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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림청 100명산 산행기

100. 희양산 (曦陽山) : 충북 괴산군, 경북 문경시

희양산(曦陽山, 998m) : 황학산, 백화산, 이만봉, 은티마을

이화령→조봉→황학산→백화산→평전치→곰틀봉→이만봉→희양산→지금티재→은티마을

◇ 산행지 :  북 괴산군 연풍면. 경북 문경시 문경읍 일원

◇ 산행일자 : 2012. 5. 5 (토). 날씨 : 맑음(더운편이었음))

 산악회및 친구 : 대전시 산사모 32명, 기대 중반 이후 장대정님과 구광회

◇ 산행거리 : 18.21km(포항 셀파산악회 실측거리 기준, 이탈 거리 : 지름티재~ 은티마을 약 3 km제외)

◇ 산행시간 : 7시간 38분 산행( 중식 20분 포함)< 이탈 은티마을22분 제외>합계:8시간, 후미 10시간

◇ 시간 대별 요약 

- 05:10 대전 IC 출발

- 06:35 이화령 도착

- 06:42 산행 시작

- 07:36 조봉

- 08:18 황학산

- 08:56 백화산

- 09:36 평전치

- 10:33 점심(20분)

- 11:01 사다리재

- 11:21 곰틀봉

- 11:40 이만봉

- 12:05 시루봉 갈림길

- 13:11 희양산 갈림길(왕복 25분 소요)

- 13:22 희양산

- 14:30 지름티재

- 14:53 은티마을 주차장 산행 마침

- 17:30 은티마을 출발

- 18:50 대전 IC 도착

 

※ 특기사항

 잠 한숨 못자고 산에 감

② 기대 배탈로 인해 시루봉 갈림길에서 은티마을로 중간 탈출

③ 컨디션 좋았음

④ 후미 오래 기다림

⑤ 산행 후 오리훈제 뒤풀이

 

※ 산행 전 사전 조사 

<봉암사 (鳳巖寺)> :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이다.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희양산파(曦陽山派)의 종찰(宗刹)로 879년(헌강왕 5)에 지증대사인 지선(智詵)이 창건했다. 935년(태조 18)에 정진대사 긍양(兢讓)이 중창하고, 1431년(세종 13)에는 기화(己和)가 중수했다. 1674년(현종 15)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신화(信和)스님이 재건했다. 1915년 세욱(世旭)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현존 당우로는 극락전과 요사채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聞慶鳳巖寺智證大師塔:보물 제137호)·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국보 제315호)·문경 봉암사 3층석탑(보물 제169호)·문경 봉암사 정진대사탑(聞慶鳳巖寺靜眞大師塔:보물 제171호)·문경 봉암사 정진대사탑비(보물 제172호) 등이 있으며 이 절의 서북쪽 계곡에 있는 거대한 암벽에는 높이 600cm의 봉암사마애보살좌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1호)이 새겨져 있다. 출처:다음 백과 사전

 

