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오산(龜尾 金烏山 ) 977m :현월봉,칼다봉
주차장→도선굴→할딱고개→마애불→현월봉→칼다봉→다혜폭포→주차장
◇ 산행지 : 경상북도 구미시, 칠곡군 일원
◇산행일자 : 2017. 1. 8(일) 날씨 : 맑음
◇ 산행거리 : 약 10Km
◇ 산악회및 산행 친구 : 하늘산악회 친구들
◇ 산행시간 : 6시간 40분 산행 (점심 20분 포함)
◇ 시간 대별 요약
- 09:50 주차장 도착 산행시작
- 10:09 케이블카 매표소 입구
- 10:26 대혜문
- 10:34 해운사
- 10:44 도선굴
- 10:50 대혜폭포
- 11:01 할딱고개 시작
- 11:57 오형돌탑
- 12:02 마애불
- 12:37 약사암
- 12:49 금오산 현월봉(점심 20분)
- 13:38 금오동천/칼다봉 갈림길
- 15:00 칼다봉
- 16:00 대혜폭포
- 16:30 주차장 산행마침(뒷풀이)
-17:35 주차장 출발
※ 특기사항
① 금오산 세 번째 산행
② 칼다봉 쪽 첫 산행
③ 출발시간, 점심시간,대전 도착시간등 알수 없음
※ 산행 후기
금오산은 산행을 시작 한 후 국립공원과 도립공원을 우선시 하던 2004년 1월 27일과 그 이후 한 번 더 다녀왔었는데 기록이 없다. 기록의 소중함을 다시금 느끼는데 산행기 역시 산행 다녀온 후 1년 넘은 시점에 적다 보니 기억에 남는 건 하늘산악회를 통해 갔었다는 것 뿐이다. 아쉬운 건 당시에 산행기를 적지 않아서 같이 간 일행이 누군지도 모르겠고 기억도 가물가물 하다. 암튼 산행기는 그때그때 적는 것이 좋을 듯 하다.
※ 산행 전 사전 조사
<『구미 금오산(龜尾 金烏山 )』> 금오산의 유래: 금오산의 원래 이름은 대본산(大本山)이었다. 고려 때는 산세의 아름다움이 중국의 오악(五嶽) 가운데 하나인 숭산(崇山)에 비겨 손색이 없다 하여 남숭산(南崇山)이라 불렀으며, 황해도 해주의 북숭산(北崇山)과 더불어 2대 명산으로 꼽혔다. 금오산의 명칭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전설들이 전해오고 있다. 옛날 당나라 국사가 빛을 내는 새를 따라 왔더니 이 산에 이르러 자취를 감추었는데, 그 이후로 까마귀가 빛을 띠며 날아왔다고 하여 금오산이 되었다고 한다.또 어느 날 이곳을 지나던 아도(阿道)가 저녁놀 속으로 황금빛 까마귀가 나는 모습을 보고 금오산이라 이름 짓고 태양의 정기를 받은 명산이라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금오(金烏)는 옛날부터 해 속에 사는 세 발 달린 상상의 새 삼족조(三足鳥)로, 태양 자체 또는 해의 정기를 뜻하는 동물이었다. 달에 산다는 옥토끼가 달의 서기며 달 자체를 뜻하는 것과 같다. 이외에도 옛날에 천지가 개벽하여 온 세상이 물에 잠겼을 때 산이 거미만큼 남았다고 해서 금오산이 되었다거나, 천지개벽 때 전부 바다가 되었는데 산봉우리가 까마귀 머리만큼 남아서 금오산이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금오산 능선을 유심히 보면 ‘왕(王)’ 자처럼 생긴 것도 같고 가슴에 손을 얹고 누워 있는 사람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마치 거인이 누워 있는 모습과 같다 해서 거인산(巨人山)이라고도 하고, 부처님이 누워 있는 모습과 같다 해서 와불산(臥佛山)이라고도 한다. 거인의 옆모습에서 그 눈(현월봉과 약사봉 사이)이 북두칠성을 바라보고 있는 형국이어서 일찍이 무학대사(無學大師)가 “명산이로고! 거인이 나겠구먼.”하고 감탄했다고 한다. 금오산은 그 산자락을 드리운 곳마다 각기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 선산 방면에서 보면 상봉이 붓끝 같아 필봉(筆峰)이라 하며 문사들이 많이 배출되었고, 인동 방면에서 보면 귀인이 관을 쓰고 있는 모습 같다 해서 귀봉(貴峰)이라 하며 고관이 많이 배출되었다. 