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백산 (小白山,1439m) : 연화봉, 비로봉, 국망봉, 늦은맥이, 고치령
죽령→연화봉→비로봉→국망봉→상월봉→늦은맥이재→고치령 →좌석리
◇ 산행지 : 충청북도 단양군, 경상북도 영주시, 경상북도 봉화군
◇ 산행일자 : 2012. 2. 4 (토). 날씨 : 맑음 (소백산 칼바람으로 몹시 추웠음)
◇ 산악회및 산행 친구 : 대전시 산사모 회원 38 명. 기대
◇ 산행거리 : 24.83km(포항 셀파산악회 실측거리 기준, 국립공원 이정표는 25.5km)
◇ 산행시간 : 10시간 36분<점심 20분 포함>
◇ 시간 대별 요약
- 03:25 대전 IC 출발
- 06:27 산행시작
- 07:50 제2연화봉
- 08:48 소백산 천문 관측소
- 08:54 연화봉 갈림길
- 09:41 제1연화봉
- 10:29 천동 갈림길
- 10:34 주목감시초소 (점심 20분)
- 11:15 비로봉
- 12:22 초암사 갈림길
- 12:30 국망봉
- 13:15 늦은맥이재
- 14:29 연화동 갈림길
- 17:03 고치령
- 17:16 트럭이용 하산
- 18:35 좌석리 출발
- 21:25 대전 IC 도착
※ 특기사항
① 백두대간 산행기로 100명산 산행기 대체 (5번째 비로봉 정상, 소백산 6번 산행)
② 소백산 칼바람(무릎까지 빠지는 눈으로 인한 고생)
③ 고치령 접근 어려워 역 산행(北進 산행) 실시
④ 고치령에서 좌석리 트럭 이용 하산
⑤ 산행 후 좌석리 뒤풀이(오리훈제),라면
※ 산행 전 사전 조사
<다자구야할미의 전설 > : 죽령산성이 있는 용부원리에는 다자구할미의 전설이 전해져오고 있다. 죽령고개는 옛날부터 오르막 30리 내리막 30리로 아흔아홉 구비의 험준한 고개였다. 이 고개에는 대낮에도 도둑이 들끓어 지나는 행인들을 괴롭혔다. 관아에서도 도둑을 잡기 위해 군졸들을 풀었지만 수목이 꽉 들어차 울창하고 험한 산세를 이용하여 숨어버리므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도둑들에게 재산을 모두 빼앗겨 살기 힘들게 되었다며 웬 노파가 관아를 찾아와 도둑잡기를 자청하였다. 관원이 도둑잡을 방법을 물으니 자신이 도둑소굴로 들어가 동태를 살펴서 알려줄 테니 군졸들을 죽령고개 일대에 숨겨두었다가 “다자구야, 다자구야!”하고 소리를 치거든 급히 잡으러 오고, “들자구야, 들자구야.”하면 도둑이 잠들지 않고 있는 것이니 숨어 있으라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두목의 생일을 맞아 실컷 술을 마신 도둑들이 모두 곯아떨어지자 할머니가 “다자구야! 다자구야!”를 외치자 숨어 있던 관군이 달려 나가 모두 잡아버렸다. 그러나 할머니는 어디로 갔는지 자취를 찾을 길이 없었다. 사람들은 다자구야 할미가 죽어서 죽령산신이 되었다고 믿어 제사를 지내기 시작하였는데 다른 제사들이 모두 밤에 이루어지는데 비해 죽령산신제는 대낮에 행해지며 그 대상이 일반적인 산신령이 아니라 여성신이라는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다자구야 할미를 모시고 있는 죽령산신당은 지방민속자료 제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지금도 용부원리 마을의 부락제로 이어지고 있다
<경북 영주시 순흥면 순흥지> : 죽령 남쪽 영주에서도 풍기나 순흥은 역사 갈피에 이름께나 떨친 땅이다. 풍기는 예로부터 인삼이 유명했고, 더불어 사과와 인견직물도 이름이 났다. 금계동은 편안한 삶을 누릴 만한 땅으로 꼽은 이 땅의 십승지 중 첫 번째로 꼽혔다. 순흥은 지금이야 보잘것없는 시골 동네에 불과하지만 경상 북부의 중심지로 한 시절을 누렸던 도호부(都護府)의 땅이었다. 조선 초까지 영월, 태백, 봉화, 울진을 포함할 만큼 넓었다. 그러나 이곳에 유배되었던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를 위한 거사가 세조 3년(1457)에 발각되면서 순흥 고을은 불바다 피바다가 되었고, 쑥대밭으로 허물어졌다. 지금의 소수서원을 감싸고 흐르는 죽계천에는 수많은 주검들이 수장 되었다. 그들의 피는 죽계천을 따라 20여 리나 흘러 가서야 멈췄으니 지금도 ‘피끝마을’이 있다.
