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산악문고(제1권) 노산산행기(鷺山山行記)
1975년 11월 한국산악회 발행
머리말
내가 우리 국내에서 큰 산을 밟아본 것은 1928년에 금강산 답파한 것으로써 비롯을 삼을 것입니다.
그 뒤 1931년 동아일보 지상에 묘향산 초등반 기행문을 발표했고, 1933년 역시 동아일보 지상에 설악산 초등반 답파기를 발표했었습니다.
다시 그 뒤 1935년 조선일보 지상에 압록강 유역 일곱 고을의 산수 답파기를 발표했고 계속해서 무등산, 백양산, 초월산, 마니산, 속리산, 가야산 등 여러산을 밟아본 기문들을 발표했거니와, 일제 말기에 이르러, 특히 1937년 조선일보 지상에 한라산 등반기를 처음으로 발표했고, 또 1938년 역시 조선일보 지상에 지리산 기행을 처음으로 발표했던 것입니다.
일제시대의 일이라. 그 글들은 혹은 삭제도 당하고 혹은 압수도 당하는 여러 가지 난관을 겪지 않을 수 없었거니와, 그보다도 오늘와서는 이미 3,4십년이 지난 뒤라 길도 변하고, 경관과 문물이 모두 변했기 때문에 그 때의 기행문이 어느 의미에서는 살아있는 고전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이 단행본에 수록하는 글들은 첫째 1933년 설악산 답파했던 기행문과 둘째 1937년 제주도 기행문 중에서 한라산 부분만을 따로 뗀 것과, 1933년 유럽 각국 산악회 역방기들을 한데 묶은 것입니다.
우리 산악인들에게는 정신적, 문화적으로 읽을 만한 산악서적이 필요하고, 또 과학적 기술적으로 산악등척에 지식이 될 수 있는 서적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한국산악회 편집위원들은 산악인들에게 정신적인 것, 과학적인 것 두 방면의 양식을 제공하기 위하여, 산악문고를 간행하는 것인바, 이 책은 그 중의 하나로 발간하게 된 것입니다.
다만, 저자로서는, 이것이 과연 우리 산악인들에게 얼마만한 참고가 될 수 있을지를 걱정할 따름입니다.
묵은 글들이요. 또 마음껏 쓰지 못한 때의 글들이라, 읽는 이는 그 시대를 생각하고 이해해 가면서 읽어주신다면 다행으로 알겠습니다.
1975년 10월
노산 이 은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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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행각(1)
이 은 상(李殷相)
행각 전날밤 등 아래서
깊은 밤 ―
바랑(鉢襄)을 앞에 놓고 이것저것 짐을 챙기다 말고 창 밖에 듣는 빗소리에 여늬날과 달리 구슬픈 생각조차 일어나는 9월 29일의 밤.
행장을 어지러 놓은 채 책상을 향해 잠깐 멍하니 앉았다 말고 머리에 문득 떠오르는 것은 「홍조(鴻爪)」 두 자입니다.
기러기가 멀리 가면서 발톱으로 눈 위에 자국을 내어 제 지나간 곳을 기표해 두어도 뒷날 다시 와보면 그 눈은 다 녹고 발자국은 스러져 어딘지 알 길이 없는 것이라 옛 사람이 일찍 인생의 자취 없음을 일러 「기러기 발자국」에 비겨 말했습니다.
이제 저 「설악」명산을 찾아가는 나도 어리석어라 한 개 「홍조」의 나그네가 아니오리까.
그러면 누가 내게 물을 것입니다. 「자취 없을 걸음을 왜 짓는 거냐」고.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머물러 있어도 또한 그 자취 없는 것이라면, 가고 오는 것을 그 누가 구태여 묻고 대답할 것입니까.
다만 나와 함께 저 강산이 여기 있고 또 강산과 함께 내가 여기 있어, 나날이 나는 저를 그리고, 철철이 저는 나를 불러, 이제 내가 가는 곳이 강산이요, 강산으로 가는 자가 나인 것으로만 생각하면 다시 더 다른 무엇을 이야기할 것이 없을 겝니다.
그러나 누가 내게 다시 묻기를 「어리석다. 강산 곧 자연이 따로 어디 있느뇨. 네가 눕고 앉는 곳이 다 강산이어늘, 구트나 무슨 일로 설악만을 찾아 가느냐」할 것입니다.
그러면 나도 여기서 설악 찾는 까닭을 구트나 말해야만 하겠습니다.
