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량산의 역사 유적 |
-내청량사 유리보전(琉璃寶殿): 신라원효대사 창건, 공민왕친필, 모신 약사여래불은 지불(紙佛: 종이로 만든 부처) |
-산성과 공민왕 사당: 고려 공민왕이 2차 홍건적을 피해 피난 -외청량사 응진전(應眞殿 옛 이름 나한전): 신라신문왕3년(683) 의상대사 창건, 고려 공민왕 따라 피난 온 ‘비운의 왕비’ 노국공주와 시녀들이 16나한상(공민왕상과 노국공주상도 있다함)을 깎아 모시고 기도한 곳, 동풍석(動風石) 전설 -청량정사(淸凉精舍): 퇴계(退溪) 이황(李滉)선생이 성리학을 공부한 곳에 후학들이 세운 집, 퇴계 이황은 13세 때 청량산을 찾아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많은 시문을 남기고, 평생 청량산을 사랑하면서 호를 청량산인(淸凉山人)이라고도 하였다. -김생굴(金生堀): 신라후기의 천하 명필 김생이 글씨 공부한 굴. 김생이 9년 만에 하산하려 하자 청량봉녀 라는 여인이 굴속에서 불을 끄고 자기 길쌈솜씨와 김생의 글씨솜씨를 겨루어보자고 제의하였는데 부족함을 깨닫고 1년을 더 연마하여 10년을 채워 명필이 되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고운대(孤雲臺 일명 어풍대)와 총명수(聰明水); 신라 대유학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수도하면서 이 물을 마시고 머리가 좋아졌다는 물 - - 그외 청량산을 찾은 명사들 고려 고종 때 대문장가 백운산인(白雲山人) 이규보(李奎報) 조선 중종때 학자 신제(愼齊) 주세붕(周世鵬) 명종때 예언자 격암(格菴) 남사고(南師古) |
○ 퇴계시조 2수와 가사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
<시조 2수> 청량산 육육봉을 아는 이 나와 백구(白鷗) 백구야 훤사(喧辭: 수다)하랴 못 믿을 손 도화(桃花)로다 도화야 뜨지 마라 어주자(漁舟子; 어부) 알까 하노라. 어느 곳을 가더라도 구름 메(산) 없으리오, 청량산 육육봉이 경개 더욱 맑노매라, 읍청정 이 정자에서 날마다 바라보니, 맑은 기운 하도 하여 사람 뼈에 사무치네 |
<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 1.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료 초야우생이 이렇다 어떠하료 (시골에 파묻혀 사는 어리석은 사람) 하물며 천석고황(자연을 버리고 살 수 없는 버릇)을 고쳐 무슴하료 (자연에 대한 깊은 애정) 2. 연하로 집을 삼고 풍월로 벗을 삼아 태평성대에 병으로 늙어 가네 이중에 바라는 일은 허물이나 없고자 (자연에의 동화) 3. 순풍이 죽다하니 진실로 거짓말이 (순박한 풍습) 인성이 어질다하니 진실로 옳은 말이 (인간의 선한 성품, 성선설) 천하에 허다영재를 속여 말씀할가 (후덕 순박한 풍습 강조) 4. 유란이 재곡하니 자연이 듣기 좋애 (향기풍기는난초가 골짜기있고) 백운이 재산하니 자연이 보기 좋애 (흰구름이 산봉우리에 있으니) 이중에 피미일인을 더욱 잊지 못하애 (임금님 그리워하는 마음) 5. 산전에 유대하고 대하에 유수로다 (산 앞에 臺, 대 아래 흐르는 물) 떼 많은 갈매기는 오명가명 하거든 (귀하고 좋은 흰 망아지) 어떻다 교교백구는 멀리 마음 하는고 (자연을 멀리하는 현실 개탄) 6. 춘풍에 화만산하고 추야에 월만대라(꽃이 산 가득, 달빛 누대 가득) 사시가흥이 사람과 한가지라 (계절마다 일어나는 흥취) 하물며 어약연비 운영천광이야 어느 그지 있을꼬 (대자연의웅대, 오묘함예찬) (물고기뛰고, 솔개날고, 구름 그늘지고, 햇빛 찬란) 7. 