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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림청 100명산 산행기

18. 내연산內延山): 710m 경상북도 영덕군, 포항시

□ 포항 내연산(內延山): 매봉, 향로봉, 삼지봉

경북수목원→샘재→매봉→향로봉→내연산(삼지봉)→거무나리골→연산폭포→보경사

◇ 산행지 : 경북 포항시 북구 죽장면, 송라면. 경북 영덕군 남정면 일원

◇ 산행일자 : 2012. 7. 22 (일) 날씨 : 약한 안개비 (습한 날씨 였지만 시원한 바람이 있었음)

◇ 산악회및 산행 친구: 대전 청솔 산악회 (홀로 산행 )

◇ 산행거리 : 약 19.4 Km(이정목에 표시된 거리)

◇ 산행시간 : 5시간 40분 산행 (점심 20분 포함) < 최후미 7시간 25분 소요 >

◇ 시간 대별 요약

- 05:30 반석마을 7단지 집 출발

- 05:45 반석역 지하철 탑승

- 05:57 노은 열매마을 6단지 앞 우체국 출발

- 07:05 대전IC

- 10:20 경북 수목원 도착 산행시작

- 10:47 샘재

- 11:01 매봉

- 11:46 꽃밭등

- 12:41 향로봉 (점심 20분)

- 13:01 향로봉 출발

- 14:54 내연산 삼지봉

- 14:44 은폭포

- 15:08 관음폭포

- 15:12 연산폭포

- 15:34 상생폭포

- 15:53 보경사

- 16:05 주차장

- 17:45 후미도착

- 17:45 보경사 출발

- 21:10 중구청역

 

※ 특기사항

① A,B,C 코스 구분 산행으로 C코스 산행자들이 후미 기다리며 짜증 부림

② 내연산 두 번째 산행

③ 육산으로 조망 없어 향로봉 보다 문수봉, 내연산 산행 코스가 더 좋을 듯

 

