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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산 산행기

화왕산 (火旺山) 757m : 진달래, 억새, 허준 세트장

화왕산 (火旺山757m : 진달래, 억새, 허준 세트장

옥천식당→창녕학생수련원685배바위화왕산허준세트장옥천매표소

◇ 산행지 :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고암면  일원 

◇ 산행일자 : 2015. 4. 12 (일) 날씨 : 맑음

◇ 산행거리 : 약 9.5km(이정표상 거리)

◇ 산악회및 산행 친구 : 금강 산악회, 기대 

◇ 산행시간 : 5시간 45분 산행 ( 중식및 막걸리 50분 포함)

◇ 시간 대별 요약

- 10:19 옥천 식당 앞 도착

- 10:23 옥천 식당 산행시작 

- 09:47 백운탐방지원센터 산행시작

- 11:52 685봉

- 12:41 배바위

- 13:05 화왕산  

- 13:13 점심(막걸리 포함 50분)

- 14:36 허준 세트장

- 15:02 제3등산로(관룡산 갈림길)

- 15:08 일야봉산장

- 16:05 옥천매표소 산행마침

 

 특기사항

① 화왕산 두 번째 산행(2005.10.28 화왕산, 관룡산 첫 산행 )

② 산행 후 남지수변공원 유채꽃 축제 관람

③ 산림청 선정 100명산 

④ 진달래, 억새 명산

⑤ 정상 막걸리 휴식(50분)  

 

  산행 전 사전 조사

< 화왕산 (火旺山) 유래 > : 화왕산은 한자로 火旺山이라고 쓰고 있는데, 본래의 이름은 火王山이었다. 창녕의 신라시대 이름이 화왕군(火王郡)이었고, 화왕산이 창녕의 진산임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화왕산의 가운데 글자인 으로 바뀐 것은 일제의 술책이다. 어렵게 풀이할 것도 없이 日王인 것이다.화왕산이 火王山이어야 맞는 것은 여러 자료들에 나타나있다. 동국여지승람 창녕현 편 산천 조에 보면 화왕산(火王山):현의 동쪽 4리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는 기록이 있고, 같은 편 고적 조에 화왕산고성(火王山古城):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5,983척이더니 지금은 없어졌고, 성 가운데 샘 아홉 개와 못 세 개가 있었다는 기록, 같은 편 고적 조에 있는 옥천사(玉泉寺)’ 해설 등과, 군명(郡名)화왕(火王)’이란 기록 등이 그 증거다. 고산자 김정호 선생이 1861년에 교간한 대동여지도에도 火王山으로 표기되어 있고, 대동여지도보다 200여 년 앞선 첩 팔도지도(帖 八道地圖)’ 경상도 편에도 火王山이며, 다른 고지도들도 내용은 마찬가지다. ‘으로 바뀐 시점은 1914년부터 1918년 사이에 제작된 한국근세지도부터다. 제작의 주체는 물론 조선총독부였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청일전쟁과 노일전쟁을 빌미로 우리 나라 지도를 만들기 시작했다. 한일합방 후 더욱 박차를 가해 1:50,000 지형도를 만들었는데, 우리 명산들 중 자가 들어간 산이나 봉우리들을 또는 으로 발음은 같거나 비슷하고 의미는 전혀 다른 한자를 바꿔치기 한 것이다. 출처: 근거 없는 어떤 이의 주장

 

< 화왕산 (火旺山) 유래 > : '화왕(火王)' 지명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757(신라 경덕왕 16)에 당시의 비사벌군(또는 비자화군)'화왕군'이라 불렀다고 한 데서 유래한다. 이를 따라서 '화왕산(火王山)'이라 한 것으로 보인다.세종실록지리지에서 "화왕은 창녕현의 진산"이라 하고 있다. 지명은 현재 임금 '()' 자가 아닌 성할 '()' 자를 사용하고 있다. 그 유래를 살펴보면 선조실록1598(선조 31) 기록에서 처음으로 '화왕산(火旺山)'이라 하여 기록하고 있다. 그 이후의 사료와 고지도에서는 두 글자를 혼용하고 있다가 1872년 지방지도이후부터는 '()' 자의 용례만 확인된다. 따라서 '()' 자 지명은 1598년에 처음 사용된 이래로 혼용되다가 1872년 이후부터는 '()' 자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출처: 한국지명유래집 경상편]


