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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림청 100명산 산행기

1. 가리산(加里山) : 강원도 춘천시, 홍천군

가리산(加里山, 1051m) : 등잔봉, 새득이봉,자연휴양림

홍천고개 등잔봉 새득이봉→가삽고개 2 1( 가리산정상 ) 무쇠말재 휴양림

산행지 : 강원 홍천군 두촌면 천현리,춘천시 북산면 조교리 일원

산행일자 : 2018. 6. 28(목) 날씨 : 흐림

산악회및 산행 친구 : 민수 산악회, 연우회 친구

산행거리 : 9.4 km(이정표상 거리)

산행시간 : 5시간 10분 소요 <중식 10분 포함>

시간대별 요약

- 06:00 기상 아침 식사

- 06:40 반석역 출발

- 10:50 홍천고개 도착

- 10:53 홍천고개 산행시작

- 11:45 등잔봉

- 12:37 새득이봉

- 12:46 가삽고개

- 13:04 물노리 선착장 갈림길

- 13:21 2봉

- 13:40 1봉(가리산 정상)

- 14:17 무쇠말재

- 15:03 가리산 휴양림 산행마침

- 15:13 출발

- 18:30 대전 은행동 도착 저녁식사

- 21:50 반석동 도착

 

※ 특기사항

① 산림청 선정 100명산(가리산 두 번째 산행)

② 차량 탑승만 8시간

③ 버스에 옷 놓고 내림

④ 화장실 샤워

⑤ 꼴찌 산행

 

산행 전 사전 조사

<산림청 선정 100대 명산 선정 사유>: 강원도에서 진달래가 가장 많이 피는 산으로 알려져 있고, 참나무 중심의 울창한 산림과 부드러운 산줄기 등 우리나라 산의 전형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으며, 홍천강의 발원지 및 소양강의 수원(水源)을 이루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하여 선정되었다 [출처:산림청]

 

<가리산(加里山)>: 강원도 홍천군 두촌면 천현리와 춘천시 동면 사이에 위치한 산이다(고도1,051m).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현의 동쪽 70리에 있다. 용연(龍淵)이 있는데, 날이 가물 때에 범의 뼈를 이 용연에 잠그면 응보(應報)가 있다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에는 "강릉 오대산(五臺山)에서 이어지는 산줄기와 연결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1872년 지방지도에는 가리산이 표시되어 있으나, 광여도해동지도에는 가리산 표기가 빠져 있다. 대신에 가리산 남쪽에 있는 건이치(建伊峙, 지금의 거니고개)가 표시되어 있다. 당시에 건이치는 인제로 가는 통로였다. 한편, 여지도(강원도지도)뿐만 아니라 대동여지도와 같은 전국지도에도 표시될 정도로 가리산은 홍천군에서 중요한 산 중의 하나였다. 홍천 너브내의 숨결에는 청() 태조 김한의 선대묘가 있었던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가래나무가 많아서 가래산이라고도 불렀다고 하는데, 현재 가래나무는 찾아보기 힘들고 참나무류의 숲이 울창하다.[출처: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가리산(加里山)>: 해발 1,050.9m의 고산으로 춘천시와 홍천군의 경계지역에 위치하며, 산 정상에 서면 탁트인 시야와 발 아래로 펼쳐진 소양호의 풍경이 등산객들의 발을 묶는 곳이다. 산자락 밑에 위치한 조그마한 폭포의 물소리가 사람들의 마음을 포근히 감싸주며, 이 곳에서부터 계곡과 능선을 따라 등산이 시작된다. 이 산은 우거진 숲과 노송들이 등산객들을 맞아주고 정상을 오르게 되면, 1봉 남쪽에는 홍천강으로 발원하는 사시사철 끓이지 않는 석청수 작은 샘물이 등산객을 기다리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소양호 쪽으로 하산길을 택하면 배를 타고 피로를 풀 수 있는 등 각 코스마다의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는 아름다운 산이다. 이 일대를 홍천군에서 자연 휴양림 지역으로 조성, 19957월 홍천군이 개장한 가리산 자연휴양림이 있어 통나무집, 야영장, 체육시설을 이용하는 가족휴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출처 : 한국관광공사

