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산(錦山) 681m : 보리암, 부소암, 상사암
두모주차장→부소암→상사암→보리암→쌍홍문→금산탐방지원센터
◇ 산행지 : 경상남도 남해군 상주면, 삼동면 일원
◇ 산행일자 : 2017. 3. 19 (일) 날씨 : 맑음
◇ 산행거리 : 약 7.5km (GPS 거리)
◇ 산악회및 산행 친구 : 비목산악회, 방영균 친구
◇ 산행시간 : 4시간 15분 산행 (점심 40분 포함)
◇ 시간 대별 요약
- 06:00 월드컵 경기장
- 06:40 대전 IC
- 10:30 두모 주차장 도착
- 10:35 두모 주차장 산행시작
- 11:50 부소암
- 12:02 상사바위갈림길
- 12:09 상사암
- 12:24 상사바위갈림길 점심(40분)
- 13:25 단군성전
- 13:37 금산 정상
- 13:53 보리암
- 14:17 쌍홍문
-14:48 금산탐방지원센터
- 14:52 주차장 산행마침
※ 특기사항
① 남해 금산 세 번째 산행
② 두모계곡 쪽 첫 산행
③ 선두로 하산
※ 산행 후기
남해 금산은 2004년 12월 2일과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한 번 더 다녀왔었다. 두모계곡쪽 산행은 2013년 9월경에 30여 만에 산행이 풀려서 꼭 한 번 가보고 싶던 차에 비목산악회에서 간다고 해서 예약을 했다. 아쉬운 건 당시에 산행기를 적지 않아서 같이 간 일행이 누군지도 모르겠고 기억도 가물가물 하다. 산악회 일정표를 보면 6시에 월드컵경기장내 매점 앞에서 출발했고 내 좌석은 30.31번이다. 원두막에 6시 40분 도착 출발했고 어느 휴게소인지 모르겠지만 휴게소에서 아침식사를 했다. 산행지에 도착하여 단체사진을 찍을 때도 나는 빠져 있었고 사진이 남아 있지 않다면 기억도 잘 나지 않을 것 같다. 산행기는 그때그때 적는 것이 좋을 듯 하다.
※ 산행 전 사전 조사
<『남해 금산 (南海 錦山)』> ; 명승 제 39호로 면적은 559,782㎡로 지정일은 2008. 05. 02이며 소재지는 경남 남해군 상주면 보리암로 691, (상주리)로 관리는 남해군에서 한다. 남해 금산은 지리산맥이 남쪽으로 뻗어내려 형성된 산으로 원래 원효대사가 이곳에 보광사라는 사찰을 지은 뒤 산 이름이 보광산으로 불리어 왔으나,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드린 뒤 왕위에 등극하게 되자 보은을 위해 영구불멸의 비단을 두른다는 뜻의 비단 금(錦)자를 써 금산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금산은 영남에서는 합천의 가야산, 방장산(지리산)과 자웅을 겨루고 중국의 남악(南嶽)에 비견되기도 했으며, 바다 속의 신비한 명산이라 하여 ‘소금강산’ 혹은 작은 ‘봉래산(蓬萊山)’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금산이 작은 봉래산이라는 이름을 얻을 만큼 명산으로 칭송을 받게 된 것은 멀리 떨어진 남해의 섬 속에서 다시 아득한 섬과 바다를 눈앞에 두고 우뚝하게 솟은 돌산이라는 점에서 유람객에게 속세를 떠난 신비감을 주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남산은 다도해에서 유일한 큰 체적의 화강암 산임에도 불구하고 토산 성격이 강해 남해안에서 가장 큰 규모의 낙엽수 군락을 이루고 있다. 가을이면 마치 오색 자수 판을 보는 듯하며 대규모의 낙엽수림이 화강암의 기암괴석과 어우러져 뛰어난 자연경관을 자아낸다. 이 밖에도 신라 고승인 원효대사, 의상대사, 윤필거사 등이 이곳에서 수도를 하였다고 전해지고, 중국 진시황의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이곳을 왔다갔다는 서불의 이야기가 담긴 ‘서불과차암’과 춘·추분 때만 볼 수 있다는 노인성(인간의 수명을 관장한다는 별, 老人星 또는 壽星)과 관련된 전설 등 신비스런 전설이 많은 곳이며, 전국의 3대 기도도량인 보리암이 위치하는 등 상징적인 의미가 많은 명승지이다. <출처; 문화재청>
※ 남해 금산 지도
※ 산행 사진
▲ 산행 초입인 두모주차장에 도착하니 많은 차량으로 인해 너무 복잡하고 아래 사진 처럼 비목산악회에서는 단체사진을 찍고 있다. 나는 단체 사진을 찍지 않고 서둘러 산행 준비를 한다.