<불교구산 (佛敎九山)> : 통일 신라 말에 고려 초 선승들이 세운 선종의 아홉 산문으로 이 용어가 처음 나타나는 것은 《고려사》 제10권 선종(宣宗) 1년의 기록으로, '보제사 승 정쌍 등이 구산문에서 참학하는 승려들에게도 진사의 예에 비추어 3년에 한번씩 선발해 줄 것을 청하자 그와 같이 시행했다'는 내용이다. 이후 여러 문헌에 달마구산문·구선선려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특히 《선문조사예참의문》은 구산의 명칭과 장소, 개산조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각 선풍의 특성을 칠언사구의 시로 나타낸 문헌이다. 이 문헌에 따르면 821년부터 932년까지 112년 동안 구산선문이 세워졌다. 이 때는 학문을 위주로 하는 교학 불교가 중심을 이루고 있었으며, 지나치게 화려하고 귀족적이었다. 당시 중국은 이미 선종이 크게 발달한 상태였는데, 당에 유학중인 신라의 승려들이 선종을 배우고 귀국하여 그 가르침을 전파한 것이 구산의 성립 배경이다. 이들은 이론보다 마음과 일상을 중시하여 일반 대중들을 가까이 하였다. 특히 신분 차별을 부정하는 불교의 보편성을 강조하여 전제왕권에서 소외된 지방 호족세력의 지지를 얻었고, 그래서 수도 경주 이외의 지방에 독자적인 선문을 세웠다.9개 선문은 828년 증각 홍척(洪陟) 국사가 개산한 전북 남원군 산내면의 실상산문(實相山門), 859년 명적 도의(道義) 국사가 개산한 전남 장흥군 유치면의 가지산문(迦智山門), 851년 통효 범일(梵日) 국사가 개산한 강원도 강릉 구정면의 사굴산문(捨堀山門), 842년 체공 혜철(蕙哲) 국사가 개산한 전남 곡성군 곡성면의 동리산문(桐裡山門), 847년 무주 무염(無染) 국사가 개산한 충남 보령군 굴산면의 성주산문(聖住山門), 850년 쌍봉 도윤(道允) 국사가 개산한 강원도 영월군 영주면의 사자산문(獅子山門), 881년 지증 도헌(道憲) 국사가 개산한 경북 문경군 가은면의 희양산문(曦陽山門), 원감 현욱(玄昱) 국사가 개산하였고 개산 연도가 알려지지 않은 경남 창원시 봉림동의 봉림산문(鳳林山門), 931년 진철 이엄(利嚴)이 개산한 황해도 해주군 금산면의 수미산문(須彌山門)이다. 이 중 봉림산문과 성주산문·사굴산문·수미산문은 그 터만 남아 있다. 산문이 9개로 나뉘기는 하였으나 그 뿌리는 모두 육조 혜능의 법맥을 이었다. [출처]:네이버 백과사전

 

※ 희양산 산림청 100명산 선정 사유 : 산 전체가 하나의 바위처럼 보이고 바위 낭떠러지들이 하얗게 드러나 있어 주변의 산에서뿐만 아니라 먼 산에서도 쉽게 알아볼 수 있으며 기암괴석과 풍부한 수량이 어우러진 백운곡 등 경관이 수려하고 마애본좌상 등 역사유적이 있는 점 등을 고려하여 선정 하였다.

 

 희양 등산 지도및 고도표

 

 

 