※ 산행 전 사전 조사

<내연산의 유래>문헌에 의하면 내연산은 원래 종남산(終南山)이라 하였다. <청하현읍지>(1832) 등에는 신라 진평왕이 이 곳으로 견훤의 난리를 피한 이후 내연산(內延山)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진평왕과 견훤은 동시대 인물이 아니니 잘못된 기록이다. 어쨌든 현재 보경사 입구 오른쪽에 ‘종남산대련암(終南山大蓮庵)’이란 이름을 쓰는 절이 하나 있어 과거 종남산으로 불렸던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내영산(內迎山)’이라 적혀 있다. 이 책은 내연산에 대해 “크고 작은 세 개의 바위가 솥발처럼 벌려 있는데, 사람들이 삼동석이라 한다. 손가락으로 건드리면 조금 움직이지만 양손으로 밀면 꿈쩍도 않는다.”고 하였다. 이때에는 삼동석이 내연산의 명물이었던 것 같다. 내연산 폭포를 명승지로 전국에 알린 것은 조선시대 명사들의 글과 그림이었다. 조선 중엽의 성리학자인 우담(愚潭) 정시한(1625~1707)이 전국의 산천을 유람하여 보고 느낀 것을 기록한 일기인 『산중일기』에 내연산 탐승 기록이 나오는데, 이 글에서 그는 용추(龍湫), 즉 연산폭포, 관음폭포, 무풍폭포, 잠룡폭포 일대의 모습을 그리면서 “금강산에도 없는 것”이라며 극찬하였다. 글보다 구체적인 그림으로써 내연산 폭포의 진수를 세상에 전한 사람은 진경산수화의 거장 겸재(謙齋) 정선(鄭敾)이다. 정선은 58세 때인 1733년 이른 봄부터 1735년 5월까지 2년 남짓 청하현감을 지냈다. 재임 기간 동안 그는 <내연삼용추도>, <내연산폭포도>, <고사의송관란도> 등 내연산 폭포를 소재로 몇 점의 그림을 그렸다. 전국의 명승을 찾아다니며 화폭에 담았던 정선이 내연산 폭포를 직접 답사하고, 이를 소재로 몇 점의 그림을 그려 남김으로써 내연산 폭포는 비로소 전국적 명승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성해응(1760~1839)이 금강산, 묘향산, 지리산, 칠보산, 백두산, 인왕산 등 전국 96개의 명승지에 대하여 소개한 책인 『동국명산기』에서 “그(보경사) 위 10리에 용추가 있어 돌등성이를 예닐곱 번 굽어들어 폭포에 가 닿는데, 장쾌하고 아리땁되 어둑하고 검푸르죽죽하여 차마 쳐다볼 수가 없다. 그 남쪽 학소대는 하늘을 찌를 듯 바위가 사면으로 깎였는데….”라고 소개한 것도 내연산 폭포를 외부로 알리는 데 공헌한 것으로 보인다. 1861년에 만든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내연산에 삼동석(三動石)과 함께 삼용추(三龍湫)를 표시해 두었다. 이 때에는 이미 삼용추가 내연산의 대표적 승경으로 자리했음을 알 수 있다. 연산폭포, 관음폭포 주변 바위면에는 이곳을 다녀간 3백여 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그 이름을 통해 내연산의 위상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이 중 각종 문헌을 통해 검색이 가능한 사람은 60명 정도이다. 이들 중에는 청하현감(21명), 흥해군수(6명), 경상도관찰사(11명)를 비롯한 지방 수령이 약 70%에 이른다. 우담이나 겸재 같은 당대의 명사(名士)뿐만 아니라, 이존수(좌의정), 오명항(우의정), 조인영(영의정), 김노경(5조의 판서, 추사 김정희의 부친), 이은(좌․우의정) 등 조정의 거물급 정치인들도 눈에 띈다. 이곳을 다녀가면서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은 대부분 18~19세기 인물인데, 이를 통해 내연산은 조선말에 이미 동해안 최고의 명승지로 발돋움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폭포나 폭포 주변의 경승지 명칭도 시대에 따라 변화를 보였다. 1688년에 내연산을 찾은 정시한의 『산중일기』에 보면 현재의 상생폭포를 ‘사자쌍폭(獅子雙瀑)’, 비하대(飛下臺)를 ‘중허대(中虛臺)’, 학소대(鶴巢臺)를 ‘계조대(繼祖臺)’라 기록하고 있다. 이 중 중허대는 1753년에 연일현감을 지낸 성리학자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이 ‘비하대(飛下臺)’로 명명하여 오늘에 이르는데, 비하대 정상부에 큼지막하게 새긴 “大山李先生命名飛下臺”란 글귀에서 확인된다. 이 글은 대산 선생의 손자인 청하현감 이병원(李秉遠)이 새겼다. 1922~37년에 간행된 이병연의 『조선환여승람』에는 지금의 연산폭포를 ‘내연폭포(內延瀑布)’라 하고, 관음폭포를 ‘중폭(中瀑)’이라 하였다. 관음폭포를 중폭이라 한 것은 맨 아래 상생폭포에서부터 바로 위의 연산폭포에 이르는 7개의 폭포 중 규모가 비교적 큰 연산폭포를 흔히 ‘상폭(上瀑)’, 상생폭포를 ‘하폭(下瀑)’으로 부른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관음폭포 암벽에 ‘慶北八景’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1933년에 대구일보가 내연산보경사를 진남교반(문경), 문경새재(문경), 주왕산(청송), 금오산(구미), 청량산(봉화), 희방폭포(영주), 빙계계곡(의성) 등과 함께 ‘경북팔경’으로 선정한 데 따른 것이다. 출처:<경북매일신문>

 