< 화왕산 (火旺山) 억새 태우기 > : 2009년 정월 대보름 화왕산 억새 태우기 축제행사는 안전 불감증이 부른 총체적 인재가 발생한 화왕산 정상 억새밭이다. 1995년 2월 24일 부터 3년마다 한 번씩 열렸던 화왕산 억새태우기는 2009년 2월 9일 제 6회 행사 때 발생한 대형 화재로 인해 사망 7명과 중상 4, 경상 77명 등의 사상자를 낸 화왕산 참사로 기록이 된 곳이라고 한다. 그런데 100인 닷 컴 지역에서 본 세상 김훤주씨의 당시의 글을 읽어 보니 공감이 가는 이런 내용이 있다. 창녕군청 등은 화왕산에서 억새태우기를 하면서 그 근거로 전설과 세시풍속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날조 아니면 왜곡입니다. 억새 태우기 행사를 실행하려고 지어낸 얘기라는 말씀입니다. 창녕군청 홈페이지는 억새 태우기를 두고 화왕산이 예부터 불의 뫼라고 하여 이곳에서 불이 나야만 풍년이 깃들고 평안하다는 전설이 있다 합니다. 그리고 창녕군이 산림청에 낸 억새 태우기 행사 개요에는 세시풍속 재현이라는 표현이 있답니다. 그러니까 화왕산 산꼭대기에서 억새를 태우는 세시풍속이 예부터 있어왔다는 얘기가 됩니다. -중략- 전설과 지명 유래, 세시풍속과 문화재를 다룬 지면을 나름대로는 샅샅이 찾아봤으나 산에 불이 나야만 풍년이 깃들고 평안하다는 전설은 없었습니다. 반면 창녕 조씨들이 그 성을 얻은 자리가 화왕산 용지라는 전설만 곳곳에 있었습니다. 이런 얘기는 있습니다. 창녕읍 들머리에 조산(造山)이 있습니다. 풍수지리에 따라 창녕이 물 위에 둥둥 뜨지 않도록, 일부러 만들어() 앉힌 산()이라 합니다. 이처럼 창녕이 낙동강 바로 옆에 있기 때문에 이뤄진 이런저런 비보(裨補)와 관련된 이야기들입니다. 그러니까, 창녕에는 소벌(우포늪)을 비롯한 습지가 많고, 또 창녕읍과 바로 아래 대지(大池)면까지 큰물이 잦았기에 이를 비보하느라 산 이름을 화왕(火王 또는 火旺)이라 했다는 얘기 정도는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일까요? 날조 또는 왜곡이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화왕산 억새 태우기를 통해 물심 양면으로 이득을 얻을 수 있는 집단이 있어서, 그이들이 이런 식으로 전설을 꾸미고 세시풍속을 만들었다고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출처: 100인 닷 컴 지역에서 본 세상 김훤주, 김주완

 

 화왕산 등산 지도


 산행 후기

화왕산은 이번이 두 번째다. 처음 산에 다닐 때는 의례히 그렇듯 정확한 기록을 해 놓지 않아 어느 코스를 이용하여 다녀왔는지 알 수 없다. 다만 20051028일에 관룡산을 포함하여 다녀왔다는 기록만 있다. 지도를 놓고 기억해 보면 창녕 여자중학교를 시작으로 화왕산 정상에 올라 허준 세트장을 지나 관룡산으로 가서 하산 한 기억이 있을 뿐 아무런 기록이 없으니 화왕산 정상 인증도 할 겸 산악회를 따라 나섰다. 다행히 친구가 동행 해 주어서 든든한 마음으로 산행에 임할 수 있었다. 돌이켜 생각 해 보면 산행 시작점인 옥천식당에서 막걸리도 한 병 샀는데 여유부리면서 산행을 했다. 조금 아쉬움이 남는다면 관룡산 정상을 갔다 하산 했어도 충분한 시간이었는데 이제는 즐기는 산행도 하고 싶으니 정상 인증 한 것으로 만족해야 겠다.

  

 산행 사진 


 옥천 식당 도착 



 창녕 학생 수련원(폐교를 활용 한다고 한다.) 

 산행 시작 후 약 5분 후면 실질적인 산행 초입에 들어 선다.

 산행 시작 후 진달래 명산 답게..

