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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끝기맥((完走)

땅끝기맥 9구간. 닭골재→ 바람재→ 달마산→ 떡봉→ 도솔봉→ 땅끝

□ 땅끝기맥 9구간 

닭골재 바람재→ 달마산→ 떡봉→ 도솔봉→ 땅끝

◇ 산행지 : 전남 해남군 송리면,북평면 일원

◇ 이동거리: 대전시청에서 닭골재 303Km, 땅끝에서 대전시청 317Km  

◇ 산행일자 : 2014. 7. 19(날씨 비온 후 맑음

◇ 산악회 및 참가인원 :  대전시 산사모 회원 20명(산행 친구: 돈민)

◇ 산행거리 :  도상거리 17.5km(실제거리 20.5Km)

<9구간> 닭골재달마봉(3.9Km)-도솔봉(4Km)-247(4.2Km)-땅끝탑(5,4Km)

◇ 산행시간 : 선두 9시간 50분, 본인 산행 시간: 10시간 10분, 최후미 13시간( 더위로 인한 산행 어려움)

◇ 시간대별 요약

- 03:00 대전시청 출발

- 07:29 닭골재 도착

- 07:35 닭골재 도착산행시작

- 09:15 바람재

- 10:35 달마봉

- 11:30 중식(15분)

- 12:45 떡봉

- 13:52 도솔암

- 14:14 도솔봉(도솔봉 표지석)

- 18:06 땅끝전망대

- 18:26 땅끝탑

- 18:45 땅끝마을 산행 마침

- 19:05 땅끝마을 저녁식사

- 21:20 땅끝마을 출발

- 01:30 대전시청 도착(2014.7.20)

 

※ 특기사항

① 내 사진 위주의 산행기 작성으로 산행 시간및 기록  정확함

② 2016년 10월 19일~13일 산행 후기 작성

③ 땅끝기맥 마지막 구간

④ 산행 시작 후 비 온 후 9시경 맑음

⑤ 산행 후 땅끝마을 식당 뒤풀이

 

 산행지도 및 고도표 

 

▲ 고도표는 돈민 친구의 블러그에서 가져 옴

 

※ 산행 후기

遊山者不可以無錄 而有錄之有益於遊山也 (유산자불가이무록 이유록지유익어유산야) : 산을 즐기는 자 기록 없어서는 아니 되고기록이 있음은 산을 즐기는데 유익하다퇴계 이황 선생님의 말씀처럼 산을 즐기기에도 기록은 필요하지만 잊지 않기 위해서도 기록은 필요하다. 땅끝 기맥은 한 구간을 제외하고 모두 했음에도 기록이 하나도 없다. 이번 산행기를 적으면서 느끼는 건 비록 미흡하더라도 후일에 기억을 돕기 위해 산행기는 꼭 남겨야 하는 게 정답인 것 같다게으르고 미루다 보니 스마트 폰이 바뀌면서 저장된 사진도 모두 유실되어 땅끝기맥 종주 사진도 여기 저기 찾아서 수집 하다 보니 한 구간 빠지고 다 했기에 다시 하지 않기 위해 정리 해서 기록한다. 느낀 점은 1구간과 똑같다

 

※ 산행 사진

<닭골재(楮洞峙 58m)>:해남군 현산면 구산리와 북평면 남창리를 잇는 고개로, 새로 생긴 4차선의 도로가 시원스레 뚫려있고 그 옆에는 잊혀져가는 구 13번 국도가 있다.해남지(海南地志)에 기록된 닭골재를 보면 고개 아래에 있는 ‘딱골’이란 지명에서 비롯된 듯 하며, 딱골은 닥나무가 많은 동네라는 뜻으로 ‘저동(楮洞)’으로 기록되어 있다고한다. 그렇다면 이 고개의 원 지명은 저동치(楮洞峙), 즉 딱골재인데 변음이 되어 닭골재로 된 모양이다.

▲ 닭골재 도착 하니 비가 내리고 있어 단체사진도 찍지 않고 바로 진행 한다.

 

 

▲ 측백나무 숲을 지난다.

 

 

 작은 닭골재에 있는 안내판

▲ 우측 임도 따라 약 16분 정도 진행 한다.

▲ 옅은 안개와 바다, 그리고 섬, 아름답다. 조망이 조금만 더 좋았더라면 좋았을텐데 비가 그친것만으로 만족 한다.

