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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산 산행기

계룡산 산행

□ 계룡산(鷄龍山)

천정골→큰배재→남매탑→삼불봉→관음봉→연천봉→은선폭포→동학사

 ◇ 산행지 : 충남 공주시 학봉면  일원 

 ◇ 산행일자 : 2012. 1. 14 (일)  날씨 :  맑음 (따뜻한 편이었음 , 조망 좋음)

 ◇ 산행 친구: 기대 

 ◇ 산행거리 : 약 12 Km 

 ◇ 산행시간 : 산행시간  5시간  < 점심 30분(산신제 10분 포함) >

 ◇ 시간 대별 요약 

      - 09:04  산행 시작  

      - 09:50  큰배재

      - 10:00  남매탑(상원암)   

      - 10:13  삼불봉 고개(갑사 갈림길)

      - 10:21  삼불봉

      - 11:16  관음봉

      - 11:36  신원사 - 갑사 갈림길

      - 11:44  연천봉(산신제및 점심 30분)      

      - 12:44  관음봉-연천봉 갈림길

      - 13:10  은선폭포 

      - 13:34  동학사

      - 13:57  산행 마침

 

산행지 설명 :계룡산 [鷄龍山]:높이 845m. 차령산맥 서남부에 솟아 있으며, 금강에 의한 침식으로 이루어진 산지이다. 주봉인 천황봉을 비롯하여 연천봉·삼불봉·관음봉·형제봉·도덕봉 등 20여 개의 봉우리들이 남북방향으로 이어지다가 동쪽으로 2줄기, 서쪽으로 1줄기를 뻗치고 있어, 전체의 모습이 마치 닭볏을 쓴 용과 같다고 하여 '계룡산'이라 했다.

 

산세가 험하며, 노성천·구곡천·갑천 등이 발원하여 금강으로 흘러든다. 연평균기온은 11℃ 내외이며, 연강우량은 1,280㎜ 정도로 6~9월에 강우량의 90%가 집중적으로 내린다. 느티나무·참나무·서나무류 등과 너구리·여우·뻐꾸기 등 동식물 1,160여 종이 자라고 있다. 예로부터 신라 5악 가운데 서악(西嶽)으로 제사를 지내왔고, 조선시대에는 중악단(中嶽壇)을 세워 산신제를 지낼 만큼 신령스러운 산이었으며, 우리나라 4대 명산의 하나이다. 〈정감록〉에서는 이 산 일대를 십승지지(十勝之地)의 하나로 예언했고 조선초에는 계룡산 신도안에 왕도를 건설하려 할 정도로 명당이라 알려졌다. 19세기말부터 나라가 혼란해지자 신도안을 중심으로 전래의 무속신앙과 각종 신흥종교가 번성하고 이들의 수도장으로 이용되어, 계곡 곳곳에 교당과 암자·수도원·기도원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지금은 종교정화운동으로 시설물들이 철거되고 주변을 정리해, 그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1968년 12월 지리산에 이어 2번째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공원의 총면적은 61.1㎢이다.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산봉·계곡·폭포·암굴 등의 특출한 자연경관을 비롯해 갑사·동학사·신원사 등의 고찰과 유물유적이 많아 교육의 장으로도 적합하다. 비구니들의 불교 전문 강원(講院)인 동학사는 산의 동쪽 기슭에 있다. 동학사는 신라 성덕왕 때 창건되었으며, 동쪽에 학바위가 있어 동학사라 했다. 고려말·조선초 삼은의 위패를 모신 삼은각과 사육신의 초혼제를 지냈던 숙모전 등이 있다. 서쪽 기슭에 자리한 갑사는 화엄종 10대 사찰의 하나로 백제시대에 고구려 아도화상이 창건했고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4년 인호대사가 다시 중건했다. 철당간 및 지주(보물 제256호)·부도(보물 제257호), 구리가 8,000근이나 들었다는 동종(보물 제478호)을 비롯한 보물 6점 외에도 지정문화재 9점, 비지정문화재 10점 등이 보존되어 있다. 갑사에서 용문폭포를 따라 1.3㎞ 정도 오르면 천연석탑인 천진보탑과 신흥암이 있다. 서남쪽에 있는 신원사는 652년(의자왕 12)에 보덕화상이 창건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그뒤에 다시 지은 것이다. 경내에는 산신제단인 중악단, 5층석탑 등이 있으며, 주위에 고왕암·등운암 등 암자가 있다. 이밖에도 용화사 등 많은 절이 있다.(출처:다음 백과 사전)

  

산행  사

 ▲ 편의점에서 5,000원 이상 구매하면 주차장 무료 제공 한다. 이곳에서 막걸리등 구입하고..