<내연산12폭포의 유래>1. 상생폭포(상생폭): 지금은 ‘상생폭((相生瀑)’이란 명칭이 통용되고 있지만 ‘쌍둥이 폭포’란 의미의 ‘쌍폭(雙瀑)’이란 명칭이 오래 전부터 쓰였다. 1688년 5월에 내연산을 찾은 정시한(鄭時翰, 1625~1688)의 산중일기(山中日記)에 보면 현재의 상생폭포를 ‘사자쌍폭(獅子雙瀑)’이라 적고 있는데, 그 당시에도 ‘쌍폭’이라는 명칭이 널리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뜻으로만 보면 상생폭포란 명칭은 두 개의 물줄기가 내리쏟는다는 뜻에서 ‘상생(相生, 두 개가 서로 조화를 이룸)’이란 좋은 의미를 지니고 있으나, ‘쌍둥이 폭포’란 뜻에서 ‘쌍생(雙生)’이라 지어진 후 ‘ㅆ’ 발음을 잘 못하는 지역 방언의 영향으로 ‘상생’으로 불려졌고,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相生’으로 적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내연산 계곡으로 오르다가 처음 만나는 폭포여서 흔히 ‘일폭포(一瀑布)’라 부르기도 한다. <주변의 경승지> *기화대와 기화담: 상생폭포 서남쪽의 층암절벽을 기화대(妓花臺)라 한다. 옛날 어떤 풍류객이 기생을 데리고 석벽 위에 올라가 만취 상태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다가 그 아래 상생폭포에 떨어져 죽었는데, 그에 연유하여 바위를 ‘기화대’, 그 아래 못을 ‘기화담(妓花潭)’이라 했다 한다. 2. 보현폭포(보현폭) : 폭포 오른쪽 언덕 위에 있는 보현암(普賢庵)에 근거한 명칭이다. 3. 삼보폭포(삼보폭) :원래 물길이 세 갈래여서 삼포폭포(三洑瀑布)라 했다. 현재의 등산로 상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4. 잠룡폭포(잠룡폭) :잠룡(潛龍)이란 ‘아직 승천하지 못하고 물 속에 숨어 있는 용’이란 뜻이다. 폭포 아래는 거대한 암봉인 선일대(仙逸臺)를 낀 협곡인데, 여기에 용이 숨어 살다가 선일대를 휘감으면서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다. 선일대에 ‘잠룡의 승천’ 전설을 뒷받침하는 흔적이 남아 있다. <주변의 경승지> *선일대 : 신선이 학을 타고 비하대로 내려온 뒤 이 곳에 올랐다가 선경에 취하여 내려오지 않았다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정상부에 절터가 있는데, 아직도 고기와 파편과 토기편이 흩어져 있다. 5. 무풍폭포(무풍폭, 무풍계): ‘바람을 맞지 않는[無風] 폭포’란 뜻이다. 폭포 아래 30여 미터에 걸쳐 암반 위를 뚫고 형성된 아주 좁은 바위틈으로 물이 흐르다보니 이런 명칭을 붙인 것 같다. 주변의 관음폭포나 잠룡폭포에 비해 폭포의 규모가 작아 ‘폭포’라는 명칭을 붙이지 않고 ‘계(溪)’를 붙인 ‘무풍계(無風溪)’라는 이름을 쓰기도 한다. 6. 관음폭포(관음폭): 비하대(飛下臺) 아래 형성된 폭포다. 불교 용어인 관음(觀音, 관세음보살의 약칭)에서 따 온 명칭이다. 주변의 경치가 너무나 빼어나 관세음보살이 금방이라도 나타나 중생들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 줄 것만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다. 정시한의 산중일기에서는 ‘중폭(中瀑)’이라 하였다. 중폭이라 한 것은 상생폭포에서 연산폭포에 이르기까지 큰 세 개의 폭포(상생, 관음, 연산)가 있다고 보고, 상생폭포를 하폭, 관음폭포를 중폭, 연산폭포를 상폭으로 불렀음을 짐작케 한다. <주변의 경승지> *감로담(甘露潭) : 관음폭포 아래 형성된 깊은 못. 