 

가리산(加里山) 산행 지도

 

※산행 후기

가리산에 대한 산행기록을 살펴보니 200594일에 다녀온 기록이 있다. 거의 13년전 이지만 당시의 기억을 더듬어 보니 출발지는 기억에 없지만 아마도 휴양림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가리산 정상으로 올랐고 하산은 정확히 기억나는데 물노리로 하산하여 배를 타고 소양강 댐으로 건너 온 기억이 난다. 다행히(?) 정상 인증 사진은 있지만 산행 기록과 사진이 없어 다시 한 번 다녀오기로 마음먹고 있었는데 민수산악회에서 평일에 간다고 한다. 장거리 산행이라 혼자 가기는 싫고 고민 고민하다가 연우회 친구에게 같이 가자고 부탁하니 흔쾌히 승낙해 줘 다녀오기로 했다. 문제는 평일이라 사무실은 그렇다 치고 집에 이야기하기가 상당히 껄끄러운데 거짓 행동 보다는 차라리 이실직고함이 더 좋을 것 같아서 평일인데 인증 하기 위해 산에 간다고 말을 꺼내니 조심히 다녀오란다. 버스 출발 시점이 반석역이라 좋기는 한데 대전 시내 한 바퀴를 돌고 대전IC에 진입하니 이미 한 시간은 버스에 머무른 시간이다.

친구는 시민회관에서 잘 탑승하였고 산행지 도착까지는 부족한 잠을 잤다. 산행시점인 홍천고개에 도착하니 전혀 기억이 없다. 13년 전 산행이었으니 기억이 안날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산행초입은 이곳이 아니었던 것 같다. 산 꾼들 사이에 아니 정확히 말해 박성태씨가 만든 신산경표에 의해 춘천지맥으로 일명 명명된 산길이라서 그런지 초입부터 잡목으로 우거진 산길은 짜증도 많이 났고 안 좋은 컨디션으로 인해 맨 뒤 후미로 뒤쳐져서 가삽고개에 도착 할 때까지 힘겨움의 연속이었다. 산행을 잘 못 할까봐 걱정했던 친구보다 오히려 내가 뒤쳐져서 산행을 했으니 지금 생각해 봐도 컨디션이 안 좋긴 안 좋았나 보다. 정상에 도착하여 인증사진을 찍고 늦은 점심을 하는데 후미로 보이는 산악회 일원들이 대충 식사를 하고 일어난다. 덕분에(?) 본인도 대충 식사를 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해찰도 안하고 석간수도 마시러 가지 못했고 허겁지겁 산행을 마치니 에고 꼴찌다. 막걸리 한 잔 겨우 받아들고 민수 사장님한테 잠깐 씻을 수 있냐고 물어보니 얼른 씻으란다. 서둘러 화장실에서 벌거숭이로 약식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버스에 오르니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출발한다. 100명산 위주의 산행으로 주부들이 평일에도 많이 오니 서둘러 대전에 가야 하는 게 맞긴 한데 늘 이런 식이라 친구는 다음에는 민수에 안 오겠단다. 대전에 도착해서는 은행동 두부두루치로 유명한 광천식당에서 소주 한 잔하려고 서둘러 내리다 보니 차안에 갈아입은 옷을 놓고 내려 다른 평일 아침에 다시 찾으러 가는 촌극이 빚어지기도 한 산행이었다.

