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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림청 100명산 산행기

3. 가야산 (伽倻山) :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성주군 가천면

□ 가야산 (伽倻山, 1433m) : 만물상,칠불봉, 상왕봉,해인사

백운동→만물상→상아덤→서성재→칠불봉→상왕봉→토사골→해인사

◇ 산행지 :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성주군 가천면 일원

◇ 산행일자 : 2013. 2. 3 (일) 날씨 : 맑음

◇ 산행거리 : 약 10.9km

주차장→0.6→백운동 탐방지원센터→3→서성재→1.2→칠불봉→0.2→상왕봉→4.2→ 해인사→1.5→치인주차장

◇ 산악회및 산행 친구 : 청백 산악회, 운용

◇ 산행시간 : 5시간 30분 산행 (해인사 관람 27분, 점심 20분 포함)

◇ 시간 대별 요약

- 06:50 대전 IC

- 09:34 백운동 주차장

- 09:47 백운탐방지원센터 산행시작

- 11:13 점심(20분)

- 11:53 상아덤

- 11:59 서성재

- 12:47 칠불봉

- 13:00 상왕봉

- 13:10 봉천대

- 14:32 해인사 (관람 27분)

- 17:45 증심사 주차장 산행마침

 

※ 특기사항

① 가야산 국립공원 다섯 번째 산행

② 만물상 첫 산행

③ 선두로 하산

④ B조 가야산 그리움 릿지, C조 남산 제일봉 산행

⑤ 운용이와 막걸리 뒤풀이

 

※ 산행 전 사전 조사

국립공원 가야산(伽倻山國立公園): 조선8경의 하나로 주봉인 상왕봉(1,430m)을 중심으로 톱날 같은 암봉인 두리봉, 남산, 비계산, 북두산 등 해발 1,000m가 넘는 고봉들이 마치 병풍을 친 듯 이어져 있다. 상왕봉은 소의 머리처럼 생겼고 오랜 옛날부터 산정에서 행해졌던 산신제의 공물을 소에 바치고 신성시 해왔다고 하여 우두봉이라고 불리며, 상왕봉의 ‘상왕’은 <열반경>에서 모든 부처를 말하는 것으로 불교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가야산은 동서로 줄기를 뻗고 있으며 남북으로 경상북도 성주군과 경상남도 합천군의 경계를 이룬다. 합천 쪽으로 드리운 산자락은 부드러운 육산을 이루고 성주군 쪽은 가파르고 험하다.정상에서 내려다보는 기암괴석과 어우러진 가을 단풍은 자연의 신비로움을 느끼게 하고, 눈 덮인 가야산 설경은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듯하다. 가야산은 오묘하고 빼어난 산세를 지니고 있어 사시사철 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매표소에서 해인사까지 이어지는 홍류동계곡 주변에는 소나무뿐만 아니라 활엽수가 우거져 있어 그 아름다움이 해인사와 함께 가야산의 백미로 손꼽힌다. 해인사 초입의 갱맥원에서 부터 정상의 우비정까지 19개의 명소가 있다. 가야산 골짜기에서 발원한 홍류동 계곡은 계절마다 경관을 달리하여 주위의 천년 노송과 함께 제3경 무릉교로부터 제17경 학사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절경이 10리 길에 널려있다. 가을의 단풍이 너무 붉어서 계곡의 물이 붉게 보인다 하여 홍류동이라 불리웠고 여름에는 금강산의 옥류천을 닮았다 해서 옥류동으로도 불리 운다.이 계곡의 아름다움은 봄이나 가을에 으뜸을 이룬다. 그밖에도 가야산에는 무릉교, 홍필암,음풍뢰, 공재암, 광풍뢰, 제월담, 낙화담, 첩석대 등의 명소가 있다.가야산 남쪽자락에 자리 잡은 해인사는 14개의 암자와 75개의 말사를 거느리고 있다. 특히 해인사는 국내 3보사찰 중 법보사찰로 유명하다. 우리나라 3보 사찰 중 하나인 가야산 해인사는 불교의 성지이다. 조선시대 강화도에서 팔만대장경을 옮겨온 후 불보사찰 통도사, 승보사찰 송광사와 함께 법보종찰로서의 명성을 얻게 된 것이다. 가야산 능선은 곰취, 더덕, 잔대, 두릅, 미나리 등 많은 종류의 산나물 산지로 봄철의 산나물산행으로도 인기 있다. 해인사 입구에서 주민들이 직접 채취한 산나물을 판다.현대에 들어와서 가야산은 백련암에서 수도했던 성철스님으로 말미암아 더욱 유명하게 됐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법어는 홍류동계곡의 맑은 물과 더불어 가야산을 찾는 이들의 마음에 항상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킨다. 출처: 합천 군청 가야산 이야기 (지명유래 및 명소)