 ▲ 산행 기점 천정골 입구 산행 시작

 ▲ 큰배재

 ▲ 남매탑(일명 오뉘탑): 남매탑(男妹塔)은 계룡산에 있는 두 개의 탑으로 동학사에서 갑사로 넘어가는 연천봉 중턱에 있는 상원암 근처 해발 615m 지점(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산18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곳은 계룡 팔경중 제팔경인 '오뉘탑의 명월'로 꼽힐 만큼 풍광이 뛰어난 곳이다. 남매탑은 충남 지방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곳에 청량사가 있었다하여 청량사지쌍탑이라고도 불린다. 5층 석탑은 보물 제128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7층 석탑은 보물 제1285호로 지정되어 있다. 청량사는 임진왜란때 병화로 전각이 모두 소실되었고, 이 탑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일명 남매탑 또는 오뉘탑이라 부르기도 하고 이 2기의 석탑들은 1950년대에 무너져 있던 것을 1961년에 복원하였다. 탑을 쌓은 돌들은 계룡산 일대의 존재하는 화강암류로 담홍색 흑운모화강암이다.남매탑은 통신신라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의 연구자들은 12세기경에 건립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두 탑은 백제계 양식을 가진 탑으로 5층석탑은 정림사지석탑을 모방하였고, 7층석탑은 미륵사지석탑을 모방하였다

 

 

남매탑 전설: 남매탑에는 탑이 세워진 내력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신라 성덕왕 때 상원조사가 이곳에 암자를 짓고 불공을 드리고 있는데 호랑이가 찾아와 입을 벌리고 우는 소리를 내었다. 스님은 호랑이의 목에 걸려 있는 큰 뼈다귀를 빼주었는데, 호랑이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사라져버렸다. 얼마 후 호랑이가 스님을 태우고 어디론가 달려갔는데 거기에 실신한 처녀가 있었다. 스님은 그 처녀를 암자로 데리고 와서 간호를 하였다. 얼마 후 정신이든 처녀는 자신이 상주에 사는 임진사의 딸인데 혼인날에 호랑이가 나타나 그만 기절을 하였는데 이곳까지 왔다고 하였다. 스님이 호랑이와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주자 처녀는 부처님이 맺어준 인연이라고 하며 부부의 연을 맺기를 청하며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상원조사는 흔들리지 않고 함께 수도에 정진하자고 하며 거절하였다. 그 후 스님과 처녀는 의남매를 맺고 불도를 닦으며 일생을 보냈는데 후에 상원조사의 제자 회의화상이 두 개의 불탑을 세워 그 뜻을 기렸고, 사람들이 그 탑을 오뉘탑이라고 불렀다 (출처: 다음 백과사전)

 ▲ 상원암

 ▲ 삼불고개(갑사 갈림길)

 ▲ 삼불봉에서 바라 본 장군봉 방향(우산봉과 갑하산까지 조망된다)

 

 ▲ 삼불봉에서 바라 본 천왕봉 쌀개봉 능선

 ▲ 뒤돌아 본 삼불봉

 

삼불봉:동학사나 천황봉에서 올려다보면, 세 개의 봉우리로 된 산의 형상이 마치 세 부처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삼불봉이라 불린다고 한다.(출처:디지털 공주 문화대전)

 

 ▲ 관음봉

 ▲ 관음봉에서 바라 본 자연성능

 ▲ 관음봉

관세음보살 [Avalokiteshvara, 觀世音菩薩]: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광세음보살(光世音菩薩)·관세자재보살(觀世自在菩薩)·관세음자재보살(觀世音自在菩薩)이라고도 하며, 줄여서 관음·관세음·관음보살이라고도 함('모든 곳을 살피는 분', '세상의 주인' 등을 뜻함). 출처:다음 백과사전

