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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림청 100명산 산행기

7. 계룡산(鷄龍山): 845m, 대전광역시, 충청남도 공주시, 논산시

□ 계룡산(鷄龍山) 천황봉 천단

윗사기소→치개봉→향적봉→천황봉→통천문→쌀개봉→관음봉→삼불봉→큰배재→천정골

◇ 산행지 : 충남 공주시 계룡면,반포면 충남 계룡시 일원

◇ 산행일자 : 2013. 7. 13(토) 날씨 : 흐리고 한 때 비

◇ 산행 친구 : 돈민이와 병채 형님

◇ 산행거리 : 약 13 km

◇ 산행시간 : 8시간 10분 소요 <중식 25분 포함>

◇ 시간대별 요약

- 04:40 기상 아침 식사

- 05:45 반석역

- 06:55 현충원역

- 06:20 삐까삐까 산행시작

- 07:45 치개봉

- 08:12 향적봉

- 08:23 벼랑바위

- 10:45 천황봉

- 10:55 금남정맥 갈림길

- 11:17 통천문

- 11:50 연천봉/관음봉/동학사 갈림길

- 11:56 관음봉 (점심25분)

- 13:13 삼불봉

- 13:26 남매탑(상원암)

- 13:47 큰배재

- 14:30 천정골 탐방 안내소 산행 마침

 

※ 특기사항

① 천황봉 다섯 번째 등정(천단 세 번째 방문)

② 흐린 날씨와 비로 인해 초반 제외 하고 조망 없었음

③ 금지구역으로 이정표 없으나 큰 어려움 없음(산행 지도 없이 산행 가능)

④ 당초 ㄷ종주 산행 계획( 장군봉 지나 병사골 하산 안하고 천정골 하산)

⑤ 산행 후 뒤풀이 (복날 백숙)

 

※ 산행 전 사전 조사

<계룡산(鷄龍山)> :충남 공주시, 계룡시, 논산시, 그리고 대전광역시에 걸쳐 있는 높이 845m의 산이다. 1968년 12월 31일에 국립공원으로 지정 되었다. 충청지역에서 계룡산은 대표적인 산이나 높이나 면적에서 최고나 최대는 아니다. 계룡산의 천황봉과 연천봉, 삼불봉을 잇는 능선이 닭의 볏을 쓴 용을 닮았다하여 계룡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최고봉인 천황봉의 높이는 해발 845미터이다. 계룡산 전체면적은 60.98평방킬로미터이고 계룡산 기슭에는 동학사, 갑사, 신원사 등 유명한 사찰이 있으며, 국어교과서에 소개되었던 남매탑이 있다. 또한 계룡산은 조선시대 천도가 거론될 만큼 명당으로 충남 제일의 명산이다. 풍수 지리학상 <금계포란형>의 동학사 조선의 <무학대사>가 이산의 산세가 금 닭이 알을 품고 있는 <금계포란형>이자, 용이 승천 하는 형상인 <비룡승천형>이라서 <계룡산>이라 이름 했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그 가장 중요한 곳에 이 <동학사>가 자리 잡고 있다고 한다. 계룡산은 백제시대도 중요한 산으로 중국측의 문헌에 계산 또는 계람산으로 기록된 것이 확인되는데, 신라에서 계람산으로 불렀던 것으로 미루어 계룡산이 계산 또는 계람산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오악의 하나로 중요시 되었다. 신라는 국가의 제사를 대사, 중사, 소사로 분류하였는데, 계룡산에서 지내는 제사는 중사에 해당되었다. 이후 이 신앙은 고려와 조선에 걸쳐 전해져 내려왔다. 이 제사는 신원사의 중악단에서 지내져왔다.<출처:다음 위키백과>

 

※ 산행지도

 