 

<해인사(海印寺)>: 인사(海印寺)는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가야산 중턱에 있는 사찰로서 팔만대장경이 세계기록유산,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장경판전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 본사로 150여 개의 말사(末寺)를 거느리고 있다. 불교의 삼보사찰 중 법보(法寶) 사찰로 유명하다. 대적광전(大寂光殿)의 본존불은 석가모니이다. 802년 신라 애장왕 3년에 ‘순응’과 ‘이정’이 창건했다. 그들은 가야산에 초막을 세우고 참선을 했는데 등창으로 고생하던 애장왕의 왕비의 병을 낫게 해주어 애장왕이 절을 창건하도록 했다. 순응과 이정 이후 ‘결언대덕’이란 승려가 사찰 창건을 계속했고 주지가 되었다. 918년에는 승통희랑이라는 당시 해인사 주지가 고려를 도와준 데 대한 보답으로 고려 태조가 국찰로 삼았다. 대각국사 의천이 《속장경》의 간행을 시도한 곳이다. 해인사는 5차례가 넘는 화재로 인해 여러 번 중창되었으며, 그에 따라 창건 당시의 건축은 알 수 없고, 현재의 전각은 대부분 조선 말기 때의 것이며, 3층 석탑·석등 등이 현존한다. 1481년 조선 성종 12년 이후 8년간 중건하였고,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건축물로서 국보로 지정된 장경판전(藏經板殿)에는 유명한 《고려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다. 해인사는 1993년에 성철 스님이 입적한 곳이기도 하다. 해인사는 광복 후 한국전쟁 때 위기를 맞게 된다. 1951년 9월, 인천상륙작전 이후 대한민국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퇴각하지 못하고 남은 1천여 명의 북한군 잔당들이 해인사를 중심으로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이에 UN군에서는 폭격기 4대로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당시 공군 편대장이었던 김영환 조종사는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이 소실될 것을 우려해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이로써 해인사는 폭격당할 위기를 넘기게 되었다. 현재 해인사 경내에는 그를 기리는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출처:다음 위키백과)

 

< 팔만대장경 [八萬大藏經] >: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陜川 海印寺 大藏經板) 또는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은 국보 제32호로 경상남도 합천군 해인사에 있으며, 고려가 몽골의 침입을 불력(佛力)으로 막아내고자 1236(고종 23) 강화군에서 조판에 착수하여 1251(고종 38) 완성한 고려의 대장경이다. 19621220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32호로 지정되었다. 현존하는 세계의 대장경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일 뿐만 아니라 체재와 내용도 가장 완벽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팔만대장경은 2007년 세계기록유산에 지정되었다. (출처:다음 위키백과)

 

※ 가야산 지도

 

 

 

 

 