한 방울만 마셔도 온갖 괴로움이 사라지며, 산 사람은 장수하고 죽은 자는 부활한다는, 천상에서 이슬이 내려 고여 있다는 도리천의 감로수에 비겨 그렇게 불렀다. *관음굴(觀音窟) : 관음폭포 옆에 패인 천연 동굴. 3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 굴 속에서 종종 수도승을 볼 수 있었다 한다. *비하대(飛下臺) : 관음폭포 서남쪽에 높이 솟은 암봉으로 정상부에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이 명명하였다고 전하는 각자가 있다. 신선이 학을 타고 내려온 곳이라 전한다. 관음폭포 쪽으로 수직암벽을 이루고 있어 산악인들의 암벽등반 훈련장으로 쓰인다. *학소대(鶴巢臺) : 관음폭포 북쪽에 높이 솟은 암벽으로, 시선을 태우고 내려온 학이 둥지를 틀고 머문 곳이라 한다. 위쪽에 계조암(繼祖菴) 터가 있어 고기와편과 토기편이 발견된다. *경북팔경(慶北八景) : 관음폭포 일대는 1933년 대구일보에 의해 진남교반(문경), 문경새재(문경), 주왕산(청송), 금오산(구미), 청량산(봉화), 희방폭포(영주), 빙계계곡(의성) 등과 함께 경북팔경에 선정된 곳이기도 하다. 관음폭포 오른쪽 정상부 암벽에 ‘慶北八景’이란 각자가 있다. 7. 연산폭포(연산폭):내연산 12폭포 중 가장 규모가 큰 폭포다. ‘내연산(內延山)’에서 ‘내’를 뺀 명칭이다. 정시한의 산중일기에서는 ‘내연폭포(內延瀑布)’라 하였다. ‘삼폭포(三瀑布’ 또는 ‘상폭포(上瀑布)’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삼폭포나 상폭포는 상생폭포에서 연산폭포에 이르기까지 큰 세 개의 폭포(상생, 관음, 연산)가 있다고 보고, 상생폭포를 1폭포 또는 하폭, 관음폭포를 2폭포 또는 중폭, 연산폭포를 3폭포 또는 상폭으로 부른 데 따른 결과로 보인다. <주변의 경승지> *삼용추(三龍湫) : 용추는 ‘폭포수가 떨어지는 바로 밑에 있는 깊은 웅덩이’를 일컫는 말이다. ‘삼용추’는 ‘세 개의 용추’라는 뜻으로 잠룡폭포, 무풍폭포, 관음폭포, 연산폭포 일대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으며(규모가 비교적 작은 무풍폭포는 무시됨), 겸재 정선이 청하현감 재임 시절에 그린 <내연삼용추도>, <고사의송관란도> 등에 처음 쓰였다. 8. 은폭포(은폭): 원래는 여성의 음부(陰部)를 닮았다 하여 음폭(陰瀑)이라 하다가 상스럽다 하여 은폭(隱瀑)으로 고쳐 불렀다(이삼우, 같은 글)고도 하고, 용이 숨어 산다 하여 흔히 ‘숨은용치’라고도 하는데 이에 근거하여 은폭(隱瀑)으로 불렀다고도 한다. <주변의 경승지> *한산대와 습득대 : 은폭 위 왼쪽과 오른쪽에는 각각 청하에서 유배살이를 했던 조선 인조 때 부제학을 지낸 유숙(柳潚)이 작호한 한산대(寒山臺)와 습득대(拾得臺)가 있다.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의 재생이라며 숭모하던 중국 당나라 때의 도인 한산(寒山)과 습득(拾得)의 형상을 한 큰 바위다. 9. 복호1폭(伏虎一瀑): <유래> 호랑이가 곧잘 출몰하여 바위 위에 엎드려서 쉬고 있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연달아 두 개가 있는데, 아래쪽(하류)을 복호1폭이라 한다. 10. 복호2폭(伏虎二瀑) :<유래> 호랑이가 곧잘 출몰하여 바위 위에 엎드려서 쉬고 있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연달아 두 개가 있는데, 위쪽(상류)을 복호2폭이라 한다. 11. 실폭포(실폭) :<유래> 시명리로 가기 전 잘피골 골짜기로 잠깐 접어들면 30여 마치 벼랑에서 실타래를 풀어 내리는 듯한 가느다란 폭포가 나타나는데, 실같이 가늘다 하여 그렇게 부른다. 12. 시명폭포(시명폭) :<유래> 지금은 없어진 화전민촌인 시명리(時明里) 마을 어귀에 자리한 폭포로 12폭포 중 맨 위쪽에 위치해 있다.

