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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기맥(進行中)

한강기맥 2구간. 호령봉→1358봉→주목삼거리→계방산→운두령

□ 한강기맥 2구간 

운두령→계방산→주목삼거리→1358봉→호령봉→수정암→상원사

◇ 산행지 : 강원도 홍천군 내면, 평창군 용평면 진부면 일원(대전에서 운두령까지 이동거리 235Km)

◇ 산행일자 : 2013. 8. 31(토). 날씨 : 맑음(시원한 바람)

◇ 산악회및 참가인원 : 대전시 산사모 회원 40명

◇ 산행거리 : 이탈거리 포함 약 20.3km

<2구간> 운두령→3.9→계방산→2.2→1462봉→5.6→1282.3봉→4.9→호령봉→0.7→상원사갈림길→3→상원사

◇ 산행시간 : 후미기준 8시간 소요 예상, 실제 산행시간 8시간 27분 <중식 15분 포함> 후미 9시간 25분 산행

◇ 시간대별 요약

- 05:00 대전 시청 출발

- 05:20 대전 IC 

- 08:15 운두령 도착

- 08:24 운두령 산행시작

- 09:31 전망대

- 09:48 계방산

- 09:59 주목삼거리

- 10:28 소계방산 갈림길

- 10:41 1462봉(봉평 424 2005 재설)

- 11:02 국립공원 표석

- 11:21 동녘골 갈림길(점심 15분)

- 12:02 뽀게지봉(1358봉) 방아다리약수 갈림길

- 13:57 1315봉(봉평 444 삼각점)

- 14:28 전망바위

- 14:45 동피골 갈림길

- 15:04 호령봉

- 15:23 1532봉(헬기장)

- 15:25 서대수정암 갈림길(상원사/비로봉 갈림길)

- 15:47 1403봉

- 16:00 1342봉(서대수정암 갈림길) 

- 16:33 상원사(10분 구경)

- 16:51 상원사 주차장 산행마침

- 19:00 남강막국수

- 19:44 뒤풀이 마치고 출발

- 22:40 대전 시청 도착  

 

특기사항

① 출입금지 구간등을 감안 편의상 역산행(계방산 주목 삼거리 이후 출입통제 비등 구간) 

② 동피골 갈림길 이후 오른 쪽 무릎 통증

③ 1315봉 이후 잡목으로 인해 산행 어려움

④ 후미조 상원사 주차장에서 우측 길로 내려가 많이 기다림

⑤ 산행 후 식당 이동 (수육, 막국수) 뒤풀이

 

산행 전 사전 조사

<이승복 기념관>:1968년 11월 2일 강원도 울진,삼척(蔚珍∙三陟)지구로 침투한 무장공비(武裝共匪)의 잔당(殘黨)이 北上하면서 12월 9일 평창군 용평면 노동리(龍平面 路洞里)에 이르러 공산주의를 선전하자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치는 이승복 군(당시 만 9세 되는 생일)과 어머니, 남동생, 여동생과 함께 무참하게 살해된 이승복군의 반공정신(反共精神)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종합기념관이다. 1975년 대관령(大關嶺)에 이승복 반공관(李承福反共館)을 세웠다가 유적을 단지화(團地化)하여 1982년 10월 ‘이승복 기념관’을 개관하여 분단의 아픔을 증언해주는 역사적인 공간이다. 연건평(延建坪) 548평의 6개 전시실(展示室)과 6∙25전쟁 당시 사용되었던 전투장비(戰鬪裝備) 등을 전시한 옥외전시장으로 이루어졌다.

 

<상원사>:오대산의 중대(中臺)에 있다. 705년(성덕왕 4)에 창건하여 진여원(眞如院)이라 하였다. 이 진여원은 보천(寶川)과 효명(孝明)의 두 왕자가 창건하였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오대산에 들어간 두 왕자 가운데 형인 보천은 중대 남쪽 진여원 터 아래에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그곳에 암자를 짓고 살았으며, 아우 효명은 북대(北臺) 남쪽 산 끝에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암자를 짓고 살았다.이 두 형제는 예배하고 염불하면서 수행하고 오대에 나아가 항상 공경스레 예배를 드렸으며, 날마다 이른 아침에 골짜기의 물을 길어다 차(茶)를 달여 1만 진신(眞身)의 문수보살(文殊菩薩)에게 공양하였다. 마침 신라의 왕이 죽자 나라사람들이 오대산으로 와서 두 왕자를 모시고 서라벌로 돌아가려 하였으나, 보천은 울면서 돌아가려 하지 않으므로 효명을 모시고 서울에 돌아와서 왕위에 추대하였다. 그 뒤 20여 년이 지난 705년 3월 8일 진여원을 처음으로 세웠다. 그 뒤 보천은 오대산을 나라를 돕는 신행결사도량(信行結社道場)으로 만들 것을 유언하였고, 그 유언에 따라 진여원에 문수보살상을 모시고 낮에는 ≪반야경≫과 ≪화엄경≫을 독송하게 하였으며, 밤에는 문수예참(文殊禮懺)을 행하게 하였다. 또, 결사의 이름은 화엄사(華嚴社)라고 하였고 복전(福田) 7원(員)을 두게 하였으며, 그 경비는 가까운 주현(州縣)에서 주었다고 한다. 고려시대는 어떠한 역사를 거쳤는지 거의 알 수가 없다. 다만, ≪동문선≫의 <오대상원사승당기 五臺上院寺僧堂記>라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고려 말 이 절은 극도로 황폐해 있었다. 그때 나옹(懶翁)의 제자 영령암(英靈庵)은 오대산을 유람하다가 터만 남은 상원사를 보고 중창(重創)의 원을 세웠다. 판서 최백청(崔伯淸)과 그의 부인 김씨(金氏)가 그 뜻을 듣고 재물을 희사하였으며, 1376년(우왕 2) 공사에 착수하여 이듬해 가을 낙성을 보았다. 그 해 겨울 선객(禪客) 33명을 모아 10년 좌선(坐禪)을 시작하였는데, 5년째인 1381년 5주년 기념법회를 열자, 승당의 불상이 방광을 하고 향내음을 풍겼다. 중창주 김씨 부인은 이 사실을 목도하고 더욱 불교를 믿는 마음이 지극해졌고, 토지와 노비를 시주하여 상원사가 영원히 존속될 수 있도록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척불정책 속에 전국의 사찰이 황폐되었지만, 오히려 이 절은 더욱 발전하였다. 척불정책의 대표적인 왕이었던 태종은 1401년(태종 1) 봄 상원사의 사자암을 중건할 것을 권근(權近)에게 명하여 불상을 봉안하고, 스님들의 거처로 사용할 3칸 집과 2칸의 목욕소를 만들었다. 그 해 겨울 11월 태종은 사자암에 왕림하여 성대한 법요식(法要式)과 낙성식을 베풀었다. 이때 태종은 권근에게 명하여, “먼저 떠난 이의 명복을 빌고, 후세에까지 그 이로움이 미치게 하여 남과 내가 고르게 불은(佛恩)에 젖고 유명(幽明)이 함께 의지하기 위함이니, 경은 기문(記文)하여 구원(久遠)한 세대에게까지 알게 하라.”고 하였다. 또한, 이 절은 세조가 문수동자(文殊童子)를 만나 괴질(怪疾)을 치료받고, 고양이에 의해 자객의 습격을 피하는 등의 일화가 서려 있는 세조의 원찰(願刹)이기도 하다. 이러한 깊은 인연 속에서 세조는 신미(信眉)와 학열(學悅)의 권유로 상원사를 중창하게 된다. 1465년(세조 11) 학열이 공사의 총감독을 맡았고, 인수대비(仁粹大妃)는 경상감사(慶尙監司)에 명하여 쌀 500석을 내어 강릉부(江陵府)로 운반하게 하고, 비단 1,000필을 함께 내어 공사비에 충당하게 하였다. 1466년 상원사의 낙성식을 가졌는데, 크게 동서로 나눈 가람형식에 각각 상실(上室)을 지었다.남쪽에는 다섯 칸의 누각을 짓고 범종을 안치하였으며, 동쪽에는 나한전(羅漢殿), 서쪽에는 청련당(淸蓮堂)을 지었다. 청련당의 서편으로는 재주실(齋廚室)을 지어 승당(僧堂)과 선원(禪院)으로 삼았다.석조(石槽)와 집기(什器) 등 현존하는 거의 모든 유물들은 이때에 마련된 것이다. 그 뒤 인수대비는 탱화를 봉안하기 위하여 다시 조(租) 150석을 하사하고, 신미를 초대 주지로 모시게 하였다.세조도 상원사의 역사가 이룩된 다음 상원사에 들러 의발(衣鉢)과 좌구(坐具) 등 수선(修禪)에 필요한 물건들을 하사하였다. 그 해 52명의 선객을 모아 수선을 시작하였다. 예종은 세조의 뜻을 따르기 위해 1469년(예종 1) 상원사를 세조의 원찰로 삼고, 전대에 하사한 전답에 대해서는 조세(租稅)하는 것을 금하였다. 배불정책을 펴온 조선왕조의 보호를 받으며 발전되어 온 이 절은 1946년 선원 뒤에 위치했던 조실(祖室)에서 시봉(侍奉)의 실화(失火)로 건물이 전소되었다. 1947년 당시 월정사의 주지였던 이종욱(李鍾郁)에 의해 금강산 마하연(摩訶衍)의 건물을 본떠서 중창하였다. 동북 45도 방향의 이 절은 전면 8칸, 측면 4칸의 ‘ㄱ’자형 건물이다. 6·25전쟁 때는 이 절을 지키면서 수행 정진하던 당대의 고승 한암(漢巖)에 의해 월정사 등의 다른 오대산 사찰과는 달리 전화를 면하였으며, 현재까지 전국 수도승들의 요람으로 중요시되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ㄱ’자형 선원을 중심으로 승당인 소림초당(少林草堂), 영산전(靈山殿), 종각인 동정각(動靜閣), 후원(後院) 등이 있다. 선원은 청량선원(淸凉禪院)이라고 하는데 오대산을 일명 청량산(淸凉山)이라고 하는 데서 유래된 것이다. 선원 안에는 석가여래좌상과 문수보살상, 국보 제221호로 지정된 목각문수동자상, 3구의 소형 동자상, 서대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목각의 대세지보살상(大勢至菩薩像)이 함께 봉안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 문수동자상은 상원사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으며, 오대산이 문수보살의 주처(住處)임을 증명하는 역사적 산물이다. 이 상은 세조가 직접 친견하였다는 오대산 문수동자의 진상(眞像)을 조각한 목조좌상이다. 이 동자상의 자세·수인(手印)·의문(衣文) 등은 불상과 동일하지만 얼굴 부분만은 동안(童顔)으로, 두발을 위에서 두 가닥으로 땋아 동자상을 나타내고 있다. 이 동자상에서는 총 23점의 유물이 나와서 보물 제793호로 일괄 지정되었다. 또한, 선실 바깥 마루에 안치되어 있는 신중상(神衆像)은 일명 동진보살(童眞菩薩)이라고도 하는데, 모든 신중들이 탱화로서 봉안되어 있는 데 대해, 이곳만이 유독 조상(彫像)으로 조성되어 있음이 특이하다. 높이 85㎝, 무릎폭 35㎝의 목조상으로서 머리에는 구름무늬의 보관을 썼고, 좌우 손은 문수동자와 같은 수인을 취하고 있는 점이 매우 특이하다. 의문은 투박하고 굵으며 양 어깨에서부터 전신을 무겁게 감싸고 있고, 가슴과 무릎, 다리 부분 등 여러 곳에 영락 등의 장엄구를 드리우고 있다. 형태는 완전히 의자형으로서 목제의자에 앉아 있다. 두 발 역시 투박한 신발에 싸여 군의(裙衣) 밖으로 나와 있으며, 조각수법은 대체로 경직된 맛을 보이고 있으나 특이한 신중상이란 점에서 주목된다. 이 상의 조성연대는 세조의 상원사 중건연대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된 적멸보궁(寂滅寶宮)과 선원, 승당인 소림초당(少林草堂), 영산전, 종각인 동정각, 후원 등이 있다. 영산전은 선원 뒤쪽에 있다. 선원 화재시에 불길을 모면한 유일한 건물이다. 산내에서 가장 오래된 법당으로서 전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이다. 전내에는 석가삼존상과 16나한상을 봉안하였고, 또 세조가 희사한 ≪고려대장경≫이 봉안되어 있는데, 모두 39함이다. 영산전의 옆에서는 화강암 석재들이 출토되어 현재 법당 옆에 쌓여 있다. 이 탑은 사방에 삼존(三尊)의 불보살을 가득 새겼으며, 옥개(屋蓋) 등에 층급을 나타내지 않고 낙수면에는 단순히 연화를 조각했을 뿐이다. 그리고 청량선원 옆에는 희귀한 당우가 있다. 승사(僧舍)로 사용되는 소림초당으로서 전면 6칸, 측면 4칸의 일반형 팔작집이다. 소림초당 앞에는 종각이 있다. 이곳에는 국보 제36호로 지정된 국내 최고(最古)의 상원사동종(上院寺銅鐘)이 있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상원사 [上院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적멸보궁의 유래> :석가모니가 설법을 펼친 보리수 아래의 적멸도량을 뜻하는 전각으로 석가모니 사후에 와서는 그의 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절, 탑, 암자 등을 뜻하는 말로 바뀌었다. 보통 절과 보궁을 헷갈려 통도사 절 자체를 적멸보궁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틀린 말은 아니지만 엄격히 따지자면 절 자체가 적멸보궁이 아니라, 절에서도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장소를 일컬어 보궁이라 한다. 석가모니의 사리를 진신사리라고 하며, 이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절에서는 석가모니, 즉 부처님이 계신다고 하여 다른 부처님을 상징할 수 있는 불상이나 조각을 절에 두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절의 시설은 전(殿)이나 각(閣)으로 나타내지만, (대웅전, 삼신각) 진신 사리를 봉안한 절은 보궁이라 하여 궁(宮)으로 높여 부른다. 적멸보궁은 여러 불교 문화재 중에서도 그 가치가 두드러지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현재 대한민국에 남아 있는 적멸보궁 중 가장 유명한 5개의 보궁을 꼽아 5대 적멸 보궁[2]이라 하는데 영축산 통도사의 적멸보궁, 오대산 중대(中臺)상원사에 있는 적멸보궁, 사자산 법흥사 (영월군)(法興寺)에 있는 적멸보궁, 정암사(淨巖寺)의 적멸보궁, 설악산 봉정암(鳳頂庵)에 있는 적멸보궁 등이다.