개령 방면에서 보면 도둑이 무엇을 훔치려고 노려보는 모습 같다 해서 적봉(賊峰)이라 하며 또는 큰 도적이 많이 나왔다고 엉뚱하게 풀이되기도 하고, 김천 방면에서 보면 노적가리 같다 해서 노적봉(露積峰)이라 하며 부잣집이 많았다 한다. 그리고 성주 방면에서 보면 바람난 여인의 산발한 모습 같다 해서 음봉(淫峰)이라고 하며 관비가 많이 났고, 성주 기생이 이름이 난 것도 이 산세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구미의 상징 금오산 [龜尾-象徵金烏山]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구미의 지명유래: 지금의 「구미 지역」이 신라 및 고려초에는 선산에 속한 방리(坊里)였으나 그 당시 어떤 지명으로 지칭하였는지 문헌의 기록이나 구전이 전혀 없으므로 알 길이 없다. 다만 구미(구미 한자)라는 지명이 문헌상에 처음으로 등재된 것은 고려 성종(981~997)때 부터이다. 즉 고려사 병지(兵志)(2) 역참조(驛站條)에 의하면 "상주도당의 25개역 중에 구미(善州)가 있음을 보아" 고려성종14년(995) 선주자사를 파견할 때 관아 및 역참을 지금의 구미시 선기동에 함께 설치한 것이 고증된다. 그 후 조선조에 이르러 단종2년(1454)에 간행한「세종실록지리지」의 역참조에「구미역」이 기록되어 있고, 그 뒤 23년 후인 성종8년(1477) 9월 선산도호부사 김종직이 편찬한 「일선지」에 의하면 선산도호부 관할의 남면(南面) 방리조(坊里條)에 구미리(재선산부남(在善山府南) 삼십리) 및 전야조(田野條)에 구미평(재구미촌전지(在仇彌村前地))과 고적조(古跡條 : 선주)에 고아 및 사창, 관청, 향교 등의 구기(舊基)가 남면「구미(仇彌)」에 있다는 등의 기록을 보아 조선초기부터 구미라는 리명이 역명과 함께 명칭 되어 왔다. 또한 중종25년(1530) 왕명에 의하여 간행된「신증동국여지승람」의 선산도호부, 사묘조(祠廟條)에「길재사」는 금오산 밑의「구미리」에 있는데 관찰사 남재의 소건(所建)이라 하였고, 그 후 영조36년(1760)에 간행된「여지도서」의 「금오진 선산도호부」단묘조(壇廟條)에 역시 "길재사는 금오산하의「구미리」에 있다고 하였으니" 길재사당이 금오산 아래의 「구미리」에 소재하고 있었음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그 후 조선중기에 이르러 선산도호부 관할이던 남면의 명칭이 개정되었는데 즉, 확기문헌으로 전기한 영조조에 간행된 「여지도서」의 선산부 방리조(坊里條)에 의하면 남면이 상구미방(上龜尾坊)과 하구미방(下龜尾坊)으로 분할 개칭되고, 뒤에 상구미는 23개리, 하구미는 14개리로 개편 증설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 「구미리」라는 동리 명칭이 바뀌게 되었다. 「구미」의 미자는 본래 우리나라에서 만든 이두 글자로 음은「며」이다. 또한 며와 彌(미)가 거의 동음인 것으로 모두 ‘동음이자’로 보아야 한다고 사학자인 이병도박사는 고증하고 있다. 이두는 한자의 음이나 새김을 빌어 우리말을 표기하는 방법을 총칭하는 것으로 인명, 지명, 관직명 등에 보이는데 신라, 고려, 조선조 초기까지 사용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구미의 지명은 이두문자임으로 뜻이 없기 때문에 음이 같은 「뜻」이 있는 글자인「구(龜)」자와 「미(尾)」자로 바뀌었다고 사학자인 이병도박사 및 불교학자인 이인재(한학 및 이두문에 조예가 깊음) 역시 고증해 주었다. 구미시 승격과 더불어 신문, 방송, TV 등에 구미지명의 연혁에 관하여 여러 가지 설을 이미 보도한바 있으나 이는 사기(史記)나 지형적으로 전혀 근거 없는 지방민의 잘못된 구전에 의한 것이 아닌 가 사료된다. (출처: 구미시청 문화관광)
※ 금오산 지도
※ 산행 사진
▲ 산행 초입인 금오산 공영주차장에 도착해 단체 사진을 찍은 것 같은데 내 폰에 담긴 것 뿐이니..