 

※ 산행 지도

 

 

※ 산행 후기

당초 계획은 토요일에 홍천의 공작산을 가려고 했었다. 수타계곡은 갔지만 공작산 정상을 다녀오지 않았었기에 정상 인증을 할 겸 가려고 산악회에 예약을 해 놓았는데 금요일 집에 와서 등산 가방을 챙기는데 “토요일은 자기와 보내고 일요일에 산에 가라”며 집사람이 태클을 건다. 생각해 보니 나중에 가면 될 것 같아서 산행을 포기했는데 토요일 집에 있어보니 아무것도 안하면서 산을 못 가게 한 꼴이었다. “이럴 거면 왜 못 가게 했냐?”고 물으니 “없어지지도 않는 산 다음에 가면되지”라는 식이다. 어의가 없기도 하고 화가 치밀어서 집에 있어봐야 싸움만 할 것 같아 일요일 산행정보를 보니 포항의 내연산이 눈에 뛴다.

내연산은 2005년 7월 20일에 친구와 둘이 내 차를 가지고 보경사로 향했었다. 당시엔 보경사에서 문수산으로 올라 내연산과 향로봉을 다녀 온 후 보경사로 원점회귀 산행을 하고 포항의 밤바다에서 술을 마시고 다음날 돌아오면서 대구 가산을 다녀왔던 기억이 있는데 당시는 사진의 소중함은 생각지 않아서 인증 사진도 없고 산행시간도 기록되어 있지 않아 내친김에 이번에 다시 가기로 했다.

누차 언급 했지만 반석동 집에서 산행을 가려면 다소 많이 불편 한 것이 차를 너무 오래 탄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노은동 열매마을 6단지에서 차를 탔는데 대전 시내를 빙빙 돌아 대전IC를 벗어나니 대전IC에서 차를 탄 사람들에 비하면 1시간 넘게 버스에 있었다는 결론이고 산행 목적지에 도착하니 버스를 4시간 이상 탄 셈이다.

산행초입은 경북수목원인데 수목원측에서 이정목을 제거 한 건지 아님 설치해 놓지 않았던지 이정목이 없어 초입 찾기가 어려웠고 더욱이 옅은 안개까지 있어 샘재를 찾기가 어려워 한 동안 우왕좌왕 고생을 했다. 샘재 부터는 이정목과 꼬리표가 많아 진행 하는데 어려움이 없었으며 산행기점 해발고도도 높아 매봉은 쉽게 올랐다. 매봉에 오르니 다른 일행들이 많았는데 표시 석 주변을 가로 막다 시피 하고 있어서 다른 사람이 나오지 않게 인증을 하기 어려웠다. 개인적인 생각인데 표시 석에서 조금 떨어져 앉아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산행예절을 가추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향로봉을 오르기까지 습도가 높고 여러 차례 오르내림이 있었지만 다행히 바람이 불어줘서 비교적 쉽게 향로봉에 올라 점심을 하고 서둘러 삼지봉으로 향했다. 실질적인 내연산 정상인 삼지봉에서 인증을 하고 문수봉으로 향하려다 문수봉은 전에 다녀왔었고 계곡이 내연산의 포인트라서 거무나리골로 그냥 하산을 했다. 산 전체가 육산이라 조망도 없고 특색이 없었지만 하산 길 은폭까지는 특히 특징이 없어 지루함이 더했다.