 

<5대 적멸보궁과 관련된 설화와 그 역사> :각각의 보궁과 관련된 전설은 모두 자장율사가 승려로 현신한 문수보살로부터 가사, 진신사리 100여과, 경전을 받으면서 시작한다. 해동에 불법을 밝히라는 보살의 말을 들은 후 율사는 친히 신라로 건너와 절을 창건하고 불법을 알리는 일에 앞장 서게 된다. 각각의 적멸보궁마다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비록 용과 봉황 등 전설의 동물들이 나와 현실성이 떨어지는 이야기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자체의 상징과 유래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기에 설화를 설명하고자 한다.

 

1.통도사

신라로 건너온 자장율사가 가장 먼저 세우게 된 절이 통도사이다. 통도사의 건립과 관련된 전설은 절 내부에 있는 연못인 구룡지로부터 비롯된다.예로부터 명당 자리였던 영취산 인근에는 많은 사람들이 궁궐이나 탑을 세우려 했으나, 아홉마리의 용들이 방해를 하는 바람에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건너온 후 절을 세울 터를 찾다가, 그가 직접 날린 나무 오리가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칡꽃을 물어오는 것을 보고, 겨울인데도 생생한 기운이 살아 있는 명당임을 알아본다. 처음에 율사는 구룡지에서 용들을 설득하여 나가게 하려하지만, 용들이 말을 듣지 않자, 화(火)자를 종이에 쓰고 연못에 넣은 후 진언을 외워 물을 끓게 한 후 용들을 좇아낸다.그 중 3마리는 하늘로 올라가려하다 죽고 5마리는 골짜기로 숨는데 이 5마리 용들이 숨은 곳을 오룡곡이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이 먼 용 한마리가 도망가지 못해 자장율사에게 살려달라고 빌자, 이를 불쌍히 여겨 연못을 지키도록 하니 이것이 구룡지의 유래이며,통도사 내부에 있는 구룡지는 용이 지키기 때문에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줄지 않고 홍수가 나도 물이 불지 않는다고 한다.이 이후 통도사는 남부의 대표적인 불교 중심지로써의 역할을 하게 되며, 불,법,승, 중 불(佛)을 상징하는 불교의 3대 상징 성지 중 하나가 된다. (법: 합천 해인사, 승: 송광사) 임진왜란 때 왜군의 침략으로 인해 절 외부의 전각이 손상되는 등 큰 피해를 입지만, 사명대사가 통도사에 있던 진신사리 중의 일부를 정암사로 옮겨놓으면서, 진신사리의 훼손은 막을 수 있게 된다.

 

2.오대산 중대 상원사

자장율사가 오대산을 개산한 이후로, 오대산에도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었다하여 불교 성지로 추앙받았으나, 이 사리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는 정확하지 않아, 신비로운 전설처럼 전해진다. 상원사는 이 사리를 보호하기 위한 수호령 역할을 맡는 절이며, 이 상원사의 건립과 관련해서는 삼국유사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자면, 상원사는 선덕왕의 두 왕자에 의해서 세워졌는데, 처음에는 진여원이라 불렀다. 자장율사가 개산한 뒤로 오대산이 불교 성지로 그 이름을 빛내면서 마침내 오류성중, 곧 다섯 부류의 성인들이 머무는 곳으로 신앙화 되기 시작하던 즈음이다. 절을 짓고 난 후 두 왕자는 그 곳에서 수행을 했는데, 신문왕이 죽은 후 후계 문제로 다툼이 끊이질 않자, 오대산의 두 왕자를 찾아왔고 그 중 하나가 왕이 된 후 진여원을 상원사로 개명했다. 고려시대에 들어 상원사에 대한 설명은 오히려 찾아보기 힘들다. 국교가 불교이니만큼 불교 성지에 대한 중흥이 일어날 법도 한데, 더 이상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후삼국 시대를 전후로 소실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고려 후기 이색의 오대상원사승당기라고하는 기행문에서 나옹스님의 제자로 알려진 영로암 스님이 재건했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현재의 상원사는 적어도 고려 말 이후의 것이다. 그 이후 조선 시대의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으로 인해 상원사는 자칫하면 소외된 절이 될 뻔 했으나. 세조와의 인연으로 다행히 그 명성을 이어가게 된다.현재 상원사는 월정사에 포함된 절이다.

 

3.법흥사

사자산 법흥사는 선덕여왕 12년에 자장율사가 흥녕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 흥녕사는 자장율사가 창건한 적멸보궁 중 가장 오래 머물던 곳으로 직접 율사가 수행하던 토굴이 그 뒤에 있다. 율사가 절을 세운 후에 신라의 선승들이 모여 사자산에 신라 말 구산선문 중의 하나인 사자산문을 연다. 이 사자산문은 특히 흥녕선원으로 불리며, 한국불교사의 명맥을 이어가는 선원 중의 하나로 자리잡으며, 불법의 계승이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하였다. 흥녕사는 고려 의종(1163)년에 중창하였으며,조선 영조,정조,헌종 때까지 적멸보궁, 선문의 역할을 다해왔다.하지만 워낙 오랜 역사를 견뎌왔기에 절의 형태는 폐사지에 가까웠다. 1902년에 대원각사에 의해 법흥사로 개칭되고 재건되었다.

