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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산문선<설악행각(雪嶽行脚)>

설악행각(雪嶽行脚)(2)

이 은 상(李殷相)

 

설악(雪嶽)의 이름 (1)

 

  얼른 동창을 열고 내다보는 눈 앞에 밤새도록 비 부어 내리던 검은 구름은 북악을 넘어 먼 하늘로 흩어지고 어둠을 뻐기고 솟아오르는 동방의 광명이 나뭇잎마다 진주알같이 빛나는 1933년 9월 30일은 내 설악행각의 첫날입니다.
  오전 8시 강원도 인제(麟蹄)가는 자동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 자동차가 굴기를 시작하기 전에, 말하지 않으면 안될 한 가지 중대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설악에 대한 서론적 지식, 아니 그보다는 설악에 대한 근본적 구명입니다.
  본시 인류 전체의 문화가 산악의 계통과 아울러 그 분포 성장을 같이한 것이어니와, 그 중에서도 더욱이 우리 겨레는 고대의 여러부족이 이미 백두산을 근거로 한 하느님 큰 왕국을 열었던 것을 비롯하여, 동으로 내려오는 줄기로, 또는 서으로 내려오는 갈래로 오직 산맥을 따라 내리며 군데군데서 문화를 짓고 짓고 하였습니다.
  우리 역사, 우리 문화를 연구하는 학도의 눈으로써 보면, 우리나라의 강산처럼 흥미 깊은 것이 다시 없을 것입니다.
  시와 문학이 적힌 것을 따로 어디서 찾는 것보다, 산악내지 국토 그것이 또한 그대로 역사요 철학인 줄을 알아야만 할 것입니다.
  그릇되고 편협하고 의혹만이 가득 차 있는 하품나는 책나부랑이의 죽은 글자에 비해서 광명하고 정대하고 정확한 것을 자랑으로 삼는 기운찬 산악 내지 국토의 산 글자야말로 너무나 그 갑이 고귀한 줄을 깨달을 일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 겨레의 신앙, 예술 내지 또는 생활이 오직 산악을 중심으로 하여 열리고 처진 것이라 거게에서 그 유적을 찾게 되는 것임을 생각하면서, 다시 설악을 의논해야 하겠습니다. 이 설악이 문헌에 보인 것으로는 삼국사기 제사지(祭祀志)에 적힌 것이 가장 오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산이름 글자에 있어서는 설악(雪嶽), 설산(雪山), 설화산(雪華山) 등 자뭇 여러 가지로 쓰이고 있음을 봅니다.
  물론 ‘설악’이외에 설산이라 설화산이라 쓰인 것은 사찰의 창건이나 중건기같은 불교 계통의 서적에서만 보이는 것입니다마는 우리는 여기서 그 산 이름의 한문 글자야 어찌 되었든지 간에 그것을 통해서 보는 다른 고증이 없을 수 없습니다.
  우리 나라의 산악 이름으로 ‘설(雪)’자를 얻은 것이 다만 여기 이산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북쪽 백두산 큰 줄기에 있어서 황초령(黃草嶺)이 북으로 달려 설한령(雪寒嶺)을 이루었고, 동쪽 큰 줄기에 있어서는 박달령(朴達嶺)이 남으로 내려와 평강(平康)북쪽 분수령(分水嶺)에 이르는 맡에 궁예(弓裔)의 옛터를 남쪽에다 두고 설운령(雪雲嶺)이 있으며, 다시 그 박달령이 동으로 달려 안변(安邊) 서쪽 설봉산(雪峰山)을 솟게 했는데, 이 설봉산이란 이름은 강원도 이천(伊川)에도 쓰이었고 또 함경도 길주(吉州) 서쪽에도 같은 이름의 산이 있습니다.
  그리고 칠보산(七寶山) 계통에 있어서는 곡돈현(曲頓峴)의 한 가닥지에 설성산(雪城山)이 있고 분수령(分水嶺) 계통에 있어서는 양주(楊洲) 홍복산(弘福山) 가닥지가 뻗어 가다가 파주(坡州) 적성(積城)으로 갈리는 산맥에 설마저(雪馬峙)가 있으니, 지리서에 의하면 이와 같은 이름이 서울 남산(南山)에도 적혀 있어 ‘산의 남쪽에 있는 것을 대설마(大雪馬)라 하고 산의 동쪽에 있는 것을 소설마(小雪馬)라 한다’ 했습니다.
  또한 저 호남의 장안산(長安山) 계통에 있어서도 옥과(玉果)의 진산을 설산(雪山)이라 하는 등 그 수가 자못 많고 그 이름 또한 널리 쓰이고 있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산 이름, 땅 이름은 실로 흥미 있는 연구 자료입니다. 그 변천의 재미스러운 경로를 보살필 때나, 또는 그 껍질을 슬쩍 들치고서 그 속알맹이의 본색을 들여다 볼 때에 받는 그 기쁨과 유쾌함은 반드시 전문가에게만 속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무엇보다도 깊은 흥미와 또 엄격한 태도로 해부해보지 않으면 안될 중요한 한 가지가 이�니 그것은 설악의 ‘설’ 그것입니다.
  이 ‘설악’이라는 ‘설(雪)’ 자의 유래에 대하여 여지승람(輿地勝覽) 이나 문헌비고(文獻備考)에서는
  ‘한 가을에서부터 눈이 와서 이듬해 여름에 가서야 녹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다’
  (仲秋始雪, 至夏乃消, 故名焉)
하였고, 금원(錦園) 여사(女史)는 그의 ‘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에
  ‘돌 빛이 눈같이 희기 때문에 설악이하 하였다’
  (石白如雪, 故名雪嶽)
했습니다.
  그러나 실상인즉 이 두 가지가 다 이미 적혀져 있는 ‘설(雪)’자에 해석을 붙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요, 본시부터 그 때문에 이름 지은 것은 아닌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높은 산 치고 겨울에 눈 오지 않는 곳이 어디 있으며, 또한 눈 업슨 남쪽에는 무슨 이유로 ‘설(雪)’자로 된 산이 생겼겠습니까. 그러므로 눈 때문에 생긴 이름이 아님은 물론이요 또 이 설악산의 돌빛은 푸른 빛과 갈색이 많으니까 돌 빛이 희어서라는 이유도 성립되지 않는 말입니다.
  그러면 설악의 ‘설’은 무슨 때문으로 얻은 이름이며 무엇을 뜻함이냐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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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산악 고전을 찾아서 (한국산악회 월간 "산" 2008년 3월호에서)

