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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정보

"내연산의 유래와 12폭포의 유래"

"내연산의 유래"

 

문헌에 의하면 내연산은 원래 종남산(終南山)이라 하였다. <청하현읍지>(1832) 등에는 신라 진평왕이 이 곳으로 견훤의 난리를 피한 이후 내연산(內延山)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진평왕과 견훤은 동시대 인물이 아니니 잘못된 기록이다. 어쨌든 현재 보경사 입구 오른쪽에 ‘종남산대련암(終南山大蓮庵)’이란 이름을 쓰는 절이 하나 있어 과거 종남산으로 불렸던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내영산(內迎山)’이라 적혀 있다. 이 책은 내연산에 대해 “크고 작은 세 개의 바위가 솥발처럼 벌려 있는데, 사람들이 삼동석이라 한다. 손가락으로 건드리면 조금 움직이지만 양손으로 밀면 꿈쩍도 않는다.”고 하였다. 이 때에는 삼동석이 내연산의 명물이었던 것 같다.

 

내연산 폭포를 명승지로 전국에 알린 것은 조선시대 명사들의 글과 그림이었다. 조선 중엽의 성리학자인 우담(愚潭) 정시한(1625~1707)이 전국의 산천을 유람하여 보고 느낀 것을 기록한 일기인 『산중일기』에 내연산 탐승 기록이 나오는데, 이 글에서 그는 용추(龍湫), 즉 연산폭포, 관음폭포, 무풍폭포, 잠룡폭포 일대의 모습을 그리면서 “금강산에도 없는 것”이라며 극찬하였다.

 

글보다 구체적인 그림으로써 내연산 폭포의 진수를 세상에 전한 사람은 진경산수화의 거장 겸재(謙齋) 정선(鄭敾)이다. 정선은 58세 때인 1733년 이른 봄부터 1735년 5월까지 2년 남짓 청하현감을 지냈다. 재임 기간 동안 그는 <내연삼용추도>, <내연산폭포도>, <고사의송관란도> 등 내연산 폭포를 소재로 몇 점의 그림을 그렸다. 전국의 명승을 찾아다니며 화폭에 담았던 정선이 내연산 폭포를 직접 답사하고, 이를 소재로 몇 점의 그림을 그려 남김으로써 내연산 폭포는 비로소 전국적 명승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성해응(1760~1839)이 금강산, 묘향산, 지리산, 칠보산, 백두산, 인왕산 등 전국 96개의 명승지에 대하여 소개한 책인 『동국명산기』에서 “그(보경사) 위 10리에 용추가 있어 돌등성이를 예닐곱 번 굽어들어 폭포에 가 닿는데, 장쾌하고 아리땁되 어둑하고 검푸르죽죽하여 차마 쳐다볼 수가 없다. 그 남쪽 학소대는 하늘을 찌를 듯 바위가 사면으로 깎였는데….”라고 소개한 것도 내연산 폭포를 외부로 알리는 데 공헌한 것으로 보인다.

 

1861년에 만든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내연산에 삼동석(三動石)과 함께 삼용추(三龍湫)를 표시해 두었다. 이 때에는 이미 삼용추가 내연산의 대표적 승경으로 자리했음을 알 수 있다.

 

연산폭포, 관음폭포 주변 바위면에는 이 곳을 다녀간 3백여 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그 이름을 통해 내연산의 위상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이 중 각종 문헌을 통해 검색이 가능한 사람은 60명 정도이다. 이들 중에는 청하현감(21명), 흥해군수(6명), 경상도관찰사(11명)를 비롯한 지방 수령이 약 70%에 이른다. 우담이나 겸재 같은 당대의 명사(名士)뿐만 아니라, 이존수(좌의정), 오명항(우의정), 조인영(영의정), 김노경(5조의 판서, 추사 김정희의 부친), 이은(좌․우의정) 등 조정의 거물급 정치인들도 눈에 띈다. 이 곳을 다녀가면서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은 대부분 18~19세기 인물인데, 이를 통해 내연산은 조선말에 이미 동해안 최고의 명승지로 발돋움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폭포나 폭포 주변의 경승지 명칭도 시대에 따라 변화를 보였다. 1688년에 내연산을 찾은 정시한의 『산중일기』에 보면 현재의 상생폭포를 ‘사자쌍폭(獅子雙瀑)’, 비하대(飛下臺)를 ‘중허대(中虛臺)’, 학소대(鶴巢臺)를 ‘계조대(繼祖臺)’라 기록하고 있다. 이 중 중허대는 1753년에 연일현감을 지낸 성리학자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이 ‘비하대(飛下臺)’로 명명하여 오늘에 이르는데, 비하대 정상부에 큼지막하게 새긴 “大山李先生命名飛下臺”란 글귀에서 확인된다. 이 글은 대산 선생의 손자인 청하현감 이병원(李秉遠)이 새겼다.