※ 산행 후기

계룡산은 거주지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 보니 거의 안 가 본 코스가 없을 정도로 많이 다녀 온 편이다. 개방된 구간은 일일이 다 거론 할 필요도 없이 구석구석 많이 갔었다. 인상 깊이 남아 있는 대표적인 몇을 뽑으라면 천황봉, 쌀개봉, 머리봉, 치개봉, 향적봉, 칼릉, 암용추, 숫용추등인데 모두 출입금지 구간에 속해 있는 곳이다. 그러고 보니 계룡산은 출입금지 구간이 모두 인상 깊은 곳으로 자리 잡고 있다. "암튼 장마가 있는 요즘은 가까운 곳이 좋은 것 같고 체력훈련을 할 겸 계룡산 ㄷ종주를 하기로 마음먹고 병채 형님에게 같이 가자“고 하니 흔쾌히 동행 해 주신다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연락해 보란다. 연호 형님에게 연락을 취해보니 토요일은 근무라 안 된다 하고 돈민이만 가능하다 해서 6시에 현충원역에서 셋이 만나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아침식사를 하고 지하철을 이용 현충원역에 가니 돈민이도 지하철을 타고 왔고 병채 형님만 차를 가지고 오셨다. 병채 형님 차를 이용하여 산행 초입인 "삐까삐까 식당"이 있는 윗사기소에서 산행은 시작되었다. 출입금지 구역답게 철조망이 설치되어 있고 출입문이 자물쇠로 잠겨있어 월담을 해야 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다행히(?) 잠겨 있지 않은 곳을 찾아 산행을 진행 했는데 역시 두 사람은 거침없이 올라간다. 두 사람 뒤를 따라 약 30분 정도 올라가니 조망바위이고 드디어 장군봉이 조망된다. 이후 약 20분 더 산행하면 (구)치개봉에 도착하고 산행시작 후 약 1시간 20분 만에 밀목재 갈림길인 (구)향적봉인 치개봉에 도착했다.

장마 기간답게 이후 조망은 없었다. 천왕봉(현재는 향적봉)엔 쓸쓸한 무덤만 있을 뿐 아무런 표식도 없다. 벼랑바위를 지나서 바로 위험 구간에 혹시 밧줄이 없을까 염려 했는데 다행히 밧줄은 잘 걸려 있다. 드디어 문제의 천황봉 갈림길에서 셋은 의견을 조율하여 천황봉으로 가기로 한다. 그런데 장마로 인한 운무로 인해 한바탕 짧은 알바를 하고 다행히 천황봉으로 향할 수 있었다. 천황봉에 도착 할 무렵 어디서 큰소리로 통화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군인들일지 몰라 조심스럽게 접근해 보니 아무도 없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천황봉 주변 시설 공사를 하러온 인부들 목소리였다. 지난 번 천황봉에 올라 천단에서 인증 사진을 찍었는데 군인에게 붙들려 찍은 사진 모두를 삭제 당했다는 병채 형님의 말을 상기 시키며 조심스럽게 즐거움을 만끽하고 쌀개봉으로 향하는 동안 기분은 최고조에 다란다. 운무로 인해 쌀개릉은 다소 위험 했지만 곳곳에 밧줄도 설치되어 있어 어렵지 않게 관음봉 갈림길에 도착 할 수 있었다.

관음봉 정상 주변에서 편한 마음으로 점심 식사를 하고 자연성능으로 출발 했는데 돈민이가 속옷 쓸림으로 인해 고통이 심하다며 동학사로 하산하자고 한다. 컨디션이 좋았던 나는 장군봉까지 내심 ㄷ종주를 하고 싶었지만 다음날 있을 팔각산 산행을 고려해 큰배재에서 천장골로 하산하기로 의견을 모아 천장골로 하산을 한 후 차가 있던 곳에서 뒤풀이로 백숙을 먹고 현충원역에 내려 집으로 향했다. 출입금지구역이니 누굴 탓해서도 안 되지만 이번 산행을 하며 다소 아쉬운 부분은 이정표가 없고, 선답자들의 표식 또한 제거된(?) 상태이며 위험 구간에 제대로 된 밧줄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언젠간 출입금지구역이 풀려 편한 마음으로 계룡산 구석구석 모두 산행을 할 날이 왔으면 좋겠다.

 

※ 산행 사진

▲ 산행 시작 한 곳

▲ 월담 하기 싫어 찾아 보니 이곳으로 들어 오는 문이 열려 있다.

 

▲ 과거 치개봉이라 했던 곳에서 바라 본 장군봉

▲ 과거 치개봉이라 했던 곳에서 바라 본 장군봉과 학봉리..우측은 우산봉

▲ 과거 치개봉이라 했던 곳에서 바라 본 우산봉과 우측은 갑하산

▲ 과거 치개봉이라 했던 곳에서 바라 본 도덕봉과 관암산

▲ 함께 산행한 두 사람은 조망 보며 쉬고 못 걷는 나는 거북이가 되어 앞서갔으나 금방 쫒아와 또 앞질러 간다. 헐~~!

▲ 원추리

▲ 치개봉에 다 와 간다. 멀리 장군봉이 잘 조망되고 우측 바로 앞은 황적 OB 슬랩

▲ 과거 황적봉이라 했던 곳인데 요즘 지도에는 치개봉으로 되어 있다.