※ 산행 후기

가야산 국립공원엔 이번이 다섯 번째다. 정상엔 한 번 갔었으나 사진을 남기지 않았고 만물상 구간은 가보지 않아서 늘 마음에 남아 있었는데 청백산악회에서 나와 있다. 기대에게 가자고 하니 처음엔 OK 하더니만 잠시 뒤 전화가 온다. 지난번에 연호 형님과 약속이 한 게 있어서 백화산에 가야 한다며 오히려 백화산에 같이 가자고 한다. 한 번 필이 꽂히면 그곳에 가야 직성이 풀리듯 난 가족과 함께 부산에 간다고 전해 달라고 하고 누구랑 같이 갈 사람이 없는지 고민 중인데 운용이가 가자고 한다. 서둘러 청백 산악회에 예약을 하고 아침 식사로 찰밥을 주니 그것으로 점심을 하면 된다고 운용이에게 알려 준 후 산행 준비를 마쳤다. 오룡역에서 버스에 오르니 대자연 화요 산행 시 보았던 강과장과 김간호과장등 그 일행이 있다. 그동안의 안부 등 반갑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대전 IC에서 운용이가 탑승 했고 휴게소에 들러 아침 식사 시간을 준다. 우리 두 사람 모두 아침 식사를 하고 왔기에 커피 한 잔 한 후 잠깐 잠을 잔 듯싶은데 버스는 산행지에 도착 하여 백운동 탐방 주차장에 정차 하여 만물상 코스 일행을 내려준 후 남산제일봉 코스로 떠났다. 운용이가 반팔 옷으로 갈아입는 사이 모두 가버리고 최후미로 출발하여 산행을 시작했다. 산행 초입은 약간 가팔랐지만 꼴찌로 출발해서 열심히 걸으니 강과장 일행 등 후미 꼬리를 잡았다. 같이 산행하자는 제의를 받았지만 우린 잘 못 걸으니 먼저 가겠다고 했는데 그것이 결국 산행이 끝난 후에 만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들은 찌개도 끓여먹고 여유로운 산행을 한 반면 우린 열심히 걷다 보니 영광스럽게도(?) 최선두로 하산을 한 꼴이었다.

 

 

※ 산행 사진

백운동 주차장 (백운동은 동성재 능선에 있는 백운대(白雲臺)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백운동 주차장에서 탐방지원센터로 향하는 길의 가야산 야생화 식물원 입구의 모습

백운동 탐방 지원 센터(좌측이 만물상 코스 우측이 용기골 코스)

만물상과 용기골의 산행들머리인 탐방지원센터 앞의 가야산국립공원 안내도

만물상 코스 산행 시작

동성봉 방향( 현재 출입금지 구간)

뒤 돌아 본 모습

 

 

 

 

심원골 능선 (그 뒤로는 그리움 리지 코스가 있는데 언제 가 볼 수 있으려나??)

 

 

 

 

뒤 돌아 본 모습(백운동 방향)

심원골 능선

동성봉 방향( 현재 출입금지 구간)

가야산 정상인 칠불봉, 상왕봉이 보이기 시작한다

 

 

 

거북이 형상의 바위가 이채롭다.

가야산 정상

 

 

만물상 : 만가지 형상을 한 만물상 능선은 국립공원 지정 이후 38년 만에 등산로를 개방한 가야산 만물상. 한마디로 `기암괴석의 향연`이고 `자연의 교향악`이었다. 코끼리바위, 돌고래바위, 기도바위(일명 부처·불상바위), 두꺼비바위, 쌍둥이바위 등 갖가지 모양을 한 바위가 지천에 뽐내는 듯 널려 있다. 코끼리바위는 몸통을 감추고 수줍은 듯 길쭉한 코만 드러내고 있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만 같다. 가만히 턱을 괸 형상의 얌전한 돌고래바위가 있는 반면, 마치 먹이를 달라고 점프를 하는 듯한 모습도 있다. 기도바위는 아직도 기도가 끝나지 않은 듯 세상을 등지고 면벽 좌선하는 모양이다. 수천 년의 세월을 버텨온 그 자세다. 두꺼비바위는 원체 덩치가 큰 녀석이라 옆을 지나쳐도 그 형체를 금방 알아차릴 수 없다. 한참을 지나 뒤돌아봐야 제대로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 그 외에도 광개토대왕비석처럼 생긴 바위, 쌍둥이바위 등등 그 형상은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비바람에 깎이고 씻긴 기암괴석들은 억겁의 세월을 대변하고 있다. 그 긴 세월 동안 각각의 바위들은 마치 `자연의 교향곡`이라도 연주하는 듯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는 모습으로 거듭났다. 스스로 `교향악`이라 불러달라는 듯했다. 만물상 능선의 백미는 그 능선 꼭지점에 있는 상아덤까지 계속된다. 상아덤에 올라서면 만물상의 모든 형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감탄이 절로 나온다. 한참을 이리저리 뜯어본다. 이쪽, 저쪽으로 방향을 돌아가며 살펴본다. 카메라 셔터를 아무리 눌러도 지겹지 않다. 그런 만 가지 형상을 한 만물상이다. 출처: 합천 군청 가야산 이야기 (지명유래 및 명소)

