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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림청 100명산 산행기

5. 감악산(紺嶽山): 675m, 경기도 양주군 , 연천군 전곡읍, 파주시 적성면

□ 파주 감악산(紺嶽山)

범륜사 입구→묵밭→장군봉→임꺽정봉→감악산→쌍소나무→약수터 휴게소

◇산행지 :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양주시 남면 일원

◇ 산행일자 : 2011. 2. 26(토) 날씨 : 맑음

◇ 산악회및 친구 : 늘뫼 산악회 ( 홀로 )

◇ 산행거리 : 약 9.2 Km

◇ 산행시간 : 실제 산행시간 2시간 45분 < 점심 15분 포함>

시간대별 요약

- 08:07 대전 IC 출발

- 11:35 범륜사 입구 도착

- 11:37 산행 시작

- 11:48 범륜사

- 12:46 장군봉

- 12:52 임꺽정봉

- 13:05 감악산 정상 (점심 15분)

- 13:31 까치봉

- 13:51 쌍소나무

- 13:58 안부 갈림길

- 14:20 약수터 휴게소 산행 마침

- 16:40 뒤풀이 마치고 출발

- 20:05 대전 IC 도착

 

※ 특기사항

① 경기 5악이며 산림청 선정 100 명산.

② 올들어 두 번째 알탕.

③ 늘뫼 산악회 첫 산행

 

※ 감악산 설명

감악산(紺岳山)은 파주시 적성면과 양주군 남면의 경계에 위치한 해발 675m 산으로 삼국시대부터 명산으로 알려져 왔다. 예부터 바위 사이로 검은빛과 푸른빛이 동시에 쏟아져 나온다하여 감악(紺岳), 즉 감색 바위산이라 불렀다. 지역 주민들에게는 감박산으로 더 잘 알려져 있고 고려사동국여지승람에는 감악으로 표기되어 있다. 또한 조선시대 도성을 중심으로 북악, 송악, 관악, 심악 등과 함께 경기 오악의 하나로 지정되어 있다. 여기서 심악(深岳)은 파주의 옛 지명이다. 신라시대부터 무속의 신산 중 하나로 태조실록에 의하면 조선시대 궁중에서 이 산에 춘추로 별기은을 지냈다고 한다. 산 중에는 폐사되어 없어진 감악사가 있었는데 삼국시대 이래로 군사적 요충지로 아래로 칠중성의 토성이 쌓여 있었다. 이곳은 삼국시대부터 한반도의 지배권을 다투던 삼국간의 혈투장이었으며, 거란침입 때도 이곳에서 피를 흘리며 싸웠으며, 한국 전쟁 때도 고랑포 전투의 주 전장이었다. 현재에도 주변에 군부대가 있다. 이 산에는 범륜사를 비롯해, 수월사, 봉암사, 미타암 등의 절이 있으며, 중부 지방에서 주요한 신앙처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감악산 밑에 자리잡은 '산머루농원' 와이너리에 들르면 머루로 만든 달콤한 와인도 시음할 수 있다. 등산이 허용된 코스는 범륜사와 신암리, 원당리 쪽이다. 범륜사로 올라가는 등산로에는 운계폭로가 있고 중간 중간에 약수터가 있지만 갈수기에는 수질이 오염되어 식수로 사용할 수 없다.

 

※ 감악산 지도

 

산행 후기

2002년 산의 해를 맞아 산림청에서 선정한 100 명산 중 아직 가 보지 못한 산이 대여섯 개 있다. 그 중에 하나가 "감악산"인데 파주가 대전에서 멀다 보니 산악회에서 자주 가지 않고, 가끔 나올 때 마다 일정이 맞지 않아 가보지 못했는데 교차로 주말 산행 정보를 보니 "늘뫼 산악회에서 간다" 해서 따라 나서기로 하고 저녁에 예약 전화를 했다.