※ 소백산 산림청 100명산 선정 사유 : 국망봉에서 비로봉, 연화봉으로 이어지는 해발 1,300여m의 일대 산군으로1,000m이상은 고원지대와 같은 초원을 이루고 있으며, 국망천과 낙동강 상류로 들어가는 죽계천이 시작되고 국립공원으로 지정(1987년)된 점 등을 고려하여 선정 하였으며 주봉인 비로봉 일대에는 주목군락지(천연기념물 제244호)와 한국산 에델바이스인 솜다리가 군락을 이루고 있음. 희방사(喜方寺), 구인사, 소수서원(紹修書院 : 사적 제55호), 부석사(浮石寺), 온달성, 국립천문대 소백산 천체관측소 등이 유명하다.
※ 소백산 등산지도와 고도표
※ 산행 후기
새해 첫 대간 산행 후 설 명절과 대간 일정이 겹치면서 대간 산행을 한 번 건너뛰다 보니 4주 만에 대간 산행이다. 대간 산행 외에는 장시간 산행 할 기회가 없었고, 고작 계룡산에 한 번 다녀왔을 뿐 동네 뒷산인 계족산만 여러 번 가서 이번 산행을 과연 잘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어 이틀 연속 계족산에서 워밍업을 하긴 했지만 장시간 산행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버스에 올랐다. 얼마 전 제법 많은 눈이 왔고, 혹한기임을 감안하여 소백산 칼바람을 피해 이번에는 다른 짧은 구간을 갈 것으로 예상 했는데 버스 안 회장님 설명은 그대로 강행이다. 소백산은 여러 번 갔지만 갈 때 마다 칼바람으로 인해 고생 했던 기억이 있어서 내심 속으론 러셀이 안 돼 있으면 국망봉 까지 가지 않고 비로봉에서 어의곡리로 하산을 하면 어떨까"이번 산행은 제발 짧게 하길"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죽령에 다가오니 모두들 또 서두른다. 죽령에서 비로봉 오름은 천문대 때문에 연화봉 까지는 아스팔트를 걸어야 해서 나는 스패츠도 안하고 내려서 상황 봐서 아이젠을 착용하려는 마음이 있어서 남들은 서두르든지 말든지 헤드램프만 챙기고 다시 눈을 감았다. 버스에서 내리니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아서 헤드램프를 하고 아이젠을 착용하고 산행을 시작했다. 눈이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은 산행 시작 후 완전히 빗나가서 연화봉 가기 전에 스패츠를 착용했는데 많은 눈으로 인해 비로봉을 지나서는 과연 국망봉으로 갈 수 있을지 의문시 되었다. 제 2연화봉을 표석을 지나면서 전망대에 올라갔다 올까 하다 시야가 좋지 않은데 뭔 의미가 있나 싶어서 건너뛰었는데 연화봉 갈림길에서도 친구는 연화봉 정상에 오르는 의미가 없다며 비로봉으로 향하자고 한다. 