 

4.정암사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이다. 우리 나라 5대 적멸보궁(寂滅寶宮)의 하나로서 갈래사(葛來寺)라고도 한다. 신라의 대국통(大國統)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한 사찰이다. 사적기(事蹟記)에 의하면 자장율사는 말년에 강릉 수다사(水多寺)에 머물렀는데, 하루는 꿈에 이승(異僧)이 나타나 “내일 대송정(大松汀)에서 보리라.”라고 하였다. 아침에 대송정에 가니 문수보살(文殊菩薩)이 내현하여 “태백산 갈반지(葛磻地)에서 만나자.” 하고 사라졌다. 자장율사는 태백산으로 들어가 갈반지를 찾다가, 어느 날 큰 구렁이가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을 보고 제자에게 ‘이곳이 갈반지’라 이르고 석남원(石南院)을 지었는데, 이 절이 정암사이다. 이 절에는 자장율사와 문수보살 사이에 있었던 유명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자장이 이곳에서 문수보살이 오기를 기다리던 어느 날, 떨어진 방포(方袍)를 걸친 늙은 거사가 칡 삼태기에 죽은 강아지를 담아 와서 자장을 만나러 왔다고 하였다. 시자(侍者)가 스승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을 나무라자 거사는 스승에게 아뢰기만 하라고 말하였다. 시자가 자장에게 이 사실을 알렸으나 미처 깨닫지 못하고 미친 사람으로 생각하여 만나지 않겠다고 하였다. 거사는 “아상(我相)을 가진 자가 어찌 나를 알아보겠는가.” 하고 삼태기를 쏟자 죽은 강아지가 사자보좌(獅子寶座)로 바뀌었으며, 그 보좌에 올라 앉아 빛을 발하면서 가 버렸다. 이 말을 들은 자장이 황급히 쫓아가 고개에 올랐으나 벌써 멀리 사라져 도저히 따를 수 없었다. 자장은 그 자리에 쓰러진 채 죽었는데, 뼈를 석혈(石穴)에 안치했다고 전한다. 또, 창건에 관한 일설에는 자장이 처음 사북리 불소(佛沼) 위의 산정에다 불사리탑(佛舍利塔)을 세우려 하였으나, 세울 때마다 붕괴되므로 간절히 기도했다.그랬더니 하룻밤 사이에 칡 세 줄기가 설상(雪上)으로 뻗어 지금의 수마노탑(水瑪瑙塔)·적멸보궁·사찰터에 멈추었으므로 그 자리에 탑과 법당과 본당(本堂)을 세우고, 이 절을 갈래사라 하고 지명을 갈래라고 했다고 전한다. 이 절은 창건에 얽힌 전설 외의 역사는 거의 전하지 않는다. 절 입구에는 일주문(一柱門)이 세워져 있고, 일주문을 들어서면 왼편에는 근년에 완공된 선불장(選佛場)이 있다. 오른쪽에는 고색(古色)의 적멸보궁이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수마노탑을 등에 지고 있다. 중간 도량가에 종루가 있고, 선불장 옆에는 무량수전(無量壽殿)과 자장각(慈藏閣)·삼성각(三聖閣)이 있다. 이 중 적멸보궁은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석가모니불의 사리를 수마노탑에 봉안하고 이를 지키기 위하여 건립한 것으로, 수마노탑에 불사리가 봉안되어 있기 때문에 법당에는 불상을 모시지 않고 있다. 이 보궁 안에는 선덕여왕이 자장율사에게 하사했다는 금란가사(錦襴袈裟)가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적멸보궁 뒤쪽의 수마노탑은 보물 제410호로 지정되어 있다. 자장율사가 643년(선덕여왕 12) 당나라에서 돌아올 때 서해 용왕이 자장율사의 신심에 감화되어 마노석(瑪瑙石)을 배에 싣고 동해 울진포를 지나 신력으로 갈래산에 비장해 두었다가, 자장율사가 이 절을 창건할 때 이 돌로써 탑을 건조하게 했다고 하여 마노탑이라 하였다 한다. 또한, 물길을 따라 이 돌이 반입되었다고 해서 수 자를 앞에 붙여 수마노탑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 탑을 세운 목적은 전란이 없고 날씨가 고르며, 나라가 복되고 백성이 편안하게 살기를 염원하는 데 있다고 한다. 또 이 절에는 금탑과 은탑의 전설이 있다. 정암사의 북쪽으로 금대봉이 있고 남쪽으로 은대봉이 있는데, 그 가운데 금탑·은탑·마노탑의 3보탑이 있다고 한다. 마노탑은 사람이 세웠으므로 세인들이 볼 수 있으나, 금탑과 은탑은 자장율사가 후세 중생들의 탐심(貪心)을 우려하여 불심이 없는 중생들이 육안으로 볼 수 없도록 비장(秘藏)하여 버렸다고 전해진다. 자장율사는 그의 어머니에게 금탑과 은탑을 구경시키기 위하여 동구에 연못을 파서 보게 했는데, 지금의 못골이 그 유지이며 지상에는 삼지암(三池庵)이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 밖에도 적멸보궁 입구의 석단에는 선장단(禪杖壇)이라는 고목이 있다. 이 나무는 자장율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심은 뒤 수백 년 동안 자랐으나 지금은 고목으로 남아 있다. 신기한 점은 고목이 옛날 그대로 손상된 곳이 없다는 것인데, 다시 이 나무에 잎이 피면 자장율사가 재생한다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5.봉정암

자장율사가 진신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길지를 찾던 도중, 봉황이 한 마리 나타나나서 율사의 눈을 끌었다. 날아가는 봉황을 자장율사는 계속해서 따라갔고, 그러던 중 부처님을 닮은 바위를 찾게 되었다. 봉황은 그 부처님을 닮은 바위의 이마부분으로 사라졌고, 율사는 곧 그 주위가 수려한 산들로 둘러싸인 길지임을 알게 되었다. 그 이마 부분에 부처님의 뇌사리를 봉안하고 암자를 세우니, 이 것이 봉정암의 유래다. 봉정암은 말 그대로 봉황이 부처님의 이마로 사라졌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특히 봉정암은 암자나 고승들의 수행처로 이름 높은 곳이다. 자장율사가 봉정암을 세운 이래로, 원효, 보조 등의 국사가 수행했으며, 그 외에도 많은 학자들이 공부를 위해 봉 정암을 찾았다. 워낙 산세가 험하기 때문에 봉정암이 현재의 모습처럼 절의 모양을 갖추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신라 문무왕 때 원효대사가 중건에 앞장 선 후 고려 명종에 이르러 지눌국사가 다시 재건하였으며, 6.25이전까지 여러 스님들과 불교 신도들이 7차례에 걸쳐 절을 세우는 것을 돕기 위해 모금 활동을 했다. (출처:다음 백과사전)

 

산행지도및 고도표

 

 

 ▲ GPS가 작동 되지 않아 운두령에서 전망대 까지는 기록 되지 않은 내용으로 약 3Km 이상 빠진 내용이다. 

 ▲ GPS가 작동 되지 않아 운두령에서 전망대 까지는 기록 되지 않은 내용으로 약 3Km 이상 빠진 내용이다. 

 

산행 후기

이번 구간은 지난 구간에 이어 계방산 쪽을 마무리(?)하는 구간이다. 대부분의 산악회에서는 무박으로 한 번에 하는 곳이 많은데 우리 산악회에서는 두 번에 걸쳐 나눠 한다. 그 이유는 장시간 힘든 산행 때문에 나눈 것은 아니고, 밝은 시간에 함으로서 주변의 확실한 경관과 가보지 못하는 오대산 주변을 가보기 위해서인데 “오대산~계방산 구간”은 한 번에 하는 것보다 두 구간으로 나누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낮다고 생각한다. 다만 비교적 늦은(?) 새벽 5시 출발이라 지난번과 같이 대전에 늦게 도착 할 것 같아서 그것이 좀 염려 된다. 하지만 단체 생활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듯이 산악회의 시간에 맞춰 출발 준비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다.

알람 소리에 깨어 이번엔 지난번과 달리 아침식사를 간단히 하고 차를 끌고 시청에 도착 하니 조금은 여유롭다. 창가에 앉기 싫어 중앙 자리에 앉았는데 “우와~! 오늘은 횡재(?)한 날이다. 끝까지 혼자 앉았으니 말이다. ㅋ ㅋ”

버스가 시청을 출발하고 3시간 20분 만에 운두령에 도착했는데 부족한 잠 때문인지 눈이 떠지지 않는다. 애써 잠을 깨워 등산화를 신고 산행 준비를 마치고 운두령에 내려섰다. 운두령엔 2006년 2월 12일 계방산을 가기 위해 왔었고, 이번이 두 번째인데 당시엔 기록의 소중함을 몰라 계방산 산행 시간 및 등산 루트 등 아무런 기록도 안했고 “상호와 기대와 함께 운두령에서 계방산에 올랐다”는 기억밖에 없으니 기록의 소중함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산행기를 남겨야겠다.

