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속에 들어서니 발이 푹푹 빠진다. 간밤 비가 내린 것이다. 축축하게 젖어 있는 붉거나 누우렇게 바랜 참나무잎과 솔잎들은 푹신하다못해 곳곳에 허방을 만들어 놓았다. 오랫동안 사람이 다니지 않은 길이다. 한 해. 두 해. 세 해. 네 해... 썩은 몸 위에 또 썩어갈 몸을 눕히며 나뭇잎들은 도대체 얼마나 떨어지고 쌓인 것일까.
그래도 갈재를 넘나들던 옛길의 흔적은 또렷하다. 장정 둘이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담소하며 걷기에 넉넉한 길이다. 발 아래 지척에 국도1호선이 지나고 그밑으로 고속도로와 철길이 뚫린 지 오래인데. 성긴 잡목들 사이로 옛길이 어제 와본 길인 양 고스란한 게 신기하기만 하다. 불과 3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소금장수며 젖장수. 소장수들이 넘나들고 괴나리봇짐을 진 한량들이며 남부여대한 뜨내기들의 발길이 부산했을 길이다. 이런 상념에 젖자니 발 밑이 문득 뜨거워진다.
버려지고. 잊혀지고. 사라져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시간을 거슬러 갈 수 없다. 시간은 과거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미래로 흐르며. 그 미래는 반드시 진보를 의미하지 않는다. 시간의 비가역성. 거꾸로 흐르지 않는 시간의 비정함은 곧 역사의 비정함과 같다. 그래서 잘 살아야 한다. 지금 사는 삶이 미래에도 잘사는 삶이 되도록 해야 한다. 길은 산비탈을 감아돌며 산골짜기 안 쪽으로 뻗어 있다. 마치 무슨 비밀스런 동굴로 들어가는 듯하다. 이 세상에 가보고 싶은 길과 웬지 내키지 않은 길이 있다면. 갈재의 옛길은 분명 가보고 싶은 길에 해당될 게 틀림없다.
"길은 굴도 아니요. 골도 아닌 그 중간쯤 되는 통로요. 삶의 여로(장호완-우리말의 상상력)" 라는 지적이 풋풋한 형상으로 실감나게 가슴에 와 안긴다. 우리말에서 '굴/굿'. '골/곳'. '길/깃'.의 갈래는 사촌간이라 할 수 있다. 혈거 민족에게 굴은 곧 구멍이요. 신전을 모시던 제단이며. 보통 사람들의 삶의 보금자리었다. 골은 파이거나 튀어나온 곳('곶'. 예를 들면 '장산 곶')을 가리키니 삶의 공간이요. 길은 그 굴과 골 사이를 오고가는 연결통로라 할 수 있다.
이 완만하고 고즈넉한 길이 어디로 향한 것인지. 저 깊은 골짜기에 닿고나면 또 어느 솟아오르는 곳(곶)을 향해 배암처럼 또아리를 풀고 머리를 들어 옮겨갈 것인지... 확실히 그것은 산등성이를 파헤치고 바위를 쪼개어 아스팔트를 깐 국도나. 이에 직선으로 터널을 뚫어 달리는 고속도로와 철길이 던져주는 느낌과는 완연히 다른 감흥이다. 그것은 속도의 차이. 그로 인한 문화의 차이. 사유 방식의 차이를 드러낸다. 속도가 빠를수록 사람의 시야는 그만큼 좁아진다. 마른 풀과 시든 꽃. 꿈꾸는 나무. 하늘을 나는 새의 노래란 달려가는 자에게는 먼 옛날일 뿐이다. 가장 빠른 자는 언제나 혼자이며 그에게는 동료가 없다. 불과 몇 십년 사이에 우리들의 길이 이처럼 판이하게 달라질 수 있나. 길의 바귐은 삶의 바뀜이다.
갈재는 전라남북도를 가르고 잇는 가장 대표적인 고개이다. 국도 1호선과 호남선 철도. 고속도로가 모두 이고개를 통과한다. 입암산과 방장산 사이의 협곡에 있는 이 고개의 남뽁은 전남 장성군 북이면이고, 북쪽은 전북 정읍시 입암면이다. 전남 지역에는 목란 마을이. 전북 지역에는 군령 마을이 고개의 첫 마을이며. 모두 옛날에는 주막거리였다.