 

▲ 임도 시작점에서 16분 진행 후 이곳에서 산길로 접어 든다. 

▲ 달마산 입구에 들어서니 멋진 바위가 마치 사열을 하듯 서 있다.

 

 

▲ 선답자의 글을 보니 이곳 능선에 올라서면 송지면에 위치한 가공산(334.8m)이 보인다고 한다. 우리나라 산 이름 중에 가.나.다 순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산이라고 한다. 가공산은 아랫 사진 보면 된다.

 

 

 

▲ <바람재 이정목> 암릉을 우회하여 안부로 내려서니 바람재 이정목을 만나는데, 우측은 송촌마을로 내려가는 길이고, 좌측은 이진리로 내려가는 길이다.달마산을 오르는 일반 등산객들은 주로 송촌마을에서 산행을 시작한다고 한다.

 

 

 

▲ 돌아 본 바위 너머로 지난구간 이어온 땅끝능선과 대흥사를 가슴에 품고있는 두륜산이 아련히 보인다. 

▲ 완도의 백운봉과 상황봉은 운무와 함께 멋진 풍광을 제공 하고 있다.

▲ 좌전방으로 이진진(梨津鎭)이 내려다 보인다.

<이진진(梨津鎭)> : 이진리에는 이진산성이 있는데, 이진리 마을 뒷쪽에 있는 이진산성은 정유재란 이후인 1598년(선조21년)에 진(鎭)이 설치되었고, 1627년(인조5년)에 만호진으로 승격되었는데 성이 축성년대가 이때쯤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진리(梨津里)는 지형이 배처럼 생겼다고하여 배진 또는 이진이라 하였는데, 서전리를 일부 병합하여 이진리라 부른다고 한다. 조선 중기까지 남창리 있던 ‘달랑진’이라는 수군 기지가 조선조 인조 때 남쪽에 있는 북평면 이진리로 옮겨와서 이진진이라 하였다.조선시대에 수군기지가 있었던 곳으로,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왜군은 임진년에 침범하지 못했던 이곳 전라도 땅으로 침범을 하였었다 한다.

▲ 완도의 백운봉과 상황봉

 

신라시대 해상왕 장보고(張保皐)가 청해진(淸海鎭 : 지금의 완도)을 건설했다. 청해진은 7세기말에서 8세기초에 걸쳐 설치된 군진 (軍鎭의 하나이지만 건설 당초부터 독자적인 성격이 강했다. 그에게 내려진 대사(大使)라는 직명도 다른 군진의 진두(鎭頭)·두상(頭上) 등 신라의 정규 관직과는 다른 것이었다는 점도 이러한 사실을 말해준다. 청해진이 건설된 뒤 그는 해적을 소탕하여 서남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했고, 당나라와 일본을 잇는 해상무역로를 통한 무역활동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신라 지배체제의 외곽적 존재로서 해상무역을 통해 일종의 해상왕국을 형성한 그는 당나라에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와 함께 교관선(交關船)이라는 무역선을 보내 교역활동을 했다. 840년(문성왕 2)에는 일본에 회역사(廻易使)를 파견하여 서신과 물건을 보냈다. 일본측은 이를 사교(私交)라 하여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무역은 허용했고, 그 사자와 이충(李忠)·양원(楊圓) 등에게 식량을 지급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무역활동을 통해 확보한 경제력을 배경으로 중국의 산둥 성[山東省] 원덩 현[文登縣] 츠산춘[赤山村]에 법화원(法華院)이라는 절을 세웠다. 이곳에는 500석을 수확하는 장전(莊田)이 속해 있었는데, 많은 승려가 머물며 정기적으로 법회를 열었고, 청해진과의 연락기관 구실도 했다 출처:다음 백과사전

▲ 진행 방향 달마산

 

▲ 드문 일인데 진행 방향에서 선두와 만났다. 

▲ "능선삼거리 이정목" 

▲ 가야할 달마산 정상으로 어어진 능선이 환상적이다.

 

 

 

 

 

▲ 능선 위롤 올라서니 누군가가 멋진 돌탑 하나를 멋지게 쌓아 놓았다.

▲ 조망이 너무 좋은 이곳 능선에서 돈민 친구와 과일을 먹고 잠시 쉬어 간다. 