 

 

상아덤 : `상아덤` `상아`는 여신을 일컫는 말이고, 덤은 바위를 지칭하니 곧 `하늘의 여신이 사는 바위`란 뜻이 된다.
상아덤 전설 :서장대에 가야국의 신화가 전해 내려오는 성스러운 공간 상아덤 이다. 아득한 옛날, 가야산에는 성스러운 기품과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정견모주란 여신이 상아덤에 살고 있었다. 정견모주는 가야산 자락에 사는 백성들이 가장 우러르는 신이었다. 여신은 백성들에게 살기 좋은 터전을 닦아주려 마음먹고 큰 뜻을 이룰 힘을 얻기 위해 밤낮으로 하늘에 소원을 빌었다.그 정성을 가상히 여긴 하늘신 `이비하는 어느 늦은 봄날 오색구름 수레를 타고, `여신의 바위`란 뜻의 상아덤에 내려앉았다. 천신과 산신은 성스러운 땅 가야산에서 부부의 연을 맺고 옥동자 둘을 낳았다. 형은 대가야의 첫 임금 `이진아시왕`이 됐고, 동생은 금관가야국의 `수로왕`이 됐다. 이 기록은 최치원의 `석순응전``동국여지승람`에 전해 오고 있다. 형은 대가야의 첫 임금 `이진아시왕`이 됐고, 동생은 금관가야국의 `수로왕`이 됐다. 이 기록은 최치원의 `석순응전``동국여지승람`에 전해 오고 있다. 출처: 합천 군청 가야산 이야기 (지명유래 )

가야산 정상인 칠불봉, 상왕봉

서성재 (만물상과 옹기골 갈림길) :경북 성주군 수륜면과 경남 합천군 가야면을 이어주는 고개로 과거 가야산성의 서문이 위치해 있었던 곳에서 유래 되었다고 한다. 가야산성은 칠불봉에서 발원한 옹기골 계곡을 중심으로 좌우로 펼쳐져있던 상아덤,동성봉 능선을 이용하여 축조된 포곡식산성으로, 성 안에 물이 풍부하고 활동 공간이 넓으며, 외부 노출을 방지해 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또한 대가야의 수도인 고령과 불과 14Km거리로 전쟁시 수도 방어의 요충지였으며, 왕이 이동 할때 머무르는 이궁으로 이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서성재에는 현재 문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으나, 10m가 넘는 넓은 공터와 허물어진 성벽의 규모를 통해 문이 있었을 가능성을 확인해 준다.

서성재에 있는 이정목

가야산성 : 백운동 용기골을 중심으로 석축 산성이다. 전장 15935(5) 성고 5(1.5m)으로 상봉에서 우능선으로 축성해져 있고 6계곡 10천이 있다. 가야 부족국 시대부터 축성된 이 산성은 이 곳을 주성으로 하여 동남방향으로 내린 산줄기를 따라 흑산성, 독용산성, 운라산성으로 이어지는 연접산성의 특색이 있다. 4처의 각 성은 약 5거리로 산봉에 위치하고 있고 할미산신의 신당을 모셔 할미산성이라고 한다. 가야산성은 1594(선조 27,갑오년) 승장 신열이 크게 개축해서 문루를 높게 하였다.출처: 합천 군청 가야산 이야기 (지명유래 및 명소)

 

 

 

건너편의 상왕봉보다 3m가 더 높아 성주 군민들은 가야산이 합천이 산이 아니라 성주의 산이라고 주장 한다.