운두령 계단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 산행은 시작되었다. 처음엔 완만한 산길이어서 어느 정도 선두를 따라 갔는데 잠시 볼일을 보고나니 아니나 다를까 후미에 묻혀 간다. 무거운 발걸음을 재촉하여 깔닥고개를 넘어서고 나니 병채 형님이 보인다. 정상에서 인증을 하고 병채 형님과 함께 하기 시작했는데 ㅋ ㅋ 주목 삼거리에서 선두는 그사이 알바를 했나 보다. 이후 용진 형님과 돈민이와 함께했는데 선두가 치고 나가지 못한다. 이유를 알고 보니 컨디션이 안 좋은 회장님 앞을 감히(?) 누가 앞서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후 산길도 외길이거니와 회장님 덕분에 동녘골 갈림길까지는 거의 선두에 묻혀 산행을 했는데 넷이서 동녘골 갈림길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난 이후엔 모두 앞서가고 혼자서 또 산행을 해야 했다. 후미는 멀리 떨어져 있으니 그냥 편히 혼자서 편안한 마음으로 산행을 했는데 효령봉 가기 전의 심한 잡목이 발목을 붙잡고 지친 발걸음이 힘겨웠지만 효령봉에 도착하니 지난 구간의 감회가 새로웠다. 효령봉에서 인증을 하고 서대수정암으로 서둘러 갔는데 서대수정암 갈림길에서 조금 더 진행 하다 보니 선두가 내려온다. 선두인 사인검님이 의아해 하는 모습을 보더니 “수정암 구경은 했느냐”고 물어 본다. “선두에서 놓고 온 표식을 보고 내려오는 중”이라고 하니 “되돌아가야 한다”고 한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는데 광명님은 내가 가면 갈 눈치다. “난 도저히 발걸음이 무거워 안 간다”고 하니 광명님도 다음에 간다고 해서 상원사로 향했는데 후미를 한 시간 이상 기다려야 했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다녀왔어야 했다. 암튼, 이번 산행에서 아쉬운 건 서대수정암에 못간 거지만 언젠가 오대산에 갈 기회가 되면 산길을 확실히 알아 두었으니 서대수정암엔 꼭 다녀와야겠다.

 

산행 사

▲ 운두령 도착

운두령(雲頭嶺:1089m) :계방산(桂芳山) 자락에 있는 고개로 강원도 홍천군 내면과 평창군 용평면의 경계에 위치한다. 남한에서 자동차로 넘나드는 고개 중 만항재(해발 1,330m) 다음으로 두 번째 높다. 고개가 높아 정상 부위에 늘 구름이 걸쳐 있어 항상 운무(雲霧)가 넘나드는 것처럼 보인다는 뜻에서 운두령이라는 지명이 유래하였다. 31번 국도가 지나며, 이승복 기념관을 지나 노동계곡 입구부터 홍천 방면으로 경사와 굴곡이 심한 운두령 고개가 시작된다. 정상에는 평창군에서 마련한 쉼터가 있으며, 이곳에서 북쪽으로 홍청군 내면과 서쪽으로 회령봉(會靈峰)을 조망할 수 있다.

 

운두령에서 계방산 진행 방향의 모습

 

오대산국립공원은 1975년 11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강원도 평창군, 강릉시, 홍천군 3개의 시/군에 걸쳐 있다. 계방산은 2011년 1월 오대산 국립공원에 편입되었고, '한국의 알프스'라고 불릴 정도로 겨울 명산 중 하나로 꼽힌다.

▲ 운두령 표석 (뒷면엔 "운두령 해발 1089M 홍천군"이라 적혀 있다)

▲ 산행 출발 전 단체 사진

▲ 계단에서 내려다 본 운두령의 모습

운두령에서 산행 시작 후 약 35분 정도 진행하면 아래 이정표가 있는 쉼터에 도착한다.(아래 이정표가 있고 이후 전망대 까지 깔딱고개가 이어진다)

▲ 쉼터에 있는 이정표(이곳에서 전망대 까지는 약 30분, 계방산 정상 까지는 약 50분 정도 소용 된다)

▲ 운두령에서 3Km 떨어진 곳에 있는 이정목 (이때 부더 GPS가 작동 된 것 같다)

▲ 설악산 까지 조망 된다 했는데 운무로 인해 조망은 하나도 볼 수 없었고 조망사진으로 대신 보고.. 

▲ 전망대의 모습( 운두령에서 1시간 5분 소요됨)

▲ 전망대에서 바라 본 계방산 방향인데 운무로 인해 ㅠ

▲ 전망대에서 약 15분 정도 진행 하면 나오는 계방산 정상 (운두령 산행 시작 1시간 25분 소요됨)

▲ 계방산은 2006년 2월 12일에 오고 이번이 두 번째다. 당시엔 산행기록의 소중함을 몰라 인증은 물론 산행 시간 또한  남기지  않았는데 그래선지 당시엔 운두령으로 올랐다가 어디로 하산 했는지 기억이 없다. 산악회를 따라 왔으니 원점회귀는 하지 않았을 것이고아마도 짧은 코스로 하산 하지 않았을까 추정 해 보니 기록의 소중함을 새삼 느낀다. 

▲ 계방산(桂芳山:1,577m):강원도 홍천군 내면과 평창군 용평면의 경계에 위치한 산으로, 산림청이 선정한 우리나라 100대 명산의 하나로 남한에서 4번째 높은 고개인 운두령(1,089m)이 산자락을 휘감고 있다.『홍천 너브내의 숨결』에는 "태백산맥, 오대산 줄기로서 산이 크므로 계방산이라 한다."는 기록이 있으며, 『해동지도』에는 "남한강 본류는 조양강과 평창강 이 영월에서 합쳐 이루어진다. 조양강은 대덕산(1,307m)에서 발원하는 골지천, 오대산에서 발원하는 오대천 등이 합쳐 이루어지고, 평창강은 계방산에서 발원하여 영월지방에서 주천강과 만나는데, 조양강과 평창강은 영월 부근에서 동강(東江)과 서강(西江)이라 불린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곳에는 계방천(桂芳川)이 흐르고 있다. 하천 유역 면적이 넓고 수위가 낮아 가족 단위의 휴양객이 많다. 계방산은 한라산, 지리산, 설악산, 덕유산에 이은 남한 제 5위봉이다. 계방산 서쪽에는 남한에서 자동차가 넘는 고개로서는 두 번째 높은 운두령(해발 1,089m)이 있으며, 지난 산행 시 고생 했던 깊은 골짜기 을수골이 있고, 남쪽에는 몸에 좋다는 방아다리 약수와 신약수 등 약수가 두 곳이나 있다. 계방산은 각종 약초와 야생화가 자생하는 곳으로, 특히 산삼이 유명하여 사철 심마니들이 모여드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이산에는 회귀목인 주목, 철쭉나무들이 군락을 이루며 자라고 있는 곳으로 산세가 설악산 대청봉과 비슷하며, 이 일대가 생태계 보호지역으로 지정될 만큼 환경이 잘 보호되어 있는 곳이다. 계방산은 우리나라에서 14번째 남한 땅에서 5번째 높은 산이다. 북한쪽에 2000m가 넘는 고봉들이 많이 있다. 산 높이로 정리를 해보면 2000m가 넘는 산은 모두가 북한 땅에 있다.백두산 2,744m, 관모봉 2,541m, 북수백산 2,522m, 차일봉 2,506m, 백산 2,476m 남포태산 2,435m, 대연지봉 2,360m이고. “1500m에서 2000m 미만에 산 7군데”는 한라산 1,950m, 지리산1,915m, 묘향산1,909m, 설악산 1,708m, 금강산 1,638m, 덕유산 1,640m, 계방산 1,577m이 있다. 계방산 정상에는 삼각점(△봉평 11, 2013 재설)이 있으며 정상석과 돌탑, 이정표 등이 있다.

▲ 계방산 정상의 삼각점

▲ 계방산 정상의 이정표(한강기맥은 지동차 야영장 방향이고 권대감 바위가 있는 곳은 계방산 주차장 방향으로 가야 한다)

촛대승마

▲ 주목 삼거리 (계방산 정상에서 약 10분 정도 진행 하면 나오는 곳으로 이승복기념관과 자동차 야영장 갈림길이다. 한강 기맥 진행 방향은  금줄을 넘어 직진 방향이고  오대산 비로봉까지 한강기맥 마루금은 출입통제 구간이다)

 

<계방산 전설>: 계방산에 용맹스럽고 무서운 권대감이란 산신령이 살았는데 어느 날 말을 타고 달리다 칡넝쿨에 걸려 넘어지자 화가 난 권대감이 칡이 살지 못하도록 부적을 써서 던진 이후 계방산에는 칡이 자라지 않는다고 전하며 부적이 권 대감 바위라는 전설이 있다 한다. 그런데 계방산에 칡이 자생하고 있는 모습을 선답자의 사진에서 많이 볼 수 있으니 전설은 그냥 전설일 뿐이다

▲ 주목 삼거리 (이승복기념관과 자동차 야영장 가는 길에 있는 주목)

 

주목(朱木) :일본이 원산지이며 북반구에서 널리 재배되고 있으며 꽃말은 “비애, 고상함, 죽음”이다. 비교적 해발이 높은 산에서 자라고 있으며 나무껍질과 속살이 유난히붉어 주목이라고 부른다. 비교적 생장이 느린 편이지만 나무 중에서도 수명이 가장 길고 수명이 다해서도 고급 가구의 재료로도 사용되고 있을 만큼 그 쓰임새도 다양해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이란 별명이 붙은 나무이다.

한국에는 주목과 설악눈주목(T. caespitosa) 등이 자라며 그밖에 서양주목을 외국에서 들여와 정원 등에 심고 있다. 주목은 바늘잎이 달리며 4월에 꽃이 피어 8~9월에 열매가 익는데, 열매는 컵 모양의 붉은색 종의(種衣)에 둘러싸인다. 잎을 말린 주목엽(朱木葉)은 신장병과 위장병 치료나 구충제로 쓰이지만 줄기와 잎에 있는 혈압을 낮추고 심장 박동을 정지시키는 탁신(taxine)이라는 알칼로이드 물질로 인해 부작용을 일으키기도 하므로 유의해야 한다. 이 물질이 없는 것으로 알려진 열매는 날 것으로 먹거나 진해제로 사용한다. 최근에는 탁신이 항암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4월에 꽃이 피며 수꽃은 1개씩 달리며 6개의 비늘조각으로 쌓여있고 암꽃은 1~2개씩 달리며 10개의 비늘 조각으로 쌓여있다. 9~10월에 붉은 열매가 달리며, 열매의 길이는 5mm정도의 둥근 달걀모양이며 빨간 가종피 안에 종자가 들어있다. 열매는 맛이 쓰고 독이 있으며 약재로 쓰이고, 목재는 단단하면서 탄력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붉은 줄기에서 주출한 액으로 궁녀의 옷감을 치장하거나 임금의 곤룡포를 염색할 때 물감으로 썼다고 한다.