은폭갈림길에서 연산폭포로 향하려다 산행 속도가 전체적으로 늦는 느낌이라서 은폭을 구경하고 연산폭포등 폭포를 두루 들러보고 보경사도 구경하고 주차장으로 가니 A코스 산행을 한 사람들은 나 이외에는 산행대장을 비롯하여 아무도 하산하지 않았다. 서둘러 알 탕할 장소를 찾아보니 주차장 뒤편으로 적당한 곳이 있어 알 탕을 하고 막걸리를 제법 많이 마셨는데도 후미가 올 기미가 없다. 급기야 B코스 산행자 중 어떤 사람이 “산악회에서 4시까지 내려오라고 했으면 내려와야지 너무 기다리게 한다”고 투덜대니 이번엔 A코스 산행자가 “그들도 최선을 다해 내려오고 있다”며 시비를 걸어 한동안 시끄러웠다. 내가 생각하기엔 산행 습관도 버릇이다. 늦는 사람은 항상 늦는다. 그러면서 볼 것 다보고 늦음에 대해 미안함이 없다. 최선을 다하고 미안함을 가지고 산행에 임한다면 피차 이해심이 생길 텐데 내가 봐도 짧은 거리의 산행을 1시간 40분 기다린 것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다. 자신에 맞는 산행을 하는 것이 좋은데 그렇지 않으니 그것이 늘 문제다.

 

※ 산행 사진

▲ 칠곡 휴게소

▲ 산행 기점 경상북도 수목원: 경상북도 수목원은 ‘경상북도 산림자원의 보존과 연구’인 수목원의 첫 번째 설립 목적과 더불어 야생화와 나무들이 우거진 숲 속에서 자연과 하나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즐기고 쉬었다 갈 수 있는 생태체험장, 자연 속 사랑방의 역할을 톡톡히 담당한다. 3,222㏊의 면적은 국내최대규모로, 수목원이 개장한 때인 1996년의 55㏊ 규모와 비교하면 지금은 무려 약 60배나 커진 셈이다. 내연산자락 고랭지채소밭을 시작으로 단장된 수목원은 침엽수원, 활엽수원, 야생초원 등 총 22개의 전문수목원으로 나뉘어져 학술연구 및 관찰, 휴식공간으로 이용된다. 평균해발 630m로 고산 지대에 위치한 수목원답게 고산식물원이 꾸며져 있어 다른 수목원에서 찾아보기 힘든 고산식물 70여 종을 관찰할 수 있으며, 울릉도의 식생을 살펴 볼 수 있는 울릉도식물원이 있어 잠시 울릉도로 여행을 떠날 수 있게 해 준다. 높이 12m, 무게 20t에 달하는 거대한 장승이 인사하는 입구를 지나 연못 주변에서 생태 관찰을 포함한 피크닉을 즐겨도 괜찮지만, 나무계단 하나하나 밟고 오르는 전망대에서 시야가 맑은 날이면 가까이로는 포항 호미곶, 멀리로는 경주 토함산까지 바라 볼 수 있다고 한다. 경상북도 수목원 또는 내연산 수목원이라고도 불린다.

 

 

▲ 경상북도 수목원의 특징은 독특한 생태를 가진 울릉도 식생을 재현한 울릉도 식물원이 있다

 

▲ 샘재에 있는 장승(본격적인 산행 시작점)

 

▲ 샘재에 있는 이정목

▲ 매봉

▲ 매봉엔 다른 팀이 있었는데 표석 뒤에 자리하고 비켜주지 않아 할 수 없이 삐딱하게 사진을 찍었다

 

▲ 꽃밭등

 

▲ 산행지가 육산인데다 산행내내 안개로 인해 이런 상태의 진행이었다(어느 분이 내 뒷모습을 담은 모습이 있어서...)