 

칠불봉 유래: 가야국 수로왕은 인도의 아전타국의 공주 허황옥과 결혼하여 10명의 왕자를 두었는데 큰아들 거등은 왕위를 계승하고 둘째·셋째는 어머니 성을 따서 허씨의 시조가 되었으나, 나머지 7왕자는 가야산에 들어가 3년간 수도했는데 , 이들에게 불법을 가르쳐 준 스승은 왕후의 오빠 장유화상(보옥선사)이었다. 왕후가 아들들이 보고 싶어 자주 가야산을 찾자 장유화상은 공부에 방해가 된다며 왕자들을 데리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그 후 왕후는 다시 지리산으로 찾아가 아들 보기를 간청하니 장유화상은 "네 아들들이 이제 성불했으니 어서 만나보라" 하였다. 이때 달빛이 교교한 못 속에서 황금빛 가사를 걸친 일곱아 들이 공중으로 올라가는 모습이 뚜렷이 나타났다. 이것이 아들과의 마지막 만남이었고 그 후 김수로왕은 크게 기뻐하여 아들들이 공부하던 곳에 대가람을 세우니 이곳이 바로 하동군 화개면의 지리산 반야봉에 위치한 칠불사이다. 출처 : 한국사찰전서 및 한국불교 전설99

친구 운용이의 반팔 산행으로 사람들 시선을 나까지 한 몸에 받으며 산행을 해야 했다.

 

칠불봉에서 바라 본 우측의 상왕봉

칠불봉

 

진행 방향에서 본 우측의 상왕봉

 

해발 1,430m의 우두봉(상왕봉)으로 합천군에서 세운 가야산의 정상석... 하지만 성주군에서 세운 칠불봉 보다 3m가 낮아 가야산정상의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하지만 많은 사이트들이 아직도 가야산의 주봉은 "상왕봉"으로 소개 하고 있다.

상왕봉은 소의 머리처럼 생겼고 오랜 옛날부터 산정에서 행해졌던 산신제의 공물을 소에 바치고 신성시 해왔다고 하여 우두봉이라고 불리며, 상왕봉의 ‘상왕’은 <열반경>에서 모든 부처를 말하는 것으로 불교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상왕봉에서 바라 본 칠불봉 방향

 

 

 

가야19경중 제18경인 봉천대(奉天臺):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다

900년경 신라 학사 최치원이 이름붙인 홍류동의 각 명소를 1918년 해인사 주지였던 이회광 화상의 부탁을 받고 예운 최동식 선생이 홍류동과 가야산일대에 19명소를 설정한 뒤 그 명소마다 제영시구(題詠詩句)를 붙여 연작시를 지으니 그 이름 하여 가야십구명소제영(伽倻十九名所題詠)이고 이는 해인사 사운당 서쪽 벽면에 두 개의 현판으로 만들어져 나란히 걸려져 있다고 한다. 출처: 월간 해인

 

 

 

 

 

 

해인사

대적광전과 삼층석탑 ( 대적광전은 거의 모든 절이 흔히 모시고 있는 석가모니 부처님 대신에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부처님이 모셔져 있으며 그래서 법당의 이름도 대웅전이 아니라 대적광전이다. 정중삼층석탑은 불상을 모신 탑이고 석등은 부처님의 광명을 상징하는 동시에 사찰경내를 밝히기 위해 만든 등 시설이다 )

 

해인사 법보종찰 장경판전으로 팔만대장경은 부처님께서 진리의 세계에 대해 차별 없이 말씀하신 법과 그에 대한 주석서를 포함한 일체의 총서를 81,258판에 달하는 목판에 양각으로 새겨 놓은 것으로 해인사를 "법보종찰"이라 부르는 것은 바로 이 대장경판을 봉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인사 사리탑 (성철스님등 여러 분의 사리가 모셔진 곳인데 늦은 줄 알고 그냥 지나쳤다)

 