▲ 1358봉 까지는 선두와 일렬로 진행 했다.

▲ 소계방산 갈림길(?): 이정표가 없으니 시간상 소계방산 갈림길 같다.

 

소계방산 갈림길: 소계방산(小桂芳山1,490.3m)은 강원도 홍천군 내면 창촌리 오대산 밑에 있는 소한동에 있는 산이다. 한강기맥이 호령봉부터 약 9km 거리에 이른 지점(계방산 전방 0.8km)인 1551m봉에 이르면 북으로 능선 하나를 분기시킨다. 이 1551m봉에서 분기한 능선은 1.7km 거리인 1390m봉에서 Y자형으로 갈라진다. 북동으로 갈라진 능선이 1km 거리에 이르러 들어올린 산이 소계방산(1,490.3m)이다. 소계방산에서 계속 이어지는 능선은 약 2km 거리인 1388m봉을 지나면서 방향을 북서쪽으로 틀어 약 10km 거리인 광원리에 이르러 여맥들을 계방천과 자운천에다 가라앉힌다. 소계방산에서 광원리로 이어지는 능선을 경계로 동쪽은 을수골이고, 서쪽은 소한동계곡이다. 소한동계곡 서쪽은 소계방산이 북동으로 갈라지는 1390m봉에서 소계방산 반대 방향으로 뻗어나간 북서쪽 능선이 감싸주고 있다. 북서로 이어지는 능선은 약 11km 거리인 자운천과 소한동 계류가 합수되는 광대평에 이르러 여맥들을 가라앉힌다. 소계방산(小桂芳山1,490.3m) 은 아직 등산인들 발길이 거의 닿지 않은 산이다. 워낙 유명한 계방산(桂芳山1,577.4m ) 그늘에 가려진 이유도 있지만, 산으로의 접근이 만만치 않은 오지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산에는 아직 뚜렷한 등산로가 없다. 산중에는 돼지들이 많은 탓에 여름철 산행의 복병인 진드기가 많이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 투구꽃(이번 산행 중 가장 많이 본 야생화다)

 

투구꽃: 미나리아재비과(―科 Ranunculaceae)에 속하는 다년생초이며 키는 약 1m에 이르며 마늘처럼 생긴 덩이줄기가 있다. 어긋나는 잎은 단풍나무 잎처럼 3~5갈래로 잎자루 근처까지 깊게 갈라지며 갈라진 조각 가장자리에는 톱니가 있다. 자주색의 꽃은 9월경 가지 끝에서 총상(總狀)꽃차례를 이루며 무리져 피는데, 투구처럼 생겨 투구꽃이라고 한다. 꽃잎은 꽃잎처럼 보이는 꽃받침잎 속에 들어 있어 잘 보이지 않고, 수술은 많으며 암술은 3~4개이다. 타원형의 열매는 골돌(蓇葖)로 익는다. 덩이줄기를 초오(草烏)라고 하여 중풍의 치료제로 쓰는데, 놋젓가락나물(A. ciliare)·지리바꽃(A. chiisanense)·진돌쩌귀(A.seoulense)·세잎돌쩌(A.triphyllum)·그늘돌쩌귀(A. uchiyamai)의 덩이줄기도 초오라고 하여 투구꽃의 덩이줄기처럼 사용한다. (출처 다음백과사전 申鉉哲 글)

▲ 삼각점(△봉평 424. 2005 재설)이 있는 1462.3봉

▲ 삼각점이 있는 1462봉에서 약 5분 진행 하면 주왕지맥 갈림길이다.

 

주왕지맥(住王枝脈) : 한강기맥의 계방산(1577m)의 동쪽 2.3km(1462m 삼각점에서 동쪽 약 210m 지점)에서 남쪽으로 가지를 쳐 내려가며 백적산(1141.2m), 잠두산(1243.2m), 백석산(1364.6m), 주왕산<住王山. 2003년 이전엔 중왕산(中旺山)이라 했다.1376.1m>, 청옥산(1255.7m), 삿갓봉(1055.4m), 접산(835.3m), 발산(675.0m)을 일구고 영월읍 하송리에서 남한강에서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약 83.1km되는 산줄기다.

▲ 국립공원 표석

▲ 1209봉 오름 전 "동녘골 갈림길" 이곳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이후 1209봉은 약 오름이고 1209봉에서 약 15분 정도 진행 하면 사거리가 나오는데 그곳이 진행 방향 좌측은 내린천 계곡으로 이어지는 길이고, 우측은 방아다리 약수터로 이어지는 갈림길이다.

▲ 1358봉(일명  뾰지게봉? 뽀지게봉?):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척전리와 홍천군 내면 광원리 경계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정상에는 헬기장과 삼각점(△도암 301 2005 재설)이 있는데 지도상에는 1,358봉으로 표기되어 있다. 선답자의 산행기를 보면 뽀지게봉이라고 많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곳에서 한강기맥 호령봉 방향은 진행 방향 좌측이다. 호령봉에서 계방산 방향으로 진행시 이곳에서 잘못하면 방아다리 약수터 방향으로 진행할 우려가 있는 곳이므로 주의가 필요한 곳이다. 계방산에서 왔다면 진행 방향 우측으로 가면 방아다리 약수터가 있는 진부면 척천리로 가는 길이다. 뽀지게봉의 유래를 찾아 보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빛바랜 표지판에는 1996년10월 8일 18시경 침투한 무장공비들이 산나물을 채취하던 주민 3명을 살해하고 도주한 지역으로 주변에 수상한 사람을 발견하면 즉시 신고 바란다는 내용과 무장공비들의 도주로를 적어 놓았는데 자세히 봐야 보인다.

▲ 방아다리 약수의 모습(선답자의 산행기에서 펌)

▲ 방아다리 약수의 모습(선답자의 산행기에서 펌)

 

방아다리 약수(藥水):평창군 진부면 척천리(珍富面 尺川里)에 있는 약수로 물빛은 푸르고 맛은 약간 떫으며 쏘는 듯한 느낌이 있으며 위장병, 피부병, 빈혈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방아다리’는 옛날 디딜방아의 모양을 닮은 데서 유래했다고도 하고, 이곳에서 화전(火田)을 일구고 살던 아낙네가 바위 한가운데 움푹 팬 곳에 곡식을 넣고 방아를 찧으려 하자 바위가 갈라지면서 약수가 솟았다고도 하고, 病으로 고생하던 한 노인이 이곳에서 기거(起居)하던 중 꿈에 “네가 누워있는 자리를 파보라”는 산신령(山神靈)의 계시(啓示)를 받고 땅을 파 솟아나는 물을 마시고 병이 완쾌(完快)되었다고도 하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 1358봉에서 약 10분간 진행 하면 나오는 활산목 갈림길(삼거리)이다.선답자들의 산행기를 보면 나무에 '등산로 확인' 이라는 표지판이 걸려있는 곳인데 누군가 훼손 했는지 나무엔 아무런 것도 없다. 호령봉 방향 한강기맥 마루금은 좌측 내리막길이고 우측 평탄한 길은 활산목, 탑동리 방향 이다.

▲ 1282봉까지 20여명이 한 줄로 진행 했다.

▲ 이 표시가 있으면 한강기맥 길을 잘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1315.2봉 가기 바로 전 까지는 선두와 같이 갔는데..

▲ 1315.2봉에 있는 삼각점 

 

 

▲ 전망바위(운무로 인해 전망은 ㅠ)

▲ 전망바위 지나 진행 방향

 

 

 

▲ 동피골 갈림길(언젠가 기회가 되면 동피골에서 동대산으로 올라 두로봉, 상왕봉, 비로봉, 호령봉 지나 동피골로 하산하고 싶다.)

 

 

▲ 칼잎용담

▲ 군-A-108 표시의 헬기장이 있는 호령봉 정상. 지난 구간 여기까지를 한강기맥 1구간으로 끊었고 감자밭등으로 하산하다 큰대산골로 잘못 내려가 고생 했던 곳인데, 오늘은 운두령에서 역방향으로 진행하여 여기서 2구간을 마치고 서대수정암 방향으로 하산 한다. 서대수정암 방향 하산로는 앞에 보이는 비로봉 방향으로 약 20분 정도 더 진행하다가 비로봉/상원사 갈림길 이정표(파손된 상태)가 있는 곳에서 우측 방향으로 내려가야 한다.

▲ 호령봉에서 본 비로봉

 

 

 

▲ 호령봉에서 약 15분 진행 하면 나오는 1532봉 (관리를 하지 않아 헬기장이라고 하기엔 잡목이 너무 많다) 

▲ 호령봉에서 약 20분 진행 하면 나오는 파손 된 이정표(서대 수정암은 상원사 방향 우측으로 진행 해야 한다) 비로봉은 직진 방향

 

▲ 서대수정암 갈림길(상원사/비로봉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약 35분 정도 진행 하면 좌측으로 내려서야 한다. 내려서다 좋은(?) 등산로를 만나면 좌측으로 내려가지 말고 우측으로 다시 가야 서대수정암을 갈 수 있다. 나는 좌측으로 진행하여 내려오다 서대수정암을 다녀오는 선두 일행을 만났는데 이미 지쳐 있어 우통수와 서대수정암은 다음 기회로 미뤄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후미를 많이 기다린 편이었는데 갔다 올 걸 약간 후회 된다. 아래 사진은 함께한 산악회 사인검님 사진에서 발췌하였다. 두고 두고 아쉬운 부분으로 남을 것 같다.