※ 희양산 산행 후기

"금요일엔 인천에서 대전 가는 차가 매진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야 했는데.. 차가 없을 것이란 생각 자체를 하지 않고 23시에 심야 우등이 막차라는 생각만 가지고 있었는데 막상 2220분경 인천터미널에 도착하니 버스가 매진이란다. 서둘러 스마트폰으로 코레일을 검색해보니 대전 가는 기차는 2330분이 막차다. 인천터미널에서 서울역까지 전철을 타고 간다한들 차를 탈수 없어서 대전에 안내려갈까고민하다가 택시를 잡았다.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하는 생각에 머리가 무거운데 택시는 그야말로 총알택시로 갓길과 때론 사이렌비슷한 경적을 울려대며 고속도로가 밀린다고 요리조리 왔다갔다 정신없이 운전하여서 잠을 한숨도 못자고 대전에 도착 했다. 집에 들어오니 거실에 이불이 깔려 있다. 자는 식구들 모두 깨워서 난리법석을 부리고 싶었지만 자는 식구들 깨워 본들 머릿속이 복잡해서 앞뒤 못 가리고 흥분부터 할 것 같아 잠을 청하는데 분해서 잠이 오지 않는다. 뜬눈으로 날을 세고 배낭을 멨다. 점심등 기타 준비물은 친구에게 부탁해 놓았으니 물만 달랑 세병 챙겨들고 집 앞으로 나가니 친구가 와 있다. "컨디션이 안 좋아서 산행을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친구의 말에 나는 잠 한 숨도 못 잤다고 하니 "너는 예전에 당구장 할 때도 잠을 한 숨 못 자고 나와도 산행을 잘 했다"며 본인 걱정을 한다. 일명 천하무적이 엄살을 떤다 싶었는데 결과적으로 친구는 중도에 산행을 포기 했으니 컨디션이 안 좋아도 많이 안 좋았나 보다. 버스에 올라 자리에 앉았는데도 머릿속이 복잡해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산행지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단체 사진을 찍고 회장님이 "준비운동을 해야 본인 같이 산행 중 사고를 안 당할 수 있다"며 산사모 산행 중 처음으로 준비운동을 하고 산행을 시작 했는데 준비운동은 꼭 필요 한 것 같다. "잠도 못 잤으니 오늘은 후미 그룹에 붙어서 산행을 하자"고 친구에게 말을 하니 친구도 컨디션이 안 좋으니 천천히 하자고 한다. 이번 구간은 백두대간 1차 산행 때 친구와 둘이 차량을 끌고 와서 여유와 호사(?)를 부리며 희양산 정상에서 라면을 끓여 먹고 노루 한 쌍을 보았던 추억이 묻어 있는 산행이라 비록 잠을 못 자고 머리가 복잡하더라도 일단 잊고 산행에만 전념하기로 했다. 처음 산행과 함께 잠깐 오를 뿐 고도가 대체로 완만하고 숲길은 편안한 마음이 들 정도로 조봉에 쉽게 도착했다. 황학산과 백화산을 지나 평전치에 도착했고, 무명봉에서 점심을 하고 나니 친구가 나에게 혼자서 먼저 가란다.” 친구는 시루봉 갈림길에서 은티마을로 탈출한다며 먼저 가라고 해서 이후엔 산행 친구가 장대정님과 구광회님으로 바뀌었다. 희양산 정상을 다녀와서 지름티재로 가는 도중에 스님 셋을 만나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는데 "그 중에 한 명이 연예인 김 제동 이었다"는 사실은 내려와서 알 수 있었다. 은티마을에 도착하니 친구는 먼저 내려와 있었다. 주차장과 인접한 도로가에서 상의만 탈의 하고 바지를 입은 체 샤워를 하고 복잡한 머리를 풀어 보려고 오리훈제에 정신없이 소주를 들이키며 후미를 기다렸는데 예상과 달리 후미는 너무 늦게 도착했다. 친구 왈 "나는 컨디션이 안 좋아 혹시 민폐를 끼칠까봐 탈출 했는데 후미는 항상 볼 것 다보고 온다""너무 심하다고 한다." 맞는 이야기다.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 조금은 적극적으로 산행을 하고 그냥 지나칠 곳은 지나쳐 와야 하는 게 후미 같다.

 