두모마을 유래: 두모마을은 큰 항아리처럼 담긴 바닷가라는 뜻의 ‘드므개’라는 말에서 유래했다.두모 마을은 드므개라는 마을 이름에서 개명이 되면서 두모마을로 바뀌었다. 드므개는 큰 항아리처럼 담긴 바닷가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드므는 궁궐 처마 밑에 있는 큰 항아리를 뜻하며 예전에는 건물이 목조건물이라 불이 났을 경우 큰 항아리에 담긴 물을 사용해서 화재를 막았고 불을 가지고 다니는 화마가 드므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으로 보고 도망을 가면 화재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속설도 있다. 출처: [뉴스브라이트] 남해여행 두모녹색농촌마을
▲ 산행전 비목산악회에서는 단체사진
▲ 서복상은 2014년 11월 10일 서불과차 한·중 국제학술 심포지엄을 통해 상호협력을 위한 표석으로 중국 서복회에서 2015년 5월 13일 기증한 것을 좌대와 주변을 정비하여 세운 것이라고 한다. 금산 중턱에 위치한 남해 양아리석각(徐市過此)은 경상남도 기념물 제6호로 지정된 서복 관련 유적으로 중국 진시황제의 명을 받아 방사 서복이 삼신산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찾아와 발자취를 남겼다고 전하고 있다. 하지만 많은 관광버스가 가리고 있어서 나는 서복상을 보지 못했고 산행 후 산행기를 적으면서 서복상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 한려해상 국립공원 금산지구 안내도와 서불(徐市)의 석상이 세워져 있는 들머리 주차장을 출발한다.
▲ 산행 입구. 금산 정상은 3.2Km로 이정목에 표시 되어 있다.
▲ 두모계곡 등산로 입구를 지나간다.
▲ 등산객이 많고 등산로는 협소하여 한동안 한 줄로 간다.
▲ 양아리석각: 거북바위라 부르는 남해 양아리 석각
양아리 석각에 대해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다음블러그명 phd88님 글에 좋은 내용이 있다. 옮겨 보면 두모마을 입구 주차장에서 금산 등산로를 따라 30분쯤 올라가면 길 오른편에 보호철책으로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평평한 거북이 모양의 너럭바위가 하나 나온다. ‘상주리 석각’이라는 이름이 붙은 거북바위이다. 한쪽에 문화재 안내 표지판이 서 있지만 철책 안에 서있어 관광객이 읽어 볼 수 없다. 상주리 석각은 중국 진시황의 시종 서불이 불로초를 구하려고 남해 금산에 왔다가 새겨놓고 갔다는 전설이 전하는데 정작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가 없다. 가로 7m 세로 4m 정도 되는 너럭바위는 거북이처럼 생겨 ‘거북바위’로도 불리는데, 두모마을이 자리 잡은 두모포를 향해 기어 내려가는 듯이 보인다. 일단 거북이라 단정하고 보면, 오른쪽 궁둥이 부근에 그림 모양 문자 혹은 문자 모양 그림이 사방 가로 1m 세로 50㎝ 크기로 새겨져 있다. 흔히 ‘서불이 이곳을 지나갔다’는 뜻의 ‘서불과차’(徐巿過此)라는 고대 글씨라고 알려져 있으나, 일반인으로서는 무슨 글씨인지 알아볼 재간이 없다. 그렇다면 글씨가 아닌 그림이 아닐까 싶어 거북이 등딱지 무늬려니 여겨보지만, 간혹 하늘 천(天)자처럼 뚜렷하게 읽을 만한 글씨도 보여 여간 아리송한 게 아니다. 전문가들의 상주리 석각에 대한 해석도 구구하다. ‘서불이 해돋는 모습을 보고 일어나 절한다’는 뜻의 서불기배일출(徐巿起拜日出) 여섯 자로 읽는 이도 있고, 훈민정음 이전의 한국 고대문자가 아닌가 하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한자가 아닌 범어, 곧 산스크리트어 계통의 글자라 보는 이들도 있지만, 어느 설이든 아직까지 명쾌하지는 않다. 따라서 현재까지 상주리 석각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전설에 크게 의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남해군의 문화 해설자는 “서불과차(徐巿過此)”로 설명한다. 