 

1922~37년에 간행된 이병연의 『조선환여승람』에는 지금의 연산폭포를 ‘내연폭포(內延瀑布)’라 하고, 관음폭포를 ‘중폭(中瀑)’이라 하였다. 관음폭포를 중폭이라 한 것은 맨 아래 상생폭포에서부터 바로 위의 연산폭포에 이르는 7개의 폭포 중 규모가 비교적 큰 연산폭포를 흔히 ‘상폭(上瀑)’, 상생폭포를 ‘하폭(下瀑)’으로 부른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관음폭포 암벽에 ‘慶北八景’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1933년에 대구일보가 내연산보경사를 진남교반(문경), 문경새재(문경), 주왕산(청송), 금오산(구미), 청량산(봉화), 희방폭포(영주), 빙계계곡(의성) 등과 함께 ‘경북팔경’으로 선정한 데 따른 것이다.

 

<경북매일신문에서 발취하여 스크랩한 것입니다. >

 

"내연산12폭포의 유래"

1. 상생폭포(상생폭)

<유래> 지금은 ‘상생폭((相生瀑)’이란 명칭이 통용되고 있지만 ‘쌍둥이 폭포’란 의미의 ‘쌍폭(雙瀑)’이란 명칭이 오래 전부터 쓰였다. 1688년 5월에 내연산을 찾은 정시한(鄭時翰, 1625~1688)의 산중일기(山中日記)에 보면 현재의 상생폭포를 ‘사자쌍폭(獅子雙瀑)’이라 적고 있는데, 그 당시에도 ‘쌍폭’이라는 명칭이 널리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뜻으로만 보면 상생폭포란 명칭은 두 개의 물줄기가 내리쏟는다는 뜻에서 ‘상생(相生, 두 개가 서로 조화를 이룸)’이란 좋은 의미를 지니고 있으나, ‘쌍둥이 폭포’란 뜻에서 ‘쌍생(雙生)’이라 지어진 후 ‘ㅆ’ 발음을 잘 못하는 지역 방언의 영향으로 ‘상생’으로 불려졌고,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相生’으로 적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내연산 계곡으로 오르다가 처음 만나는 폭포여서 흔히 ‘일폭포(一瀑布)’라 부르기도 한다.

<주변의 경승지>

*기화대와 기화담

상생폭포 서남쪽의 층암절벽을 기화대(妓花臺)라 한다. 옛날 어떤 풍류객이 기생을 데리고 석벽 위에 올라가 만취 상태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다가 그 아래 상생폭포에 떨어져 죽었는데, 그에 연유하여 바위를 ‘기화대’, 그 아래 못을 ‘기화담(妓花潭)’이라 했다 한다.

2. 보현폭포(보현폭)

<유래> 폭포 오른쪽 언덕 위에 있는 보현암(普賢庵)에 근거한 명칭이다.

3. 삼보폭포(삼보폭)

<유래> 원래 물길이 세 갈래여서 삼포폭포(三洑瀑布)라 했다. 현재의 등산로 상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4. 잠룡폭포(잠룡폭)

<유래> 잠룡(潛龍)이란 ‘아직 승천하지 못하고 물 속에 숨어 있는 용’이란 뜻이다. 폭포 아래는 거대한 암봉인 선일대(仙逸臺)를 낀 협곡인데, 여기에 용이 숨어 살다가 선일대를 휘감으면서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다. 선일대에 ‘잠룡의 승천’ 전설을 뒷받침하는 흔적이 남아 있다.

<주변의 경승지>

*선일대 : 신선이 학을 타고 비하대로 내려온 뒤 이 곳에 올랐다가 선경에 취하여 내려오지 않았다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정상부에 절터가 있는데, 아직도 고기와 파편과 토기편이 흩어져 있다.

5. 무풍폭포(무풍폭, 무풍계)

<유래> ‘바람을 맞지 않는[無風] 폭포’란 뜻이다. 폭포 아래 30여 미터에 걸쳐 암반 위를 뚫고 형성된 아주 좁은 바위틈으로 물이 흐르다보니 이런 명칭을 붙인 것 같다. 주변의 관음폭포나 잠룡폭포에 비해 폭포의 규모가 작아 ‘폭포’라는 명칭을 붙이지 않고 ‘계(溪)’를 붙인 ‘무풍계(無風溪)’라는 이름을 쓰기도 한다.

6. 관음폭포(관음폭)

<유래> 비하대(飛下臺) 아래 형성된 폭포다. 불교 용어인 관음(觀音, 관세음보살의 약칭)에서 따 온 명칭이다. 주변의 경치가 너무나 빼어나 관세음보살이 금방이라도 나타나 중생들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 줄 것만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다. 정시한의 산중일기에서는 ‘중폭(中瀑)’이라 하였다. 중폭이라 한 것은 상생폭포에서 연산폭포에 이르기까지 큰 세 개의 폭포(상생, 관음, 연산)가 있다고 보고, 상생폭포를 하폭, 관음폭포를 중폭, 연산폭포를 상폭으로 불렀음을 짐작케 한다.