 

▲ 진행 방향 달마산 

▲ 완도의 백운봉과 상황봉 

 

 

 

 달마산 정상에서 바라 본 <미황사(美黃寺)> 아래 사진은 선답자의 사진에서

▲<미황사(美黃寺)>신라 경덕왕 8년(749년) 인도에서 경전과 불상을 실은 돌배(石舟)가 사자포구(지금의 갈두상)에 닿자, 의조 화상이 100여명의 향도와 함께 쇠등에 그것을 실고 가다가 소가 크게 한번 울면서 누운 자리에 절을 세워 통교사(通敎寺)라 하였으며, 소가 마지막 멈춘곳에 절을 세우니 미황사였다. 그때 소의 울음소리가 아름답다하여 아름다울 ‘미(美)’, 금인(金人)이 황금색으로 번쩍거리는 것을 기려 누를 ‘황(黃)’이라 미황사(美黃寺)라 하였다.위의 설화를 볼 때 백제가 멸망하고 통일신라시대에도 중국(당나라)이 아닌 바다를 통해서 인도 불교가 전래되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설화를 뒷받침하는 부분이 미황사 초입에 있는 마을 이름에서 알 수 있다. 미황사 입구에 있는 우분(牛墳)마을이다.미황사는 한반도 최남단에 위치한 사찰로 바닷길 불교 전래를 추측케 하는 신비로운 전설을 간직한 천년 고찰이다. 바위의 누런 이끼, 금빛 나는 금샘, 달마전 낙조를 미황사의 3황(黃)으로 꼽는다. 미황사는 한반도 내륙의 위도상 가장 끝에 자리잡은 사찰로서, 신령스런 달마산의 기슭에 있는데 달마산은 미황사의 불상과 석양빛, 암릉이 조화를 이뤄 달마산의 삼황(三黃)이라 부른다고 한다. 미황사 주변으로는 동백꽃 군락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 <달마산 정상 봉수대(돌탑)>:이곳은 조선시대까지 이곳에 봉수대가 있었다. 하여 '불을 써는(써다는 켜다의 전남 방언) 봉'이라 해서 불썬봉이다.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불썬봉 대신 이 지점에서 북쪽으로 470m쯤 떨어진 곳에 '달마산(達馬山)'으로 오기했다. 극심한 가뭄이 오래 계속되면 산봉우리에서 기우제를 지내 비를 내리게 했다한다. 봉수대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긴 하지만 어느 학자는 삼국시대부터 있었다고 하고 어느 학자는 12세기 중반인 고려시대부터 설치되었다고 주장한다. 봉수대에선 밤이면 횃불, 낮에는 연기로 동서남북 사방팔방으로 긴급함을 알렸다. 이곳 달마산의 봉수대는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완도의 숙승봉과 북일 좌일산으로 연결하던 봉수대다. 그래서 달마산 정상의 봉우리가 불선봉 또는 불썬봉이라 불렀는데, 이는 전라도 사투리로 ‘불을 켜다’, ‘불을 써다’라는 유래에서 따온 지명으로 봉수대와 관련된 지명인듯 하다. 

 

▲ 달마산 정상에서 바라 본 완도

 