※ 희양 산행사진

▲ 새재 자전거길 : 충북 충주시 탄금대에서 백두대간 이화령을 넘어 경북 상주시까지 내륙 산간지역을 관통하는 250리 길이다. 행정안전부는 2011년 11월 27일 충주시(34.8km)∼충북 괴산군(11.4km)∼경북 문경시(37.3km)∼상주시(16.5km)로 이어지는 총길이 100km의 ‘새재 자전거길’을 개통했다. 2011년 10월 8일 문을 연 ‘남한강 자전거길’의 끝인 충주 탄금대와 낙동강을 따라 조성되고 있는 ‘낙동강 자전거길’의 출발점인 상주 상풍교를 잇는 내륙구간이다. 새재 자전거 길은 차량 통행이 줄어든 옛 국도와 마을길 농로 하천 둑길을 따라 조성돼 내륙 산간의 아름다운 자연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특히 충북 괴산과 경북 문경을 가르는 백두대간의 주요 고개인 이화령을 넘는 코스가 백미로 꼽힌다. 괴산군 연풍면 행촌리 행촌교차로에서 이화령 휴게소까지 이어지는 5km의 오르막 구간이다. 해발 548m인 이화령 휴게소는 국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조성된 자전거길 휴게소가 됐다. 충주시와 괴산군 경계에 있는 해발 374m의 작은 새재 ‘소조령’도 도전할 만한 코스다. 이화령과 소조령이 버티고 있긴 하지만 두 곳을 제외하면 새재 자전거길은 대부분 경사가 완만해 초보자라도 8시간 정도면 완주할 수 있다. 또 수안보와 문강 문경 등 3개 온천관광단지를 통과하도록 구성돼 있어 온천을 즐기며 여유롭게 쉴 수도 있다. 고려 말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내려왔다는 전설이 서린 수옥폭포와 문경새재도립공원, 문경시 영순면 영강습지 갈대밭 등 지역 관광명소도 주변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행정안전부는 2011년 말까지 낙동강 자전거 길을 완공해 인천 서해갑문에서 부산 을숙도까지 702km에 이르는 국토종단 자전거길을 완성할 예정이다. 금강과 영산강을 따라 조성되고 있는 자전거길까지 완공하면 총길이 1692km의 ‘4대강 국토종주 자전거길’이 탄생한다. 출처: 괴산·문경=김재홍 기자 nov@donga.com  

 

 

▲ 이화령 : 이유릿재라고도 하며 높이 548m로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의 사이에 있는 고개로 유래는 고개가 가파르고 험하여 산짐승의 피해가 많으므로 전에는 여러 사람이 어울려서 함께 넘어갔다하여 이유릿재라 하였다. 그 후에 고개 주위에 배나무가 많아서 이화령으로 불리게 됐다.

▲ 이화령 : 이유릿재라고도 하며 높이 548m로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의 사이에 있는 고개로 유래는 고개가 가파르고 험하여 산짐승의 피해가 많으므로 전에는 여러 사람이 어울려서 함께 넘어갔다하여 이유릿재라 하였다. 그 후에 고개 주위에 배나무가 많아서 이화령으로 불리게 됐다. 조령산(鳥嶺山, 1,017m)과 갈미봉(葛味峰, 783m)과의 안부(鞍部)에 위치하며 동쪽사면은 조령천(鳥嶺川)의 곡구(谷口)인 진안리에서 서쪽으로 분기하는 하곡과 통하고, 서쪽사면은 남한강의 지류인 달천(達川)으로 흐르는 연풍천(延豊川)의 하곡으로 이어진다. 현황도로도 위에 언급된 계곡을 따라 개통되었으나, 동편의 진안리에서 이화령 고개까지는 갈미봉의 산록을 따라 올라가고, 서편은 행촌리까지 ‘잣밭등’의 남쪽을 따라 내려간다. 고개 아래 연풍은 영하취락(嶺下聚落)이다. 옛날의 국도는 새재[鳥嶺]로 통하였으나, 새재는 몹시 높고 산로(山路)가 험하므로 신국도 3호선은 이화령을 통하게 되어 연풍은 이화령에 교통로가 열린 뒤에 발달한 신흥취락이다.연풍에서 하곡을 따라 올라가 원풍리를 거쳐 분수령에 이르면 동쪽은 새재마루의 조령 제3관문이고, 서쪽은 소조령(小鳥嶺)이다. 소조령을 넘으면 온천으로 유명한 수안보(水安堡)에 이른다. 이와 같이 이화령은 충청북도의 충주권과 경상북도 북부의 점촌지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이화령의 개통으로 북쪽의 조령은 제1·2·3 관문과 주변의 성곽 등을 사적 제147호로 지정하고 크게 보수, 축조하여 도립공원으로 정비하였다. 조령의 통과는 중초리에서 통제되고 관광객이나 등산로 외에는 사용되지 않고 있지만, 이화령은 국도 제3호가 통과하여 주변지역에서 산출되는 특용작물의 수송도로로 이용되고 있다. 이리하여 옛 조령에 이어 이화령은 새로운 교통요충지로 변모하고 있다. 그러나 국도 3호선은 도로가 구불구불하여 이용하는 사람들이 불편하다는 민월을 끊임없이 제기하였다. 이에 따라 민간투자사업으로는 처음으로 3번 국도가 4차로로 확장되면서 이화령 터널이 뚫렸다. 그 뒤 이화령 터널 옆으로 고속도로의 상하행선 터널이 추가로 관통됨으로써 모두 3개의 터널이 있게 됐고, 옛 이화령 포장도로까지 합쳐 10개의 차로의 도로들이 나란히 있는 실정이다. 이화령 터널을 건설할 당시 예상한 이용률보다 훨씬 적어서 문제가 되었고, 2007년 건설교통부가 ‘이화령 터널’을 인수하여 2007년 8월 1일 터널 통행료가 폐지되었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