 

※산행 사진

▲ 원동(홍천)고개 도착

홍천고개: 해발 580 미터로 춘천시 북산면 조교리와 홍천군 두촌면 원동리를 연결하는 고개로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고 곳인데 이 지역 사람들은 원동고개라고 한다. 개인적인 생각도 원동리가 고개 아래 있으니 홍천고개 보다는 원동고개로 봄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춘천시 북산면 조교리는 625전쟁이 끝난 뒤 홍천군 두촌면 원동리로 통하는 홍천고개 도로공사가 시작되었으나 1973년 소양강댐이 들어서면서 북산면 소재지였던 내평리가 물에 잠기는 바람에 공사가 중단되어 춘천시내와의 도로가 끊겨 생활권은 양구나 홍천이 더 가까운 육지 속 섬같은 오지가 됐다고 한다. 육로를 따라 조교리로 들어오려면 미완성 홍천고개를 힘겹게 넘어야 했는데 2003년 홍천고개가 포장되면서 차량 통행이 원활해졌으나 2013429일 되어서야 조교리 마을버스가 개통되었다고 한다. 당시 마을버스는 11인승 승합차인 코란도 투리스모였으며, 운행노선은 조교2리 농촌체험관-조교1리 보건진료소-홍천군 원동사거리-홍천군 두촌면 버스정류장 사이의 약 15구간으로 하루 3회 왕복 했다고 한다. 조교리 마을버스는 20145월 농림축산식품부로부터 최우수 농촌형 교통모델로 선정되는 영예도 안았다고 한다. 두촌에서 조교리로 가는 마을버스 시간은 오전 840, 1220, 오후 6(동절기 5)이며 조교리에서는 오전 740, 1120, 오후 5(동절기 4)에 출발한다고 하며 춘천 소양강댐 나루에서 조교리로 가는 배는 하루 2회 운항하는데 철따라 운항 시간이 달라지므로 문의해 봐야 한다고 한다. (033-241-4833)

홍천고개에서 들머리로 오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지맥길을 잇는 산 꾼들만 다니는 길답게 정비되지 않은 상태였으며 여름이라 그런지 잡목으로 우거져 진행이 더뎠다. 정비가 되지 않은 길에선 칠부 바지를 입은 것을 가끔 후회도 했으나 산길에 접어 들어서는 견딜만한 수준의 등로였으며 새득이봉 부터 가리산 정상가는 길은 잘 정비되어 있었다.

이후 참나무와 철쭉 등 초록으로 단장한 가리산의 등로는 육산으로 이루어져 있어 편안했으나 나만 안 좋은 컨디션으로 인해 자꾸 뒤쳐졌다. 결국 후미로 가고 있다는 생각이 발걸음을 더 무겁게 했다.

등잔봉(833.9m) 삼각점: 등잔봉 표식은 없다. 등잔봉 유래를 찾아 보니 어디에도 나와있지 않으며 다만 한국의 산하에서는 펑퍼짐하게 둔덕처럼 솟아 있는 산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원동고개 갈림길에서 시작되는 능선상의 새득이봉이 보인다. 이때만 잠시 조망을 보았는데 등잔봉을 지나 약 10분후 잡목으로 우거진 터널구간을 지나며 고개를 푹숙이며 산행을 해야 했다. 보이는 좌측이 등골산이며 우측이 새득이봉이다.

새득이봉 직전의 원동고개 갈림길 삼거리다. 이정표에는 원동고개 4Km, 휴양림 2.5Km, 가리산 정상 2.2Km 표시 되어 있다. 이후 부터 휴양림 까지 산길은 고속도로(?) 수준으로 잘 정비되어 있다.

새득이봉에 대한 유래는 문헌상 나와 있지 않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춘천시 북산면 물노리에 새덕이골이 있으니 새덕이봉이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다음 글은 새득이 봉에 대한 설명으로 한국의 산하에서 발췌해온 내용이다. 새득이봉은 강원도 춘천시 북산면 물노리와 홍천군 두촌면 천현리 경계선상의 가리산과 맥락을 같이하는 산이다. 워낙 산이 깊다보니 사람들의 접근이 쉽지않고 또 비교적 덜 알려져 있어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지명이다.새득이봉은 원시청정림이 살아숨쉬는 곳으로 환경이 오염되지 않아 어디를 가나 빽빽한 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상쾌한 공기를 호흡할 수 있다. 심산유곡의 분위기를 한껏 자아내는 등산로를 오르다보면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정상은 안타깝게도 나무들이 우거져있어 조망이 그리 좋은 편은 못되지만 나뭇가지 사이로나마 제법 웅장한 암골미를 드러낸 서남쪽 가리산 정상 풍광은 일품이다. (출처: 한국의 산하 )