동국여지승람에 갈재를 (위령)이라 기록하고 (노령)으로 부른다고 하였고. 고려사절요/ 현종 2년 1월 조에 거란의 침입으로 왕이 '노령'을 넘어 나주로 들어갔다는 기록이 있다. (위)나 (노)나 그 글자의 뚯은 갈대를 가리키니 '갈재'라는 이름의 유래를 이와 연관시켜 말할 법도 하다. 흥미로운 것은 목란 마을 산자락에 있는 미인암. 곧 '갈애바위'의 전설에도 갈대가 모티브로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목란 마을에 '갈대 아이(노아)'가 태어날 때 그의 아버지는 신선에게서 석 자나 되는 갈대꽃을 받는 꿈을 꾸었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느 퇴기집의 수양딸로 팔려가 기생이 되었다. 어찌나 그 미모가 뛰어났던지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가는 선비들이 노아에게 홀려 갈재 주막에 눌러 앉았고, 전라도에 부임해 오는 고을 원들도 넋을 빼앗겨 민정을 돌보지 않자 조정에서 암행어사를 보내 처벌하게 하였다.
갈애바위 전설은 대략 이와 같은 스토리를 골격으로 하되 전승자에 따라 다른 결말을 끌어내고 있다. 1.노아가 미리 갈재 계곡에서 어사를 유인하여 그와 백년가약의 언약을 맺고 그 정표로 팔에 어사의 이름을 쓰게 했다. 며칠 후 죄를 문책받게 된 노아는 '노아의 이팔에 뉘 이름 새겨 있뇨. 고운 살에 먹이 배어 글자도 선명하구나. 차라리 천원강이 말라버릴지언정 굳게 맺은 그 맹세 변할 줄이 있으랴' 라는 글을 써 올리니 어사는 그제야 속았음을 알았다. 그러나 어찌 할 수 없어 문죄하지 못하고 한양으로 돌아가 임금님에게 사실을 고하고 어명으로 노아를 소실로 맞이하였다.
2.나라에서 장군을 보내어 노아를 처형하고 본래 처용암이라 부르던 갈애바위의 한쪽 눈을 조아버린 후로 목란 마을에는 애꾸미인이 태어났다. 갈애는 죽어 황룡강의 물고기가 되었는데. 그 물고기를 이 지역사람들은 지금도 '가래(피라미 수컷)라고 부른다.
3. 갈애와 사랑에 빠진 총각이 갈애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바위에 그 얼굴을 새기다 떨어져 죽자 그 죽음을 기리기 위해 마을사람들이 원덕리 미륵석불을 세웠다.
설화란 전승되면서 변하는 것이니 허무맹랑한 얘기라고 무시할 수도 있겠으나. 그런 만큼 언제 다시 귀 기울여봐도 음미할 대목이 있다. 갈대의 우리말 뿌리는 ㄱ.ㄹ이었고 예로부터 아름답고 어진 여인은 갈대꽃에 비유되곤 했다. 또한 설화에서 갈대는 '절개(박제상 이야기)'를 상징하거나 신비한 힘을 가진 '열쇠(아기장수 설화)'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그림에서 갈대는 갈대'로'자와 한자의 독음이 같은 늙을 '로'길'로' 등과 서로 통하는 의미로 이해되어 왔다. 때때로 갈대 줄기를 한 가닥 그려 넣어 일로의 의미로 사용했는데. 이런 맥락에서 보면. 노령과 갈재. 갈애바위 전설은 매우 그럴사함을 알 수 있다.
남도의 선비들과 서울의 위정자들이 모두 노아에게 넋이 빠져 일을 망친다는 이야기는 갈재가 예로부터 이 지역의 중요한 길목이었음을 시사한다. 이야기에 따라 노아가 죽어서 물고기가 되었다든지. 혹은 첩이 되어 활를 면했다든지 하는 결말에는 당시 정치에 대한 이 지역 사람들의 어떤 원망과 희비가 담겨 있을 법하다.
갈재의 옛길은 한 골짜기 방향을 틀어 다른 골짜기로 옮아간다. 그 직전에 푸른 이끼로 둘러싸인 옹달샘 하나와 만난다. 돌이켜 보면 이 쯤에 꼭 있어야 할 것이 샘이다. 사람들은 여기서 목을 축이고 고갯마루를 향해 발길을 재촉했을 것이다. 계곡을 곧장 가로지르지 않고 우회할 수밖에 없었던 자들의 삶이란 무엇이었을까. 이런 상년에 빠져들자니. '길이 호젓하고 험해서 도적이 떼로 모여 대낮에도 사람을 죽이고 약탈을 하므로 나그네가 다닐 수 없어 성종 15년(1484)에 (보방수)를 두었다' 는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이 떠올라 그만 고개를 흔들고 만다. 그들도 가장 빠른 지름길을 닦았을 터이다.