성철(性徹: 1912년 음력 2월 19일(양력 4월 6일)~1993년 11월 4일)은 대한민국의 승려이다. 속명(俗名)은 이영주(李英柱)이고 아호는 퇴옹(退翁)이다. 대한민국의 선종을 대표할 정도로 전형(典型)이 될 만한 특징이 있는 승려이다. 경상남도 산청에서 출생했다.1936년 해인사(海印寺)에서 동산(東山) 대종사(大宗師)에게 사미계(沙彌戒)를 받고 승려가 되었다. 1938년 운봉(雲峰)을 계사(戒師)로 보살계(菩薩戒) · 비구계(比丘戒)를 받았고 봉암사(鳳巖寺)에서 청담(靑潭)과 함께 수행하면서 불타(佛陀)답게 살자고 결사(結社)하는 등 새로운 선풍(禪風)을 고양(高揚)시켰다. 1967년 해인총림(海印叢林) 초대 방장(方丈)이 되었고 1981년 대한불교조계종 제7대 종정(宗正)에 취임하였다. 세속에 거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교리를 대상으로 한 성철의 견해는 저서인 《선문정로》(1981)에 잘 노정되어 있다. 대한민국 선불교의 수행 전통으로 여겨온 지눌의 돈오점수(頓悟漸修)에 반대하여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창했다.그 후 현재까지 대한민국 불교 철학계의 돈 · 점 논쟁은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다. 성철은 지행합일(知行合一) 단계의 지(知)만이 진정한 지(知)이고 지눌의 돈오점수는 실제(實際)이고 세부까지 포함한 현실을 좇지 않는 직접 지각하거나 체험할 수 없는 관념과 표상(表象)에 경도(傾倒)되어 실증성이 희박(稀薄)하게 조직된 이론에 근거한 지(知)일 뿐 참 지(知)가 아니라고 주장(主張)하였다. 그러나 지눌과 성철은 가르침의 대상이 달랐으므로 시비(是非)를 가리기가 어렵다. 지눌은 일반인에게 불교 교의를 풀어서 밝혔고 성철은 수행하는 승려에게 설법하였다.

 

중국 대륙에서 임제종(臨濟宗)을 개종(開宗)한 임제(臨濟)의 후예(後裔)인 선사(禪師) 유신(惟信)이 선종의 내밀(內密)한 특징인 소위 도교에서 영향 받은 화광동진(和光同塵)을 교시(敎示)하려는 취지(趣旨)로 한 설법(說法)인, “내가 삼십 년 전 참선하기 전에는 산은 산으로, 물은 물로 보았다가 나중에 선지식(善知識)을 친견(親見)하여 깨침에 들어서서는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게 보았다. 지금 휴식처를 얻고 나니 옛날과 마찬가지로 산은 *다만 산이요, 물은 다만 물로 보인다. 그대들이여, 이 세 가지 견해가 같으냐? 다르냐? 이것을 가려내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같은 경지에 있다고 인정하겠노라.”중에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고측(古則)을 성철이 원용(援用)하여 인상(印象)을 남기면서 일반인에게도 유명해졌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화두(話頭)는 최초에 미망(迷妄)하는 단계는 수도(修道)하기 이전 평범한 일상계(日常界)이나 수도를 이용해 득도(得道)하면 체험하는 평범한 일상을 완벽히 초월한 세계는 일상에서 하는 착각(錯覺)이 적멸(寂滅)한 상태이나 진정하게 득도하려면 거기서 진일보(進一步)해 평범한 세계로 회귀하여야 한다. 화광동진을 이용해 다시 돌아온 그 세계는 외양상으로는 최초처럼 속(俗)되고 평범한 단계와 같으나 내면상으로는 처음과는 차원이 판이(判異)하다. 이는 나선형(螺旋形) 성격을 띤 회귀를 뜻한다. 이로 보아 임제(臨濟)의 후예(後裔)인 선사(禪師) 유신(惟信)이 설법한 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공안(公案)은 노자의 화광동진(和光同塵) 사상을 그대로 해설한 교시(敎示)이다. 재언하면, 수도자(修道者)가 작고 대수롭지 않게 득도(得道)했을 때는 물이 산으로, 산은 물인 듯 혼란(混亂)스럽지만, 득도하는 규모가 확대되면 물은 물로, 산은 산으로 보게 된다. 외부 세계나 자연을 주관의 작용과는 독립하여 존재한다고 관망(觀望)하는 태도를 획득한다는 뜻이다.《육조단경(六組檀經)》, 《전등록(傳燈錄)》 등 선문(禪門)의 조사(祖師) 어록을 중심으로 많은 법어를 이루었는데 관념의 도그마(dogma)에[2] 빠지지 말 것과 견성(見性)의 체험을 강조하였다. 1993년 해인사에서 입적(入寂)하였다. 저서로 《돈오입도요문강설》(1986) 등이 있다.

▲ 홍류동 계곡: 홍류동이란 이른 봄날의 진달래 꽃잎과 가을의 단풍이 계곡의 수면을 붉게 물들이며 흘러가는 아름다운 경치에서 붙여진 이름이다출처: 월간 해인

 

산행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