어차피 산행 후 트럭을 이용하여 하산을 하려면 시간도 많아서 연화봉 정상에 가고 싶었지만 혹시 러셀이 안 돼 있으면 고생만 할 것 같아 친구 의견을 따라 비로봉으로 향했다. 비로봉이 보이는 기점에 있는 주목 군락지 관리 사무소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날씨가 너무 추워 다른 곳에서 식사를 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부분이 있어 선택했는데 안에 들어가 보니 산 사모 일원도 세 분 있었고, 소백산 산행만을 목적으로 온 분들이 라면을 끓여 먹고 있었다. 1차 때 이곳에서 라면을 끓여 먹다 공단 직원에게 발각되어 “추운데 라면 끓여 먹을 수도 있다”고 대들었다 밉상을 보여 산악회 전체가 비로봉에서 어의곡리로 하산 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친구와 그때 사건을 이야기 하는데 라면을 끓여 먹는 사람들이 친절하게도 김치를 건네준다. 우리는 김밥과 컵라면으로 점심을 해결 하고 커피도 한 잔 얻어 마시고 비로봉으로 향했다. 비로봉 정상의 칼바람은 엄청났다. 간단히 인증 하고 장갑을 끼다 바람에 날아가는 장갑을 보니 실감이 난다. 엄청난 추위를 피해 빠른 걸음으로 어의곡리 갈림길에 오니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산행은 진행 하고 있다. 비로봉 능선의 칼바람과는 비교 할 수 없지만 국망봉을 거의 다 와서 까지도 바람은 심하게 불었고 선두는 러셀로 인해 많은 고생을 하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표식이 없어 상월봉은 산행을 마치고서 사진을 보며 “그 곳이 상월봉 이었구나! 라는 판단을 했다. 늦은맥이를 지나면서 급격한 체력 하락으로 많이 힘들었지만 그렇다고 마땅한 탈출로도 없고 계속 진행해야 했는데 나중에는 나에게 보조를 맞춰주는 친구에게 미안하여 먼저 가라고 했는데 친구는 끝까지 내 페이스를 맞춰주어서 무사히 고치령에 도착했다. 고치령에는 이미 다섯 분이 트럭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우리 뒤로도 여섯 분이 더 와서 13명이 트럭을 타고 좌석리로 향했다. 좌석리에 도착하니 돈민이는 라면을 열심히 끓이고 있다. 서둘러 옷부터 갈아입고 바닥지님과 거부기님이 구워주는 오리 훈제에 쏘맥 서너 잔을 마시니 너무 힘들었던 산행도 언제 그랬느냐는 듯 잊히고 후미가 도착 할 때 까지 주린 배를 채우고 천소를 도와 준 후 버스에 올라 일정을 마무리 했다. 러셀 하느라 고생 한 영선조님들께 감사드리며 산악회에 항상 헌신적인 회장님께도 감사드린다.
