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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산 산행기

토함산(吐含山)-불국사, 석굴암

토함산(吐含山)-불국사, 석굴암

불국사→석굴암→추려 갈림길→토함산마동 갈림길→마동

산행지 : 경상북도 경주시 하동, 진현동, 덕동, 황용동, 양북면 일원

산행일자 : 2016. 4. 2() 날씨 : 맑음 

산악회및 산행 친구 : 영인 

산행거리 : 약 7.4km(이정표상 거리)-석굴암 왕복 포함 

산행시간 : 2시간 55분 소요 <불국사 석굴암 관람 포함>

시간대별 요약

- 15:10 불국사 입구

- 15:30 토함산 탐방 지원 센터 산행 시작

- 16:05 석굴암 입구 매표소(석굴암 왕복 20분 소요)

- 16:28 석굴암 입구 매표소 출발

- 16:46 추령 갈림길 

- 16:50 토함산

- 17:02 마동 갈림길 삼거리

 

특기사항

① 토함산 정상 처음 밟음

② 1박 2일 청솔회 모임 전 산행

③ 감포 여행

 

산행 전 사전 조사

<토함산(吐含山)>경상북도 경주시 하동, 진현동, 덕동, 황용동, 양북면에 걸쳐있는 산이다. 신라시대에는 5악 가운데 동악(東嶽)이라 하여 호국의 진산으로 신성시하였으며 중사(中祀)를 거행하기도 한 산이다. 산의 서쪽에는 불국사선상지(佛國寺扇狀地)가 전개되어 있다. 북서쪽에는 추령(楸嶺), 남쪽으로는 동산령(東山嶺)이 있고, 경주에서 감포(甘浦)에 이르는 도로는 추령을 통과하며, 특히 산세가 웅장하고 경치가 수려하다. 태백산맥의 한 줄기인 해안산맥(海岸山脈) 중의 한 산인데, 해안산맥은 중앙산맥(中央山脈)의 동쪽에 있어 해안을 따라 연속되는 구릉성 산맥으로 울산만에 이른다. 해안산맥 중에서 토함산을 최고점으로 하며, 경상북도 동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달리는 산맥을 토함산맥이라고도 부른다. 삼국사기삼국유사에서 탈해는 한편 토해라고도 하여 토해와 토함은 유사음으로 토함산이 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그 하나이다. 또 다른 견해는 토함산의 경관이 안개와 구름을 삼키고 동해의 습기와 바람이 워낙 변화가 심해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사납게 굴다가도 안개와 바람이 걷히면 아름다운 소나무와 산 봉우리가 한 폭의 동양화 그림처럼 나타나게 되어 동해 바다의 잔잔한 수평선 위로 해가 가득 떠 오르고 붉은 태양이 토함산을 넘어 갈 때의 전경이 마치 토해낸다 할 정도로 그 변화가 심해 지명으로 삼았다는 설이다. 출처:위키백과

 