예. 설악! 저 관동의 설악을 찾아가 그 빼어난 봉오리를 기어오르고, 그 맑은 못물을 굽어도 보며, 무지개 어린 긴 폭포 아래서 두 귀를 씻고, 유리 같은 반석 위에서 노래를 읊어, 갇혔던 내 영혼을 해방하고 향불 끊인 내 마음의 제단에 분향하며, 말랐던 생명의 샘을 다시 파서 재생의 은혜를 입어보자 함도 한 까닭이옵고,
티끌 번뇌를 바윗굴 저녁 구름에 날려 보내고, 중생의 죄업을 절간의 새벽 종소리에 훌쩍 벗어나, 먼지를 떨어버린 경지를 잠깐이나마 얻어보자 함도 한 까닭이옵고,
거룩한 대사들의 고행하고 ? 닦던 일을 듣고 생각고, 매월(梅月)과 삼연(三淵)의 눈물 흔적을 보고 만지며, 거기 내 마음의 외로운 그림자를 비치어 보고, 깊은 정한을 마주 붙여서 그분들을 앙모하는 그 앙모로써 내 영혼의 참 모습을 앙모할 수 있기까지에 이르러야겠고, 그분들을 위로하는 그 위로로 내 영혼의 위로를 삼자함도 한 까닭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도, 설악은 우리 옛 조상들의 오랜 숭배를 입어온 신령한 산, 거룩한 지역이라 후세에 끼쳐진 한 자손이 찾아가 그 영적(靈跡)을 더듬고 활력(活力)을 얻어 「조선」민족정신을 재인식하자, 「조선」민족 신념을 재수립하자, 「조선」민족 문화를 재건설하자 하는 거기에 더 큰, 더 깊은 까닭이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저렇듯이 이름 높은 승지를 사람마다 순례하는 건 그만 두고라도, 조그마한 기행문 하나 끼친 것 없는 걸 헤아릴 때, 「우리네의 산악 순례에 대한 열성이 이렇게도 없구나, 우리네의 산악 순례를 위한 여유가 이렇게도 없구나」하는 탄식과 아울러 얼른 이 기회에 내가 한 번 대답하고 나선 것도 한 까닭입니다.
그러나 필경은 두려운 일입니다. 저 지극히 참되고 어질고 아름답고 빛나고 향기롭고 거룩함이 한데 모이고 쌓인 「황홀의 왕국」「자비의 전당」「약동의 경지」를 남에게 보임에는 내가 너무도 힘이 모자라는 학도가 아니오리까.
그러므로 설악행각의 길을 떠나려는 내 마음에 이 한 점이 큰 「거리낌」이 됩니다마는 귀한 기회가 내게 온 것을 옛사람의 말대로 선연(仙緣)이라 생각하니, 고작 느꺼움으로 가슴이 부풀어짐도 사실입니다.
가서 울고 웃는 것도 미리 기약할 것 아니요, 가서 편하고 괴로울 것도 지레짐작할 것 없으며, 그 거룩한 자취, 그 아름다운 경치를 잘 전하고 못 전함도 앞서 말할 것이야 무엇이리까.
이 밤도 어느 덧 자정이 지났습니다.
새벽이면 길을 떠나야 할 지금 이 행각 전날 밤의 등불 아래 끊임없이 들리는 밤비 소리는 어수선히 널린 행장과 함께 이 외로운 나그네에게 짧은 잠조차 허락하지를 아니합니다.
▼ 팔도분도 동관(東關)지도 설악산 부분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홈페이지에서...)
▼ 팔도지도 강원도 지도 설악산 부분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홈페이지에서...)
한국산악 고전을 찾아서 (출처 : 한국산악회 회보 "산" 2008년 1월호)
설악행각(雪嶽行脚)(1)
- 행각 전야(前夜)의 등하(燈下)에서
이 은 상(李殷相)(주1)
편집문헌위원회에서는 1954년 노산문선(鷺山文選, 1954. 9.30 영창서관 발행)의 <설악행각> 원문을 입수하여 2008년 1월호부터 회보에 연재한다. 원문이 한자로 수록되어 있고, 모두 138쪽의 분량으로 원고지 400매에 해당하는 글로 이를 한글로 고치고 어려운 낱말은 한자를 병기하거나 주석을 붙여 놓았다.
<설악행각>은 노산 이은상 전 회장이 1933년 9월 30일에 15명의 일행을 동반하고 서울을 출발하여 10여일간 설악산 일대를 탐방한 기행문으로 국한문홍용 출판본과 한글전용 출판본 2가지가 있다.