천운대 돌아들어 완락재 소쇄한데 만권생애로 낙사 무궁하얘라 (책을 벗삼아 살아가는 즐거움) 이중에 왕래풍류를 일러 무슴할꼬 (독서의 즐거움) 8. 뇌정(雷霆)이 파산하여도 농(聾)자는 못 듣나니 (우뢰, 귀머거리) 백일이 중천하여도 고(?)자는 못 보나니 (밝은 해, 장님) 우리는 이목총명남자(聰明男子)로 농고같이 말으리(진리의중요성) 9. 고인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 못 뵈 (옛 사람) 고인을 못뵈도 예던 길 앞에 있네 (가던 길, 행하던 길) 예던 길 앞에 있으니 아니 예고 어쩔꼬 (옛성현의 도리 본받자) 10.당시에 예던 길을 몇 해를 버려두고 어데가 다니다가 이제야 돌아 온고 이제나 돌아오나니 연데 마음 말으리 (학문수양에 대한 다짐) 11 청산은 어이하여 만고에 푸르르며 유수는 어찌하여 주야게 긋지 아니는고 우리도 그치지 말고 만고상청 하리라 (학문 정진의 의지) 12 우부(愚夫)도 알며 하거니 긔 아니 쉬운가 성인도 못다 하시니 긔 아니 어려운가 쉽거나 어렵거나 중에 늙는 줄을 몰래라(학문에의 영원한 정진) |
○ 공민왕(恭愍王)과 노국공주(魯國大長公主) |
- 고려31대왕, 충숙왕의 둘째아들 강릉대군(江陵大君), 충혜왕복위2년(1341) 원나라에 갔다가 원나라 위왕(魏王)의 딸 노국대장공주를 비로 맞고, 원의 지시로 충정왕을 폐하고 왕위에 올랐으나 원에 대한 반항의 뜻을 품고 있었다. - 원에 다녀온 최영, 유탁 등의 보고를 받고 원이 쇠퇴하고 있음을 알고 공민왕1년(1352) 변발, 호복 등 몽고풍 폐지 -공민왕5년(1356) 몽고 연호, 관재 폐지하고 옛 제도로 복구, 원내정간섭의 주역 정동행중서성이문소 (征東行中書省理問所)폐지 - 원 황실과 인척관계로 세도를 부리던 기철(奇轍) 일파 숙청, 100년간 존속해온 원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폐지하고, 원에 빼앗겼던 영토 복구 - 공민왕17년(1368) 주원장이 명(明)을 세우자 이인임을 보내서상호 협력하여 요동에 남아 있던 원 세력을 공략 - 공민왕19년(1370) 이성계로 동녕부(東寧府)를 치게 하고, 오로산성(五老山城)을 점령, 문무관 정형권을 쥐고 있던 귀족회의기관 정방(政房) 폐지 - 신돈을 채용,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하여 귀족둘이 겸병한 토지를 소유자에게 반환, 불법노비 해방 - 공민왕9년(1360)과 10년(1361) 연이어 홍건적이 침입하고, 왜구의 침략하여 국력이 기울기 시작 - 공민왕14년(1365) 노국공주가 난산으로 죽자 불사에 전심하며 왕비만 추모하고, 정사는 신돈에게 일임하자 신돈의 전횡으로 더욱 문란해짐 - 자제위(子弟衛)를 설치하여 미소년(美少年)을 궁안에 머무르게 하자 풍기가 더욱 문란해졌는데 특히 홍륜(洪倫)이란 소년이 익비(益妃)를 범하여 임신시키자 이를 은폐하려고 밀고한 최만생을 죽이려다가 오히려 암살 당함 - 공민왕은 글씨와 그림에 능했다. 유리보전(琉璃寶殿) 현판과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 덕수궁 소장)가 공민왕의 작품. |
○ 최치원(崔致遠) |
- 자 고운(孤雲),해운(海雲), 시호 문창후(文昌侯), - 신라 47대 한안왕1년(857)생, - 12세에 당에 유학하여 17세에 과거에 급제, 宣州漂水縣尉, 時務郞侍御史內供奉를 지내고, 황제로부터 紫金魚袋 하사. 고변(高?)의 종사관으로 황소의 난 진압 때 격문(檄文)을 지어 유명, - 28세(884) 귀국, 진성왕7년(893) 견당사(遣唐使)에 임명되었으나 도둑(해적)이 횡행하여 못 가고, 이듬해 시무(時務) 10여조를 제출, 아찬(阿?: 신라 관계 6/17)에 임명, - 뒤에 난세에 절망하며 놀러 다니며 풍월을 하다가 가야산 해인사(고운암)에서 여생을 마쳤다. - 저서: 四六集 1권, 桂苑筆耕 20권, 鳳巖寺 비문, 崇福寺 비문, 釋順應傳, - 가야산 해인사 홍류동계곡에는 최치원이 소요하며 명명한 16개 절승지가 있고, 그가 수학하다가 죽은 고운암(孤雲庵)이 있다. * 최치원이 명명한 가야산 홍류동 명소들 (1)갱백원, (2)축화천, (3)무릉교, (4)칠성대, (5)홍류동천, (6)농산정, (7)완제암, (8)광풍뢰, (9)퇴적봉, (10)금풍뢰, (11)체필암, (12)분목폭포, (13)제월담, (14)낙화담, (15)첩석대, (16)화선암 |