<신라오악[ 新羅五嶽>신라시대 나라의 제사(祭祀) 대상이 되었던 다섯 산악(山嶽). 신라 사람들은 일찍부터 산악숭배사상을 가지고 산신에 대해서 제사를 지냈는데, 삼국통일 이전 경주평야를 중심으로 경주 주변의 오악을 숭배했던 듯하다. 그 뒤 반도를 통일하여 넓은 영토를 차지하게 됨에 따라 국토의 사방과 중앙에 해당하는 지역에 위치한 대표적인 산악을 지정하여 오악으로 삼았는데, 동악에는 토함산(吐含山), 서악에는 계룡산(鷄龍山), 남악에는 지리산(地理山 : 智異山), 북악에는 태백산(太伯山), 중악에는 부악(父嶽 : 八公山)이 바로 그것이다. 이처럼 오악은 통일신라의 상징적인 존재의 하나로서 동서남북 각 방면의 일정한 정치적 세력을 진압한다는 국방 내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 오악은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로 구분되어 있는 신라통일기의 국가적 제사 중 중사에 편입되어 나라의 평안과 발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신라오악 [新羅五嶽]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석 탈 해(脫解)>탈해 이사금 (脫解尼師今, 기원전 19~80, 재위: 57~80)은 신라의 제4대 국왕으로, ()은 석()이고, 휘는 탈해(脫解)이다. 서기 8년에 남해 차차웅의 사위가 되며 10년에 대보(大輔)로 등용되어 정사를 맡았고 43년부터는 손위처남 유리 이사금의 대리청정을 맡았다. 57년 유리 이사금의 유언에 따라 왕이 되었다. 토해(吐解)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 수록된 석탈해 설화에 따르면 본래는 왜의 동북쪽 1천 리에 위치한 다파나국(多婆那國)출신으로, 그 나라 왕이 여국(女國) 왕녀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임신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은 사람이 알을 낳는 일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니 알을 버릴 것을 명했고, 왕비는 비단으로 알과 보물을 싸 궤 속에 넣어 바다에 떠나보냈다. 가락국의 바닷가에 닿았으나 가야인들은 이를 괴이하게 여겨 건지지 않았고, 진한의 아진포(阿珍浦) 어구에 이르니 이 때가 박혁거세 거서간의 즉위 39, 곧 기원전 19년이라 하는데 삼국사기의 이 기록은 탈해가 왕위에 오른 57년에 그가 62세였다는 같은 책의 기록과 모순된다. 또한, 가야의 역사를 다룬 삼국유사》〈가락국기에는 용성국(龍城國) 출신인 탈해가 가야에 먼저 도래하여 김수로왕과 왕위를 놓고 다투다 패배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일부에서는 석탈해가 왜국 동북쪽에 위치한 오키 제도에서 왔다고 하며 일본출신이라고 하나, 삼국사기가 쓰여 졌을 당시에 오키 제도는 일본에 속했지만 석탈해가 태어났을 때에는 일본에 속해 있지 않았다. 석탈해는 기원전에 출생하였고, 왜국의 전설상 첫 국가라고 할 수 있는 야마타이국은 2세기(100~ 200)에 형성되었다. 탈해의 출신지인 다파나국이 어디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일부에서는 탈해가 인도 타밀인으로서 촐라 왕국 출신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하며 캄차카 반도에서 기원한 민족 출신이라는 주장도 있다. 24, 남해 차차웅이 죽자 유리가 마땅히 왕위에 올라야 했는데, 대보(大輔)인 탈해가 본래 덕망이 있었던 까닭에 왕위를 미루어 사양하였다. 57, 유리 이사금의 유언에 따라 76세에 왕이 되었다. 즉위 이듬해인 58년 봄 정월에 호공을 대보(大輔)로 삼았고 음력 2월에 몸소 시조묘에 제사지냈다.[10] 탈해 이사금은 즉위 초에 외교에 힘을 기울여 59년 왜와 수교하였으며 61년 마한의 장수 맹소(孟召)가 복암성(覆巖城)을 바치고 항복했다. 그러나 탈해 이사금 대에 신라와 백제는 계속 전시 상태였는데, 63년 음력 10월 백제의 다루왕이 낭자곡성(娘子谷城)까지 땅을 개척하고 만날 것을 제안했으나 거부했다.[13] 64년 음력 8월에는 백제가 와산성(蛙山城), 음력 10월에 구양성(狗壤城)을 공격했으나 기병 2천명을 내어 쫓았다. 65, 시림(始林)에서 김알지(金閼智)를 얻고 시림을 계림으로 개칭한 뒤 계림을 국호로 삼았다. 66, 백제는 다시 와산성을 빼앗고 수비병 2백을 주둔시켰으나 신라는 곧 다시 빼앗았다. 67년 봄 정월에 박씨의 귀척(貴戚)으로써 나라 안의 주·(州郡)을 나누어 다스리게 했는데, 이름을 주주(州主군주(郡主)라 하였다. 음력 2월에 순정(順貞)을 이벌찬으로 삼아 정치의 일을 맡겼다. 70년에 다시금 백제의 침공이 있었으나 자세한 것은 전하지 않는다. 73년에는 왜인이 목출도(木出島)를 침범해 각간(角干) 우오(羽烏)를 보내 막았으나 이기지 못하고 우오는 전사하였다. 74년에는 백제군이 변방을 노략, 탈해가 병사를 보내 격퇴했다. 75년 크게 가물어 백성이 굶주렸으므로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누어 주어서 진휼하였다. 음력 10월 백제가 와산성을 다시 공격, 함락되었으나 이듬해 음력 9월 회복하고 백제인 2백 명을 모두 죽였다. 이와 같이 탈해 이사금 치세 때, 신라와 백제가 서로 2백 명 정도의 적은 군사로 연혁(沿革)도 전하지 않는 와산(蛙山) 봉산(烽山) 등지를 거의 해마다 빼앗고 빼앗기곤 하였다는 것이 삼국사기의 기록이나, 신라는 당초 경주 한 귀퉁이의 조그만 나라이고, 백제는 온조왕(溫祚王) 당년에 벌써 마한(馬韓) 50여 나라를 차지하였으니 신라와 똑같이 해마다 2백명 정도의 군사를 내었다는 것에 의문이 있다. 또한, 두 나라가 간혹 화호(和好)한 일이 있으나 삼국사기에는 늘 백제가 먼저 신라에 향하여 화의를 빌었다고 하였는데, 백제가 신라보다 몇 갑절 되는 큰 나라로서 늘 먼저 굴복하였다는 것도 의문이다. 백제와 신라 사이에 가라(加羅) 6나라와 사벌(沙伐감문(甘文) 등 완충국(緩衝國)이 있었는데 백제가 가라 등의 나라들과는 한 번의 충돌도 기록이 없고 도리어 신라를 침범했다는 것도 의문이다. 대개 신라가 백제를 원망함이 심하였으므로 신라는 백제가 망한 뒤에 그와 관계된 사적을 많이 고치거나 혹은 위조하였다. 중국의 삼국지(三國志남사(南史북사(北史) 등에 보인 기록을 보면 신라가 처음에 백제의 결제를 받았다 하였으니 이것이 도리어 믿을 만한 기록일 것이라는 것이 현대의 주장이다. 77년 음력 8월에 아찬 길문(吉門)이 황산진(黃山津) 어구에서 가야군과 싸워 1천 기를 베었다고 하나 공격전이었는지 방어전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79년에는 장군 거도를 파견하여 현재의 울산 울주구, 부산 동래구에 해당하는 우시산국(于尸山國)과 거칠산국(居柒山國)을 병합하였다. 80년 가을 음력 8월에 죽어 성 북쪽의 양정구(壤井丘)에 장사지냈다. 사후 그를 모시는 숭신전(崇信殿)이 세워졌으며 1980년 경주시 남쪽 탈해왕릉 앞으로 옮겨졌다. 사후 9대 왕 벌휴 이사금이 즉위하였으나 연대차이가 심하여 그의 손자 여부는 불확실하다. 출처:위키백과