동아일보에 1933.10.15부터 12.20까지 37회에 걸쳐 연재하고, 1942년에 발행한 『노산문선』에 수록한 것이 국한문혼용 출판본이다.
한국산악회 창립 30주년 기념으로 1975년 11월 3일 ‘한국산악문고’ 3권(문고판)을 발간하였는데, 제1권인 『노산 산행기』(이은상 지음)에 <한라산 등척기>, <해외 산악계 순방기>와 함께 <설악행각>을 수록한 것이 한글로 풀어 쓴 출판본이다. (한글전용 출판본은 노산산행기의 <설악행각>중 아래 본문에 해당하는 부분(행각 전야의 등하에서)을 http://blog.daum.net/himvit/13545810 에 옮겨 놓았습니다.)
<설악행각>의 일정은, 9월 30일 서울~춘천 소양강~인제읍, 10월 1일 우천으로 인제읍에 머뭄, 2일 인제~원통~남교리~칠음대~구선대~십이선녀탕계곡~연현, 3일 연현~한계고성~옥녀탕~한계사터~자양전, 4일 자양전~대승폭~대승령~백담사, 5일 백담사~영시암~수렴동~봉정암, 6일 봉정암~대청봉~가야동 계곡~오세암, 7일 오세암~마등령~금강문~비선대~와선대~신흥사, 8일 신흥사~계조굴~신흥사, 9일 신흥사~서울의 여정이었다. - 편집자 주
▲ 설악행각 개념도 : 이은상 전 회장과 그 일행은 남교리~한계고성~장수대~백담사~영시암~대청~봉정암~오세암~마등령~신흥사~계조암을 탐방했다. (출처 : 월간 마운틴 2007년 10월호)
깊은 밤 - 홀로 바랑(鉢襄)을 앞에 놓고, 이것저것 여구(旅具)를 만지다 말고, 창 밖에 듣는 비소리에 평일과 달리 구슬픈 생각조차 일어나는 9월 29일의 밤.
행장(行裝)을 어질어 놓은 채로 돌아앉아, 안두(案頭)를 향해 등(燈)과 마주 아무 말이 없는 동안, 내 머리에 문득 떠오르는 것은 <홍조(鴻爪)>의 두자.
기러기 멀리 돌아가면서 발톱으로 자국을 눈 위에 내어, 제 지나간 곳을 기표(記票)해 두어도, 후일에 다시 와 보면, 그 눈은 다 녹고, 발자국은 스러져, 어딘지 알 길이 없는 것이라, 고인(古人)이 일찍 사람의 유역(遊歷) 무적(無跡)을 일러 <홍조>라 하였습니다.
이제 저 ‘설악’ 명산(名山)을 찾아가는 이 사람도 우매(愚妹)할사 한 개의 홍조여인(鴻爪旅人)이 아니오리까. 그러면 누구 있어 묻기를 “흔불가지(痕不可知)의 홍조행(鴻爪行)을 무슨 일로 짓느냐”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할 때, 머물러 있어 또한 그 자취 없을진대, 가고 옴을 그 누구라 묻고 대답할 게 있으오리까.
다만 나와 함께 저 강산(江山)이 여기에 있고, 강산과 더불어 이 내가 지금에 있어, 또한 주주야야(晝晝夜夜)에 내가 저를 연연(戀戀)하고, 시시절절(時時節節)에 저가 나를 초초(招招)하므로, 이제 내가 가는 곳이 강산이요, 강산으로 가는 자가 나인 것으로만 생각하면, 다시 더 가부(可否)를 장론(長論)할 게 없을 겝니다.
그러나 누구 있어 다시 묻기를 “어리석다. 강산 곧 자연이 따로 어디 있느뇨. 내 눕고 앉는 곳이 다 강산이거늘, 구트나(주2) 무슨 일로 설악만을 찾아가느뇨” 할 것입니다.
그러면 나도 여기서 설악 찾는 까닭을 구트나 말해야만 하겠습니까.