▲ 달마산((達摩山 489m) : 해남군 북평면과 현산면, 송지면에 걸쳐있는 산으로 땅끝을 향해 펼처져 있는 암릉이 다도해와 어우러져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불썬봉”이라고도 하는데 옛날 이곳에 봉수대가 있어서 ‘불을 사용하다’라는 남도 사투리에서 ‘불쓴 봉우리’라는 뜻으로 불썬봉이라 부른것을 미황사 스님들이 불선봉(佛禪峰)이라 부르는 바람에 불선봉이 되었다고 한다. 달마산은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가 선종의 시조가 된 달마대사가 머무를 만큼 산세가 뛰어나다는 데서 유래했다. 기록상으로 고려의 무외 스님이 처음으로 이 산을 달마산으로 불렀다고 한다.그는 '달마산 정수리의 바위들은 사자와 용, 호랑이가 발톱과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릉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어떤 이들은 불썬봉을 불선(佛仙), 불성(佛聖)봉으로도 부른다. 미황사 스님들은 달마봉으로 쓴다. 달마(達摩)란 범어(梵語,산스크리트어)인 ‘다르마’에서 유래되어 ‘경전’ 또는 ‘진리’를 의미하며, 달마대사는 중국에 선(禪)을 전한 후 천축국(인도)으로 돌아가지 않고 해동의 바닷가 달마산에 머물렀다는 설로 이 산의 이름을 달마산이라 불렀다고 한다.달마(達摩)는 조사선의 초조(初祖)로 인도의 스님이었는데, 중국으로 건너와 선맥(禪脈)을 이어 육조 혜능조사로 이어져 우리나라 조계종맥으로 이어지는 스님이다. 달마대사는 본래 인도 파사국(波斯國)의 왕자였다. 6세기 전후에 북위(北魏)로 건너가 중국 선종(禪宗)의 초조가 되었다. 당시 주류를 형성한 강설불교(講說佛敎)의 모함을 받아 여섯번이나 독약을 받았다. 결국 중국에서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인도로 되돌아가고 만다. 이 전설에 대한 우리나라 땅끝 사람들의 이야기는 다르다. 달마는 고향으로 가지 않고 해남으로 왔다고 믿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도 이를 뒷받침한다. 고려 때 무외스님이 쓴 글에 “1281년 겨울에 남송의 큰 배가 표류해 이 산에 정박했을 때 한 고관이 나와서 달마산을 향해 예를 올리며 우리나라에서는 이름만 듣고도 공경할 뿐인데 그대들은 이곳에서 자랐으니 부럽다. 이 산은 참으로 달마가 머무를 땅이다”라며 그림으로 그려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달마봉 인증

 

 

 

 

 

작은금샘 삼거리 이정목: 작은 금샘은 금서동굴 쪽으로 10분정도 내려가야 하는데 금샘을 찾기가 그리 쉽지 않으며 해남군에서는 금샘을 보호하기 위해 이정표를 설치하지 않았다고 한다. 

 

 

 

▲ 드문 일인데 진행 방향에서 선두와 또 만났다. 마지막 구간에서 선두와 거의 같은 시간대에 움직였다.

 

 

 

▲ 좌측의 완도 대교가 보이고 완도의 백운봉과 상황봉도 뚜렷이 보인다.

▲ 대밭삼거리 이정목

 대밭삼거리의 명물/ 고인돌처럼 보이는 문바위

 

 

 

▲ 지나온 땅끝기맥 길 

 

 ▲ 하숙골재에 있는 이정목

▲ 떡봉 정상에 있는 이정목으로 25000지형도에는 ×422봉으로 표기된 별 특징 없는 봉이다. 

 

 

▲ 함께 산행 한 돈민 친구  

▲ 진행 방향 / 이젠 도솔봉도 지척이다.

▲ 도솔암 갈림길을 만나고, 우측으로 올라간다. 

 도솔암 입구

▲ 도솔암 

 

"해남에 남도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달마산이 있다. 동서로 7km, 주능선 평균 높이 400여 m에 이르는 달마산 중턱을 한 바퀴 도는 산길 17.7km 달마고도. 돌계단이나 철계단 하나 없이 편하게 걸을 수 있는 천년숲길 달마고도의 봄빛 향기를 소개한다.남도 해남에는 두륜산과 달마산이 있다. 두 산은 해남 사람들의 자긍심이다. 조금 더 낮고 작은 산들이 많이 있지만 두 산에 비하면 고개를 들기가 쉽지 않다. 달마산은 한반도의 남단에 자리하고 있는 긴 암릉으로 이루어진 산이다. 마치 설악산 공룡능선을 연상케 하는 바위능선,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냈다는 불썬봉, 기묘한 바위들로 이루어진 도솔봉과 바위틈에 살포시 앉아 있는 작은 암자 도솔암 등이 유명하다." [출처 : 여행스케치]

 