 

<다파나국(多婆那國)>: 또 다른 이름으로는 용성국, 정명국, 완하국, 화하국이라고도 한다. 신라 건국기에 있었던 나라로 석탈해왕의 출생국이다. 『삼국사기』신라본기에서는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의 소생이다. 그 나라는 왜국(倭國)의 동북 1,000리에 있다.”고 하고, 『삼국유사』에서는 “나는 본래 용성국(龍城國) 사람이라.”하고 주석하여 “용성국은 또한 정명국(正明國)이라 하고, 혹은 완하국(琓夏國)·화하국(花廈國)이라고도 하는데, 왜국의 동북쪽으로 1,000리가 된다.”고 하였다.그러므로 다파나국은 모두 같은 나라인 용성국 내지 정명국·완하국·화하국의 다른 이름인 듯하나 현재의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또는, 다파나국이 탐라국(耽羅國)과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에 지금의 제주도가 다파나국이라는 추측도 있다. 탈해왕은 다파나국에서 처음 금관국(金官國)으로 왔다가 용납되지 않자 신라로 갔다고 한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다파나국 [多婆那國]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토함산(吐含山)산행 지도

 

 

산행 후기

경주를 떠올리면 꼭 가 보고 싶은 산 중에 하나가 토함산이었다. 기맥도 다하지 못했고, 지금은 기맥도 안하고 있지만 호미지맥중에 포함되어 있는 산이니 지맥을 하게 되면 언젠가 가겠지만 지금은 기맥, 지맥 산행을 하고 싶은 생각이 없기에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는데 청솔회밴드 모임에서 12일로 경주에서 모임을 한다고 해서 시간을 내서 먼저 산행을 하고 저녁 모임에 참석하기로 했다. 광수는 전날인 금요일에 KTX로 출발했고, 차를 대전 역에 놓고 가서 영인이와 만나 경주로 향했는데 다시 경주에 간다면 오갈 때 차가 너무 밀려 차는 가지고 가지 말아야겠다. 불국사 입구에 도착 가볍게 늦은 중식을 하고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 싶어불국사 관람을 했다. 고교 때인지 중학교 때인지 수학여행 때 왔으니 감개무량(?) 했다고나 할까 눈도장 찍듯이 불국사를 구경하고 산행을 시작 했는데 석굴암 입구 매표소 까지 큰 어려움이 없는 산행이었다. 석굴암 역시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몰라 서둘러 눈도장을 찍고 토함산 정상으로 향했는데 산행엔 큰 어려움이 없다. 정상인증을 하고 모임 때문에 뛰다시피 마동으로 하산했는데 오히려 마동으로 내려오며 느낀 것은 탐방지원센터 코스보다 많이 가파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저녁 모임에 참석해 모임을 갖고 다음날 감포로 이동 점심 식사를 한 후 대전으로 향했고 오면서 운전 하느라 고생한 광수를 위해 저녁을 산 후 12일 일정을 마무리 했다.   