예. 설악, 저 관동(關東)의 설악을 찾아가 그 삭발(削拔)한 고봉(高峰)을 기어오르고, 그 명철(明徹)한 징담(澄潭)을 굽어도 보며, 수홍(垂虹)의 장폭(帳幅) 아래 두 귀를 씻고, 유리(琉璃)의 반석(磐石) 위에 노래를 읊어, 유폐(幽閉) 당한 내 영혼(靈魂)을 해방(解放)하고, 향화(香火) 끊인 내 제단(祭壇)에 분수(焚修)(주3)하며, 고갈(枯渴)한 내 생명천(生命泉)을 다시 파서, 재생(再生)의 은전(恩典)을 입자함도 한 까닭이옵고,
진환(塵寰)의 번뇌(煩惱)를 석실(石室)의 저녁 구름에 날려보내고, 중생(衆生)의 죄장(罪障)을 임궁(琳宮)의 새벽 종성(鐘聲)에 열고 벗어나, <구흔불거(垢痕拂祛)(주4)> 시원한 심경(心境)을 잠깐이나마 얻어보자함도 한 까닭이옵고, 성사(聖師) 명승(名僧)의 고행(苦行) 정수(靜修)를 듣고 생각고, 매월(梅月)(주5) 삼연(三淵)(주6)의 눈물 흔적(痕迹)을 보고 만지며, 거기다 내 마음의 외로운 영자(影子)를 우러 비치고, 깊은 정한(情恨)을 마주 붙여서, 그분들을 찬앙(讚仰)하는 그 찬앙으로 내 영혼의 찬앙을 삼을 수 있기까지에 내가 이르러야겠고, 그분들을 위석(慰釋)하는 그 위석으로 내 영혼의 위석을 삼자함도 한 까닭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도, 설악은 우리 옛 선민(先民)의 오랜 존숭(尊崇)을 입어온 신산(神山) 성역(聖域)이라, 천재(千載) 후대(後代)에 끼쳐진 일(一) 향도(香徒) ― (略)
더욱이 저렇듯한 영구(靈區) 명승(名勝)으로서 사람마다의 근참(覲參)은 그만두고라도, 조그마한 유기(遊記) 일편(一篇)조차 우리에게 없음을 깨달을 때, ‘우리네의 산악 순례에 대한 열성(熱誠)이 이렇게도 엷구나, 우리네의 산악 순례를 위한 여유(餘裕)가 이렇게도 없구나’하는 장탄(長嘆)과 아울러 얼른 이 ‘기회(機會)’에 대답(對答)하고 나선 것도 한 까닭입니다.
그러나 필경(畢竟)은 두려운 일입니다. 저 지극(至極)이 참되고 어질고 아람답고 빛나고 향기롭고 거룩함이 한데 모이고 쌓인 ‘황홀(恍惚)의 왕국(王國)’ ‘비민(悲愍)의 전당(殿堂)’ ‘약동(躍動)의 세계(世界)’를 남에게 보임에는, 졸자(拙者)가 너무나 치열(稚劣) 일소(一小) 학도(學徒)가 아니오리까.
그러므로 설악 행각의 길을 떠나려는 내 마음에 이 일점(一點)이 큰 ‘걸림’이 됩니다마는, 의외(意外)의 기회(機會)가 내게 온 것을 고인(古人)의 말대로 ‘선연(仙緣)’이라 생각하매, 고작 느꺼움으로 가슴이 충색(充塞)해짐도 사실입니다.
가서 울고 웃는 것도 미리 기약(期約)할 바 아니요, 가서 편하고 괴로울 것도 지레 짐작(斟酌)할 것 없으며, 그 성적(聖蹟), 그 경물(景物)을 잘 전(傳)하고 못 전함도 앞서 의론할 것이야 무엇이리까.
이 밤도 어느덧 자시(子時)를 넘었습니다.
새벽이면 길을 떠나야 할 지금 이 행각(行脚) 전야의 등하(燈下)에 끊임없이 들리는 밤비소리는 어수선히 널린 행구(行具)와 함께 이 고고(孤苦)한 여인(旅人)에게 짧은 잠조차 허락하지를 아니합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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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03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나 1982년 별세.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거쳐 일본 와세다 대학 사학부에서 수학하고, 일본 동양문고에서 국문학을 연구.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 교수와 동아일보 기자, 조선일보 편집국 고문 겸 출판국 주간을 역임했다. 민족문화협회 회장과 한국시조작가협회 회장,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한글학회 이사, 한국산악회 회장(제4대(1967~1969), 제7~11대(1973~1982))을 역임했다. 저서로 <조국강산> 등이 있다.
2) ‘구태여’의 옛말
3) 분향하여 도를 닦음
4)때 묻은 흔적을 훌훌 떨어 버리다.
5) 매월 김시습
6) 삼연 김창흡 : 설악산 영시암(永矢庵)의 창시자
▲ <설악행각> 동아일보 1933.10.15 연재 1회 수록분
▲ 한국산악회 회보 <산> 2008년 1월호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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