<주변의 경승지>

*감로담(甘露潭) : 관음폭포 아래 형성된 깊은 못. 한 방울만 마셔도 온갖 괴로움이 사라지며, 산 사람은 장수하고 죽은 자는 부활한다는, 천상에서 이슬이 내려 고여 있다는 도리천의 감로수에 비겨 그렇게 불렀다.

*관음굴(觀音窟) : 관음폭포 옆에 패인 천연 동굴. 3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 굴 속에서 종종 수도승을 볼 수 있었다 한다.

*비하대(飛下臺) : 관음폭포 서남쪽에 높이 솟은 암봉으로 정상부에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이 명명하였다고 전하는 각자가 있다. 신선이 학을 타고 내려온 곳이라 전한다. 관음폭포 쪽으로 수직암벽을 이루고 있어 산악인들의 암벽등반 훈련장으로 쓰인다.

*학소대(鶴巢臺) : 관음폭포 북쪽에 높이 솟은 암벽으로, 시선을 태우고 내려온 학이 둥지를 틀고 머문 곳이라 한다. 위쪽에 계조암(繼祖菴) 터가 있어 고기와편과 토기편이 발견된다.

*경북팔경(慶北八景) : 관음폭포 일대는 1933년 대구일보에 의해 진남교반(문경), 문경새재(문경), 주왕산(청송), 금오산(구미), 청량산(봉화), 희방폭포(영주), 빙계계곡(의성) 등과 함께 경북팔경에 선정된 곳이기도 하다. 관음폭포 오른쪽 정상부 암벽에 ‘慶北八景’이란 각자가 있다.

7. 연산폭포(연산폭)

<유래> 내연산 12폭포 중 가장 규모가 큰 폭포다. ‘내연산(內延山)’에서 ‘내’를 뺀 명칭이다. 정시한의 산중일기에서는 ‘내연폭포(內延瀑布)’라 하였다. ‘삼폭포(三瀑布’ 또는 ‘상폭포(上瀑布)’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삼폭포나 상폭포는 상생폭포에서 연산폭포에 이르기까지 큰 세 개의 폭포(상생, 관음, 연산)가 있다고 보고, 상생폭포를 1폭포 또는 하폭, 관음폭포를 2폭포 또는 중폭, 연산폭포를 3폭포 또는 상폭으로 부른 데 따른 결과로 보인다.

<주변의 경승지>

*삼용추(三龍湫) : 용추는 ‘폭포수가 떨어지는 바로 밑에 있는 깊은 웅덩이’를 일컫는 말이다. ‘삼용추’는 ‘세 개의 용추’라는 뜻으로 잠룡폭포, 무풍폭포, 관음폭포, 연산폭포 일대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으며(규모가 비교적 작은 무풍폭포는 무시됨), 겸재 정선이 청하현감 재임 시절에 그린 <내연삼용추도>, <고사의송관란도> 등에 처음 쓰였다.

8. 은폭포(은폭)

<유래> 원래는 여성의 음부(陰部)를 닮았다 하여 음폭(陰瀑)이라 하다가 상스럽다 하여 은폭(隱瀑)으로 고쳐 불렀다(이삼우, 같은 글)고도 하고, 용이 숨어 산다 하여 흔히 ‘숨은용치’라고도 하는데 이에 근거하여 은폭(隱瀑)으로 불렀다고도 한다.

<주변의 경승지>

*한산대와 습득대 : 은폭 위 왼쪽과 오른쪽에는 각각 청하에서 유배살이를 했던 조선 인조 때 부제학을 지낸 유숙(柳潚)이 작호한 한산대(寒山臺)와 습득대(拾得臺)가 있다.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의 재생이라며 숭모하던 중국 당나라 때의 도인 한산(寒山)과 습득(拾得)의 형상을 한 큰 바위다.

9. 복호1폭(伏虎一瀑)

<유래> 호랑이가 곧잘 출몰하여 바위 위에 엎드려서 쉬고 있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연달아 두 개가 있는데, 아래쪽(하류)을 복호1폭이라 한다.

10. 복호2폭(伏虎二瀑)

<유래> 호랑이가 곧잘 출몰하여 바위 위에 엎드려서 쉬고 있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연달아 두 개가 있는데, 위쪽(상류)을 복호2폭이라 한다.

11. 실폭포(실폭)

<유래> 시명리로 가기 전 잘피골 골짜기로 잠깐 접어들면 30여 마치 벼랑에서 실타래를 풀어 내리는 듯한 가느다란 폭포가 나타나는데, 실같이 가늘다 하여 그렇게 부른다.

12. 시명폭포(시명폭)

<유래> 지금은 없어진 화전민촌인 시명리(時明里) 마을 어귀에 자리한 폭포로 12폭포 중 맨 위쪽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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