 

산행 사진

▲ 진현동 비빔밥으로 점심 식사 한 곳( 산행 동안 주차를 허용 해 주셔서 감사 했다)

▲ 화사하게 핀 벚꽃

 

▲ 불국사 입구(뒷문?)

 

불국사(佛國寺):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시 동쪽 토함산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 사찰이다. 신라시대인 경덕왕에서 혜공왕 시대에 걸쳐 대규모로 중창되었다. 신라 이후 고려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 수축되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불타버렸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이고,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불국사고금창기에 따르면 불국사는 신라 법흥왕 15528년에 왕모 영제 부인의 발원으로 지어졌고, 574년에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 부인이 중건하면서 비로자나불과 아미타불을 주조해 봉안하였다고 적고 있다. 문무왕 10670년에는 무설전을 새로 지어 이곳에서 화엄경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모습, 오늘날 불국사의 상징물로 알려진 석탑(석가탑·다보탑)이나 석교 등의 축조를 포함한 대규모 중창불사가 이루어진 것은 신라의 재상 김대성에 의해서였다. 삼국유사 권제5 효선9 대성효이세부모에는 김대성을 신라 신문왕 때, 혹은 경덕왕 때의 사람이라고 기록하였으나 오늘날에는 경덕왕 때의 사람이며 불국사의 창건도 경덕왕 10년의 일로 보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십이연기 불교의 윤회설에 따라 김대성 자신의 전생의 부모님을 위해 석굴암 석불사를, 현생의 부모를 섬긴다는 뜻에서 불국사를 창건하였으며, 공사를 마치기 전에 죽자 국가에서 나서서 완성시켰다고 한다. 출처:위키백과

다보탑(多寶塔): 경주 불국사에 있는 하대 신라 시기의 석탑이다. 국보 제20호이며, 불국사 대웅전 앞뜰에 석가탑과 상대하여 위치하고 있다. 200812월부터 1년간 원형 복원 작업을 거쳤었다. 535(법흥왕 22)에 창건하여, 751(경덕왕 10) 김대성의 발원으로 불국사가 중건될 때 함께 수축(修築)한 것으로 추정된다. 1925년 일제 강점기에 보수되기까지 유물의 대부분이 훼손됐다. 다보탑은 다보여래상주증명(多寶如來常住證明)의 탑으로 현재 상륜부(相輪部)에 보주(寶珠)가 없을 뿐 그 외는 완전한 것으로, 높이 10.4미터이다. 순백(純白)의 화강암(花崗巖)으로 방형(方形)의 기단(基壇)과 사방에 계단과 난간(欄干)을 만들었다. 초층(初層)의 중앙과 4(四隅)에 방형 석주를 세워 옥개석(屋蓋石)을 받치고 있다. 그 위는 팔각 삼층인데, 1층은 4각으로 난간을 두르고, 2층은 죽절형(竹節形) 기둥 8개에 싸인 탑신부 둘레에 8각의 난간을 두르고, 3층은 귀두 모양의 옥개석을 받치고 있으며, 상륜부에도 각 층마다 변화를 주고 있다. 이 탑 기단의 4우에는 돌사자가 있었으나, 그 중 세 개는 분실되고 한 개만 극락전(極樂殿) 추녀 밑에 있다. 한국의 어떤 다른 석탑과도 닮지 않은, 독특한 아름다움을 가진 석탑으로, 목조 건물의 복잡한 구조를 화강석을 이용해 아름답게 표현하였다. 또한 경쾌하면서도 장려하고 번잡한 듯 하면서도 전체의 통일이 잡혀 있으며, 돌을 자유자재로 다룬 기법은 놀랄 만한 것으로, 이러한 형식의 탑은 중국과 일본 등 다른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1925년 일본인들이 탑을 해체·보수하는 과정에서 내부에 있던 사리와 사리장치 등의 유물 및 기단부의 네 마리 사자상 가운데 세 마리가 사라졌으며, 하나의 사자상은 현재 영국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보관 중이며, 나머지 두 사자상은 행적을 알 수가 없다. 현재 10원짜리 동전에 다보탑 문양이 새겨져 있으며 2008122층 사각난간과 팔각난간, 상륜부의 수리가 이루어지고 나머지 부분은 해체하지 않고 오염물 제거와 강화처리가 이뤄졌다. 출처:위키백과

 

 

바로 옆에 있어야 할 석가탑은 유리문으로 막혀 있고 수리중이라고 되어 있다.