※ 산행 사진
▲ <죽령> 죽령은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과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경계의 소백산맥에 있는 고개로 높이 689m이고 도솔봉(兜率峰:1,314m)·연화봉(蓮花峰:1,394m)·국망봉(國望峰:1,421m) 등 높이 1,400m 내외의 높은 봉우리들이 이어져 있는 험한 지세 때문에 조선시대부터 조령과 더불어 영풍-단양 간의 주요교통로였다. 옛날 어느 도승이 짚고 가던 대지팡이를 꽂은 것이 살아났다 하여 죽령이라 했다 한다. 서쪽 사면은 충주호로 흘러드는 죽령천의 상류 하곡과 연결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아달라이사금 5년(158) 3월 죽죽이에 의하여 죽령 길이 개통되고 그의 이름을 따서 죽령이라 부르게 되었으니 연륜이 1800년이나 넘는다.비교적 높고 험한 고개이므로 봇짐이나 등짐을 지고 걸어 다녀야 했던 시절에는 이 고개에 도둑떼가 들끓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도둑떼에게 아들을 잃은 할머니가 도둑소굴로 숨어 들어 망을 보다가 사람들에게 신호로 "다자구야 들자구야"라고 외쳐서 도둑떼를 사로잡는 데 공을 세워 이곳 주민들은 매년 대강면 용부원리의 산신당에 모여 다자구 할머니에게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중앙선이 이 고개를 통과하기 위해 '또아리굴'이라 불리는 루프식 터널을 건설했다. 죽령에서 단양까지의 서쪽 사면은 비교적 경사가 완만하여 높은 곳까지 개간되었고 동쪽 사면인 경상북도 풍기 쪽으로는 산림이 우거져 있다. 부근에 죽령 봉수와 보국사·희방사·죽죽사가 있으며, 중앙선을 따라 중앙고속도로(춘천-대구 간)가 있다. 옛날에는 죽령 고개를 넘는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 당연히 노잣돈을 노린 산적이 들끓지 않을 리 없다.
▲ 2019년 6월 9일 연화봉 산행시의 죽령 사진 1
▲ 2019년 6월 9일 연화봉 산행시의 죽령 사진 2
▲ 2019년 6월 9일 연화봉 산행시의 죽령 사진 3
▲ 산행 시작.
▲ 죽령에서 연화봉 까지는 포장도로다.
▲ 연화봉(蓮花峰) : 유래는 잘 나와 있지 않다. 한자를 풀이 해보면 산봉우리의 모양이 연꽃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도로에 있는 제 2연화봉 표석 (날씨로 인해 조망을 볼 수 없을거리라는 생각에 전망대는 올라 가지 않고 진행 했다)
▲ 2019년엔 강우레이더 관측소 위로 올라 갔다. 식사를 할 수 있는 대피소도 있고 아래 사진처럼 멋진 조망을 선사 했다.
▲ 소백산 죽령 구간은 늘 새벽 시간에 왔었는데 이러하여 산은 그때 그때 다르기에 여러 번 와 보아야 한다. 진행 방향 멀리 소백산 천문대가 보인다.
▲ 스패츠를 착용하는 동안 산사모 일행들이 줄을 맞춰 진행 하고 있다. 러셀이 안돼 생긴 현상이 흡사 고산 등정을 하고 있는 것 같다
▲ 소백산천문대 (小白山天文臺 Sobaeksan Optical Astronomy Observatory) -한국천문연구원 소속의 우주천체관측소.
1972년 국립천문대 설립위원회에서 24인치 《Boller & Chivens》반사망원경을 연화봉에 설치하기로 결정하여 1975년에 설치하였다. 1978년에 관측소를 준공하면서 국립천문대 산하 소백산천체관측소로 개소하였다. 1986년 국립천문대가 천문우주과학연구소로 변경되면서 소백산천문대로 개칭하였고 1997년 연구관리동 신축공사를 시작하여 1999년에 연구관리동을 완공하였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주간견학과 야간체류견학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주간견학 대상자는 제한이 없고, 야간 체류 견학의 경우는 15인 이하로 이루어진 ① 천문관련전공 대학(원)생 ② 초중고 과학교사단체 ③ 초중고대학 천문동아리 ④ 아마추어 천문동호회 로 제한하고 있다.
▲ 2019년의 연화봉 인증
▲ 연화봉 갈림길(선두도 그냥 지나쳐 갔고 큰 의미가 없는것 같아 반칙을 했다.)
▲ 희방사 갈림길
▲ 주목 군락지 관리 사무소 (이곳에서 점심 식사)
▲ 당시엔 지금처럼 찬물만 부어도 되는 발열 식품이 흔치 않아서 궁색(?)을 떨어야 했다.
▲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운무로 인해 정상은 가끔씩 보여 주고 있었다.
▲ 같이 식사 했던 산사모 사계절님 사진에서...