 

설악행각 (2)

 

노산 이은상


"편집문헌위원회에서는 『노산문선』(鷺山文選, 1954. 9.30 영창서관 발행)의 <설악행각> 원문을 입수하여 2008년1월부터 회보에 연재한다. 원문이 국한문혼용으로 한자로 수록되어 있어한글로 고치고 어려운 낱말은 한자병기 또는 주석을 붙여 놓았다. - 편집자주"

 

설악(雪岳)1) 명칭(名稱)의 고구(考究)


  얼른 동창(東窓)을 열고 내다보는 눈앞에, 밤새도록 비 부어내리던 검은 구름은 북악(北岳)을 넘어 먼 하늘로 흩어지고, 암흑(闇黑)과 음침(陰沈)을 뻐기고 솟아오르는 동방(東方)의 광명(光明)이 정수(庭樹)의 잎잎으로 진주(眞珠)의 찬가(讚歌)를 부르는 9월 30일2)은, 내 설악(雪嶽) 행각(行脚)의 제1일입니다.

  오전 8시, 강원도 인제(麟蹄)행 자동차(自動車)에 몸을 던져 실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 자동차가 굴기를 시작하기 전에, 말하지 않으면 안 될, 한가지 중대(重大)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산악(山岳)에 대한 서론적(緖論的) 지식(知識) 내지 설악(雪嶽)에 대한 근본적(根本的) 구명(究明)입니다.

  본시 인류(人類) 전체(全體)의 문화(文化)가 산악(山岳)의 계통(系統)과 아울러 그 분포(分布) 성장(成長)을 같이한 것이어니와, 그 중에서도 더욱이 조선 겨레는 그 고대(古代)의 여러 부족이 이미 백두산(白頭山)을 근거(根據)로 한 천제(天帝)의 대왕국(大王國)이 개조(開肇)3)됨을 비롯으로하여, 동하(東下)하는 줄기로, 또는 서하(西下)하는 갈래로, 오직 산맥(山脈)을 따라 내리며, 군데군데서 그 문화(文化)를 짓고짓고 하였습니다.

  한국 역사(歷史), 한국 문화(文化)를 연구(硏究)하는 학도(學徒)의 눈으로서 보면 반도(半島)의 산악(山岳) 하천(河川)처럼 흥미(興味) 깊은 것이 다시없을  것입니다.