▲ 우통수 물 맛을 보고 왔어야 하는데 ㅠㅠ

▲ 우통수(于筒水) : 우동수(于洞水)는 조선시대에 한강의 발원지라고 여겨져 왔던 우통수(于筒水)를 가리키는 말로,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산 1번지 오대산(五臺山)의 오대(五臺) 중 서대(西臺)에 위치한 수정암(水精庵)에 있는 샘물을 가리킨다. 우동수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권3 탑상4 명주오대산보질도태자전기(溟州五臺山寶叱徒太子傳記)에 기록이 있다. 이에 의하면 정신태자 보질도와 그 아우 효명태자가 오대산에 들어가 매일 이른 아침 골짜기의 물(于洞水)을 길어다 차를 다려 1만의 진신 문수보살을 공양하였다고 한다. 효명태자가 즉위한 후에는 보질도 태자 홀로 오대산에 남아 항상 골짜기의 물(于洞水)의 신령한 물을 마시고 육신이 공중을 날아 유사강(流沙江)에 이르러 울진대국(蔚珍大國)의 장천굴(掌天窟)에 들어가 도(道)를 닦다가 다시 오대산 신성굴(神聖窟)로 돌아와 50년 동안 도를 닦았다고 전한다. 이 기록에서 보여지는 우동수는 우(于)를 어조사로 보아 “골짜기에서 물을 길어(于洞水)”라는 해석이 일반적이지만(이병도, 1956; 리상호, 1990), 신령스러운 물은 우리나라의 정서로 볼 때 골짜기의 물 전체보다는 특정 지점의 물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아 한강의 발원지로 알려진 우통수를 가리킨 것으로 본 견해도 있다.(강인구 외, 2003; 김선풍, 2009) 또한 『삼국유사』 권3 탑상4 대산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조에서도 우동수와 관련된 내용이 전하는데, 다만 앞의 조목에서는 “우동수”라고 한 반면에 대산오만진신조에서는 “동중수(洞中水)”에서 물을 길어 차를 다려서 5만의 진신(眞身)에게 공양하였다고 하여 명칭의 차이가 보인다. 조선시대의 기록에서는 성현(成俔, 1439-1504)이 쓴 『용재총화(慵齋叢話)』에 “금강산에서 시작하여 한강의 가운데로 흐르는 우중수(于重水)”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 기록에 근거하여 우중수를 우통수와 상통하는 것으로 본 견해가 있다.(강원대학교박물관·평창군, 2004) 우통수라는 명칭은 조선 태종 4년(1404)에 권근(權近)이 쓴 『양촌집(陽村集)』 14 「오대산서대수정암중창기(五臺山西臺水精庵重創記)」에 처음 기록되었으며, 또한 우통수에 대한 자세한 기록도 전해진다. 기록에 따르면 “서대(西臺) 밑에서 함천(檻泉, 솟아나는 물)이 솟아나서, 빛깔과 맛이 보통 우물물보다 낫고 물의 무게도 또한 무거운데 우통수(于筒水)라고 한다. 서쪽으로 수백 리를 흘러가다 한강(漢江)이 되어 바다로 들어가는데, 한강이 비록 여러 군데서 흐르는 물을 받아 모인 것이지만 우통수가 중랭(中冷)이 되어 빛깔과 맛이 변하지 아니하여, 마치 중국의 양자강(揚子江)과 같으므로 한강이라 이름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라고 하여 우통수의 특징에 대해 설명하였다. 한편 우통수가 한강의 발원지임을 기록한 첫 문헌자료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권153 강릉대도호부(江陵大都護府) 명산(名山)조이다. 기록에 따르면 “우통수의 물은 나아가 금강연(金剛淵)이 되고 한수(漢水)의 근원이 된다.”고 하여 우통수가 한강의 발원지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우통수와 함께 한강의 발원으로 언급된 월정사와 맞닿은 곳에 위치한 금강연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같은 대표적인 지리지는 물론 조선후기까지 많은 지리지에서 우통수와 함께 한강의 발원샘과 발원지 혹은 시원지(始源池)로 기록되어 왔다.(이지누, 2009)

이처럼 조선시대 기록에서 우통수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된 것에 대해 한양의 상징성 때문인 것으로 본 견해가 있다. 이에 따르면 조선시대에 들어와 수도를 한양으로 함으로써, 그 조선의 젖줄에 대한 근원으로서의 신성성을 상징하는 것으로써 새롭게 우통수를 인식하게 되었다고 한다.(자현스님, 2009) 그러나 이러한 우통수에 대한 한강의 발원지로서의 인식은 최장 발원지 개념이 도입되고, 현대적인 측량 기법이 도입되면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최장 발원지 개념에 의해 한강까지 최장 길이를 기준으로 계산하였을 때 발원지는 오대산이 아닌 태백시 금대산 북쪽계곡의 고목나무샘이라고 본 견해도 등장하게 된 것이다.(이형석, 1981) 이후 건설교통부에서는 한강의 발원지를 태백시 금대산 고목나무샘이라고 발표하였다.(건설교통부, 2000) 우통수는 현재 수정암 입구에 위치해 있으며, 가로 60cm, 세로 60cm, 깊이 20cm의 사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 우통수의 관리는 수정암에 안거하는 수도승이 맡고 있으나 생활용수로 사용되지 않기 때문에 거의 방치되고 있는 실정이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우동수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삼국유사 사전/박물지 시범개발), 2012, 한국콘텐츠진흥원)

 

『택리지』에는 한강의 발원지에 대하여 “강릉 서쪽이 대관령이고 영 북쪽이 오대산인데, 우통수(于筒水)가 여기에서 나오며 한강의 근원이 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한강의 발원지는 어디인가?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대동지지』 등 옛 문헌들에는 『택리지』와 같이 한강의 발원지를 오대산 우통수라고 기록하였는데, 조선 초기의 학자 권근은 기문에 우통수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오대산 서대(西臺) 장령(長嶺) 밑에 샘물이 솟아나는데 그 빛깔이나 맛이 특이하였다. 무게도 보통 물보다 무거웠고 사람들은 그 샘물을 우통수라고 불렀다. 우통수는 바로 한강의 수원이다. 사람들은 우통수의 빛과 맛이 변하지 않음이 마치 중국 양자강의 그것과 마찬가지이므로 중령이라 부른다.” 중령이란 중국의 고사에 나오는 물 이름으로, 여러 줄기의 냇물이 모여서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지만 중령의 물만은 다른 물과 어울리지 않고 그 찬 기운을 그대로 간직하였다고 한다. 한강의 발원지가 오대산 우통수에서 지금의 태백시 하장면 금대산 밑 검룡소(儉龍沼)로 바뀐 것은 1918년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에서 실측 조사한 결과에 따른 것이다. 오대산 우통수와 태백시 창죽동까지의 골지천(骨只川) 길이를 계측한 결과 골지천이 32.5킬로미터 더 길었다고 한다. 하천 연구가 이형석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한강의 발원산인 금대산에는 네 개의 샘이 있다. 첫 번째인 고목나무샘은 금대산 정상에서 북서쪽으로 700미터쯤에 위치한 아름드리나무 아래에서 솟는데, 해발 1340미터에 있다. 두 번째는 제당궁샘으로 금대산 북쪽으로 250미터쯤에 있으며 해발 1340미터 지점에 있다. 세 번째는 금대샘으로 고목나무샘과 제당궁샘이 합수되는 바로 위쪽에 있다. 네 번째는 검룡소로 고목나무샘에서 1.75킬로미터 아래, 해발 950미터 지점에 있다. 고목나무샘에서 발원한 한강의 물줄기는 검룡소를 거쳐 하장천을 지나 골지천으로 들어가고, 아우라지에서 송천과 합하게 된다. 영월에서 동강과 서강을 받아들인 남한강은 남류하면서 평창강과 주천강을 합하고, 단양을 지나면서 북서로 흘러 달천ㆍ섬강ㆍ청미천ㆍ흑천을 합친 뒤, 양수리에서 북한강과 합류한다. 양수리에서 북한강과 남한강을 합류한 한강은 계속 북서 방향으로 흐르면서 왕숙천, 한천, 안양천 등의 작은 지류와 합류하여 김포평야를 지난 뒤 김포시 월곶면 보구곶리에서 강으로서 생을 마감한 후 서해로 들어간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오대산과 우통수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8 - 강원도, 2012.10.5, 다음생각)

 

▲ 너와집 (서대 수정암)

▲ 선답자들의 산행기를 보면 서대염불암이라 되어 있는데 현판은 현재 서대 수정암으로 되어 있고 스님 혼자 기거 중이다.