내용이야 어떻든, 마을 전설에 의하면 중국 진시황이 삼신산에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보낸 시종 서불이 동남동녀 500명을 거느리고 이곳을 지나면서 자신들의 발자취를 남긴 글이라고 한다. 『한서』에는 “진시황이 처음으로 천하를 정복하고 나서 서복(敍復)과 한종(韓終) 등을 시켜 바다에 나가 삼신산의 불사약을 구해오라 하였는데 그들은 도망 가버리고 돌아오지 않았다”라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진시황 때는 이미 한문자가 사용되고 있었으니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간 시기의 고문자일지도 모른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후한서』 ‘동이전 진한조’ 등의 기록에 의하면, 진나라의 혹정을 피해 망명한 자들이 우리나라 삼국시대 이전에 한반도로 건너와 살았으며, 일부는 일본으로 일부는 남해안에 상륙하여 정착했을 가능성도 헤아려지고 있다. 망명자 전부가 서불 집단이었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서불 일행일 가능성이 없다고도 할 수 없다. 부산시 일원을 비롯하여 제주도와 경상남도 일원에는 신선사상이나 서불과 관련된 전설이 숱하게 전해오기 때문이다.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에 유배생활을 하고 있을 때 정방폭포에서 탁본한 각자는 상주리 석각과 매우 비슷하다. <출처:다음블러그명 phd88님 글>
▲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진시황(秦始皇)편에 이런 글이 있다고 한다. - 황제폐하, 동쪽 바다에 신선이 살고 있는 세 개의 섬이 있는데 그곳에 가서 불로초(不老草)를 구해오겠나이다. 황제는 서불(徐市)에게 동남동녀 500명과 함께 배를 내주어 불로초를 구해오게 했다. 徐市라 쓰고 ‘서시’ 혹은 ‘서불’이라고 읽고 있다. 결과적으로 서불이 불로초를 찾으러 온 세 섬은 제주도, 거제도, 남해도 였다는 것이다. 그런 추측을 가능하게 한 것이 남해 상주 양아리의 석각 ‘서불과차’이고 거제도 해금강의 절벽에도 이런 석각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없는 모양이다. 서불과차는 ‘서불이 여기 머물렀다’는 뜻이다. 제주도 정방폭포 중간부에 ‘서불과차’라는 글이 있어 조선시대에 어떤 군수가 탁본을 떴다는 기록이 있고 서귀포(西歸浦)라는 지명도 서불이 여기 머물다가 서쪽, 중국으로 돌아갔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만하면 흥미진진한 한 편의 이야기로 책이나 영화를 만들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 소재로 글을 쓴 사람이 있다. 김익재라는 한문학자가 ‘서불과차도’라는 책을 썼다고 한다.
▲ 남해 양아리 석각에 대한 안내문
▲ 남해라 그런지 3월 중순인데도 진달래가 피어 있다.
▲ 이정표상 두모주차장에서 1.3Km 온 상태
▲ 등산객이 많아 계속 한 줄로 간다.
▲ 이정표상 두모주차장에서 2Km 온 상태
▲ 가파른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 부소암을 전망 할 수 있는 조망바위가 나오고 진행방향으로 부소암이 모습을 드러낸다.
▲ 조금 더 오르면 전망대가 나오는데 두모마을과 남해바다가 보인다.
▲ 선답자의 글을 보니 두모마을 뒤쪽으로 노도, 사진 왼쪽 뒤로 보이는 작은 섬은 소치도라고 한다.
▲ 나선형 계단이 나타나고..
▲ 부소암 가는 길로 밧줄을 잡고 바위 구멍 길을 통해 부소암으로 간다.
▲ 부소암: 경북 영천의 은해사의 말사로 사찰명은 부소암으로 주소는 경남 남해군 상주면 양아리 산4-1이고 전화번호는 055-863-5043이라고 한다. 중국 진시왕의 아들 부소가 유배되어 살다가 갔다는 전설과 단군의 셋째아들 부소가 방황하다 이곳에서 천일기도를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금산 38경의 하나인 34경인데 전설은 전설일 뿐 내가 생각하기엔 믿을 건 못되는 것 같다.
아래 글은 인터넷에서 본 내용이다.