재는 넘을수록 험하고 내는 건널수록 깊어진다는 말이 있다. 인류의 시간은 점점 더 빠른 쪽으로 흘러왔다. 시간이 빨리 흐른다는 것은 변화가 급속도로 진행된다는 말이며. 그것은 에너지의 소모량과 비례한다. 우주에서 유용한 에너지는 갈수록 고갈돼 가고 있다. 엔트로피 법칙운. 우주의 전체 에너지 양은 일정하고 더 이상 일이 될 수 없는 에너지(엔트로피)민이 증가하려 한다근것을 일찍이 일개워 주었다. 예컨대 그것은 우리가 자동차를 타는 동안 기름의 연소과정으로 인한 에너지의 총량은 변화가 없어도 이미 공기 중에 흩어져 버린 배기가스는 다시 에너지로 사용할 수 없는 이치를 말한다.
나무들이 아름다운 것은 그들이 최소한의 에너지로 자라기 때문이다. 지난 계절 동안 나무들은 잎을 떨구어 허방을 만들고 그 썩음으로 자란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다 허방을 하고 그 허방의 썩음을 먹고 자란다. 그 가운데 사람의 허방만이 가장 추하다. 노자 도덕경에 (휴무상생)이라는 말이 있다. 있음과 없음이 서로 생한다는 말이다. 혼돈 또한 거대한 질서이며 삶과 죽음. 있음과 없음이 종이의 양면을 이룬 것과 같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저 잘 아래 고속도로와 철길로 상징되는 오늘 우리의 삶은 과연 유무상생인가.
갈재의 옛길은 바위와 바위 사이에서 정상을 맞이한다. 그 한 쪽 바위에 (부사) 홍아무개를 기린 (영세불망비)가 (임신)년 9월이라는 날짜와 함께 새겨져 있다. 그가 어떤 치적을 베풀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사람의 흔적이란 이처럼 인위적이다. 그것은 '스스로 그러한' 자연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나무들만이 옛길의 흔적을 지키거나 지우며 숲을 이루고 있을 뿐이다.
고갯마루를 넘어서면 전라북도 정읍 땅이 발 아래 펼쳐지고. 예전에 군대가 주둔해서 군령 다리라 부르는 고개 밑 첫 마을에 이른다. 고속도로와 호남선 복선화로 마을의 대부분이 잘려나간 이 마을에는 다행히 정자나무가 남아 있어 옛 길목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고속도로에 자신의 탯자리를 내주었다는 60대 노인은 정자나무를 따라 예전에는 갈재로 오르는 길에 주막이 즐비했노라며 '70년대 까지만 해도 소장수들 따라 갈재를 넘어 장성장 가서 소를 사고 팔았지. 장성서 오후 2시에 나서면 여그 오면 해 넘어가. 그래 여가 쉬어가는 길목이라. 우리 집 마당에 소를 가득 메놓았지.
군령 마을을 빠져나와 오른쪽 산배기로 고개를 돌리면 (입암산) 갓바위의 형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우리말의 달래로 보면 갓은 끝. 가장자리.를 뜻하니 입암산 또한 한 지역의 경계임을 알 수 있다. 갈재는 어떠한가. 골/ >갈의 변화를 거쳐 가르다/길다/길로 분화되는 과정을 상기할 때 갈재는 길재/ 가름재/가는재 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갈재의 옛길은 누군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조곤조곤 담소하며 걸을 만한 길이다. 그 길은 이미 지나와 버린 시대의 깊은 골짜기에 버려진 채 잊혀져 가는 길이지만 마치 어제 와 본 길인 양 풋풋하고 아늑하다. 그곳에는 무성하고 현란했던 지난 계절의 빛들이 가라앉아 있다. 마른 삭정이를 떨구지 않고 서 있는 나무들. 아니 죽어서도 떨어져 나가지 않은 검은 삭정이들. 그렇게 나무들은 자라고 숲은 깊어지며. 그 비어 있음으로 충만한 겨울숲을 갈재의 옛길은 통과하고 있다. 출처: 금호문화 2000년 송광룡 기자님 글
위 글은 도서출판 심미안의 대표인 송광룡님이 월간 금호문화 재직 시 작성한 글이고 월간 금호문화는 금호그룹에서 발행하던 문화 잡지로 2001년 폐간될 때까지 송광룡님은 기자로 활동한 경력이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