가삽고개는 춘천시 북산면 물노리와 홍천군 두촌면 천호리를 잇는 고개로 홍천군청의 지명유래에는 평내고개, 가삽현(加揷峴), 평내현] : 큰평내에서 춘천시 북산면 물로리 참배나뭇골로 가는 큰 고개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정표에는 가삽고개 우측으로 휴양림방향 0.3Km라고 표시하고 있는데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혼란을 주고 있다. 옛 지도에는 이곳을 평내현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선답자의 산행기에서 보니 국토지리원 유래에는 이곳을 평내고개라 하며 고시지명은 가삽고개로 되어있다고 한다. 춘천시 북산면 지명유래에 보면 <가삽>은 가협리(加峽里). 가리산 밑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니 가삽고개는 가협마을에서 가져 온 듯하다.

▲ 가삽고개를 지나 산길은 참나무로 만들어진 수림은 발걸음을 편하게 했지만 점심을 먹지 못해 약간은 힘든 시간이었다. 조망은 2봉을 올라야 비로서 보이지만 녹음이 짙은 등로라서 햇볕을 피할 수 있어 좋았다.

길 옆에 선 떡갈나무 몸체가 움푹 파여 있어 이채롭다.

▲ 휴양림에서 올라 오는 코스라서 그런지 이후 이정표는 잘 되어 있다.

 ▲ 대부분의 전설이 그렇듯 신빙성이 없는 내용이 많다. 암튼 한천자의 묘에 대한 전설을 알아 보았다.

* 한천자(漢天子) 묘의 전설 : 한씨 성을 가진 머슴이 조상의 묘를 잘써 후에 중국 천자가 됐다는 전설이 있다. 위치는 강원도 춘천시 신북면 물로리 은주사 뒤편 가리산 자락 북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한천자의 발복지라고 알려진 묘 중의 하나로 풍수지리학자들이 지형적으로 천자를 낼만한 장소라고 말하는 명당이다. 북산면 내평리 한터마을에서 한 총각이 아버지와 함께 머슴살이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한 총각 아버지가 돌아가시었는데 산소자리를 구할 수가 없어 남새밭 옆에 가매장해 놓았는데 어느 날 저녁에 스님이 상좌와 함께 찾아와 머슴방에서 유숙하게 되었다고 한다. 스님이 머슴에게 달걀을 달라고 하여 머슴은 쇠여물 끓이는 가마에 달걀을 삶아서 스님에게 주었다. 한밤중에 스님이 상좌와 함께 밖으로 나가자 머슴이 몰래 그들의 뒤를 따랐다. 스님은 가리산 중턱에 이르러 지형을 살펴보고 나서 달걀을 땅에 묻었는데 한참 후에 달걀 묻은 자리에서 닭이 홰를 치며 울었다고 한다. 스님은 이곳이 명당자리라고 상좌에게 말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묘를 쓰려면 세 가지를 지켜야 하는데 그것은 금관을 써야 하고, 황소 백 마리를 잡아야 하고, 하관할 때 투구철갑 한 사람이 곡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머슴은 이 말을 엿듣고, 이튿날 노란 귀리짚 공석으로 부친의 시신을 둘러 싸 가지고 그 명당자리로 갔다. 투구처럼 솥뚜껑 머리에 쓰고 곡을 하고, 옷을 벗고 황소 같은 이 백 마리를 잡았다. 그리고 아버지의 시신을 그 명당자리에 묻었다고 한다. 그 후 머슴은 중국으로 갔는데 어느 대처에 이르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천자를 뽑고 있었다고 한다. 짚으로 만든 북을 쳐서 소리나 는 사람이 천자가 된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차례대로 북을 쳤으나 소리가 나지 않았다. 머슴이 북을 치자 북소리가 온 장안에 울려 퍼졌다. 바로 그때 춘천 가리산에서는 머슴 부친의 시신이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머슴은 중국의 천자가 되었다. 그가 곧 한천자이다. 세월이 흐른 뒤에 중국 황실에서 한천자 부친의 묘가 조선의 가리산에 있다는 것을 알고 치산(治山)하러 오려고 하였다. 조선의 조정에서는 가리산에 가려면 십년강(지금의 의암땜이 있는 신연강)을 건너 삼천리(춘천시 삼천동 혹은 신북면 산천리) 버덩을 지나 구만리고개(구만이고개)를 넘어야 한다고 했다. 중국의 황실에서 이말을 듣고 치산을 포기하였다.한천자가 된 머슴이 살던 한터마을은 지금은 소양강 댐 속에 잠겨 있고, 한천자 부친의 무덤인 한총은 물로리에서 가리산으로 오르는 곳에 있다. 천자 부친의 묘로서는 좀 초라하지만 그것은 그때 치산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묘소 뒤 산허리는 중턱이 허물어진 암석인데 그것은 한천자 부친의 시신이 용이 되어 나가면서 산을 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덤 근처에는 지금도 비가 오면 물이 붉게 흐르는데 그것은 머슴이 장례지낼 때 황소 같은 이 백 마리를 잡아 그 피가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라는 전설이다. 이묘는 북산면 물로2리 배터에서 4.5km 지점에 있다. 춘천시(시장 이광준)는 북산면 물로리 가리산의 한천자묘까지 이정표와 묘 유래가 담긴 안내판을 20125월에 설치했다고 한다.