 ▲ 갑사 신원사 갈림길

 ▲ 연천봉: 뜻 그대로 하늘과 이어진 곳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전설에 따르면 이성계가 계룡산 연천봉에 올라 제단을 차려 놓고, 이곳에 왕도가 서고 모든 일이 잘 되도록 천지신명께 엄숙히 기도를 드린 곳이라고 한다. 꿈에 신선을 만났는데 신선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도록 명하였다 한다.(출처:디지털 공주 문화대전)

 

 ▲ 연천봉에서 바라 본 천황봉

 

천황봉이란 명칭은 보통 큰 산의 주봉에 붙여지는 이름으로 속리산, 지리산, 월출산 등 많은 국립공원의 주봉들의 이름이다. 계룡산 천황봉의 명칭이 언제 붙여졌는지 명확하진 않다. 과거에는 계룡산의 가장 높은 봉이라 하여 상제봉(上帝峰), 상봉(上峰), 제자봉(帝字峰) 등으로 불리웠다고 한다.최근 천황봉이란 명칭이 일제의 잔재라는 주장에 따라 천왕봉(天王奉)으로 개명하려 했었다. 그러나 천황봉이란 명칭의 유래에 대한 명확한 근거가 없으며, 1914년 일제에 의해 제작되고 1928년 수정된 1:50,000 지형도에 연천봉 외에는 다른 봉우리의 명칭이 보이지 않고 있는 점과 동쪽 능선에 자리잡은 천왕봉과 혼란을 초래할 우려가 있어 천황봉이란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현재 천황봉에는 군 작전을 위한 레이다기지와 방송수신탑이 설치되어 있어, 군사 시설 보호 구역이자 출입 금지 구역으로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다. (출처:디지털 공주 문화대전)

 ▲ 조촐한 제물을 놓고 친구와 둘이 산신제를 지냈다.

 

계룡산 산신제: 계룡산은 예로부터 오악(五嶽)의 하나로 국가의 모심을 받던 산악이다. 민간의 먹거리는 밥이지만 임금의 먹거리는 수라이다. 민간인에게는 산이지만, 나라에게는 산악이다. 계룡산은 산악으로 대우받아 왔다. 이렇게 사전(祀典)에 의거한 산악은 신명(神明)인 셈이다. 나라를 도와야 하기 때문에 산악이 된 것이다. 계룡산은 국가적인 의례를 받을 만큼 감응(感應)이 있다는 것이다.

 

계룡산에는 나라의 산신이 있다. 바로 계룡산 중악단이다. 계룡산 중악단은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 신원사 경내에 있다. 대한제국의 사전(祀典)으로 삼악단(三嶽壇, 묘향산 상악단·지리산의 하악단) 중의 하나이다. 계룡산 중악단은 1999년 3월 2일에 보물 제1293호로 지정되었다.

 

계룡산 중악단은 일제강점기에 끊어졌다가 1998년에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계룡산 중악단은 계룡단을 계승하였다. 나라에서 계룡단을 중시한 것은 궁중 발기에서도 확인된다. ‘무자이월탄일각처위축노자전(戊子二月誕日各處爲祝路資錢) 발기’와 ‘이월탄일각처위축노자전(二月誕日各處爲祝路資錢) 발기’ 등의 창경궁 고문서 2건에는 계룡산에 각각 30냥의 노자 돈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 계룡산 중악단 현판과 궁중 무속 자료는 널리 알려진 자료는 아니다.

 

복원된 산신제는 향교에서 대한제국의 사전에 의하여 고마나루 수신제와 함께 올리고 있다. 산신제는 소사(小祀) 의례로 계룡산의 옛날 계룡단 터에서, 수신제는 고마나루에서 중사(中祀) 의례로 각각 지낸다. 고려시대에는 산신제가 중사로, 수신제는 소사로 치러졌다. 이와 함께 신원사에서 불교식 산신제를, 계룡산 산신제보존회에서 무속식 산신제를 각각 주관하여 올린다. 제의 날짜는 음력 3월 16일을 전후한 토요일과 일요일을 넣어서 잡는다.(출처:디지털 공주 문화대전)