▲ 실질적인 산행 초입인 금오산 캐이블카 입구까지는 대략 20분정도 걸린다.
▲ 금오동학: 금오산 관리사무소(주차장) 근처의 케이블카 승강장에서 등산로를 따라 150m 정도 산을 오르면 오른쪽으로 커다란 바위가 서 있다. 그 바위에 ‘금오동학(金烏洞壑)’이라는 큼직한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금오동학이란 ‘금오산의 깊고 아름다운 골짜기’라는 의미이다. 각 글자의 길이는 세로 90~100cm, 가로 50~70cm 정도로, 오랜 세월에 걸쳐 마모되어 판독이 어려운 상태이다. 이 글씨는 조선 중기의 명필로 특히 초서(草書)를 잘 써서 초성(草聖)이라 불렸다는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 1521~1575)의 필적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고려의 충신 야은 길재(吉再 1353~1419)를 추모하기 위해 1768년 세운 채미정(採薇亭, 명승 제52호)이 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금오산 금오동학 각자 [金烏山金烏洞壑刻字] (두산백과)
▲ 성문 밖에서 본 금오산성 대혜문
▲ 성문 밖에서 본 금오산성 대혜문
금오산성은 고려시대 이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옛 성터로, 고려 말에 선산·인동·개령·성주 백성들이 왜구를 피해 이곳에 들어와 성을 지켰으며, 이곳에 군량과 무기를 비축해 두었던 군창을 두었다. 조선 태종 10년(1410)에 국가적 계획으로 성을 크게 고쳐 쌓았으며, 임진왜란 때 이 산성의 전략적 중요성이 인식되어 선조 28년(1596)에 다시 고쳐 쌓았다. 인조 17년(1639)에 외성을 쌓는 확장공사가 실시되어 이중의 산성이 되었고, 고종 5년(1868)에 새로 고쳐 쌓았다. 기록에 의하면 성 안에 1개의 계곡과 여러 개의 연못·우물이 있었으며, 대혜창과 내성창이라는 창고, 군기고, 진남사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내·외성의 문터, 적이 알 수 없게 만든 작은 성문인 암문의 형체, 건물터들이 남아있다. 한편 성 안에는 고종 5년(1868) 무렵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금오산성 중수송공비가 성을 쓸쓸이 지키고 있다. (출처:워키백과)
▲ 금오산성 대혜문을 지나 나무 데크를 따라 올라가다 조금 더 진행하니 돌탑들이 많이 있다. 일일이 세어 보지는 못하였는데 새천년을 맞으면서 21세기를 상징하여 구미시에서 금오산 오르는 길목에 21개의 돌탑을 세워 오르내리는 시민들에게 금오산의 정기를 받게 하려는 의도로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 금오산성에서 약 10여분 정도 오르면 영홍정을 만난다. 영홍정은 샘물이다. 지하 168m에서 솟아나는 맑고 신선한 지하수로 금오산을 산행하는 이들의 식수로 사용하고 있다.
▲ 영홍정 바로 위로 조금 가면 해운사(海雲寺)가 있다. 이 절은 신라 말기에 도선(道詵:827∼898년)이 창건하였으며, 창건 당시에는 대혈사(大穴寺)라고 하였다. 고려 말에 성리학자였던 야은(冶隱) 길재(吉再:1353∼1419년)가 이 절과 도선굴(道詵窟)에 은거하며 도학(道學)을 익혔다고 한다. 1592년(조선 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폐사되었다. 이후 오랫동안 폐사지로 남아 있다가 1925년 복원하면서 해운암(海雲庵)이라고 바꾸었다가 현재는 해운사로 불리우고 있다. 케이블카 타는 곳이 바로 아래에 있다.
▲ 대혜폭포로 가지 않고 도선굴로 향했다.