▲ 한 천자 이야기가 있는 이곳이 물노리 선착장으로 가는 삼거리다. 여기서 소양호쪽으로 내려가 물노리 선착장에서 유람선을 탈 수 있다. 200594일에 물노리로 하산하여 유람션을 탔었던 기억이 새롭다.

 

네이버 지식백과에 보면 rlaw**** 님의 한천자 묘에 대한 답변이 있는데 설득력 있어서 옮겨와 적어 본다.

강원도 춘천의 한천자묘 또는 소슬묘 라 불리 우는 곳은 풍수학 적으로 황제가 날 자리라 알려져 있습니다.그렇기에 묘의 주인에 대한 많은 설이 나돌고 있습니다.한천자묘(강원도 춘천시 소재)는 중국 최고의 황제중 하나라 일컬어지는 주원장 의 조부의 묘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즉 묘의 주인이 정확히 주원장의 조부 인지는 알수가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MBC방송 신비한TV서프라이즈에 소개 되기도 하였습니다. 바로 명의 태조 주원장이 고려 출신의 인물 이였다는 가설이였으나 이는 현재까지도 가장 신빙성 있는 이야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뒷받침 할수도 없는 것이 주원장의 조부인주초일과 주원장의 부친인 주세진은 중국을 벗어났다고 기록 되어 있는 역사가 없기 때문 입니다.한천자묘(강원도 춘천시 소재)는 중국 최고의 황제중 하나라 일컬어지는 주원장 의 조부의 묘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즉 묘의 주인이 정확히 주원장의 조부 인지는 알수가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MBC방송 신비한TV서프라이즈에 소개 되기도 하였습니다. 바로 명의 태조 주원장이 고려 출신의 인물 이였다는 가설이였으나 이는 현재까지도 가장 신빙성 있는 이야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뒷받침 할수도 없는 것이 주원장의 조부인 주초일과 주원장의 부친인 주세진은 중국을 벗어났다고 기록 되어 있는 역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일제 시대에는 청나라 황제의 묘로 알려 지기도 하였습니다만 이는 구전으로만 내려오던 이야기입니다. 허나 이와는 다르게 일본측에서는 다른 해석을 하고 있는데요 일본을 건국한 아마테리스 오이카미(일본의 시조)의 동생 스사노 오노미코도가 소시모리에 건너갔다가 다시 출운국으로 귀한 하였다 라는 역사적 기록이 있습니다.소시모리 라는 곳은 한국어로 우두산 소슬묘(한천자묘)가 됩니다. 즉 아마테리스의 조상이 소슬묘(한천자묘)에묻혀 있다는 이야기가 되겠지요 이는 일본의 시조인 아마테리스가 한반도 출생 이였다는 학계의 가설을 뒷받침 해주는 자료 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일제 강점시기에 일본총리 고이쇼는 소슬묘를 신성하게 여겨 신궁까지 세우려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이처럼 한천자묘 또는 소슬묘 에는 여러가시 설이 난무 하지만 묘를 발본 해보지 않는 한은 누구의 묘 이며 또한 누가 잠들어 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출처:네이버지식백과