○ 김생(金生) |
- 신라 성덕왕10년(711)-원성왕7년(791), 신라 후기 명필. - 어려서부터 서도에 정진, 일생을 바쳐 필법을 닦아 예서, 행초서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 고려 사신 홍관(洪灌)이 송(宋) 사신으로 갈 때 김생의 글씨를 가져가 보이자 왕우군(王右軍: 王羲之)에 비할 명필이라 격찬하고 해동서성(海東書聖)이라 불렀다. 그 후로 중국사신들은 김생의 글씨를 구해가려고 혈안이 되었다 한다. - 필적: 백율사석당기(栢栗寺石幢記, 국립박물관경주분관 보관), 백월서운탑비(白月栖雲塔碑, 경북 영천), 창림비(昌林碑, 경주) |
○ 이황(李滉) |
- 자 경호(景浩), 호 퇴계(退溪), 퇴도(退陶), 도수(陶?), 청량산인(淸凉山人)시호 문순(文純), 연산군7년(1501-선조3년(1570) 조선중기 대학자, 경북예안(안동 여안면) 출생 7개월 부친별세 - 중종23년(15280 진사 급제, 중종28년(1533) 성균관에 입학, 이듬해 문과 급제, 홍문관 정자(正字: 정9품), 박사(博士: 정7품),성균관 전적(典籍: 정6품), 호조좌랑(佐郞: 정6품), 홍문관 수찬(修撰: 정6품), 성균관 사성(司成: 종3품) 사직, 홍문관 교리(校理:정5품), 전한(典翰: 종3품), 을사사화 파직, 복직, 사직, - 고향에 내려가 양진암(養眞庵)을 짓고 주자전서(朱子全書)에 몰두, 성리학을 연구 대성하여 ‘동방의 주자’ 라는 칭호, 이로부터 사방에서 학자들이 운집. 외직을 자청 단양 군수(郡守: 정5품), 풍기 군수 역임 사퇴 후 고향에 돌아와 한서암(寒棲庵)을 지음. - 명종7년(1552) 홍문관 교리,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정3품상),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정3품상), 공조 참판(參判: 종2품),모두사양 명종10년(1555) 사액(賜額)서원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지어 학문과 사색생활 계속(율곡 이이가 방문), 퇴계사상, 변론, 저술, 편저 등 「주자서절요 (朱子書節要)」, 「송계원명이학통록(松季元明理學通錄)」,「인심경석의(人心經釋疑)」,「사단칠정부이기서(四端七情分理氣 書 ) 」 등이 대표적인 명저. - 명종22년(1567) 예조판서(禮曹判書: 정2품), 선조1년(1568) 대제학(대제학: 정2품), 판중추 (判中樞: 종1품) 겸 지경연(지경연: 정2품),「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 성학십도(聖學十圖)」등 창작 - 선조3년(1570) 죽자 시호, 영의정 추정, 광해2년(1610) 문묘배향, 주자의 이기이원론(理氣二 元論)적 사상을 계승 발전. |
'산행정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월출산 지도 (0) | 2011.11.24 |
---|---|
월출산 [ 月出山 ] 관련자료 (0) | 2011.11.24 |
태백 금대봉 (출처 : 마운틴 2011년 02월호(통권)) (0) | 2011.11.06 |
신시도 대각산 산행지도 (0) | 2011.10.06 |
[점봉산] 지명 유래 (0) | 2011.09.07 |