▲ 해운사에서 조금 더 진행하면 대혜폭포와 도선굴 갈림길 표지석을 만난다. 우선 도선굴로 가기 위해 우측으로 난 탐방로로 들어섰다. 바위를 돌아 올라가는 조금은 험로다. 바위에 붙은 좁은 길을 돌아올라 도선굴에 도착했다. 날씨가 푹해 대혜폭포는 약한 물줄기를 뿌리고 있다."세종실록지리지"에는 도선굴이 “깊이 31척, 넓이가 3척 3촌, 높이 15척으로 세상에 전하기로 도선국사가 수행하던 곳”이라고 적혀있다. 고려 때 야은 길재 선생이 소요하며 도학을 했다고도 하며, 임진왜란 때는 인근 향인의 난을 피해 암벽의 틈에 기어오르는 칡넝클을 잡고 100여명이 이곳에서 옆의 세류폭포의 물를 긴 막대로 받아먹으면서 살았다고 한다. 내부 길이 7.2m, 높이 4.5m, 너미 4.8m이다. 안에는 불상 앞에 촛불을 켜서 정성을 드리고 있다. 바로 아래는 해운사가 보이고 오른편에는 거대한 대혜폭포가 있다.
▲ 도선굴
▲ 도선굴에서 바라 본 구미시
▲ 아래 글에 보면 대혜폭포(大惠瀑布)와 욕담(浴潭) :도선굴을 내려오면 바로 대혜폭포를 만난다. 대혜폭포는 해발 400m 지점에 수직 27m 높이의 폭포로 물소리가 금오산을 울린다 하여 명금폭포(鳴金瀑布)라고도 한다. 금오산 정상 부근에서 발원하여 긴 계곡을 따라 흘러 이 고장 관개의 수자원으로 큰 은혜의 골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물이 떨어지는 일대의 움푹 패 인 연못에는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을 했다 해서 욕담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겨울이라 그런지 폭포가 샤워 물줄기 보다 조금 더 수량이 많은 것 같다.
▲ 할딱고개: 대혜폭포를 지나면 계곡의 왼편으로 나무데크로 된 계단이 있다. 이 계단을 따라 한참 올라가면 금오산에서 가장 숨이 찬 지점인 할딱고개에 이른다. 고개 앞 넓은 바위를 마당 삼아 바라보면 금오호, 도선굴, 해운사, 멀리 구미시까지 한눈에 조망해 볼 수가 있다.
▲ 할딱고개 오름 중 뒤 돌아 본 금오저수지
▲ 할딱고개에서 잠시 뒤를 돌아보면 구미시가 눈에 들어왔다. 기암들이 서 있고 또 하나의 커다란 폭포를 만났다. 대혜폭포와 달리 얼음폭포다.
▲ 할딱고개를 거쳐 정상을 향해 올라가다 보면 마애석불과 정상을 향하는 두 갈래의 길이 나오는데, 오형돌탑은 이곳에서 마애석불 방면으로 500m 거리에 위치한다. 마애석불을 가려면 오형(烏亨)돌탑을 지나가야 하는데 이 돌탑에 사연이 있다.구미시 도담동에 거주하는 김용수 할아버지가 사랑하는 손자를 잃은 슬픔을 돌탑으로 승화시켰다. <세상에 이런 일이>란 TV 프로그램에 소개된 사연에 의하면, 뇌 병변 장애로 인해 손주 형석이는 태어날 때부터 말하지도 걷지도 못했다고 한다. 어르신은 아픔을 겪고 있는 손주를 위해 자식들을 대신해 돌봐왔는데, 형석이는 10살이 되던 해에 갑작스러운 패혈증으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손주를 그리는 안타까운 마음에 하나둘씩 쌓은 돌탑은 10년만에 금오산의 상징이 되어 있었고, 태어나 등교를 단 하루밖에 못 한 형석이를 위해 '오형학당'이라는 돌탑을 쌓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형돌탑이란 이름의 유래는 금오산의 '오'자와 손주의 이름에 '형'자를 따서 오형돌탑이란 이름을 만들게 되었단다.
▲ 오형돌탑을 뒤로 하고 마애불을 찾아 간다.