 

춘천백년사에 나온 내용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북산면 내평리 및 물로리의 한천자전설도 특수전설이다. 머슴이 아버지의 묘를 잘 쓰고 중국의 천자가 되는 줄거리로 되어 있는 이 전설은 궁핍한 서민이 가지는 신분상승의 욕망이 풍수(風水)관념과 결합되어 실현되고 있으며 중국에 대한 우월감도 적절이 가미되어 있다. 현상의 초월을 본질로 하는 골계의 정서를 가지고 있는 것도 이 전설의 특징이다. 달걀 모티프는 풍수설화에 흔히 나타나는 것이고 북 모티프는 신화의 흔적이다. 지금은 소양댐 속에 잠겨 와는 내평리 한터마을, 물로리의 한총, 한총 근처의 붉은 흙, 배소구미 옆 산줄기의 형상 등을 증거물로 가지고 있다. 출처:<춘천백년사> 춘천 전설

▲ 한 천자 이야기가 안내판을 지나 평이한 산길을 조금 지나면 직진해서1봉으로 가는 길과 우측으로 2,3봉을지나 1봉 정상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당연히 우회로를 버리고 우측 철로 된 보조물을 의지하여 급경사를 오르고 또 오르고 2봉으로 간다.

▲ 2봉 오름전의 이정표(3봉을 가고자 한다면 2봉을 지나 3봉을 다녀온 후 다시 이곳으로 와서 1봉으로 진행해야 한다.

▲ 2봉에서 뒤 돌아 본 새득이봉과 등골산 방향

▲ 2봉에서 본 가리산 정상(1봉)

▲ 2봉에서 본 등골산 방향

2봉에 있는 가리산 큰바위 얼굴: 큰바위 얼굴이 있는 정상이 2봉이라 했는데 보지 못했다. 정상아래의 석간수 역시도 꼴찌로 하산하고 있다는 중압감에 가보지도 못했다. 안내 산악회는 이렇게 쫒기는 산행이라 이런 면이 상당히 불편하다.

 

큰바위얼굴은 지금으로부터 약 250여년전인 조선조 영조대왕 후반기 이곳 가리산이 소재한 두촌면 천현리에 사는 선비 한분이 있었는데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활달하여 공부를 잘했고 틈틈이 가리산 정상에 올라 휴식과 책을 호연지기를 키워왔으며 스무살되던 해에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판서까지 오르는 벼슬을 했다고 한다 그후 그 판서가 앉아서 공부하던 제2봉의 암벽이 조금씩 사람 얼굴을 띠기 시작했으며 사람들은 이바위를 가리산큰바위얼굴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소문이 전해지기 시작하면서 지역에 사는 많은 청년과 선비들이 이 가리산2봉에 올라 학업과 휴식과 호연지기를 키우면서 많은 이들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고 한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각종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과 고3 수험생을 둔 학부형들이 가리산 큰바위얼굴을 찾아가 기도하는 진풍경 속에 많은 등산객이 찾는 지역의 명소가 되고 있다고 한다.