부소(扶蘇): 진시황제의 장남이다. 기록에 의하면 부소는 많은 형제 중 가장 총명하여 아버지나 중신들로부터 장래를 촉망받았다고 한다. 부소는 부황(父皇)인 시황제의 분서갱유에 간언했기 때문에 황제의 분노를 사 북방의 기마민족인 흉노에 대한 국경 경비의 감독을 명령받아 장군 몽염과 함께 벽지로 보내졌다. 그러나 그 덕분에 오히려 중앙의 화를 피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부소가 시황제에게 소중한 적자였기에 제왕학의 일환으로서 몽염 아래로 보낸 것이란 추측 견해도 있다. BC 210년 순행 중이던 시황제가 급사했다. 황제의 순행에는 승상 이사와 환관 조고가 수행하였고 조고가 옥새를 관리하는 일을 겸임했다. 시황제는 막내아들 호해를 귀여워하여 이번 순행에도 아들 중 유일하게 동행시키고 있었다. 황제가 사구 지방에 이르자 갑자기 병이 깊어져 위독하게 되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오자 그래도 믿을 건 장남뿐이었던지 황제는 부소에게 “짐은 천하를 순유하여 명산의 여러 신에게 제사지냈다. 그리하여 목숨을 연장시켰다. 불행히도 돌아가는 도중에 병이 재발하여 목숨이 오늘내일하니 병력은 몽염에게 맡기고 함양으로 돌아와 장례를 주재하라”는 성지를 남겼다. 앞일의 두려움을 간파한 환관 조고와 승상 이사는 시황제가 살아 있는 것처럼 꾸며 호해를 옹립해 황제로 받을 것을 모의하고 부소에게는 자해를 권하는 거짓 성지를 내렸다. 장군 몽염은 그것이 거짓 성지인 것을 간파하고 곧바로 부소에게 진언했지만 부소는 「의심하는 것 자체가 도리(道理)에 반한다」고 말하고 성지 내용에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진시황의 죽음은 폭정에 시달리고 있던 민초들에겐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을 것이다. 내분과 반란이 극에 달하자 수많은 민초들은 먹고 살기 위하여 고향을 등지고 심지어는 해외 탈출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 가운데는 서복의 동도 사실을 알고 그의 행적을 쫓아 부소가 탈출하였으리란 추측도 낳고 있다. 그래서 부소는 자결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보고 만약 자결하지 않았다면 몽염장군 휘하의 사람들은 부소를 따라 남해로 탈출하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추측이고 구전되어 오는 전설은 그저 전설이다. 서불과차도 그렇고 부소의 이야기도 부소암의 이야기도 그저 전설 인 것 같다
▲ 부소암에서 보이는 두모마을 뒤쪽으로 노도, 사진 왼쪽 뒤로 보이는 작은 섬은 소치도
▲ 부소암: 중국 진시왕의 아들 부소가 유배되어 살다가 갔다는 전설은 전설일 뿐..
▲ 부소암을 지나 금산정상/상사바위(상사암) 갈림길이 있는 헬기장에 도착한다. 오른쪽 상사암 방향으로 진행한다.
▲ 상사바위
▲ 상사바위 안내판 글 : 이 바위는 조선조 19대 숙종대왕 시절에 전라남도 돌산지역 사람이 남해에 이거하여 살았는데. 이웃에 사는 아름다운 과부에게 반하여 상사병이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남자가 죽을 지경에 이르자, 아름다운 과부가 이바위에서 남자의 상사를 풀었다 하여 이 바위를 상사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상사바위전설>은 사회의 관습, 신분, 윤리의 제약과 한계 때문에 사랑을 이루지 못하거나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현실의 여건 때문에 지속하지 못하고 죽었다는 내용이다. 지역에 따른 변이와 관계없이 남녀 사이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통해 인간성이 무시되는 중세의 윤리와 질서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 남해군의 전설은 돌쇠의 한을 과부가 풀어주었다는 내용이다. 상사의 한을 풀었기 때문에 돌쇠는 죽지 않아도 되며, 상사바위 또한 비극의 공간이 아닌 상사 풀이의 공간으로 변이된다. 중세의 이데올로기가 약화되는 과정에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고 사랑을 이룬 이야기로 변이된 것으로 보인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상사바위 (한국민속문학사전(설화 편))
▲ 상사바위에서 바라 본 남해바다의 풍경(상주 해수욕장 쪽). 미세먼지로 인해 조망이 좋지 않아 아쉬움이 남았다.
▲ 상사암에서 금산산장으로 가는 길 우측으로 향로봉이 조망된다. 향로봉은 금산 제24경으로 모양이 향로를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며 원효, 의상, 윤필 세 대사가 촉대와 함께 향로로 썼다는 전설이 있다.
▲ 상사암에서 바라본 보리암 모습
▲ 금산정상/상사바위(상사암) 갈림길이 있는 헬기장에 되돌아 오니 점심 식사하는 등산객이 너무 많다. 본인도 여기서..