▲ 암용추 밑에 있는 용동 저수지, 우측은 게룡시 엄사리에 있는 황적산

▲ 과거 천왕봉이라 했던 곳인데 요즘 지도에는 천왕봉은 없어졌고 황적봉으로 되어 있다.

▲ 천황봉 방향인데 비로 인해 조망 되지 않는다.

▲ 장군봉이 잘 조망되고 우산봉과 갑하산 우측 바로 앞은 황적 OB 슬랩이다.

▲ 안전사고 발생이 문제가 아니라 군사시설보호가 주 목적이면서..ㅋ(얼른 풀려서 자유로운 산행을 할 수 있는 그날이 왔으면 싶다)

▲ 천황봉 방향은 이제 비로 인해 조망 되지 않는다.

▲ 동학사가 보인다.

 

동학사(東鶴寺)[유래]: 신라 성덕왕 23년(724)에 上願祖師(상원조사)가 조그마한 암자를 지었는데 그 후에 懷義和尙(회의화상)이 중창하여 上願寺라 하고 그리 부르게 하였다. 고려 태조20년(937)에 신라가 망하고 大丞(대승) 柳車達이 신라의 시조와 충신 박제상의 넋을 불러 제사 지내고 동학사를 지었다. 이때부터 참선하는 중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서 절의 이름을 東鶴寺라 고쳤다. 이것은 이곳 동쪽에 있는 鶴바위의 뜻을 따서 그리 부르게 하였다 한다. 조선시대 영조 4년(1728)에 신천영의 난 때 모두 불타서 86년간 비어 있다가 순조 14년(1814)에 錦峯 月印禪師(월인선사)가 예조에호소하여 다시 세웠다. 고종 원년(1864)에 金剛山에 있던 중 萬化 普善禪師(보선선사)가 옛 건물을 모두 헐고 새로 절 40칸과 招魂閣(초혼각) 두 칸을 지어서 내려오다가 6·25 사변 때 피해가 많아서 대웅전을 다시 세웠다. 동학 경내에는 肅慕殿(숙모전), 東鶴寺(동학사), 表忠寺(표충사), 三隱壇(삼은단)이 있어서 신라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의 여러 위인들의 거룩한 정성을 엿볼 수도있는 곳이다. 동학사에 딸린 절로는 文殊庵(문수암), 彌陀庵(미타암), 吉詳庵(길상암)이 있다. 골이 깊고 수석이 기이하며 수목이 울창하여 文客들이 즐겨 찾았던곳이다. 계룡산의 삼사인 東鶴寺, 甲寺, 麻谷寺를 말할 때 동학사는 文脈이고, 갑사는 武脈이고, 마곡사는 政脈이라고 평한다. 文脈이 서린 곳이 東鶴寺다.동학승가대학은 운문사의 강원과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비구니 수련 도량으로 손꼽히고 있다.

▲ 벼랑바위

 

 

 

 

▲ 뒤 돌아 본 벼랑바위

▲ 좌측 장군봉 멀리 중앙 갑하산 우측은 황적봉이다.

▲ 남근 바위 (어떤이의 산행기에는 물개바위라고..)

 

 

▲ 동학사

 

▲ 운무로 시야가 안좋아 알바 아닌 알바를 잠깐 했다.

▲ 금남정맥 갈림길

▲ 머리봉 쪽에서 본 천황봉의 모습예전에 머리봉에 갔을 때사진에서)

<천황봉>: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 때 사회·문화적으로 일제의 많은 침탈을 받았었는데, 창지개명(創地改名)도 그 사례 중 하나이다. 가장 많은 왜곡의 유형으로 큰 산이나 봉우리 이름에 들어가는 왕(王)을 황(皇)이나 왕(旺)으로 바꾼 경우가 있는데, 황은 일본 천황을 의미하는 것이고, 왕은 일본의 왕이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천황봉이란 명칭은 보통 큰 산의 주봉에 붙여지는 이름으로 속리산, 지리산, 월출산 등 많은 국립공원의 주봉들의 이름이다. 계룡산 천황봉의 명칭이 언제 붙여졌는지 명확하진 않다. 과거에는 계룡산의 가장 높은 봉이라 하여 상제봉(上帝峰), 상봉(上峰), 제자봉(帝字峰) 등으로 불렸다고 한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공주시에 주로 위치하며, 일부가 대전광역시와 논산시에 걸쳐 있다. 천황봉은 높이가 845.1m이며, 계룡산의 주봉으로서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 천황봉을 중심으로 연천봉[738.7m], 삼불봉[775.1m], 문필봉[796m] 등 28개의 봉우리가 둘러싸고 있다. 최근 천황봉이란 명칭이 일제의 잔재라는 주장에 따라 천왕봉(天王奉)으로 개명하려 했었다. 그러나 천황봉이란 명칭의 유래에 대한 명확한 근거가 없으며, 1914년 일제에 의해 제작되고 1928년 수정된 1:50,000 지형도에 연천봉 외에는 다른 봉우리의 명칭이 보이지 않고 있는 점과 동쪽 능선에 자리 잡은 천왕봉과 혼란을 초래할 우려가 있어 천황봉이란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현재 천황봉에는 군 작전을 위한 레이다기지와 방송수신탑이 설치되어 있어, 군사 시설 보호 구역이자 출입 금지 구역으로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다.