 

▲ 이화령에서 단체 사진 찍은 후 산사모 산행 중 첫 준비운동 실시

▲ 이화령에서 내려서며 사진 중앙의 현수막 있는 곳이 산행 출발점.

 

 

 

▲ 이화령에서 올라 서면 나타나는 군 시설물

 

 

▲ 조봉: 충북 괴산군 연풍면과 경북 문경시 문경읍의 경계에 위치하며 조선시대 말엽 이 산봉우리에 새들이 많이 있다 하여 유래하였다고 한다. 

▲ 산꼭대기에 물이 고여 있는 분지의 모습

▲ 흰드뫼→분지안말(50분) 이라는 이정표가 보이는 삼거리 갈림길 :이지점은 안말마을에서 흰드뫼를 거쳐 황학산~백화산으로 오르는 일반적인 코스로 이후 사다리재에서 하산하면 안말마을로 원점회귀를 할 수 있다고 한다.

 

흰드미: 안말에서 30여 분 거리에 위치하며 분지리 맨 꼭대기에 올라앉은 이 마을은 '겨울철 흰 눈 덮인 모습이 흡사 하얗게 핀 꽃 같다'는 백화산(白華山) 턱밑에 웅크리고 앉아 있어 흰두뫼, 흰드뫼 등으로 불리다가 흰드미로 바뀌었다. 흰드미는 산 높고 골 깊은 산비탈이지만 땅이 넓고 기름져 옥수수든 감자든 콩이든 팥이든 심는 대로 풍작이었다. 그래서 삶에 지친 민초들이 희망을 심는 땅이었다. 그들은 아침 해가 산등성 위로 고개를 들 때부터 저녁 어스름이 연풍 들녘에 깔릴 때까지 땀으로 범벅된 채 이랑을 팠다. 그러다가 자식들에게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아도 될 만큼 살림이 피면 산을 내려갔다. 그 빈자리는 또 다른 사람들을 위한 희망의 공간으로 남겨졌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서서 본격화된 화전민 정리 사업으로 하나둘 이곳을 등졌다. 이에 굴하지 않고 외롭게 땅을 일구던 홍태식 할아버지 내외가 1990년대 중반 산에서 내려오자 흰드미는 지도에만 이름을 남긴 빈 마을이 되었다. 출처:인터넷 한국일보

 

▲ 모두 모여 단체 사진을 찍는데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있다 독사진만 찍었다.