▲ 2봉을 내려와 1봉으로 가는 길

▲ 1봉(정상)에서 본 가리산 2봉,3봉

현재의 가리산 정상석:가리산의 높이는 1,051m이다. 산이름인 가리는 '단으로 묶은 곡식이나 땔나무 따위를 차곡차곡 쌓아둔 큰 더미'를 뜻하는 순우리말로서, 산봉우리가 노적가리처럼 고깔 모양으로 생긴 데서 유래한다. 태백산맥 중 내지(內地) 산맥의 일부를 이룬다. 1봉 남쪽에서 홍천강이 발원하여 북한강의 지류인 소양강의 수원(水源)을 이룬다. 능선은 완만한 편이나, 정상 일대는 좁은 협곡을 사이에 둔 3개의 암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강원 제1의 전망대라고 할 만큼 조망이 뛰어나, 소양호를 비롯하여 북쪽으로 향로봉에서 설악산을 거쳐 오대산으로 힘차게 뻗어나간 백두대간 등 강원 내륙의 고산준령이 한눈에 보인다. 정상 부근에서는 소양호로 갈 수 있는 가삽고개가 있는데, 그 형태가 계단식 분지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가리산 [加里山] (두산백과)

2005년 9월 4일 14시 19분...처음 가리산에 갔을 때의 사진...기록은 이 사진 한 장만 있다

2015년 5월1일 새로운 정상석과 해병대 가리산전투 기념비를 홍천군에서 정상에 만들어 놓았다.

전적비가 있으니 가리산 전투에 대해 알아 보았다.

 

가리산 전투 : 가리산은 홍천,춘천,인제를 잇는 전술적 요충지로 1951년 당시 인민군 최강 부대인 제6사단 1,500명이 방어 하고 있었다. 곳을 미 해병대 제1사단에 배속된 한국 해병대 제1연대가 319일부터 공격하여 325일 총공격으로 가리산을 빼앗는데 이후 이어진 종공군의 춘계 2차 공세를 맞아 미2사단 38연대 3대대는 517~19일 벙커 고지 일대에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여 사수한다. 미국의 진지 사수로 종공군은 홍천 진출이 막히면서 춘계공세는 끝을 맺게 되었다고 한다. 경향신문에 실린 중국이 본 한국전기사는 이 전투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중공군의 제 2차 춘계공세로 공격 개시 5일 만에 끝나고 미 8군도 재 진격을 개시 할 수 있는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됐다. 국군(중공군) 제 3사단을 해체의 치욕으로 몰고 가게 했던 강원도 현리 전투와 미 제 2사단 38연대 3대대의 사수로 미 제 10군단이 전선을 고수 할 수 있었던 가리산 전투 벙커 고지 전투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고 소개 했다.

가리산에서 내려서다 바라 본 무쇠말재 방향의 능선 모습과 강우관측 레이더

2016615일에 개소식을 한 가리산 강우관측 레이더는 해발 994m에 설치되어 있으며 북한강 유역을 포함한 강원도 지역에 대한 집중호우와 돌발홍수 등에 대해 관측 한다고 한다. 39개월의 공사기간과 240억원의 공사비가 투입된 '가리산 강우레이더'는 태풍, 기상변동 등을 목적으로 하는 기상레이더와는 달리 반경 100이내의 강우를 집중 관측한다고 한다. 20033월 임진강(강화), 20096월 비슬산(청도), 201111월 소백산(단양), 201410월 서대산(금산), 201512월 모후산(화순)에 이어 여섯 번째라고 한다.

정상에서 휴양림으로 하산 하는 등산로는 급 경사로 겨울 산행시는 어려움이 많을 것 같다.

석간수로 유명한 약수터 갈림길 : 꼴찌 하산이다 보니 300m 거리도 다녀 오지 못했다.

