 관리들은 허겁지겁 원효를 건져 내서 요석궁으로 데려갔다. 원효는 젖은 옷을 말린다는 핑계를 대고 옷을 벗고 궁에서 머물렀다. 요석공주는 처음엔 어이가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스님답지 않은 자유분방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하여 둘은 함께 밤을 보내게 되었다. 얼마 후 공주가 아이를 낳으니 그 아이가 바로 유명한 설총이었다. 설총은 나면서부터 어찌나 총명하였던지 어릴 때 이미 유학과 역사에 통달했다. 그는 이두문자를 만들어서 그 때까지 중국어로만 통하던 중국과 우리나라의 문물을 우리식으로 표현할 수 있게끔 했다. 원효대사는 파계해서 설총을 낳은 후로는 속세 사람들이 입는 옷을 입고 다니며 스스로 소성거사라 했다. 또 광대들이 가지고 다니는 둥근 박에 여러 가지 도구를 장엄하여 무애라 이름 짓고 가지고 다니면서 노래하고 춤추며 염불하였으므로 가난 하고 무지몽매한 사람이라도 모두 부처를 알게 되었고 갓난아이들까지도"나무아미타불"을 모르는 자가 없게 되었다. 이 때 부터 신라에서는 누구나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였고, 백성들은 고달픈 삶에 위안을 얻게 되었다. 스스로가 붙인 원효라는 법명은 부처님의 세상을 처음으로 빛나게 하다 라는 뜻인데 원효대사가 이룬 업적을 생각할 때 참으로 그 이름대로임을 알 수 있다. 원효는 이처럼 대중들에게 널리 부처의 가르침을 전했을 뿐 아니라 화엄경과 금강산매경에 대한 해설을 써서 후세에 길이 도움이 되게 했다. (출처 : 한국콘텐츠진흥원)
▲ 공주봉 이후 급경사 계단으로 본격적인 하산길이 시작된다. 구절터로 하산하여 일주문으로, 다시 주차장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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