 산행 시작 후 1시간 25분만에 첫 이정표를 만난다 (비들재 갈림길: 비들재1.5km, 화왕산 2.6km)

 685봉에 본 모습


 강인한 생명력

 685봉 모습



 창녕읍 방향



 배바위 뒤로는 화왕산





 산불 감시 초소 뒤로 배바위



 비들재 암릉길에 대해 설명 하는 안내문: 산의 긴 능선이 비둘기가 날개를 펴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비둘기 재라고 한 것이 비들재로 되었다고 하기도 하고 닭의 볏 처럼 생겼다하여 벼슬(볏)-비슬-비들로 변형 되었다고 한다.



 비들능선 뒤 돌아 본 모습


 배바위에 있는 이정표


 화왕산성 복원 공사 중




화왕산성(火旺山城):화왕산 정상부의 험준한 암벽을 이용해 골짜기를 둘러싼 포곡식산성이다. 현재 남아 있는 산성의 둘레는 약 1.8km, 동쪽 성벽의 대부분은 돌로 쌓았으며, 서쪽 성벽은 흙과 돌을 섞어 쌓았다. 성벽의 높이는 높은 곳이 4m 정도로 폭은 3~4m이다. 자연암벽의 틈새는 성벽을 높게 쌓았다. 산성의 출입구로 보이는 서문은 흔적도 찾기 어려우나, 동문 자리 좌우의 석벽은 잘 남아 있다. 이 석벽은 다른 부분의 성벽과 달리 가로 1m, 세로 1.6m나 되는 큰 돌로 쌓았다. 관룡사 쪽의 동남쪽 성벽에서는 무너져 내려 앉은 수문이 확인되고 있다. 산성에서는 남쪽으로 영산 방면과 낙동강이 한눈에 들어오고, 북쪽으로 현풍 방면을 통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이러한 위치는 이 일대에서 화왕산성이 가지고 있었던 군사적 중요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이미 조선 전기에 폐성되었다 하나, 임진왜란 때인 1595년에 다시 쌓았고, 그 이듬해에는 홍의장군 곽재우가 이 성을 근거로 의병활동을 하면서 내성을 쌓았다 한다. 성안에는 군량미를 저장하는 군창, 9개의 샘과 3개의 연못 등이 있었다 한다. 3개의 연못은 현재도 확인되며, 산성 중앙의 연못 주위에는 많은 건물터가 남아 있다. 창녕 조씨가 이곳에서 성을 얻었다는 이야기를 새긴 창녕조씨득성비도 있다.성안의 곳곳에서는 조선·고려의 자기편들과 신라·가야의 토기편들이 출토되고 있어, 가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장기간에 걸쳐 화왕산성이 군사적으로 이용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출처:위키백과 현지 안내문 편집

 

 

화왕산 정상을 등지고 본 모습





< 화왕산 (火旺山) 유래 > '화왕(火王)' 지명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757(신라 경덕왕 16)에 당시의 비사벌군(또는 비자화군)'화왕군'이라 불렀다고 한 데서 유래한다. 이를 따라서 '화왕산(火王山)'이라 한 것으로 보인다.세종실록지리지에서 "화왕은 창녕현의 진산"이라 하고 있다. 지명은 현재 임금 '()' 자가 아닌 성할 '()' 자를 사용하고 있다. 그 유래를 살펴보면 선조실록1598(선조 31) 기록에서 처음으로 '화왕산(火旺山)'이라 하여 기록하고 있다. 그 이후의 사료와 고지도에서는 두 글자를 혼용하고 있다가 1872년 지방지도이후부터는 '()' 자의 용례만 확인된다. 따라서 '()' 자 지명은 1598년에 처음 사용된 이래로 혼용되다가 1872년 이후부터는 '()' 자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출처: 한국지명유래집 경상편]

 

 


▲ 옥천 식당에서 산 동동주 한 잔의 여유 


▲ 화왕산 정상의 모습





▲ 화왕산성 동문


 

▲  화왕산성 동문 에서 관룡산 방향(옥천삼거리 방향 500m 지점)으로 가는 길에  MBC 창사 기념 특별기획 드라마 "허준"촬영 세트장이 있다. 허준이 나병환자를 돌보는 과정을 촬영한 세트장이라고 한다. 너와집, 초가집등이 있는데 이후 "상도"  "대장금"도 촬영 되었다고 한다.





 



 


 

▲  억새 필 때 다시 한 번 와 보고 싶다.

 




▲  관룡산은 예전에 다녀 왔기에 "옥천제1탐방로"를 이용 하여 하산 


 









▲  옥천 매표소 산행 마침

  화왕산 산행 마치고  창원 근처 가볼만한 곳 남지 낙동강 유채꽃 축제장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