▲ 소백산은 미륵이 주도하는 도솔봉(천)과 비로나자불(부처)이 주도하는 비로봉이 있으며 그 사이에 연화봉이 있다. 소백산의 다른 이름으로 이백(二白), 또는 백산(白山)으로 불린다. "이백"은 산경표가 나타나기 전까지 태백산과 하나의 산군으로 보아 (태백과 소백을 합친 말 뜻) "이백"이라 하였고 "백산"은 밝다. 깨끗하다 으뜸이다. 라는 뜻으로 가장 높거나 정기가 맑은 산에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소백산은 장엄하게 솟아있어 영남에서 태백산의 버금가는 웅대한 산이면서도 험준하거나 날카로운 기가 없이 순후한 모습의 토산으로 온아하고 기품 있는 선비의 풍모처럼 맑고 수려한 기상의 영기어린 성산으로 살기가 없다. 술사 남사고는 소백산을 보고, "이 산은 사람을 살리는 산이다"라고 했고 그의 저서에서도 태백, 소백산은 피난에 첫 째 가는 땅이라고 해서 소백산에 안긴 풍기가 십승지지의 첫째로 꼽히고 있다고 한다.
▲ 비로봉(毘盧峰, 1439.5m):비로봉은 부처를 의미하는 산이다. 비로(毘盧)란 범어의 '바이로차나(Vairocana)'의 음역이며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준말이다. 본래의 뜻은 '몸의 빛, 지혜의 빛이 법계에 두루 비치어 가득하다'는 것으로 '부처의 진신(眞身)'을 의미하는 말이다. 비로자나불은 법(法)이 세상에 몸을 입어(身) 드러난 법신불(法身佛)로 '공(空)의 인격화된 존재'이다. 그러하기에 비로자나불은 우주의 만물을 모두 간직하고 있는 존재로, 연화장 세계의 교주로 받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비로봉은 그 이름만으로도 부처의 산이다. 우리나라의 산에는 비로봉이라는 이름을 가진 봉우리들이 많다. 주로 큰 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들이 이 이름을 지니고 있다. 금강산 비로봉(1638m), 오대산 비로봉(1563m), 치악산 비로봉(1288m), 속리산 비로봉(1057m)과 소백산의 비로봉이다. 모두 부처의 산이다. 부처의 법을 드러내어 사방팔방으로 온 누리에 퍼지게 하는 산인 것이다. 그렇기에 이름이 '비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진리의 빛이 막힘없이 온 세상에 퍼지게 하는 산이니 말이다. 비로봉 정상에는 이정표와 표지석, 산행객들이 쌓아놓은 돌탑, 그리고 앉아 쉴 수 있는 의자들이 놓여 있다. 표지석 뒤에는 서거정(徐居正)의 시 한편이 새겨져 있다.
태백산에 이어진 소백산 백리에 구불구불 구름사이 솟았네 뚜렷이 동남의 경계를 그어 하늘 땅이 만든 형국 억척일세
▲ 어의곡리 갈림길(← 어의곡리 4.7km, ↑ 국망봉 2.7km):에서 바라 본 비로봉
어의곡리: 본래 영춘군 대곡면의 지역으로서 큰 골짜기이므로 엉어실 또는 어의곡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의곡, 하의곡, 한곡동, 구익, 을전, 명길리를 병합하여 어의곡리라 해서 단양군 가곡면에 편입됨.