<출처: 디지털공주문화대전>

▲ 계룡산 천황봉 정상에 있는 이 천단 표석은 2003년 5월 12일 300명 가까이 모인 가운데 복원 행사를 했다고 한다. 천황봉의 유래를 살펴보니 천왕봉과 임금봉을 거느리고 있어서 천황봉이라 했다는 글도 있었는데 현재 지도에는 임금봉이 갓바위로 천왕봉이 향적봉으로 표기 되어 있어 임금봉과 천왕봉은 사라졌다.

 

 

 

▲ 이 산제단(계룡산 백호 할머니 제단)은유림동에 사는 근암 이하석 옹이 계룡산이 천하명산이고 신령함에 기도인이 많았으나 제단이 없음을 염려 하던 차에 꿈에 하얀 할머니가 반가워하심으로 혼자 이곳에 막을 치고 자연석에 글을 쓰고 각자하여 1957년 10월에 세웠다고 한다.

▲ 천단엔 두 번 왔으면서도 천단 표시석 아래 산제단이 있는 줄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이 제단 옆에 공사하러 올라 온 사람들이 가져온 수박과 막걸리, 음료수등이 있어 막걸리 한 잔에 대한 유혹이 강렬했으나 차마 양심상 그러지 못하고 제물도 없이 삼배를 하고 군인들이 와서 사진을 지울까봐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계룡산 천단 유래비: 2003년 5월 12일 당시 충청남도 도지사 심대평氏가 세운 유래비에는 대략 이런 내용이다.

역사 이래 충청인과 애환을 함께 한 계룡산은 첫 기록이 이미 백제때 보이는 명산이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오악(五岳)중에 서악(西岳)이라 불리었고 고려 이후 나라에선 영산으로 받들었던 이 산은 조선초 말기에는 신원사의 경내에 중악단(中嶽壇)이 세워져 오늘에 이르고 이른다. 계룡산 제일봉인 이곳 천황봉(天皇峰)에는 통일신라시대 이래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제단을 설치하고 국태민안을 기원코자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신성한 장소로 보존되어 왔다. 민족의 운명이 암담했던 지난 시기에도 우리에게 희망과 위안을 안겨주는 명소로 널리 알려져 온다.

계룡산 천단을 보고 내려 왔는데 운무로 가까운 몇 미터도 보이지 않는다. 왔던 길로 서둘러 돌아가 쌀개봉 능선으로 이동 했다.

 

▲ 되돌아 온 금남정맥 갈림길 (이 지점에서 천단 왕복 약 20분 소요)

 

▲ 통천문(바로 위가 쌀개봉인데 앞이 보이지 않고 미끄러워 쌀개봉은 우회 했다. 이후 쌀개 능선으로 진행 했다.)

쌀개봉(828m) : “쌀개”란 디딜방아를 양쪽으로 고정시키는 걸개를 말한다. V자형 산봉우리가 마치 디딜방아의 쌀개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

▲ 연천봉/관음봉/은선폭포(동학사 방향) 갈림길 :통천문에서 여기까지 약 25분 정도 소요된다. 다행히 국공이 없어서.. 휴~!

▲ 관음봉 방향엔 궂은 날씨임에도 사람들이 많다.

▲ 관음봉 근처에서 점심을 하고 이후 진행에 대해 의논 했으나 돈민이의 속옷 쓸림 현상으로 더 이상 진행은 무리이고, 천단을 다녀와서 그런지 장군봉까지는 욕심도 없고 다음날 있을 영덕 팔각산 때문에 큰배재에서 천장골로 하산 결정~!

