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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산문선<설악행각(雪嶽行脚)>

설악행각(雪嶽行脚)(7)

(사)한국산악회 월간회보 '산' (2008년 8월호) - 한국산악 고전을 찾아서

 

설악행각(雪嶽行脚) (7)

노산 이은상

 

설악문(雪嶽門) 들어서서

산주소(散珠沼)를 떠나, 개울 우편 길로 청산가(靑山歌)를 부르며, 돌길을 더듬어 가느라니, 거대한 두 개 암석이 밑은 따로 놓이고 머리는 서로 맞대어, 천성(天成)의 문을 이룬것이 있는데, 이것을 설악문이라 합니다.

  지나온 수석경(水石景)도 비범(非凡)한것이었으나, 참으로 설악 심승(深勝)은 이 석문(石門)을 들어서야만 시작된다 하여, 특히 이것을 설악문이라 한 모양이어니와, 동곡(洞谷)의 명칭으로 지리곡(支離谷)이란 것은 남교리(嵐校里)에서 약 사십분간을 비(費)하여오믄 이 설악문까지의 오리(五里)를 이름이요, 이 석문을 들어서서부터는 따로이 탕수동(水洞)1)이라고 부릅니다.

  탕수동이라고 부르는 그 이유는 나중에 따로 말할 자리가 있겠습니다마는, 우선 석문을 들어서서 동천(洞天) 안을 둘러보매, 유수(幽邃)한채로 소광(昭曠)한데, 아침 해ㅅ발이 반짝이는 잔잔(潺潺)한 계류(溪流)를 발 아래 보고, 반석(盤石) 평류(平流)는 무미(無味)하대서, 구태여 돌 사이를 원무(圓舞)하다가, 그도 모자라 낮은채로 떨어져, ‘소리의 주인(主人)’이 되고자 하는 물의 기자(奇者)를 저 상엽(霜葉) 속으로 봅니다.

  일보(一步) 이보(二步)에 점점더 본격적인 경승(景勝)이 ‘내로라’ 자랑하는 그 속으로서 더욱 더 저절로 빛남을 봅니다.

  지팡이를 물속에 꽂고, 바위와 바위 사이를 제법 고도식(高跳式), 광도식(廣跳式)으로 뛰어 건너기도 하는데, 그러다 한 발이 물속에 빠졌다 나매, 어째 짝제기 신발을 얻어신은것 같아, 일부러 성한 신발까지 마저 적셔버리고도 싶습니다. 아니, 세상 사는데는 이런 경우도 많은 것 같아서, 혼자 한번 빙그레 쓴웃음을 웃고 갑니다.

  석문(石門)을 떠나, 약 이십분쯤 지난 때에, 어디로선지 찬 기운이 코밑을 찌르고 스치면서, 이막(耳膜)을 하마 뚫어 터질듯이 내려찢는 물 소리를 한가슴 밀어붙입니다.

  이것은 물을 것 없이 폭포(瀑布)이지만, 폭포라고 왜 무시무시한 위혁(威)부터 먼저 주는고 하였더니, 들으매, 불길(不吉)한 래역(來歷)이 있는 폭포라 그렇는가봅니다.

  백여척(百餘尺)이나 되는 거므스럼한 석벽(石壁)으로 떨어지는 수량조차 무섭게도 많은 폭포인데, 석일(昔日)에 이 산의 한 늙은 중이, 어느 가을날 달 밝은 밤에, 오히려 세간(世間) 번우(煩憂)를 울다못하여, 시비(是非) 고락(苦樂)을 다 잊어버리려고 이 폭포에 떨어져, 그 몸을 부수어버렸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이 폭포 이름도 승폭(僧瀑)이라 하였다 합니다.

  슬픈 일입니다. 사람이 죽다 하니 슬픈 일이요, 노승(老僧)이 근심으로 죽다 하니 더 슬픈일이요, 아니, 그보다는 그가 중이고보매, 도(道) 닦는 사람으로, ‘간수(看水)에 사학기청(思學基淸)하고, 간월(看月)에 사학기명(思學基明)하고, 좌석(坐石)에 사학기견(思學基堅)하라’2)함은 다 잊어버리고서, 구태여 그 밝은 달ㅅ밤 이 바위 이 물에 나와 사(死)로써 그 번뇌(煩惱)를 멸(滅)할줄만 알던, 그 부족(不足)한 수도(修道)가 더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그 모든 것보다도 번뇌(煩惱)를 벗을수 없는 ‘사람’ 그것이 본시부터 더 슬픈것이 아니오리까.