▲ 국망봉 가며 뒤 돌아 본 비로봉
▲ 멀리 국망봉
▲ 진행 방향 우측 국망봉
▲ 초암사 갈림길
초암사: 소백산의 남쪽자락 국망봉 아래 죽계구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계곡 끝자락에 쉼터마냥 자리잡고 있는 작은 사찰이다. 그러나 이곳은 규모나 명성에 비해 역사가 무척이나 오래돼 찾는 이들을 놀라게 한다. 초암사의 역사는 무려 천년이 넘는다. 의상대사가 호국사찰을 짓기 위해 이곳에 초막을 짓고 땅을 찾다가 결국 부석사를 짓게 되었다는 곳이다. 의상은 부석사를 지을 때까지 초막에 머물다가 부석사가 완성된 후에 초막자리에 작은 암자를 짓고 초암사라 했다. 그후 임진왜란과 6.25동란을 거치면서 모든 건물이 다 없어졌다가 1970년중반에 보원(寶元)스님이 주석하면서 새로이 법당을 짓고 현재의 모습으로 중창하였다. 절 아래까지 시멘트 길을 놓아 절을 찾아가는 아기자기한 산길의 묘미는 없어졌지만, 소백산을 오르려는 사람들에겐 더 없는 중간 기착점이 되어주기도 한다.(출처:야후)
▲ 국망봉
▲ 국망봉:높이 1,421m. 소백산맥 중의 비로봉(1,439m) 다음가는 고봉으로, 남서쪽으로 연화봉(蓮花峰:1,394m)에 이어지며, 낙엽수의 숲이 아름답다. 산의 남동쪽 기슭에는 부석사·초암사(草庵寺)·석륜암(石崙庵) 등이 있으며, 유명한 석천폭포(石川瀑布)가 있다. 국망봉(國望峰·1,420.8m)은 조선 선조(宣祖)때 무쇠장이(水鐵匠) 배순(裵純)이라는 사람이 왕이 승하하자 3년 동안 이 봉우리에 올라와서 왕성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며 통곡하였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며, 나라에서 그를 표창하고 무쇠점을 하사하여 배점(裵店)이라 한 것이 배점리라는 지명이 생긴 유래이다(한국지명총람 참고)
하지만 국망봉 정상표석이 옆의 안내 설명에는 마의태자가 엄동설한에 베옷 한 벌만을 걸치고 망국의 한을 달래며 개골산으로 들어가는 길에 이곳에 올라 멀리 옛 도읍 경주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하여 국망봉이라 이름 붙여졌다는 안내판이 서 있다. 뒤로는 비로봉, 앞으로는 상월봉, 왼쪽으로는 신선봉이 눈에 들어오고 오른쪽으로는 영주시내 일대가 내려다보여 조망이 시원스럽다.
▲ 상월봉: 상월봉의 상징인 버섯모양의 바위는, 늦트재에서 상월봉으로 치올라온 동릉상의 마지막 잘룩이를 내려서기 직전 봉에서 바라보는 것이 좋다고 한다. 그야말로 바위 위의 바위 위에 또 하나의 윗돌을 깎아서 얹어놓은 것처럼 기이한 조각품이다. 경상도 말로 하면 상월봉은 '웃돌봉'이다. 상월봉이란 이름은 아마 신의 솜씨로 만든 것 같은 저 바위 때문에 생긴 것이리라. 국망봉에서 신선봉으로 이어지는 주능선에서 보면 상월봉은 그저 그렇고 그런 바위 무더기들이 모여있을 뿐이다. (출처 : 작은 꽃들이 모여서 지키는 큰 산 시인 이향지님 글)
▲ 선두에서 보만식계 이정재 대장님 러셀 장면( 영선조는 러셀로 고생이 많았다고 한다)
▲ 늦은맥이재에 대한 유래는 여러 곳을 찾아 보아도 없다. 아마도 늦은목이와 같은 맥락인것 같다.