  시(詩)와 문학(文學)이 적힌 곳을 따로 어디서 찾는 것보다 산악(山岳) 내지 국토(國土) 그것이 그대로 한국의 시(詩)요 문학(文學)이며, 역사(歷史)와 철학(哲學)을 달리 어디서 뒤지는 것보다 산악(山岳) 내지 국토(國土) 그것이 또한 그대로 역사(歷史)요 철학(哲學)인줄을 알아야만 할 것입니다.

  오진(誤診), 편협(偏狹), 의혹(疑惑)을 자랑으로 삼는 하품나는 서적(書籍)의 사(死) 문자(文字)에 비겨서는 공명(公明), 정대(正大), 요확(瞭確)4)을 그 자랑으로 삼는 기운찬 산악(山岳) 내지 국토(國土)의 활(活) 문자(文字)는 너무나 그 값이 고귀(高貴)한 줄을 깨달을 일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진족(震族)의 신앙(信仰), 예술(藝術) 내지 모든 생활(生活)이 오직 산악(山岳)을 중심(中心)으로 하고 열렸으며, 퍼졌으며, 또한 거기에서 그 유적(遺跡)을 찾게 되는 줄을 생각하는 기대(基臺) 위에서 다시 설악(雪岳)을 논의(論議)하여야 하겠습니다. 대개 이 설악이 문적(文籍)에 보인 것으로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제사지(祭祀志)에 적힌 것이 가장 오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산명(山名)의 자면(字面)에 있어서는 설악(雪岳), 설산(雪山), 설화산(雪華山) 등 자못 수종(數種)으로 쓰이어 있음을 봅니다.

  무론(毋論)5) ‘설악(雪岳)’ 이외(以外)에 설산(雪山)이라 설화산(雪華山)이라 쓰인 것은 사암(寺菴)6)의 창중건기(創重健記)등 승가(僧家)의 기록(記錄)에서만 보이는 것입니다마는, 우리는 여기에서 그 산명(山名)의 한자(漢字) 기록(記錄)이야 어찌 되었든지 간에 그것을 통(通)하여 보는 다른 고증(考證)이 없을 수 없습니다.

  우리 반도(半島)의 산악(山岳) 명(名)으로 ‘설(雪)’자를 얻은 것이 다만 여기 이 산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북부(北部) 백두(白頭) 대간(大幹)에 있어서 황초령(黃草嶺)이 북주(北走)하여 ‘설한령(雪寒嶺)’을 이루었고, 동부(東部) 백두(白頭) 대간(大幹)에 있어서는 박달령(朴達嶺)이 남하(南下)하여 평강(平康) 북(北)의 분수령(分水嶺)에 이르는 맡에 궁예(弓裔) 고도(古都)7)를 남(南)에다 두고 ‘설운령(雪雲嶺)’이 있으며, 또한 석인(昔人)8)의 축성(築城) 방호(防胡)의 험산(險山)인 ‘설함령(雪含嶺)’이 있고, 다시 강원도(江原道) 이천(伊川)9)의 진산(鎭山)에도 쓰이었고, 또 함경도(咸鏡道) 길주(吉州) 서(西)에도 동명(同名)의 산(山)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남(漢南)의 칠보산(七寶山) 간지(幹枝)에 있어서는 곡둔현(曲屯峴)의 일지(一支)에 건지(乾止), 대덕(大德)을 지나 ‘설성산(雪城山)10)’이 있고, 한북(漢北)의 분수령(分水嶺) 간지(幹枝)에 있어서는 양주(楊洲) 서남(西南)의 홍복산(弘福山) 일지(一支)가 서북(西北)으로 뻗어가다가, 파주(坡州), 적성(積城)으로 갈리는 산맥에 ‘설마치(雪馬峙)’가 있으니, 여람(與覽)11)에 의하면, 이와 동명(同名)이 한성(漢城) 남산(南山)(목멱산(木覓山))에도 있어, ‘재산남자(在山南者)를 대설마(大雪馬)라 하고, 재산동자(在山東者)를 소설마(小雪馬)라 한다’하였습니다.

  또한 저 호남(湖南)의 장안(長安) 간지(幹枝)에 있어서도 옥과(玉果)의 진산을 ‘설산(雪山)’이라 하는 등, 그 수 자못 많고, 그 이름 또한 광포(廣布)된 줄을 알 것입니다.