  철학(哲學)을 모르는 나는 생사(生死) 희비(喜悲)를 더 의논(議論)할 것이 없거니와, 다만 지금 이 승폭(僧瀑) 아래에 서서, 깊고 널리 패인 담중(潭中)을 바라보매, 물 속으로서 근심에 쌓인 얼굴 그대로의 그 노승(老僧)의 곡뒤(환상(幻像))가 보이는듯하며, 따라서 그 밤 광경이 부질없이 내 머리를 비추고 지나갑니다.

 

  가을날 달 밝은 밤을 저 노승(老僧) 근심에 싸여

  깊은 이 산을 이리 저리 헤매다가

  이 소에 그 몸을 던져 다 잊으려 하옵든가.

 

  늙도록 울어 살고 눈물 아직 또 남으니

  천번 헤어보고 만번 남아 생각하되

  산다는 인생(人生) 일생(一生)이 그렇이도 슬프든가.

 

  지금 물 속으로서 보이는 저 ‘곡뒤’가

  상기도 근심 그득한 그 얼울 그대롤네

  가서도 인간(人間) 번뇌(煩惱)는 벗기 저리 어려운가.

 

  죽는다 산다 함이 같은줄을 아시던들

  구대3) 늙은 몸이 여기에야 들었으리

  닦은 도(道) 채 부족(不足)하여 깨단 미쳐 못하셨나.

 

  저 승(僧)의 하온 일을 사람아 의논 마소

  제 몸을 던졌거니 남의 말씀 부질없소

  수중(水中)에 드신 저 혼(魂)이 부디 편안 하시과저.

 

칠음대(七音臺)와 구선대(九仙臺)

고전(古傳)의 노승을 위해 수장(數章) 조가(弔歌)를 부른 뒤에, 다시 앞을 바라보며 승소(僧沼))의 우측을 돌아 오르매, 개울을 잠깐 빗겨나, 잣나무 가지 밑을 헤치는 동안, 물은 오히려 떠난채로 그대로 소리만은 장(壯)하게 들리려하고, 창벽(蒼壁) 홍태(紅苔)가 드문드문 발리고 찍혀, 본 얼굴을 가리운 속으로서 채색(彩色)을 도로 잡(雜)되다 하여, 기어이 제 생김 제 꼴을 소명(昭明)한 태양 아래 바로 뵈려는 암석들은 그 직(直)한자, 그 사(斜)한자가 서로 다투어 본색(本色) 바로 뵈기 내기를 합니다.

  권소유(權少遊)의 기(記)에 ‘성차점장(聲且漸壯), 색차점로(色且漸露)’4)는 정(正)히 여기를 이름이어니와, 과연 그 잘 듣고 잘 본 말임을 알겠습니다.

  승소(僧沼)에서 한 십오분쯤 지난 때에, 광대(廣大)한 반석(盤石) 위에 이게 무슨 기관(奇觀)입니까. 이간(二間) 쯤의 넓이로 또 상당히 두터운 물이 일곱 번 구비쳐 흐르는 양은 손도 안대고 보는 이의 어깨를 올렸다 내렸다 합니다.

  이름조차 칠음대(七音臺) !

  무수(無數)한 지상(地上)의 악성(樂聖)들의 궁(宮), 상(商), 각(角), 징(徵), 반징(半徵), 우(羽), 중한(中閑)의 칠음(七音)을 짧고 길게 받고 넘긴, 온갖 악조(樂調)의 본원(本源)이 알고보매 여기입니다.

  천인(千人)의 우륵(于勒)과 만인(萬人)의 베토삔을 한데 뭉친, 그 어떤이를 천만인(千萬人)이나 다시 모아, 그 위대(偉大), 숭고(崇高), 청아(淸雅), 명랑(明朗)한 대작(大作) 대곡(大曲)을 내어놓게 할찌라도, 이 칠음대의 들을쑤록 신비(神秘)한 자연의 묘악을 따를수는 없을겝니다.

  기천만(幾千萬)의 ‘�’과 ‘불렉’5)이 서로 얽히어, 영원(永遠)한 무휴지부(無休止符)의 대신곡(大神曲)을 아뢰는 여기 언제와 든든지, 듣다말고 가든지, 토막토막 그대로가 완성(完成)한 대곡(大曲)이언만 화옹(化翁)6)께 묻는다 하면, 악보(樂譜)의 첫 소절(小節)도 아직 채 더러 했다고 할것입니다.

 

  칠음대(七音臺) 이 곡조(曲調)를 누구나 들으련만

  듣는이 그 누구나 기뻐 춤을 추옵건만

  여보소 어느 당신이 깊은 그 뜻 아시오

 

  천만음(千萬音) 한데 얼려 한 곡조(曲調)로 들리어도

  한 곡조 깊은 속에 천만음 들었나니

  화옹(化翁)의 크신 예술(藝術)을 분별하기 어려워라.