▲ 관음봉

관세음보살 [Avalokiteshvara, 觀世音菩薩]: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광세음보살(光世音菩薩)·관세자재보살(觀世自在菩薩)·관세음자재보살(觀世音自在菩薩)이라고도 하며, 줄여서 관음, 관세음, 관음보살이라고도 함('모든 곳을 살피는 분', '세상의 주인' 등을 뜻함).출처:다음 백과사전

 

▲ 자연성능 쪽에서 바라 본 지나온 향적봉 치개봉 방향 (왼쪽 멀리 갑하산, 우측 멀리 금수봉)

▲ 자연성능에서 바라 본 삼불봉

▲ 삼불봉

 

 

▲ 금남정맥 갈림길 (금잔디 고개/삼불봉 갈림길)

삼불봉: 동학사나 천황봉에서 올려다보면, 세 개의 봉우리로 된 산의 형상이 마치 세 부처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삼불봉이라 불린다고 한다.(출처:디지털 공주 문화대전)

삼불봉 설화는 "계룡산 8경" 중에 하나 인데 계룡산 팔경을 열거 해 보면 1.천황봉에서 바라 본 일출 2.삼불봉을 하얗게 덮어버린 겨울의 흰눈 3.연천봉의 낙조 4. 관음봉을 싸안고 한가롭게 떠도는 구름 5. 한 여름 동학사 계곡의 숲 6. 가을 갑사 계곡을 붉게 수놓은 단풍 7. 은선폭포가 낙수되면서 하얗게 포말을 일구워내는 물안개 8.남매탑에 반쯤 걸린 달의 모습

 

 

▲ 남매탑(일명 오뉘탑): 남매탑(男妹塔)은 계룡산에 있는 두 개의 탑으로 동학사에서 갑사로 넘어가는 연천봉 중턱에 있는 상원암 근처 해발 615m 지점(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산18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곳은 계룡 팔경중 제팔경인 '오뉘탑의 명월'로 꼽힐 만큼 풍광이 뛰어난 곳이다. 남매탑은 충남 지방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곳에 청량사가 있었다하여 청량사지쌍탑이라고도 불린다. 5층 석탑은 보물 제128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7층 석탑은 보물 제1285호로 지정되어 있다. 청량사는 임진왜란때 병화로 전각이 모두 소실되었고, 이 탑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일명 남매탑 또는 오뉘탑이라 부르기도 하고 이 2기의 석탑들은 1950년대에 무너져 있던 것을 1961년에 복원하였다. 탑을 쌓은 돌들은 계룡산 일대의 존재하는 화강암류로 담홍색 흑운모화강암이다.남매탑은 통신신라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의 연구자들은 12세기경에 건립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두 탑은 백제계 양식을 가진 탑으로 5층석탑은 정림사지석탑을 모방하였고, 7층석탑은 미륵사지석탑을 모방하였다

 

남매탑 전설: 남매탑에는 탑이 세워진 내력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신라 성덕왕 때 상원조사가 이곳에 암자를 짓고 불공을 드리고 있는데 호랑이가 찾아와 입을 벌리고 우는 소리를 내었다. 스님은 호랑이의 목에 걸려 있는 큰 뼈다귀를 빼주었는데, 호랑이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사라져버렸다. 얼마 후 호랑이가 스님을 태우고 어디론가 달려갔는데 거기에 실신한 처녀가 있었다. 스님은 그 처녀를 암자로 데리고 와서 간호를 하였다. 얼마 후 정신이든 처녀는 자신이 상주에 사는 임진사의 딸인데 혼인날에 호랑이가 나타나 그만 기절을 하였는데 이곳까지 왔다고 하였다. 스님이 호랑이와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주자 처녀는 부처님이 맺어준 인연이라고 하며 부부의 연을 맺기를 청하며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상원조사는 흔들리지 않고 함께 수도에 정진하자고 하며 거절하였다. 그 후 스님과 처녀는 의남매를 맺고 불도를 닦으며 일생을 보냈는데 후에 상원조사의 제자 회의화상이 두 개의 불탑을 세워 그 뜻을 기렸고, 사람들이 그 탑을 오뉘탑이라고 불렀다 (출처: 다음 백과사전)

▲ 남매탑 옆의 상원암:상원암에 대한 유래는 남매탑 전설을 읽어 보면 알 수 있다.

▲ 동학사/ 천정골 갈림길

▲ 큰배재 (마음은 장군봉으로 ㄷ종주를 완성 하고 싶기도 한데 많이 다녀 본 곳이고 다음날 있을 산행을 위하여 천정골로..)

 

▲ 천정골 입구 (지도에는 천장골이라 나와 있는데 탐방 안내소엔 천정골이라 표기 되어 있다)

▲ 산행 마치고 삐까삐까에서 바라 본 장군봉

 

 

▲ 산행 마치고 뒤풀이는 백숙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