▲ 황학산[黃鶴山(912.8m)]:전설속의 누런 학에서 유래 되었으며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과 괴산군 연풍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으로 백두대간의 중추를 이루고 있다. 3번 국도인 이화령 남쪽 6㎞ 거리에 솟아 있고 바로 옆에 있는 규모가 큰 백화산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은 산이다. 호젓한 산길과 억새밭, 참나무 숲길은 비할 데 없이 아름답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하여 길이 뚜렷하지 않아 정확한 독도법이 필요하다. 산에 있는 억새밭은 1960~1970년대 사람들이 살면서 목장을 하던 곳으로, 갈수록 잡목이 늘어나고 있어 억새밭이 줄어들고 있다. 산행은 문경읍 마원리에서 시작할 수 있지만 이화령 바로 밑인 각서리 농산물 판매점 앞을 지나 잘 닦인 농로을 따라 능선을 오르는 것이 수월하다. 정상에 올라서면 동쪽으로 문경읍이 뚜렷이 보이고 그 너머로 운달산도 조망된다. 산 가까운 곳에는 연풍향교와 연풍성지가 있어 산행과 함께 돌아보면 좋다. 연풍향교는 조선 중종 때 창건되어 여러 차례 중수되었고, 연풍성지는 조선 정조 때의 신해교난 이후 연풍 지역에 은거하며 신앙을 지키다 순조 때 신유교난으로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당한 자리를 성역화한 곳이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 독대아범님이 내 모습을 잡은 사진

▲ 백화산: 성인을 따라 세상에 나타난다는 봉황의 수컷에서 유래 되었다는 백화산(1063.5m)은 겨울철 눈 덮인 산봉우리의 모습이 하얀 천을 덮어 씌운듯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괴산군내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백두대간에 속하며 황학산, 이만봉 등의 고봉들과 함께 고원을 이루고 있다. 이화령에서 잠시 숨을 죽인 백두대간이 속리산을 향 하다가 치솟은 산이라고 하며 특히 문경 쪽으로 바라보는 정상부는 암릉으로 되어 있어 봉황의부리 구실을 하고 정상은 새가 봉황이 하늘을 날며 땅을 굽어보는 듯이 천지간의 산과 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조망의 명당이란다. 신라시대의 고찰인 봉암사를 두고 뒤를 이화령으로 시루봉으로 날개를 펼친 거대한 봉황새의 형상이라고 한다.

 

▲ 평전치(平田峙): 경북 문경시 마성면 상내리와 충북 괴산군 연풍면 분지리를 잇는 고갯길로 일명 평밭등이라 부르고 있으며, 예전에는 분지리에서 상내리로 넘어가던 옛 고개였으나 지금은 폐로가 되었고, 분적골까지 산판임도가 개설되었으나 그 역시 쓰임새를 잃고 현재는 등산로로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평전치 서쪽으로 1시간 정도의 거리에 사다리재가 있고 곰틀봉과 이만봉을 거쳐 희양산으로 이어진다. 동쪽으로는 대간 마루금을 따라 45분 정도에 백화산에 닿고, 이어 황학산과 조봉을 거쳐 이화령에 닿게 된다. 평전치 남쪽의 상내리 한실마을은 마원리, 중평리 여우목마을, 연풍지역과 더불어 천주교 성지로서 백화산 일대 대간능선을 넘나들며 선교활동을 펼쳤던 곳으로, 1866년 병인박해 당시 대원군의 박해를 피해 허기진 몸을 숨겼던 첩첩산중 천혜의 은신처이기도 했다.

▲ 사다리재 : 원래 미전치로 부르던 고개인데, 사다리재는 그 출처나 연원이 불분명한 이름이며, 본래는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한밤미 마을과 괴산군 연풍면 분지리(분적골) 마을을 오가던 ‘고사리밭등’이 고개의 옳은 이름이다. 고사리밭등은 분적골 사람들이 고사리가 많은 곳이라 하여 부르던 이름으로 고비 미(薇)자를 써서 '薇田峙'라 하였다.

▲ 곰틀봉 : 예전에 곰을 잡기 위해 틀을 놓았다는 것에 유래되었다고 한다. 표시석도 없고 나무에 누군가 파 놓은 "곰"자만 보인다.