 

▲ 야간 산행시 유용한 시설 (솔라 표시등)

 

▲ 향로봉: 지금은 향로봉이 내연산 정상을 대신 하고 있다. 옛 문헌을 보아도 별개의 봉우리인데 얼마 전 부터 내연산 정상이 되었다.

▲ 향로봉에 있는 이정목

▲ 하옥리(향로교) 갈림길

▲ 시명리 갈림길

▲ 안개 때문에 산행 내내 이런 모습이었다

<내연산(內延山)> : 높이는 710m이다. 원래 종남산(終南山)이라 불리다가, 신라 진성여왕(眞聖女王)이 이 산에서 견훤(甄萱)의 난을 피한 뒤에 내연산이라 개칭하였다. 1983년 10월 1일 군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이 산의 남쪽 기슭에, 포항에서 북쪽으로 약 30km 되는 곳에 고찰 보경사(寶鏡寺)와 그 부속암자인 서운암(瑞雲庵)·문수암(文殊庵) 등이 있다.보경사 부근 일대는 경북3경(慶北三景)의 하나로 꼽히는 경승지를 이루어 좋은 관광지가 되고 있는데, 그 주된 경관은 동해로 흐르는 갑천계곡에 집중되어 있다. 갑천계곡에는 상생폭(相生瀑)·관음폭(觀音瀑)·연산폭(燕山瀑) 등 높이 7∼30m의 12개의 폭포, 신선대(神仙臺)·학소대(鶴巢臺) 등 높이 50∼100m의 암벽, 깊이 수십 척의 용담(龍潭) 등 심연(深淵) 및 암굴(岩窟)·기암괴석 등이 장관을 이루는 경승지로,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내연산 삼지봉 안내도 유래를 인용하면, "이 봉우리는 내연산(內延山)에 속하며 문수봉(文殊峯) 향로봉(香爐峯) 북동대산(北東大山) 등 3곳으로 갈라지는 위치에 있는 봉우리이므로 삼지봉(三枝峯)이라 한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옛 문헌을 보아도 내연산 정상은 삼지봉이고 향로봉과 문수봉은 별개인데 지금은 향로봉을 내연산 정상으로 표시 하고 있다.

▲ 동대산 갈림길

▲ 거무나리 코스로 하산

 

 

▲ 은폭포

 

 

 

 

▲ 관음폭포

 

▲ 연산폭포

 

 

 

 

 

 

 

 

 

 

▲ 삼보폭포

▲ 상생폭포

 

 

▲ 보경사 대웅전

보경사 [寶鏡寺]:경상북도 포항시 송라면 중산리 내연산 동쪽 기슭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의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이다. 사명대사의 〈금당기문 金堂記文〉에 의하면 서역승 마등(摩謄)과 법란(法蘭)이 중국에 가져온 팔면경(八面鏡)을 제자인 일조선사(日照禪師)가 황해를 건너 해동 땅에 가져와 종남산 아래에 있는 연못 속에 묻고 메운 다음 절을 지어 보경사라고 했다 한다. 745년(경덕왕 4)에는 철민(哲敏)이 중창하고, 1214년에는 원진국사(圓眞國師)가 승방 4동과 정문 등을 중수했다. 1677년에는 도인(道仁)이 중창을 시작하여 삼존불상과 영산전의 후불탱화를 제작했다. 1725년(영조 1)에는 성희(性熙)와 관신(寬信)이 명부전을 이건했다. 현존 당우로는 대웅전·대적광전·영산전·팔상전·명부전·산신각·천왕문·일주문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원진국사비(圓眞國師碑:보물 제252호)와 보경사부도(보물 제430호)가 있으며, 이밖에 11기의 부도가 있다. 출처: 다음 백과사전

 

 

▲ 주차장 가는 길에 있는는 상가

▲ 보경사 주차장 산행마침

▲ 주차장 아래 알 탕 장소 (물이 비교적 많고 깨끗하여 씻는데 매우 만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