석간수(石間水) 안내판에 있는 글 내용 :사계절 끊이지 않는 석간수는 400리 홍천강으로 발원하고 있으며 , 풍수지리에서 물은 재물을 의미한다. 암반에서 물이 나오는것은 매우 드문일인데다가 사계절 내내 마르지 않는다. 석간수가 마르지 않고 서서히 흐르는것은 재물이 마르지 않는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그래서 일까? 가리산 정상에서 마주 보이는 샘재마을 출신 사람이 20034월 국내 로또 사상 최고액인 407억원에 당첨되면서부터 명당 터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고 한다.

석간수(石間水): 가 보지 못한 아쉬운 마음에 선답자 사진에서 펌.

무쇠말재에는 옛날 이 일대가 큰 홍수가 나서 물바다가 되었을 때 무쇠로 배터를 만들어 배를 붙들어 놓았다 하여 무쇠말재라 하는데 그 당시 모든 사람이 다 죽고 송씨네 오누이만 살아남았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연리목이란 뿌리가 다른 두나무의 몸통이 합쳐져 하나가 된 것을 말하는데 부부간의 금슬이 좋거나 남여간의 애정이 깊은 것을 비유한다고한다 연리목은 보통 수종이 같거나 유사한 나무끼리 결합하여 이루어지고 소나무의 경우 송진이 있어 소나무 외의 특히 활엽수가 붙을 경우 활엽수가 고사하기 마련인데 가리산 연리목은 생물학적으로 종 자체가 다른 침엽수인 소나무와 활엽수인 참나무가 한번도 아닌 3번씩이나 감아올라 한몸을 이룬 우리나라에서 찾아보기 힘든 희귀목이다

가리산 연리목은 새천년이 시작되던 2000년 5월 서로 사랑하면서도 부모의 반대로 결혼하지 못한 커플이 우연히 가리신 등반을 왔다가 발견하고 연리목을 서로 두팔로 껴안고 입맞춤을 한후 부부의 연을 맺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전국적으로 갖가지 사연으로 정상적인 커플이 되지 못한 수많은 남여가 함께 등산을 와 사랑을 비는 명소가 되고 있다

이런 좋은 물에 발도 못 담그고...

 

가리산 자연휴양림은 전국의 88개 자연 휴양림중의 하나이며 1995년에 개장하였고 1일 최대 수용인원은 1,500명이고, 홍천군청에서 관리한다. 

▲ 모노레일을 설치 운영중인 가리산 강우레이더는 산 아래 관리동과 산 정상 레이더동 사이를 진입도로 대신 모노레일로 설치,운행해 산림 훼손을 최소화 했다고 한다.

 

하산해서 바라 본 가리산 정상의 모습

가리산 해병대 전투기념비 그리고 탱크를 마지막으로 보며 오늘의 가리산 산행 마무리

1951년 3월 21일 가리산 탈환작전 서전에 나선 1대대와 2대대는 적의 의표를 찌르는 야간 공격을 감행해 큰 전과를 올렸다.

미 해병대 한국전쟁 가리산 전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공식 전사는 피의 길, 승리의 길, 영광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가리산 전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는데 미 해병 제1연대와 제7연대는 각각 독립작전을 실시해 계획된 목표를 점령했고, 한국 해병 제1연대는 323일 적과 치열한 교전 끝에 미 해병사단의 중요 목표인 975고지를 점령했다. 이 전투는 23일과 24일 새벽까지 계속됐는데 총탄과 수류탄이 난무하는 생지옥 같은 백병전이 전개되자, 한국 해병대는 강인한 정신력과 불굴의 감투정신으로 중공군 아성을 쳐부수고 끝내 고지를 점령하고 말았다.여기서 말하는 한국 해병대란 <공정식 해병대사령관>이 지휘한 제1대대와 제2대대였다. 출처:네이버 블러그 오해병 <공정식 해병대사령관>의 글에서..

화장실 샤워 후 버스에 오르니 안내 산악회 버스는 주차장에서 바로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