▲ 단군성전(檀君聖殿)은 단군전, 단군사묘(檀君祠廟), 단군사우(檀君祠宇) 등으로 불리며, 한국의 국조(國祖)인 단군의 영정이나 위패 등을 두고 봉향하는 사당을 지칭한다. 단군성전의 경우, 1973년 5월 서울특별시에서 인정받아 사직공원 경내 서북쪽에 마련된 단군성전이 주로 알려져 있지만, 단군에 대한 봉향은 역사적으로 왕조 국가 및 민간에 의해 동시에 이루어졌다. 특히 일제 강점기에 여러 곳에 단군성전이 설립되었다는 기록들이 있다. 단군성전에서 단군은 민족의 상징이 되고 있으며, 단군성전마다 매년 단군이 승하해서 산신이 되었다는 어천절[3월 15일]과 개천절[10월 3일] 행사가 개최되기도 한다. 단군성전에 있는 단군은 종교적 차원의 신앙 대상, 국조 등 여러 형태로 인식된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단군성전 [檀君聖殿]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금산 정상인 망대와 망대 아래 남해 금산 표석이 있다. 남해 금산은 명승 제3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망대는 금산 제1경이다. 망대는 고려시대부터 우리나라 최남단 봉수대로 사용되었으며 현존하는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봉수대란 횃불과 연기를 이용해 급한 소식을 전하던 고대의 통신수단을 말하는데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이 봉수대는 경상남도 기념물 제87호로 고려 명종(明宗·1170~1197) 때 설치된 것으로 추종되며 조선시대까지 사용되었다. 봉수대 둘레는 26m의 둥근 형태이며, 높이는 4.5m로 비교적 원래의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다.
▲ <『남해 금산 (南海 錦山)』> ; 명승 제 39호로 면적은 559,782㎡로 지정일은 2008. 05. 02이며 소재지는 경남 남해군 상주면 보리암로 691, (상주리)로 관리는 남해군에서 한다. 남해 금산은 지리산맥이 남쪽으로 뻗어내려 형성된 산으로 원래 원효대사가 이곳에 보광사라는 사찰을 지은 뒤 산 이름이 보광산으로 불리어 왔으나,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드린 뒤 왕위에 등극하게 되자 보은을 위해 영구불멸의 비단을 두른다는 뜻의 비단 금(錦)자를 써 금산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 인증샷 한 장은 남겨야...
▲ 보리암: 장봉, 형리암, 화어몽, 삼불암 등 기암절경으로 이루어진 금산 정상 바로 아래 자리 잡은 보리암은, 638년 원효대사가 초당을 짓고 수행하다 관음보살을 친견한 후 초당의 이름을 보광사라 칭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양양의 낙산사, 강화 석모도의 보문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로 알려져 있는데, 관음보살에게 기도를 하면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한 후, 소원이 이루어지면 온 산을 비단으로 둘러주겠노라 약속을 했기에 산 이름에 ‘비단 금(錦)’자를 써서 금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 쌍홍문: 상주 쪽에서 금산 상봉에 이르는 암벽에 두 개의 둥글고 큰 구멍이 문 모양으로 나란히 있는 돌문이다. 이 속에 들어가 보면 속이 비어 있고, 천장 벽에도 구멍이 뚫어져 있어 파란 하늘이 잡힐 듯이 보인다. 옛날 세존이 돌배를 만들어 타고 쌍홍문으로 나가면서 앞바다에 있는 세존도의 한복판을 뚫고 나갔기 때문에 세존도에 해상동굴이 생겼다고 전해온다.안내 표지판 글에는 금산의 수문장, 해골을 닮은 검은 동굴 금산을 오르는 관문으로 쌍홍문은 두개의 무지개를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금산 기암괴석 중 제일경으로 손꼽히며 석가세존과 세존도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세존도의 전설: 세존이 금산 쌍홍문에서 돌배를 타고 이 섬 한가운데를 뚫고 지나갔다는 전설이 있다. 상주 은모래 Beach에서 40km나 떨어져 있지만, 날씨가 좋으면 아득히 세존도를 볼 수 있다. 이 섬에는 한복판에 원형으로 된 해상 동굴이 있다. 섬 전체가 바위이며 나무도 식수도 전혀 없는 무인도(無人島)이다. 남해에서는 오래 가 물고 한발이 심할 때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효험을 본다고 하는 이야기가 민간에 전해오고 있다. 남해의 섬 중에서 낚시가 가장 잘 되기로 유명하여 낚시철이 되면 수많은 꾼들이 모여드는 장소이기도 하다.
▲ 산행 마침
▲ 산행 마치고 주차장에서 바라 본 금산
▲ 산행 마치고 간 뒤풀이 장소
▲ 산행 함께한 영균이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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