산행 준비를 하고 출발지인 원두막으로 가니 8시 전후에 출발하는 산악회 버스로 인해 인산인해다. 8시가 지나도 버스가 도착하지 않아 산악회에 연락하니 금방 도착 한단다. 버스에 올라 부회장이란 분이 일정을 소개 하는데 "오창 휴게소에서 아침을 하고 산행지로 출발" 한단다. 파주 까지 가려면 조금 일찍 가는 것이 좋은데 출발도 다소 늦은 8시로 늦었는데 더욱이 "아침 식사를 제공 한다며 오창에서 식사를 한다"니 약간 부담 스럽지만 "부부 모임이 있는 건 내 사정이고, 산악회 측에 맞춰야지 어쩌겠나" 싶어 커피 한 잔 마시고 눈을 감았다.

역시 수도권은 전 국민의 1/2이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듯 교통 체증으로 인해 답답함은 더했지만 인내 하는 방법 외에는 다른 수단이 없었기에 참아 내야 했지만 산행 초입을 잘 찾지 못한 기사님 덕분(?)에 회차 하여 산행 초입에 도착하니 솔직히 짜증이 났다. 개인적인 생각에 "한 달에 한 번 가는 산악회이니 아무래도 준비 소홀은 있는 것 같고, 그러다 보니 진행의 매끄러움은 부족해 보였지만 그래도 멀리 까지 와 준 것 만으로도 감사한 마음" 으로 산행에 임했다.

산행 시작과 함께 잘 정비된 산행로와 안내판 덕분에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역시 전날 과음으로 인해 권광진씨는 따라 붙지 못하고 뒤 쳐져서 따라가다 보니 힘에 겨워 동행은 포기하고 나름대로 즐기는 산행을 하고자 했지만....역시 산행 습관 탓에 부지런히 정상에 올라 인증 샷을 누르고 보니 정상에 오른 사람은 보이지 않고 혼자서 점심을 하고 보니 권광진씨가 옆에 있다. "일찍 올르셨텐데 왜 지금까지 정상에 있냐"고 물어 보니 1회용 비빔밥을 만드느라 10여 분 넘게 기다렸다고 한다. 이후 하산 길은 편한 등로로 인해 너무 쉬운 듯 했고 권광진씨와 나란히 하산해 보니 허걱~!!! 정상적인 산행을 한 사람은 우리 외에 없었고, 설마계곡 물에 약식 알탕을 하고서도 한참을 기다리니 산악회 사람들이 하산 하기 시작 한다.

산악회 측에서 준비한 청와대 만찬 막걸리에 매운 족발에..그리고 휴게소에서 시킨 라면으로 즐거운 뒷풀이를 한참 하고 나서야 후미가 도착 했고 뒷풀이를 다하고 출발 할 때 만에도 너무 즐거웠던 마음은 차안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 하면서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술을 마신 이후라 그냥 자장가로 생각하며 들었지만 뒤 좌석에서 심한 반발로 인해 나 역시도 즐겁지 않아 오창 휴게소에 도착하여 출발 할 즈음 부회장님에게 "이제 부터라도 조용히 갔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내니 "우린 늘 그렇게 했다면서 싫으면 오지 말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해서 실망을 금치 못했는데 다행히도 그 후론 조용히 대전으로 향해서 감사한 마음을 간직하고 부부 모임 장소로 향했다.

 

산행 사진

산행지 도착 범륜사 입구 (여기서 범륜사 까지 승용차 출입이 가능 한 아스팔트 길이다)

산행지 입구에 있는 감악산 지도

범륜사 까지는 아스팔트

 

범륜사 아래 운계폭포는 얼어서 볼품이 없었고 촬영을 위한 위치도 안 좋아 그냥 지나쳐오니 산행 초입에 안내판이 잘 되 있다.

범륜사 : 한국불교태고종에 속하며 원래 감악산에는 감악사, 운계사, 범륜사, 운림사 4개의 사찰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현재는 모두 소실되었고, 지금의 범륜사는 1970년에 옛 운계사터에 재창건되었다. 중앙에 대웅전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머타전과 동양 최대의 백옥 11면 관세음보살상과 전면에는 9층 석탑과 자연석으로 세운 세계평화의 비가 있고, 절 입구에는 해탈교라는 작은 다리가 있고 경내에는 하얀 불상이 우뚝 서 있으며, 절 뒤편으로는 산신각이 있는데 그 안에서 시원한 석간수가 흘러나온다. 절 바로 밑에는 높이 20m의 운계폭포가 있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범륜사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범륜사에 있는 등산 안내도

범륜사

범륜사 이후 묵은밭까지 등산로는 거의 돌 계단 수준이다.