"도솔암은 정유재란 때 파괴되었다고 한다. 진도 앞바다인 울둘목에서 명량해전이 벌어졌고, 여기에서 패한 일본 수군의 패잔병들이 달마산으로 올라왔다. 왜군들이 달마산으로 피신하면서 여기에 있던 도솔암에 불을 질렀다. 도솔암 터는 날카로운 바위 틈에 자리 잡고 있다. 공룡의 이빨 사이에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절을 짓기 쉬운 터가 아니었다. 왜군들이 불을 지르고 수백 년 동안 이 터는 비어 있었다. 그 빈터는 무속인들의 기도터가 되었다. 정유재란 이후로 수많은 무속인이 이 터에 와서 굿을 하고 공을 들였다. 2003년 무렵 오대산의 월정사에서 기도를 하던 법조(法照·62) 스님이 신비한 꿈을 꾸었다. 꿈에 스님이 칡넝쿨이 엉켜 있는 절벽에서 잠복근무를 하는 군인처럼 엎드려 있는데, 절벽 밑의 호수에서 살던 시커먼 이무기가 올라와 스님의 어깨에 턱 걸치는 꿈이었다. 이 꿈을 꾸고 월정사에 있던 법조 스님은 도솔암 터에 찾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바위 절벽 사이 축대가 쌓여 있는 빈터에 법당을 짓기 시작하였다. 법당을 짓고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새벽예불을 끝내고 돌계단을 내려오는데, 돌계단에서 웅크리고 있던 커다란 뱀이 계단 밑의 돌축대 사이로 사라지는 장면을 보았다. 새벽의 여명 속에서 본 그 뱀은 귀가 달려 있었다고 한다. 뱀이 귀가 달리려면 수백 년은 묵은 뱀이어야 한다. “이렇게 귀가 달린 뱀이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아마도 수백 년 동안 이 돌축대 밑에서 살던 뱀이었을 겁니다. 법당에서 예불 소리를 듣고 비로소 뱀의 허물을 벗었을 겁니다. 축생(畜生)의 과보를 벗어난 것이죠. 아마 수백 년 동안 예불 소리 듣기를 기다렸을 겁니다.” (출처 : 주간조선, 조용헌의 영지순례)

도솔암 (兜率庵) : 흔히 달마산 도솔암을 소개할 때 하늘에 맞닿은 암자, 땅끝에서 만나는 하늘끝, 남도의 금강산인 달마산에 핀 연꽃이란 수식어가 붙는다. 도솔암은 미황사를 창건한 의조화상이 미황사를 창건하기 전에 수행하던 곳으로,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암자로 조선조 정유재란 때 명량해전에서 이 순신장군에게 대패한 왜군들이 해상 퇴로가 막혀 달마산으로 퇴각하던 중, 암자에 불을 지르는 바람에 소실되었는데, 월정사의 법조스님이 복원하였다고 한다. 깍아지른듯한 암릉사이에 아슬아슬하게 자리잡은 암자. 마치 제비집을 연상케 하는 도솔암, 미황사의 12번째 부속 암자로 해남 8경중에서도 가장 으뜸이라는 도솔암의 풍광이 마치 금강산에 온 것처럼 착각을 느끼니 왜 이곳이 남도의 금강산이라 부른 이유를 알 것 같다.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창건한 도솔암은 달마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암자로 원효성사, 서산대사, 사명대사 등 여러 스님들의 기도처로도 사용되었으며 동국여지승람에는 ‘달마대사의 法身이 늘 상주하는 곳’으로 기록이 되었으며 드라마 ‘추노’ , ‘각시탈’,‘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 가 촬영된 장소로 알려지면서 유명세를 탄 암자이기도 하다. 

▲ 도솔암 앞의 전경 

▲ 도솔암 맞은편의 병풍바위

 

▲ 이곳부터는 땅끝 천년숲 옛길이라는 안내도다. 삼남길의 일부 인듯하다. 

▲ 이곳부터 삼성각에서 도솔암 전경을 본 후 이제 다시 돌아 나와 도솔암주차장으로 향한다.

이제 달마산 암릉산행은 실질적으로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 도솔봉에서 바라 본 통신 탑.

▲ 도솔봉

 

 도솔봉에서 바라 본 다도해

 

▲ 도솔봉에서 포장도로로 내려와 아래 이정표에서 땅끝까지 약 10km 정도 천년숲길을 이어 간다.

 

 

▲ 땅끝까지 약 9.2km. 이런 이정표가 계속 나타난다.

 

 

 

 

 

 

 

 

▲ 이제 땅끝전망대까지 약 3km정도

 

▲ 갈두재는 다리를 건너 통과

 

 이제 땅끝전망대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 전망대 주차장

 

 

 

 

 

 

 

 

 

 

 

 

 

 

 

 

 이제 땅끝마을에서 땅끝기맥 종주를 마친다.

땅끝기맥 종주 기념 만찬을 즐기고 대전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