석가탑(이미지 사진 출처:위키백과)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慶州佛國寺三層石塔): 경주 불국사에 있는, 남북국 시대 신라의 삼층석탑이다. 원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設法塔)이며 흔히 줄여서 석가탑(釋迦塔)이라고도 한다. 아사달과 아사녀의 전설에서 따 무영탑(無影塔)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불국사 대웅전 앞뜰에 다보탑과 나란히 서 있으며, 대한민국의 국보 제2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탑은 일반적으로 751(경덕왕 10) 무렵 김대성이 불국사를 중수할 무렵에 세워졌다고 추정하고 있지만, 742년에 완성되었다는 주장도 있다.[1] 또한 이 탑은 고려 초에 일어난 지진 때문에 1024년과 1038년에 중수되었다. 높이 10.4m. 신라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을 대표하는 가장 우수한 예이며,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과 상륜부가 있는데 각 부분의 체감비율이 적당하며 간결하다. ·하 기단의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가 각각 2개씩 새겨져 있고 다른 조각은 없다. 탑신을 받치는 갑석은 4매의 돌로 되어 있는데 아래에는 부연(附椽)이 있고, 윗면은 경사가 져 있으며 2단의 탑신 굄이 있다. 탑신부의 옥신석(屋身石)과 옥개석(屋蓋石)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옥신에는 우주가 새겨져 있을 뿐이다.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5단이며 그 위에는 2단의 옥신받침이 있다. 상륜부는 노반(露盤복발(覆鉢앙화(仰花)만 남아 있었는데 1973년 실상사 삼층석탑의 상륜부를 본 따 없어진 부분을 더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이 탑의 특이한 점은 탑 주위에 장방석을 돌려서 형성한 탑구(塔區)에 연꽃무늬를 조각한 팔방금강좌(八方金剛座)가 있는 것과 탑의 기단부를 자연석이 받치고 있는 것 등이다. 이는 유례가 드물며, 주목할 만한 것이다. 해체 수리 때 2층 옥신의 사리공에서 사리함과 여러 개의 장엄구가 발견되었다. 2층 기단의 웅대함과 탑의 아름다움이 잘 조화되어 당대의 대표적 작품으로 손꼽힌다. 사리장엄구 발견경위는 1966년 가을, 도굴로 인해 석가탑이 일부 훼손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도굴사건에 대한 대책의 일환으로 피해를 입은 석가탑을 해체보수하기로 결정하였으며, 19661013일 해체 작업이 시작되었다. 보수과정에서 2층 탑신석 상면 중앙 사리공 내에 봉안되어 있었던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사리공은 가로·세로 41cm, 깊이 19cm로 구성되었으며, 사리공 중앙에는 금동제 사리 외함이 안치되었고, 주위에는 동경, 비천상, 구슬, 목제소탑 등의 공양물들이 납입되어 있었다. (출처:위키백과)

 

 

 불국사 정문(그야말로 인산인해다)

 ▲ 탐방지원센터 산행 시작(이정표에 석굴암 매표소 까지 2.3Km라고 되어 있다) 

▲ 석굴암 주차장

산행 중 종소리가 나서 웬 종소리인가 궁금했는데 석굴암 입구에서 종치는 비용 천원을 받고 타종을 하게 한다. 그 비용은 불우이웃 돕기에 사용되어진다고 한다.