묵은밭: 묵정밭(오래 내버려 두어 거칠어진 밭)’의 평안북도 방언이라고 한다. 묵은밭은 묵밭, 진전(陳田) 등으로도 불리는데, 옛날에 가꾸다가 오랫동안 묵혀 두어 잡초가 자란 밭이다.

이곳 묵은밭에서 계곡을 따라 직진하는 길과 오른쪽 능선으로 오르는 갈림길이 있다. 임꺽정봉으로 가는 길이 더 힘들다지만 당연히 임꺽정봉으로 향했다.

 

 

 

정상의 모습( 통신탑과 까치봉의 팔각정)

레이다 기지가 있는 파평산이라는데..육안으론 잘 보였는데 카메라가 좋지 않아....

파주시 적성면

산행로는 잘 정비 되어 있다.

감악산의 통천문?

 

장군봉과 임꺽정봉

병풍바위

임꺽정봉

 

장군봉에서 바라 본 임꺽정봉

임꺽정(林巪正, 1504~ 1562)은 조선 명종 때의 황해도 지방의 백정 출신 도적이다. 홍길동, 장길산과 함께 조선 3대 도적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겨지며 임거정(林巨正), 임거질정(林巨叱正) 등으로도 쓴다. 경기도 양주(楊州)의 백정으로 정치의 혼란과 관리의 부패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불평분자를 규합하여 민가를 약탈하였으나, 아전과 백성들이 도와 잡지 못하였다. 1559(명종 14)부터 황해도·경기도 일대를 중심으로 관아를 습격하고 관리를 살해하는 한편 창고를 털고 빈민에게 양곡을 나누어 주었다. 황해도 장연(長淵옹진(甕津풍천(豊川) 등지에서 관군이 토벌을 하려 했으나 백성들이 내응하여 이를 피했다. 1560(명종 15)부터 점차 세력이 위축되던 중 1562(명종 17) 음력 1월에 관군의 대대적인 토벌 작전으로 인해 구월산(九月山)으로 철수하여 항전하다가 잡혀서 사형을 당했다. 정성희 실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조선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은 조선의 3대 도적으로 홍길동·장길산과 임꺽정을 꼽았다. 성호가 3대 도적으로 이들을 꼽은 것은 비단 대도(大盜)여서만은 아닐 것이다. 당시 위정자들은 이들을 도적떼로 몰고 갔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는 위정자에 대한 농민의 저항이자 신분해방의 부르짖음이 담긴 의적(義賊)이라는 시각이 담겨있다고 본다.라고 평했다 출처:위키백과

 

 

임꺽정봉에서 바라 본 감악산 정상

임꺽정굴로 내려 가 보려 했더니 낭떨어지 수준이라 포기 하고..

 