▲ 이만봉 : 옛날 만호라는 벼슬을 한 이씨가 이곳에 살았다 해서 붙여졌고, 이만호골이 시작되는 도막은 임진왜란 당시 도원수권율이 군막 을 쳤다 해서 붙여진 지명으로, 충북과 경북을 가르는 경계선에 있으며 괴산군에서 최고봉인 백화산과 희양산의 중간에 위치한다. 독립된 산이기보다는 황학산, 백화산. 시루봉, 희양산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능선으로 표시 된다.

▲ 희양산이 조망 된다.

▲ 시루봉 갈림길

▲ 시루봉, 은티마을 갈림길

 

 

▲ 희양산 성터

▲ 희양산 갈림길에는 입산통제를 알리는 안내판이 있다. 계곡 숲속의 봉암사 사찰 스님들의 극성적인 입산통제로 자주 마찰 발생하는 곳으로 그래선지 다들 입산을 꺼려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예전에 스님들이 막고 지키고 있어서 못 올라가고 되돌아 간적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지키지 않으니 모두 희양산 정상을 향했다.

▲ 추락 위험은 없다.

▲ 희양산(曦陽山): 충청북도 괴산군과 경상북도 문경시에 걸쳐 있는 산이다. 높이는 해발 999m이며 동·서·남 3면이 화강암 암벽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돌산이다. 암봉들이 마치 열두판 꽃잎처럼 펼쳐져 있으며 그 중심에 봉암사가 있다. 경내에는 지증대사 적조탑과 부도 등 5점의 보물과 지방유형문화재들이 있다. 현재 건물 대부분은 1992년에 중창된 것이다. 평소에는 일반인 출입이 금지되어 있으나 석가탄신일에는 개방된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 중반 이후 함께 산행한 구광회님과 장대정님

▲ 희양산 인증

▲ 희양산에서 바라 본 구왕봉

▲ 희양산 갈림길 되돌아 옴

 

 

▲ 이쯤에서 스님과 일행 둘과 인사를 나누었는데 알고 보니 연예인 김제동도 있었다.나는 모르고 지나 침. 

▲ 유수스님과 김제동씨. 유수스님은 하나밖에 없는 법륜스님의 제자 승이라 한다. 

▲ 뒤에 따라 온 대전시 산사모 회원님 사진에서

▲ 지름티재에 대한 유래: (1) 연풍과 가은을 넘나드는 최단거리 지름길이라 붙혀진 이름이다. (2) 희양산과 구왕봉으로 오르는 길이 지름(기름)처럼 미끄럽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신빙성은 없다.

 

▲ 지름티재에 있는 이정목과 거리가 다르게 표시 되어 있다. 약 50분 소요 된 것을 보면 은티마을 까지는 3km가 맞는 것 같다. 

 

 

 

▲ 은티마을에 있는 주막집

▲ 은티마을 유래비

< 은티마을의 남근석과 남근석에 얽힌 유래> : 마을 입구에는 은티마을 유래비가 서 있고, 시내버스 종점의 작은 공터 느티나무 아래에는 조그마한 남근석이 새끼줄로 금줄을 두른 채 세워져 있는데, 은티마을은 희양산 계곡과 악희봉 계곡에서 흘러 내려오는 개울이 만나는 합곡점에 위치하고 있어서, 마치 Y자 가운데 여궁혈 자리에 위치해 있는 형국이라고 한다. 그래서 큰비가 오면 물난리가 자주 일어난다고 믿고 있으므로 음기를 누를 목적으로 남근석을 세워놓고, 매년 정월 초이튿날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그 형세가 마치 여성의 성기와 같은 여근곡(女根谷)이다. 이를 여궁혈(女宮穴)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쌘 음기를 막기 위한 풍수의 하나로 남근석과 전나무 등을 심어 놓았다한다. 마을 유래비가 이 마을의 역사를 잘 말해주는 듯하다.

▲ 은티마을 주차장 산행 마침.

▲ 뒤풀이는 오리훈제

▲ 이렇게 모여 앉아 뒤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