▲ 석굴암 입구

경주 석굴암 석굴(慶州 石窟庵 石窟):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시의 토함산 중턱(진현동 891)에 있는 석굴(石窟)로서 국보 24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라 경덕왕 10(751), 당시 51세였던 김대성이 만들기 시작했고 20여년 후 완성되었다. 신라의 건축과 조형미술이 반영되어 있다. 석굴암의 원래 이름은 '석불사(石佛寺)'였으나, '석굴', '조가절' 등의 이름을 거쳐 일제강점기 이후로 석굴암으로 불리고 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석굴이며, 1913년 이후로 일제가 수차례 해체·조립·수리하기 전까지는 원형을 유지하였다. 현재는 부실 복원에 따른 습도 문제로 유리벽으로 막아 보존되고 있다. 석굴암은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적인 가치와 독특한 건축미를 인정받아 불국사와 함께 1995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삼국유사에 김대성이 현생의 부모를 위한 불국사와 함께 전생의 부모를 위한 석불사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서 불국사와 가까운 위치에 있는 점을 참작하여 석불사가 현재의 석굴암으로 여겨지고 있다. 석불사에는 신림(神琳표훈(表訓)의 두 성사(聖師)를 각각 청하여 거주하게 하였다 한다. 그 뒤로는 기록에 등장하지 않다가 조선 중기 이후로 중수하거나 방문한 기록이 남아 있고, 정선은 그림을 남기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1912~1915년에 걸쳐 일제에 의한 대규모 보수공사가 있었다. 첫 번째 수복 때 석굴암은 붕괴 직전의 상태였다. 천장이 새서 불상에 직접 비를 맞고, 주변의 불상의 배치도 불분명했으며 전체의 반 이상이 흙에 파묻혀 있었다. 최초의 보수 후에 비가 새는 것이 발견됐고, 그 후의 보수에 콘크리트가 사용되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의 복원공사는 석굴암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고 건축원리에 대한 이해가 없는 채로 콘크리트를 덮어버렸기 때문에 외면상 수리는 되었지만, 석굴암을 복원 불가능한 형태로 파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특히 본존불 아래, 석굴내 지하수가 모여 밖으로 배출되는 수로장치는 일본에는 없는 독특한 장치로, 일본인들이 이것을 막아 버렸기 때문에 지하수로 차가워진 돌에 수분이 맺히는 현상이 발생했다. 해방 이후 혼란한 사회 속에서 방치되어 오다가, 1961-1963년 문화재관리국의 주도로 보수공사가 진행되었다. 일제가 바른 시멘트로 인해 습도와 온도 유지가 어려워지고, 석굴 내에 맺힌 물이 시멘트를 녹여 결과적으로 화강암으로 된 조각상들을 침식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기존의 시멘트 구조물 위에 약간의 공간을 두고 그 위에 돔을 덧씌웠다. 그리고 이때 외부 습기를 차단하기 위해 유리로 봉인하고, 습기제거장치를 설치했다. 하지만, 이렇게 밀폐된 공간 속에 관람객들이 배출한 이산화탄소와 이물질이 갇혀 화강암을 손상시키는 점이 지적되었다. 1961년에 목조에 기와를 덮은 전실이 설치되었다. 이것 또한 석굴암의 통풍을 막는 요소라고 지적되고 있다. 2011년 현재, 입구는 유리로 봉해져 실내의 습도가 항상 조절되고 있지만, 일반 방문자는 석굴 내부에 들어갈 수 없다. 출처:위키백과

경주 석굴암 석굴(慶州 石窟庵 石窟): 사진 촬영 금지라 위키백과에서 빌려옴  (이미지 사진 출처:위키백과)

미지 사진 출처:위키백과

원형이 훼손되기 전의 석굴암 (이미지 사진 출처:위키백과)

석굴암을 다녀 온 후로 길은 산책로와 같이 연결 된다.


▲  경주 토함산 성화 채화지. 해마다 경북도민체전이 열리면 이곳에서 채화한다고 한다.

  ▲ 추령 갈림길

▲ 토함산 정상석 뒷면

 

 

 


▲ 마동 갈림길 삼거리



▲ 마동 삼층 석탑 뒤로는 코오롱 호텔

▲ 경주 마동 삼층석탑(慶州 馬洞 三層石塔)은 경상북도 경주시 마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중기의 3층 석탑이다. 대한민국의 보물 제912호로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현재 상륜부에는 노반만 남아 있고 높이는 5.4미터이다. 기단은 2겹으로 쌓되 아래 기단의 갑돌 및 가운데 돌은 각각 8매의 돌을 짜 맞추어 만들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석굴암을 조성한 김대성(金大城)과 인연이 있다고 한다. 즉 김대성이 무술을 닦을 때 큰 곰을 잡아 운반하다가 날이 저물어 현재의 석탑이 있는 부근 민가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꿈에 곰이 덤벼들면서 절을 지어 주지 않으면 해치겠다고 하기에 이곳 마동에 절을 짓고 몽성사(夢成寺)라고 하였다가 뒤에 장수사(長壽寺)라 개명하였다는 것이다. 이 석탑도 몽성사 또는 장수사라는 사찰과 관계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출처:위키백과

 ▲ 마동 산행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