설인귀(薛仁貴, 613년 ~ 683년): 당나라 초기의 명장 중의 하나이다. 이름은 설례(薛禮)였으며, 자는 인귀(仁貴)로 통상 설인귀로 알려져 있다. 설궤(薛軌)의 아들이다. 강주(絳州) 용문 출생으로 645년(보장왕 4년)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 군졸로 응모, 안시성 공방전에서 공을 세워 유격장군(遊擊將軍)으로 발탁되었다. 당 고종 때 우령군 중랑장으로서 659년(보장왕 18년)에 횡산(橫山)에서 고구려 장군 온사문을 상대하여 승리하였다. 666년(보장왕 25년) 고구려의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죽고 그 장남 연남생이 아우 연남건·연남산에게 쫓겨 당나라에 와서 원병을 청하자,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으로 요동안무대사(遼東安撫大使) 계필하력(契苾何力)을 도와 다시 고구려를 침략했다. 그는 남건의 군사를 격파하고 남소(南蘇)·목저(木底)·창암(蒼巖) 등 3성을 함락시켰다. 668년에 나·당 연합군에게 고구려가 망한 후, 당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그는 검교안동도호(檢校安東都護)가 되었다.당나라는 고구려의 행정구역이었던 5부, 176성, 69만 7000의 민호를 나누어 9도독부, 42주, 100현으로 하고,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설인귀로 하여금 통치하게 하였다. 671년(신라 문무왕 11년) 계림도행군총관(鷄林道行軍總管)으로 신라를 침입했으며, 675년 신라의 천성(泉城)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676년 11월 설인귀가 이끄는 병선이 기벌포를 침범하였는데, 사찬(沙飡) 시득이 이끄는 신라 함선이 이를 맞아 싸웠다. 처음에는 신라 해군이 패하였으나, 이어 크고 작은 22번에 걸친 싸움 끝에 당나라 수군 4,000여 명이 죽었다. 681년 과주자사(瓜州刺史)·대주도독(代州都督)으로 임명되었으며, 다음해 돌궐을 격파했다. 뒤에 본위대장군(本衛大將軍)으로 임명되고 평양군공(平陽郡公)에 봉해졌다. 출처:위키백과

감악산 정상 인증

감악산비(紺岳山碑):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객현리 산182, 감악산 정상에 있는 비석이다. 1986817일 파주시의 향토유적 제8호로 지정되었다. 이 비석은 기단부, 비신, 개석을 갖춘 화강암 석비로 높이 170cm, 너비 70~79cm의 규모이다. 이 비는 글자가 전혀 확인되지 않고 있어 '몰자비(沒字碑)'라 부르기도 하고 '설인귀비'. '빗돌대왕비' 등으로 구전되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이 비에 대한 실체는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속전에 의한 기록만이 존재하고 있다. 1982년 동국대학교 감악산고비 조사단에서 2차례에 걸쳐 이 비를 조사한 결과 그 형태가 북한산의 진흥왕순수비와 흡사하고 적성지역이 전략적 요충지로서 진흥왕 대의 영토확장 정책에 따라 세력이 미쳤던 곳이라는 점을 들어 제5의 진흥왕순수비의 가능성을 제기했으나 그 역시 결론을 낼만한 확실한 증거는 발견되지 못했다. 출처:위키백과

감악산 정상에서 식사를 할 때 까지도 아무도 없었는데 식사 후에 보니 감악산비에 올라 가는 몰상식상한 사람들도 있었다.

까치봉에 있는 팔각정

임진강 너머 연천군..맑은 날은 경기 5악 송악산도 보인다는데..

뒤 돌아 본 정상

지도에 쌍소나무라 되 있어서 기대하고 올라 가 보니 헐...

범륜사 방향으로 가다 안부에서 휴게소 방향으로 가면 됨..

안부에 있는 안내판.

약수터 휴게소 산행마침.

 

감악산 충혼탑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설마리 145

충혼탑 건립기(建立記):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집단의 불법 남침으로 평화스럽던 남한 땅이 한 때 붉은 무리들의 손에 들어갔으나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고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젊은 청년들은 고귀한 피를 흘려 싸웠다. 당시 감악산에는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현역 잔류병과 파주군 연천군 양주군 장단군 등지에서 모여든 반공 청년들이 대한의열단 감악산 결사대를 조직하여 적의 후방교란과 유격전을 전개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고 결사대원들의 희생도 많았다.생존한 결사대원들은 항상 구국의 일념으로 목숨을 바친 동지들의 숭고한 뜻과 영혼을 달래고저 1978년 적석면 객현리에 충혼사를 건립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수복일인 9월 28일과 현충일에 위령제를 지내왔다. 이런 일이 있은지 어언 38년 감악산 결사대장과 생존동지들은 옛 순국동지들의 영혼을 달래는 길은 충혼탑의 건립이라고 뜻을 모으고 그 성사를 위하여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던 중 1988년 파주시당국과 한국자유총연매 파주시 지부의 도움을 받아 늦게나마 이탑을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