▲금오산 마애석불: 1968년 12월 19일 보물 제490호로 지정되었으며. 전체 높이 5.55m라고 한다. 이 불상은 거대한 암벽의 모서리에 조각된 마애석불로, 불상의 중심선이 모서리여서 양쪽 암벽에 조각된 특이한 구도이다.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를 모두 갖추었으며, 보존 상태도 비교적 좋다. 머리에는 3면보관(三面寶冠)이 있으나, 마멸로 조각한 장식은 분명하지 않다. 얼굴은 갸름하고 풍만하며, 눈·코·입 등도 원만하게 처리하였다. 귀는 어깨까지 내려오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명확하게 나타났으나, 목이 짧아 가슴까지 내려오는 형식적인 것이다. 어깨의 선은 매우 원만하고 자세도 좋지만, 가슴·팔·하체 등은 둔탁하게 처리하였다. 오른손은 아래로 내려 손바닥을 안으로 향하였으며, 왼손은 팔굽을 약간 굽히고 손바닥을 바깥으로 향한 자세로 옷자락을 잡고 있다. 발은 곧게 서 있으며, 발가락은 매우 크고 듬직하다. 입상(立像) 앞면의 평평한 대지에는 현재 기둥의 초석이 있고 기와 조각들도 흩어져 있으며, 암벽 자체에도 목조 가구(架構)의 흔적이 보이므로 사찰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일선지(一善誌)》 기록으로 미루어 보봉사(普峰寺)로 추정된다. 이 불상은 얼굴·신체·옷무늬·광배 등에서 9세기 보살상보다 더 발전한 형식화가 나타나 있으므로, 보다 후대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금오산 마애보살입상 [金烏山磨崖菩薩立像] (두산백과)
▲ 금오산 마애석불을 보고 약사암 방향으로 이동 한다.
▲ 금오산 약사암 :금오산 약사암은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의 말사로, 금오산(金烏山, 977m) 정상의 약사봉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당시의 유물은 발견된 바 없으며, 1618년(광해군 10) 간행된 <일선지 一善誌>, 1799년(정조 23) 간행된 <범우고 梵宇攷>에 고찰(古刹)이었음을 알려주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종 때 편찬된 <영남진지 嶺南鎭誌>에는 ‘법당은 8칸으로 성내(城內) 삼리(三里)에 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약사암은 약사전·삼성각·일주문·종각·요사로 구성되어 있다. 1985년 기암절벽 아래에 남향으로 건립한 약사전은 정면 4칸·측면 2칸 규모의 다포계 팔작지붕집으로 약사암의 중심법당이다. 내부에 신라 말 또는 고려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화강암으로 조성한 석조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다. 1935년 우상학이 지은 ‘약사암중수기’에 본래 지리산에 있던 석불 3기 중 1기를 이곳 약사암으로, 나머지 2기를 수도산 수도암과 황악산 삼성암으로 옮겨 봉안했다고 쓰여 있다. 석조여래좌상 좌우로 일광·월광보살이 협시되어 있으며, 후불탱·신중탱·독성탱 등의 불화가 걸려 있다. 요사채 왼쪽으로 약 300m 지점에 있는 바위에는 고려시대에 조성한 높이 5.5m의 금오산 마애보살입상(보물 제490호)이 조각되어 있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약사암 [藥師庵] (두산백과)
▲ 금오산 약사암을 구경하고 정상인 현월봉으로 향했다.
▲ 금오산 현월봉: 정상에 도착했다. 1953년 미군 통신기지가 생기면서 정상은 일반인들에 개방되지 않았다. 2014년 10월에야 정상이 일반인에게 개방 되었으니 61년 만이다. 아직도 거대한 통신 철탑이 하늘을 찌르듯 우람하게 서 있었다. 정상 바로 밑 헬기장에서 점심을 먹은 기억이 난다. 산 정상임에도 한 점 바람도 불지 않고 넓은 헬기장은 포근하여 점심 먹기 딱 안성맞춤이었다.
▲ 금오산 현월봉 정상 인증
▲ 2014년 9월 이전의 금오산 현월봉 정상석(실제 정상에서 약 10m 아래에 있다)
▲ 점심 식사 후 칼다봉을 가기 위해 약 10여명이 발걸음을 재촉 했다.
성안마을 유래 :금오산 정상에서 800m정도 내려온 지점의 천연분지로, 성안마을은 금오정을 비롯해 우물과 못이 많아서 산 아래 마을보다 오히려 물 걱정이 적었고, 1971년 화전민 독가촌 철거 당시 8가구가 살았다고 한다.
▲ 금오동천/칼다봉 갈림길.
▲ 금오산 현월봉 방향
▲ 한문으로 표기도 안되는 "칼다봉"이란 이름이 특이한데, 인터넷 여러 곳을 검색해 봐도 그 명칭의 유래나 설명이 아무데도 없어 아쉽다.
▲ 칼다봉에서 폭포방향으로 향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자연환경 연수원 방향으로 갔어야 했다.
▲ 대혜폭포를 거쳐 주차장에 도착하며 산행을 마무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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