▲ 연화동 갈림길
▲ 고치령 산행 마침
고치령(古峙嶺)은 영주시 단산면 좌석리와 마락리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그러나 좀 더 크게 보면 단양군 영춘면과 영주시 단산면을 이여주는 고개이다. 고치령은 또한 한강 수계와 낙동강 수계를 나누는 중요한 고개이기도 하다. 백두대간 죽령을 지나 동북으로 흐르던 소백산 줄기가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처음으로 만나는 큰 고개가 바로 고치령이다. 이뿐만 아니라 고치령에는 역사적인 사연과 백성들의 애환이 많이도 서려있는 곳이다. 이곳 고치령이 바로 단종 복위운동을 벌이던 사람들이 뜻을 세우고 수시로 넘어들던 고개이다. 이곳이 단종과 인연을 맺은 것은 수양대군의 동생이자 단종의 숙부인 금성대군을 통해서 이다. 1455년 6월 금성대군은 형인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하다 이곳 순흥에 유배당한다. 그는 이곳에서 순흥도호부사인 이보흠의 도움을 받아 단종 복위를 계획한다. 고치령 정상에는 길 양쪽으로 장승이 세워져 있고 길 오른쪽 언덕위에 산신각이 모셔져 있다. 고치령 산신각은 옛날 이곳을 지나던 백성들이 무사히 산을 넘을 수 있도록 산신령에게 기도를 하던 장소이다. 또 과거 순흥지역에서 영춘으로 말을 이용해 세곡을 옮길 때 사고 없이 무사히 넘어갈 수 있기를 기원하던 신당(神堂)이기고 하다. 소백산을 넘는 고개는 크게 세 개가 있다. 그 중에 제일 큰 고개가 죽령 고개로 국토의 대동맥으로 예나 지금이나 수많은 사람들과 물류가 넘나드는 고개이다. (지금은 중앙고속도로가 건설되면서 터널이 뚫렸다) 그리고 소백산 동쪽 사람들의 발길이 끊겨서 옛 길이 된 마구령과 고치령이다. 현지 주민들은 메기재, 고치재라고 부른다고 한다.
▲ 고치령에는 좁은 길을 사이에 두고 소백산 편에는 단산대장군과 포도대장군이 소백지장(小白地將)을 호위하고 서 있고, 건너편 태백산 줄기가 시작되는 곳에는 태백천장(太白天將)이 양백대장과 항락(恒樂)과 함께 산령각을 지키고 있다.
▲ 고치령에 있는 산신각에는 한 칸짜리 아담한 산령각(서낭당)이 자리해 있다. 단종을 태백의 신으로, 금성대군을 소백의 신으로 모신 이곳 산령각은 마을 주민들 사이에서는 영험하기로 이름난 곳이다. 산령각 안에서는 호랑이를 탄 산신과 말을 탄 단종, 그리고 말고삐를 쥔 금성대군이 나란히 제상을 받고 있다 한다. 요즘도 영주 사람들은 정월 열 나흗날이면 이곳에서 어김없이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 고치령(古峙嶺) 정상(해발 760m)에 설치된 백두대간 고치령 표지석은 영주국유림관리소 관내 백두대간구역에 기 설치된 주실령(2006년), 선달산(2006년), 마구령(2007년), 하늘재(2009년) 표지석에 이에 5번째로 설치된 백두대간 표지석이라고 한다. 고치령 정상에 설치된 표지석은 자연석으로 제작했으며, 백두대간 고치령의 유래와 함께 백두대간 고치령의 새로운 상징성을 부여하기 위해 2010년 병인년을 맞아 백호모양의 수마석으로 설치하였다고 한다.
▲ 좌석리로 트럭 타고 하산(거북이님과 태련씨 고기 굽느라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좌석리( 座石里) 지명 유래: 마을 한 중간 논바닥에는 앉은 바위라는 큰 바위가 있다. 옛날 마귀할멈이 소백산에서 반지를 잃었는데 그 반지를 찾아 산을 파 내려가 골짜기가 생기고 땅 속에서 나온 큰 바위가 골짜기를 굴러내려 오다가 자리에 멈추어서 자리잡았다 하여 앉은 바위라고 불러왔다. 이바위를 중심으로 윗마을을 상좌석(上座石) 아랫마을을 하좌석(下座石)이라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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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선운산 (禪雲山) : 전북 고창군 심원면 (1) | 2023.0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