  반도(半島)의 산악(山岳) 명(名) 내지 지역 명칭은 실로 흥미 있는 연구 자료입니다. 그 변천(變遷) 또는 와오(訛誤)의 재미스러운 경로(經路)를 보살필 때나, 또는 그 표피(表皮)를 슬쩍 들치고서 적라(赤裸)한 그 속알맹이의 본색(本色)을 들여다볼 때에, 받는 그 기쁨과 쾌(快)함은, 반드시 전문가(專門家)에게만 속(屬)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무엇보다도 깊은 흥미와 또 엄격(嚴格)한 태도(態度)로 포착(捕捉) 해부(解剖)하지 않으면 안 될 막중한 한 가지가 있으니, 그것은 ‘설악(雪岳)’의 ‘설(雪)’ 그것입니다.

  이 ‘설악’이라는 ‘설’자의 유래에 대하여 여지승람(輿地勝覽)12)이나 문헌비고(文獻備考)13) 등은

  중추시설(仲秋始雪), 지하내소(至夏乃消), 고명언(故名焉)14)

이라하였고, 금원여사(錦園女史)15)는 그의 호동서락(湖東西洛)에

  석백여설(石白如雪), 고명설악(故名雪嶽)16)

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상인즉, 이 양자(兩者)가 다 이미 써놓은 ‘설(雪)’자에 이유를 붙이자고 붙인, 일종(一種)의 전회(傳會)에 불과(不過)함이요, 본시부터 그 까닭에 ‘설’자로써 이름지은 것은 아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왜 그런고 하니, 고산준령(高山峻嶺) 치고 동절(冬節)에 눈 오지 않는 곳이 어디 있으며, 또한 눈 없는 남방(南方)에는 무슨 이유(理由)로 ‘설’자 산이 생겼습니까. 그러므로 ‘다설(多雪)’의 이유라 함이 결코 그 연유(緣由)될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이 설악산의 석색(石色)은 다청다갈(多靑多褐)이매, ‘석백(石白)’의 이유라 함도 한낱 공연(空然)한 말임이 분명(分明)합니다.

  그러면 설악의 ‘설’은 무슨 때문으로 얻은 명자(名字)며 무엇을 의미(意味)함이냐 할 것입니다. (다음호에 계속)

 

▲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팔도지도> 강원도 지도 설악산 부분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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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 주)

1) 동국여지도(東國輿地圖)에서는 설악산(雪岳山)과 한계산(寒溪山)으로 표시되어 있다. 인제에서 양양으로 가는 길이 지도에는 세가지 경로로 표시되어 있다. 가장 남쪽에는 지금의 조침령을 넘는 길, 오색령(지금의 한계령)을 넘는 길, 그리고 미시파령(지금의 미시령)을 넘어 목우재로 지나는 길이다. 미시령과 오색령 사이에 설악산이 있고, 오색령과 조침령 사이에 한계산이 있다. 지금은 설악산과 한계산을 합하여 설악산(雪嶽山)으로 부른다. 본문에서는 옛 지명은 ‘설악(雪岳)’으로 현재의 지명은 ‘설악(雪嶽)’으로 구분하였다.
2) 1933년 - 한국산악문고(1975년 한국산악회 발행) 1권 노산산행기 <설악행각>편 참조

3) 열리기 시작하다.

4) 명료하고 정확함

5) 말할 필요도 없이. = 물론(勿論), 무론(無論)

6) 절과 암자들

7) 강원도 철원(鐵原)을 말함. 철원·평강 북쪽의 설운령은 1946년 9월 함경남도에서 강원도로 편입된 안변군(安邊郡)에 있다.

8) 옛 사람

9) 북한의 강원도 북서부에 있는 지역으로 남쪽은 철원군, 동쪽은 평강군, 서쪽은 황해북도 신계군·토산군, 북쪽은 판교군과 접해 있다.

10) 이천시 설성면과 장호원읍의 경계에 있는 산. 건지산과 대덕산은 이천시와 용인시의 경계에 있다.

11) 12)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13)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14) “한 가을에서부터 눈이 와서 이듬해 여름에 가서야 녹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다.” - 한국산악문고(1975년 한국산악회 발행) 1권 노산산행기 <설악행각>편

15) 금원(錦園, 1817~?) 조선 헌종 때의 여류시인으로 열네살에 남장을 하고 금강산에 올라 유람기 '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를 남겼다.

16) “돌 빛이 눈같이 희기 때문에 설악이라 하였다.” - 한국산악문고 1권 노산산행기 <설악행각>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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