▲ 너와집: 너와는 지붕을 이는 데 기와처럼 쓰는 재료로서, 널빤지를 쓰는 나무너와와 켜가 있는 청석판을 쓰는 청석너와의 두 가지가 있다. 보통은 나무로 만든 것을 너와로 부르며, 강원도 지방에서는 ‘느에’ 또는 ‘능에’라고도 한다. 너와는 지름 30㎝ 이상의 나뭇결이 바르고 잘 쪼개지는 적송 또는 전나무 등의 나무줄기에서 밑둥치와 윗부분을 잘라낸 다음 토막을 내서 사용한다. 쪼개는 방향은 생목이 서 있던 향의 동서방향에 평행이 되도록 한다. 너와의 크기는 일정하지 않으나 보통 가로 20∼30㎝, 세로 40∼60㎝, 두께 4∼5㎝ 정도이다. 너와의 수량을 헤아릴 때 70장을 한 동이라고 하는데, 보통 한 칸 넓이의 지붕에는 한 동 반 내지 두 동이 소요된다. 지붕을 이을 때는 처마 부분에서 윗방 향으로 서로 포개며 이어 올라간다. 너와가 바람에 날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10∼15㎝ 정도의 무거운 돌을 얹어놓거나 통나무를 처마와 평행으로 지붕면에 눌러놓기도 하는데 이런 통나무를 ‘너시래’라 부른다. 너와의 수명은 10∼20년 정도 간다고 하지만, 이은 지 오래되면 2, 3년마다 부식된 너와를 빼고 새 것으로 바꾸어 끼우는 부분적인 교체작업을 해야 한다. 너와를 언제부터 사용하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조북맹회편 三朝北盟會編≫ 권 30에 “목판이나 화피로 지붕을 이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 함경도 지방에서 이미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으며, ≪동국여지승람≫ 권55의 “널 이엉이므로 빗소리가 높다.”는 등의 기록으로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 너와집은 수목이 울창한 지대에서 볼 수 있는 살림집으로 개마고원을 중심으로 한 함경도 지역에 분포한다. 또 낭림산맥 및 강남산맥을 중심으로 한 평안도 산간지역,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한 강원도 지역, 울릉도 등지에 분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대체로 화전민의 분포지역 범위 속에 들어간다. 화전민과 같이 산간지역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주로 밭작물을 재배하게 되어 지붕을 이을 짚 같은 것을 구하기 어렵다. 따라서 새·겨릅(대)·수수깡·굴피 등으로 지붕을 이기도 하였지만, 근처의 산림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적송·전나무 등을 쓰기도 하였다. 너와집은 집의 유형이나 지붕의 구조, 벽체의 구성 재료 등이 각 지역에 따라서 다르다. 같은 지역이라 하더라도 시대 및 경제적인 여건에 따라 일정하지 않다. 그러므로 평면상으로 보면 홑집·겹집, 벽체의 구성 재료로 보면 귀틀집·판잣집·토벽집, 지붕형태로 보면 우진각지붕·합각지붕·박공지붕 등 다양한 형태를 볼 수 있다. 너와집의 내부공간은 대개의 경우 온돌방에만 지붕 밑에 별도로 고물반자를 만들고, 나머지 부분인 봉당·부엌·마루 등은 삿갓천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굴뚝이나 까치구멍으로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연기는 지붕의 너와 틈 사이로 빠져나오게 된다. 그러므로 밖에서 보면 집 전체가 자욱한 연기로 휩싸여서 나름대로의 독특한 경관을 이루게 된다. 이와 같이, 너와로 이은 지붕은 너와와 너와 사이에 틈이 있어 환기와 배연이 잘 되고, 단열효과도 크다. 여름에는 자연히 집안이 시원하고 겨울의 적설 기에 지붕이 눈에 덮이면 내부 온기가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므로 보온효과도 크다. 따라서 너와는 한서의 차가 심한 산지기후에 알맞고 그 주변에서 손쉽게 얻을 수 있던 지붕재료였다. 그러나 과거의 무계획한 남벌로 인한 산림의 황폐, 당국의 산림보호책으로 인한 무단 벌채의 금지, 새마을사업에 의한 지붕개량사업 등으로 너와집은 점점 없어져가고 있다.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신리에 있는 너와집과 도계리에 있는 너와집이 중요민속자료 제33호와 제221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너와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서대 수정암 :『삼국유사』 권3 「대산오만진신」과 명주오대산 「보질도태자전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실려 있다. 신라의 보천과 효명이라는 두 왕자가 속세를 향한 뜻을 버리고 오대산에 들어왔다. 그들은 중대와 북대 밑에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그 자리에 풀로 엮은 집을 짓고 불법을 닦고 있었다. 그들이 어느 날 함께 오대산으로 참배하러 올라가자 동대 만월산에는 만 명의 관음보살이 나타났고, 남대 기린산에는 8대 보살을 우두머리로 한 만 명의 지장보살이 나타났으며, 서대 장령산에는 무량수여래불을 우두머리로 한 만 명의 대세지보살이 나타났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북대 상왕산에는 석가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오백대아라한이, 중대 풍로산에는 비로자나불을 우두머리로 한 만 명의 문수보살이 나타나기에 5만 명의 진신에게 예불을 드렸다고 한다. 그때부터 관음과 미타 그리고 지장, 석가, 문수보살 같은 극락세계의 보살들이 오대산의 다섯 봉우리에 저마다 머무른다고 하는 신앙으로 발전했고, 월정사에서 9킬로미터쯤 떨어진 위쪽에 지금의 상원사인 진여원(眞如院)이 들어섰다. 그러한 정황을 살펴볼 때 오늘날에 보는 것과 같은 다섯 대(臺)에 세워진 암자들은 이때 벌써 그 기틀이 마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진여원에서는 매일 인시(새벽 4시)가 되면 문수보살이 36개의 변형된 부처의 얼굴로 나타났으며, 보천과 효명이 골짜기의 물을 길어다가 차를 달여서 만 명의 문수보살에게 공양했다고 한다. 이곳의 다섯 대에 자리한 암자들은 중대의 사자암을 위시하여 동대의 관음암, 서대의 수정암, 남대의 지장암, 북대의 미륵암으로 저마다 고유한 이름을 갖고 있지만, 언제부터인지 비구니들의 승방인 남대의 지장암 하나만이 계속 지장암이라 불리고 나머지는 흔히 그냥 중대사, 동대사, 서대사, 북대사로 불리고 있다. 이 암자들은 오늘날 대한불교조계종의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에 딸린 말사로 등록되어 있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다섯 보살이 머문다는 오대산 신앙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8 - 강원도, 2012.10.5, 다음생각) 

▲ 서대수정암 갈림길(서대수정암 방면에서 내려오면 '상원사 0.4km, 적멸보궁 1.1km' 이정표와 수정암 방향으로 샛길 출입금지 안내 현수막이 보이면 이곳이 서대수정암 가는 길이다) 

▲ 상원사 갈림길의 이정표

▲ 상원사 구경 가는데 사인검님이 포즈를 취하란다 ㅎ

▲ 상원사:강원 평창군 진부면(珍富面) 동산리(東山里)의 오대산(五臺山)에 있는 사찰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로,월정사와는 이웃하고 있다. 원래의 절은 724년(신라 성덕왕 23) 신라의 대국통(大國統)이었고 통도사(通度寺) 등을 창건한 자장(慈藏)이 지었다고 한다. 지금은 종각(鐘閣)만 남고 건물은 8·15광복 후에 재건한 것이다. 현존 유물 중 가장 오래된 동종(국보 36)이 있다. 출처:두산백과

▲ 상원사 문수전

▲ 상원사(上院寺) 동정각(動靜閣)

상원사 동종(上院寺銅鐘):신라 성덕왕 때인 725년에 만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종이다. 국립경주박물관 앞뜰에 옮겨져 있는 성덕대왕 신종보다 제작 시기가 45년이나 앞선다. 높이는 1.67m, 입지름이 91cm로 성덕대왕 신종보다 작은 규모이지만, 조각 장식이 아름다운 것은 물론 종소리도 매우 아름다워 성덕대왕 신종과 더불어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범종의 걸작으로 꼽히기에 손색이 없다.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범종 가운데 완형으로 남아 있는 것은 이 상원사 동종과 성덕대왕 신종 둘 뿐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범종은 몸통의 아래와 위쪽의 끝부분이 안으로 좁혀지는 모습으로, 고려나 조선 시기에 제작된 범종들과 차별을 이룬다. 본래 어느 절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예종이 세조의 원찰인 상원사에 종을 바치려고 전국을 수소문하니, 안동의 정문 문루인 관풍루에 걸려 있던 종이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고 하여, 이것을 1469년에 상원사로 옮겼다고 한다. 신기한 일은 안동 누문에 걸려 있던 종을 옮기려 하였으나 꼼짝도 하지 않아 애를 먹었는데, 종뉴 하나를 떼어냈더니 비로소 움직였다고 한다. 지금도 유곽 안에는 종뉴 하나가 없다. 한국전쟁 때 불에 타 녹아 없어질 뻔한 위기를 겪었으나 30년 동안 상원사 문밖 출입을 하지 않고 수행 정진하던 방한암스님의 굳은 의지에 힘입어 월정사로 옮겨다 놓았던 선림원터 동종(통일신라시대 범종)이 불타버린 것과 같은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오대산 상원사 동종 맨 위에는 범종을 거는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와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이 있응게, 용뉴에는 큰 머리에 굳센 발톱을 가진 용이 힘찬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으며, 음통에는 연꽃과 덩굴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상대와 하대에는 화려한 당초문이 새겨져 있고, 상대 아래 네 곳의 유곽 안에는 연꽃 모양의 종뉴가 9개씩 있다. 종신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상이 곧 하늘로 날아오를 듯 경쾌한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다. 비천상 사이에 당좌가 두 곳 있는데, 당좌는 연꽃과 당초문으로 장식되었다. 상원사 동종에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특징, 곧 외형은 마치 김칫독을 엎어놓은 것처럼 위 아래가 좁고 중간이 볼록한 모양이라든가, 종의 꼭대기에는 종을 매달기 위한 고리가 용모양으로 생겼다든가, 음통을 꾸몄다든가, 종의 둘레가 가장 긴 부분인 3분의 1쯤에 종을 치는 당좌는 불룩하게 2곳 배치하였다든가, 몸통 위와 아래에 상대와 하대라는 띠를 두르고 상대 바로 밑 4곳에 유곽을 마련하였다든가, 당좌와 당좌 사이에 주악비천상이나 공양비천상을 새겼다든가 하는 등의 구조적인 특징은 양식적인 변천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나라 종의 전형이 되었다. 현재는 종구(鐘口) 일부에 작은 균열이 생겨 수리를 거친 뒤 모작품(模作品)을 만들어 사용하고, 이 종은 사용하지 않고 있다. 국보는 좌측 유리관 안에 있고 우측은 모작품 (출처:사이버 문화재 탐방,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상원사 문수전<국보 목조문수동자좌상(上院寺 木彫文殊童子坐像)과 목조보살좌상(木造菩薩坐像) 이 모셔져 있는 곳>