 

  다만 나같은 범부(凡夫)도 여기와서는 무엇을 아는듯한 그대로, 다시 헤아리면 모르기도 더 모르는 것임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는 중에 오아(吾我)의 견(見)을 잃어버리고, ‘오! 거룩한 대예술(大藝術)이여’하는 지극한 감탄(感嘆)만 심수(心髓)를 들고 나고 함은, 진실로 저도 모르게 경지(境地)의 일단(一端)을 체득(體得)한 것이 아니오리까.

  이 칠음대를 지나 십분쯤 더가면, 이것은 또 무슨 기우기관(奇又奇觀)7)입니까. 칠음대와 그 성질(性質)은 같으면서도 그 구비친것이 어딘지 모르게 좀더 멋있어보이는자가 이번은 다시 구전(九轉)하여 흐르는데, 이것은 이름도 맞추어 구선대(九仙臺)라 합니다.

  이 칠음대의 칠전류(七轉流) 나 구선대의 구전류(九轉流)가 한 개요 둘도 아닌 만장(萬丈) 대반석(大盤石) 위로 연결된데 있어서는, 더한층 경이(驚異)의 눈을 찢어질 근심도 채 못하고, 힘껏 떠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구선대의 청수(淸秀)한 품자(品資)! 구선대의 숭려(崇麗)한 자태(姿態)! 신비와 황홀(恍惚)의 극치사(極侈奢)한 면사포(面紗布)를 쓰고, 원무(圓舞), 전무(轉舞), 선무(旋舞), 곡무(曲舞)8)를 갖추갖추 보이는 이 예술의 전당(殿堂)!

  글로 쓰자고 물을 향수(香水)라 함이 아니라, 향수(香水) 아니로 볼수는 없는 이 물의 향기로움은 내게 있어서나 누구에게 있어서나 분명(分明)한 향수(香水)일 수밖에 없습니다.

  탁족(濯足)이라 탁영(濯纓)9)이라 함은 그나마 건방진 말이 아니오리까. 통째로 몸뚱이를 빠쳐 이 향류(香流)에 목욕(沐浴)함이 진실로 옳을 것입니다.

  어디로선지 불어오는 바람은 구선(九仙)의 치마ㅅ자락을 날립니다. 아니, 이것이 구선의 선무(旋舞)로 말미암아 생기는 향풍(香風)이 아닌지요.

  참 좋거든요. 어허, 참 좋거든요!

  반석(盤石) 길에 지팡이를 던져놓고, 바보 같이 입을 벌이고 앉아 멍하니 보옵다가, 구선 따라 활개를 들고 배운데 없는 춤을 제멋대로 추고야 마는 이곳입니다. 참 좋거든요.

 

  구선녀(九仙女) 너훌너훌 제 춤이 따로 있어

  원무(圓舞) 전무(轉舞)에 선무(旋舞)요 곡무(曲舞)로다

  인간에 못 보는 춤을 여기 와서 보는구나.

 

  저 사람 저 무슨 춤 저리도 우서운고

  허허 모르시거든 가만히나 서 계시오

  구선(九仙)도 갈라 추는 춤을 모둬 추니 그렇소.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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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주

1) 탕숫골 - ‘노산산행기’(이은상저, 한국산악문고 1편, 한국산악회 1975년11월 발행)에서

2) 물을 보거든 그 맑은 것 배우기를 생각하고, 달을 보거든 그 밝은 것 배우기를 생각하고, 돌 위에 앉거든 그 든든한 것 배우기를 생각하라 - ‘노산산행기’(상동)에서

3) 구대 : 구태여, 일부러 애써

4) 소리가 차츰 웅장해 가고, 빛은 차츰 현저해진다. - ‘노산산행기’(상동)에서

5) ‘�’, ‘불렉’ : ‘올림표(#, sharp)’, ‘내림표(b, flat)’를 말함. ‘노산산행기’(상동)에서는 ‘음계’와 ‘음색’으로 표현하여 놓았다.

6) 조화옹(造化翁) : 만물을 창조하는 노인이라는 뜻으로, '조물주'를 이르는 말.

7) 기이한 중에 기이한 경관 - ‘노산산행기’(상동)에서

8) 원무(圓舞),전무(轉舞),선무(旋舞),곡무(曲舞) : ‘노산산행기’(상동)에서 전무(轉舞),선무(旋舞)를 같은 뜻으로 보아 ‘둥근 춤, 돌이춤, 꼬불춤’으로 표현하여 놓았다.

9) 탁족(濯足). 탁영(濯纓) : 발을 씻는다. 갓끈을 씻는다. - ‘노산산행기’(상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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