 ▲ 연천봉 아래의 등운암: "665년(문무왕 5) 등운대사가 계룡산에 정씨가 도읍한다는 설에 왕기(王氣)를 누르기 위해 창건했다"한다

▲ 연천봉,관음봉 갈림길

▲ 은선 폭포 :옛날 선녀가 이곳에 숨어 목욕을 하였다는 전설이 있어 은선폭포라는 이름이 유래하였다.(출처:디지털 공주 문화대전)

 

 동학사:724년 상원(上願) 화상이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에 창건한 사찰로‘동계사(東鷄寺)’라고도 한다. 동학승가대학은 운문사의 강원과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비구니 수련 도량으로 손꼽히고 있다.상원(上願) 화상이 암자를 지었던 곳에 회의(懷義)가 절을 창건하여 청량사(淸凉寺)라 하였고, 920년(태조 3) 도선(道詵)이 중창한 뒤 태조의 원당(願堂)이 되었다. 936년 신라가 망하자 대승관(大丞官) 유차달(柳車達)이 이 절에 와서 신라의 시조와 충신 박제상(朴堤上)의 초혼제(招魂祭)를 지내기 위해 동학사(東鶴祠)를 지었다. 그 뒤 사찰을 확장하고 절 이름도 ‘동학사(東鶴寺)’로 바꾸었다. 그러나 이 절의 동쪽에 학 모양의 바위가 있으므로 동학사(東鶴寺)라 하였다는 설이 전하고, 또 고려의 충신이자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조종인 정몽주(鄭夢周)를 이 절에 제향하였으므로 ‘동학사(東學寺)’라고 하였다는 설도 전한다.

1394년(태조 3) 고려의 유신(遺臣) 길재(吉再)가 동학사의 승려 운선(雲禪)과 함께 단(壇)을 쌓아서 고려 태조를 비롯한 충정왕·공민왕의 초혼제와 정몽주의 제사를 지냈다. 1399년(정종 1) 고려 유신 유방택(柳芳澤)이 동학사에 와서 정몽주·이색(李穡)·길재 등의 초혼제를 지냈으며, 다음해 이정한(李貞翰)이 공주목사로 와서 단 이름을 삼은단(三隱壇)이라 하고, 또 전각을 지어 삼은각(三隱閣)이라 하였다. 

1457년(세조 3) 김시습(金時習)이 조상치(曺尙治)·이축(李蓄)·조려(趙旅) 등과 더불어 삼은단 옆에 단을 쌓아 사육신의 초혼제를 지내고 이어서 단종의 제단을 증설하였다. 다음 해에 세조가 동학사에 와서 제단을 살핀 뒤 단종을 비롯하여 정순왕후(定順王后), 안평대군(安平大君), 금성대군(錦城大君), 김종서(金宗瑞), 황보인(皇甫仁), 정분(鄭奔) 등과 사육신, 그리고 세조 찬위로 원통하게 죽은 280여 명의 성명을 비단에 써서 주며 초혼제를 지내게 한 뒤 초혼각(招魂閣)을 짓게 하고 인신(印信 : 도장)과 토지 등을 하사하였으며, 동학사라고 사액한 다음 승려와 유생이 함께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다. 

1728년(영조 4) 신천영(申天永)의 난으로 이 절과 초혼각이 모두 소실되었고, 1785년(정조 9) 정후겸(鄭厚謙)이 위토를 팔아버리자 제사가 중단되기도 하였다. 1814년(순조 14) 월인(月印)이 예조에 상소하여 10여 칸의 사옥과 혼록봉장각(魂錄奉藏閣)을 세웠다. 

1827년 홍희익(洪羲翼)이 인신을 봉안하는 집을 따로 지었으며, 충청좌도어사 유석(柳奭)이 300냥을 내고 정하영(鄭河永)이 제답(祭畓)을 시주하여 다시 제사를 베풀었다. 1864년(고종 1) 봄에 금강산에 있던 보선(普善)이 여기에 와서 옛날 집을 모두 헐고 건물 40칸과 초혼각 2칸을 지었는데, 초혼각은 1904년 숙모전(肅慕殿)이라고 개칭하였다. 6·25전쟁 때 옛 건물이 모두 소실되자 1960년 이후에 중건하였다.

 

 ▲ 산행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