▲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上院寺 木彫文殊童子坐像):1984년 10월 15일 국보 제221호로 지정되었다. 높이는 98cm이며 1466년(세조 12) 에 제작되었다. 예배의 대상으로서 만들어진 국내 유일의 동자상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큰 문화재이다. 문수보살은 지혜를 맡은 보살로서, 석가모니불의 왼쪽에 있는 것이 통례이고 그 모양도 여러 가지이나 보통은 사자를 타고 오른손에 지검(智劍)을, 왼손에 연꽃을 가지고 있으며, 머리털은 다섯 뭉치로 맺고 있다. 그러나 이 목각문수보살상의 수인(手印)·법의, 그리고 가슴의 달개[瓔珞] 등은 다른 보살상의 그것과 비슷하지만, 앉아 있는 모습과 머리털을 두 뭉치로 맺고 있는 점 등이 다르다. 이 불상은 세조가 왕위에 오른 직후, 몸에 난 종기를 불력(佛力)을 빌려 고치고자 상원사로 가던 길에, 동자(童子)처럼 생긴 문수보살을 만나 씻은 듯이 나았으므로 그때의 영검을 기리기 위하여 조성하였다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또, 이 보살상의 뱃속에서 당시의 중수발원문(重修發願文)·불경·명주적삼·사리 등의 불교관계 유물 23종류가 나왔으며, 일괄하여 1984년 10월 보물 제793호로 지정되었다. (출처: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국보 목조문수동자좌상(上院寺 木彫文殊童子坐像)과 목조보살좌상(木造菩薩坐像) 

 

평창 상원사 목조보살좌상(木造菩薩坐像): 1976년 6월 17일 강원유형문화재 제52호로 지정되었다. 얼굴은 긴 달걀형이며 가늘게 열린 눈과 큰 코, 끝이 약간 올라간 큰 입 등이 단아하게 표현되었다. 머리에는 해무리를 중심으로 5개의 화염돌기가 달린 화려한 보관(寶冠)을 쓰고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으며, 영락(瓔珞)으로 장식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이다.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으로 되어 있고 옷주름은 매우 단순하다. 두 손에 연봉(蓮峰)을 들고 있는데 오른손은 밑줄기 끝을, 왼손은 꽃봉오리 부분을 받쳐들고 결가부좌하였다. 상원사 문수전< 예전의 청량선원(淸凉禪院)>에 안치되어 있으며,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국보 221)과 같은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

▲ 상원사 주차장/상원사/적멸보궁 이정표 

 

▲ 관대걸이 안내판

관대걸이 설화 :『마마, 정신 차리십시오.』잠자리에 든 세조는 악몽을 꾸는지 온몸이 땀에 흥건히 젖은 채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옆에 누웠던 왕비가 잠결에 임금의 신음소리를 듣고 일어나 정신 차릴것을 권하니 잠에서 깨어난 세조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마마, 신열이 있사옵니다. 옥체 미령 하옵신지요?』세조는 대답 대신 혼자 입속말을 했다.『음, 업이로구나, 업이야.』『마마, 무슨 일이세요? 혹시 나쁜 꿈이라도 꾸셨는지요.』『중전, 심기가 몹시 불편하구려. 방금 꿈에 현덕왕후(단종의 모친 ·세조의 형수) 혼백이 나타나 내 몸에 침을 뱉지 않겠소.』『원, 저런‥‥』꿈 이야기를 하며 다시 잠자리에 들었으나 세조는 잠을 이를 수 가없었다. 어린 조카 단종을 업어주던 모습이며, 생각하기조차 꺼려지는 기억들이 자꾸만 뇌리를 맴돌았다.

 

이튿날 아침, 이게 웬일인가. 꿈에 현덕왕후가 뱉은 침자리마다 종기가 돋아나고 있다니, 세조는 아연실색했다. 종기는 차츰 온몸으로 퍼지더니 고름이 나는 둥 점점 악화되었다.명의와 신약이 모두 효험이 없었다. 임금은 중전에게 말했다.『백약이 무효이니 내 아무래도 대찰을 찾아 부처님께 기도를 올려야겠소.』『그렇게 하시지요. 문수도량인 오대산 상원사가 기도처로는 적합할 듯 하옵니다.』왕은 오대산으로 발길을 옮겼다.월정사에서 참배를 마치고 상원사로 가던 중 장엄한 산세와 밝은 계곡물 등 절경에 취한 세조는 불현듯 산간벽수에 목욕을 하고 싶었다 자신의 추한 모습을 신하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늘 어의를 풀지 않았던 세조는 그날도 주위를 물린 채 혼자 계곡물에 몸을 담그고 목욕을 즐겼다.

 

그때였다. 숲속에서 놀고 있는 조그마한 한 동자승이 세조의 눈에 띄었다.『이리와서 내 등 좀 밀어주지 않으련?』동자승이 내려와 등을 다 밀자 임금은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단단히 부탁의 말을 일렀다.『그대는 어디 가서든지 임금의 옥체를 씻었다고 말하지 말라.』『대왕도 어디가서 문수보살을 친견했다고 말하지 마시오.』이렇게 응수한 동자는 흘연히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왕은 놀라 주위를 살피다 자신의 몸을 보니 몸의 종기가 씻은 듯이 나은 것을 알게 됐다. 왕은 크게 감격했다. 환궁하자마자 화공을 불러 자신이 본 문수동자를 그리게 했다.기억력을 더듬어 몇 번의 교정을 거친 끝에 실제와 비슷한 동자상이 완성되자 상원사에 봉안토록 했다.

 

현재 상원사에는 문수동자 화상(畵像)은 없고, 얼마 전 다량의 국보가 쏟아져 나온 목각문수동자상이 모셔져 있다. 또 세조가 문수동자상을 친견했던 월정사에서 상원사로 갈라지는 큰 길목 10km지점은 임금이 그곳 나무에 의관을 걸었다 하여 「갓걸이」또는 「관대걸이」라고 부른다. 병을 고친 이듬해 봄. 세조는 다시 그 이적의 성지를 찾았다. 상원사에 도착한 왕은 곧바로 법당으로 들어갔다. 막 예불을 올리는데 어디선가 별안간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 세조의 곤룡포 자락을 물고 자꾸 앞으로 못 가게 잡아 당기는 것이 아닌가, 이상한 예감이 든 왕은 밖으로 나왔다.그리고 병사들을 풀어 법당안팎을 샅샅이 뒤지게 했다. 아니나 다를까. 불상을 모신 탁자 밑에 세 명의 자객이 세조를 시해하려고 시퍼런 칼을 들고 숨어 있었다.

 

그들을 끌어내 참하는 동안 고양이는 벌써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하마터면 죽을 목숨을 구해준 고양이를 위해 세조는 강릉에서 가장 기름진 논 5백 섬지기를 상원사에 내렸다. 그리고는 매년 고양이를 위해 제사를 지내주도록 명했다. 이때부터 절에는 묘답 또는 묘전이란 명칭이 생겼다. 즉 고양이 논, 또는 고양이 밭이란 뜻. 궁으로 돌아온 세조는 서울 근교의 여러 사찰에 묘전을 설치하여 고양이를 키웠고, 왕명으로 전국에 고양이를 잡아 죽이는 일이 없도록 했다. 최근까지도 봉은사 밭을 묘전이라 부르는 이유도 이에 기인한다. 또 지금도 상원사에 가보면 마치 이 전설을 입증하는 듯 문수동자상이 모셔진 청량선원 입구 계단의 좌우에는 돌로 조각한 고양이 석상이 서 있다. 속설에 의하면 「공양미」란 말도 고양이를 위한 쌀이란 말이 변하여생겼다는 일설도 있다. 고양이 사건이 있은 지 얼마 후 세조는 다시 상원사를 찾았다. 자신에게 영험을 베풀어준 도량을 중창하여 성지로서 그 뜻을 오래오래 기리기 위해서였다. 대중 스님들과 자리를 같이한 왕은 상원사 중수를 의논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공양시간을 알리는 목탁이 울렸다.소탈한 세조는 스님들과 둘러 앉아 공양 채비를 했다.『마마, 자리를 옮기시지요.』『아니오. 대중 스님들과 함께 공양하는 것이 과인은 오히려 흡족하오.』그때 맨 말석에 앉아 있던 어린 사미승이 발우를 들더니, 세조의 면전을 향해 불쑥 말을 던졌다.『이거사, 공양하시오.』놀란 대중은 모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몸둘바를 몰라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가. 정작 놀라야 할 세조는 껄껄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과연 도인될 그릇이로다.』왕은 그 사미승에게 3품의 직을 내렸다. 그리고는 그 표시로서 친히 전홍대 (붉은 천을 감은 허리띠)를 하사하였다. 아마 세조는 지난날 자신의 병을 고쳐준 문수동자를 연상했던 모양이다. 그 후 세간에서는 어린아이들이 귀하게 되라는 징표로 붉은 띠로 허리를 졸라매 주는 풍속이 생겼다 한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세조와 고양이),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불교설화, 2012, 한국콘텐츠진흥원

 

 

▲ 상원사 주차장

▲ 상원사 주차장 아래 알탕 장소(공단 직원의 눈을 피해 얼른 알탕을 하고 ㅋㅋ)

▲ 알탕 후 주차장에서 마시는 동동주와 맥주 한 잔의 술은 그야말로 꿀 맛~~!

▲ 상원사 주차장에서 산행을 마치지 않고(?) ㅋㅋ 월정사 방향으로 한참 내려 간 후미조 탑승ㅎㅎ

▲ 뒤풀이 장소

▲ 뒤풀이 수육

 

▲ 뒤풀이 비빔 막국수와 물 막국수

 

 

▲ 이크~~! 먹는 모습은 역쉬 안 조앙 ㅋㅋ 앞으론 먹는 모습 사진 사절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